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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 3:16) 옥한흠 목사 전도설교

by 【고동엽】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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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간적으로 여러분들이 어떤 분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는 어렸을 때 교회를 나가 본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웃, 동창, 가족 등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기독교를 상식적으로 너무 많이 알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한 학구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 책 저 책을 섭렵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나름대로 ‘기독교는 이런 종교다’ 하는 관(觀)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기독교에 대한 상식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교회에 나오신 것은 여러분이 온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밀어서 오신 것입니다. 비록 옆에 있는 친구, 이웃집 아주머니를 통해 소개받고 오셨을지 모르지만 아주머니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며, 친구의 입을 여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여러분의 한 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자리요, 의미심장한 자리입니다. 이 시간 저는 심부름꾼입니다. 미국 사람에게 우리 말을 전하려면 한국말과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세우듯이 이 목사는 그렇게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실 것이고 듣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튼 잘 오셨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오늘밤 제가 전하는 소식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건강 이야기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건강한 사람이 되지못합니다. 시사 이야기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세상 물정에 밝지를 못합니다. 그런 방면이라면 여러분이 저보다 몇 갑절 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중요하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 말씀은 성경 중의 성경입니다. 이 신구약 성경 66권을 압축하면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만 남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말씀 한 절만 알고 믿어도 저 하늘나라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이 됩니다.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 말씀의 골자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신다.”

 

  지금부터 30 여년 전 빌리 그래함 목사가 휴스턴 시에 가서 대집회를 인도하면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설교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이 설교를 할 때는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들을 때 이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인 것처럼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내일을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바로 들으면 내일이 없다 해도 영원히 사는 자가 될 것이고, 이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원히 불행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지막 설교를 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마지막 듣는 설교인 것처럼 겸허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이 보낸 심부름꾼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귀가 있고, 다른 또 하나는 영혼의 귀가 있습니다. 아마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귀는 두 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듣는 귀, 아마 여러분은 누구에게도 이 귀는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발달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너무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까지 들어서 여러분의 귀가 피곤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영의 귀가 있기는 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듣지 않은, 어떤 의미로는 난청현상이 나타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그런 분들 중에 하나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이걸 오늘밤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이런 귀도 있구나. 나는 지금까지 세상 듣는 귀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었구나.’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을 듣고 마음 속으로 가슴으로 깊이 들어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 그 말씀이 잘 안 들어옵니까? 졸음이 옵니까? 따분합니까? 공연히 왔다 싶어 손목 시계만 자꾸 들여다봅니까?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벌떡 일어나지 말고 끝까지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귀를 언제 열어주실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것만큼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먹고사는 것이 중요하고, 어느 정도 사람 대접받고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갈 때 가장 기본적인 어느 정도 인간 대우를 받는 이런 기본적인 요구들이 충족된 다음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만큼 비중을 가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신은 진짜 사랑을 찾으셨습니까? 할 때에 “예. 찾았습니다” 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당신 정말 사랑을 찾았습니까?” “아니요. 지금까지 신기루를 찾았지만 아직도 내 손에 사랑이라는 것을 내 손에 잡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인격을 좌우합니다. 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좌우합니다. 사람은 사랑에 의해 행복과 불행을 좌우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과학적으로 조사한 데이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1994년입니다. 이제 20세기가 6년만 있으면 끝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20세기가 시작될 초반기 1901-1902년에 과학도 시원치 않고 발전하지도 못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이 짧았습니다.

  미국의 아동보호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곳에는 많은 아이들을 데려와 기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어머니가 몰래 아이를 버려두고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 없이 거기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고아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온 아이들이 그렇게 잘 죽었습니다. 너무 잘 죽어서 왜 그렇게 죽는지 과학적으로 좀 알아보자는 여론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수한 과학자들을 초청해서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스피치 박사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고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한 집에는 아기로 하여금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도록 했습니다. 또 다른 집에는 보모가 아이 열 둘을 맡아 우유를 먹이면서 키우도록 했습니다. 한쪽은 어머니가 젖을 먹이는 가족적인 분위기이고, 한 쪽은 고아원과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똑같은 시설에다 똑같은 배려를 했습니다. 한 쪽은 어머니의 사랑이 있고, 한 쪽은 어머니의 사랑이 없다는 차이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이들이 ‘사랑’의 ‘사’자나 알겠습니까? 먹이면 먹고 싸면 싸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물리적으로 똑같은 조건이니까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나중에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발달지수를 조사해 보니 엄청난 차이가 났습니다.

  엄마 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발달지수가 자꾸 높아 가는데 보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점점 떨어졌습니다. 2년 기간 안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산 아이는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보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37%가 죽었습니다. 조사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아이지만 사랑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생명이 살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합니다. 설사 산다고 해도 건전하게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이 조그마한 연구가 증명해 주었습니다. 참 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니까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이 땅 위에 태어난 인류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나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 말은 “극진히 사랑 하사, 너무 사랑 하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자마자 무엇을 발견합니까?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발견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뭐가 그리 대수냐?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40넘은 분은 자녀들이 고등학교 대학교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얘야,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그걸 네가 너무 몰라 주더구나.” 하면 뭐라고 합니까? “엄마니까 당연하지 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어.” 당장 그렇게 말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부모님들의 마음이 뭔가 허전합니다. 물론 애는 장난 삼아 하는 말일 수 있겠으나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뼈 있는 말입니다. 이미 애들은 자라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강도가 어렸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솔직히 이제 나는 부모 없어도 살 수 있다는 배짱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자녀를 볼 때마다 섭섭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부모님의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게 정상인데 벌써 저렇게 컸다고 저 모양이다 할 때는 우리 마음에 뭔가 삐뚤어졌구나. 비정상이다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자식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게 판단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면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게 당연하지 하는 태도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사랑 아냐? 그러니 하나님의 직업은 용서하시는 거 아냐. 나의 직업은 죄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직업은 용서하시는 거 아냐.”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필요하냐? 나는 자신이 있다. 성인의식, 즉 독립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어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넘깁니다. 한 마디로 뒤틀린 영혼입니다.

  오늘밤에 하나님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이 말씀 앞에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서 하나님의 사랑에 여러분의 마음 깊은 구석으로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느껴지기 바랍니다. 뜨거워지기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인지 평생을 두고 연구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사실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이 놀랍게도 저의 눈을 열러 주셨습니다. 여자에게 눈이 열리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눈이 열렸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이다’ 느끼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먼저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붙잡고 웃어도 보았고, 울어 보았습니다. 흥분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후 40년이 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왜 나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나 수수께끼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을 잘 모르듯이 그 크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내가 듣고 감격하지만 아직도 잘 모릅니다. 왜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지,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바다에서 물 한 컵을 떠서 태평양을 말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 지식은 그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가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느냐와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발견했느냐 하는 발견에 비례합니다.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발견하면 할수록 그만큼 행복하고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사랑이 여러분이 가볍게 듣고 넘어가서는 안될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들으시면 여러분이 이해하시리라 봅니다. 먼저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를 한 번 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1.하나님은 유일한 신입니다.

 “여호와여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참 신이 없나이다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 하사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크고 두려운 일로 인하여 이름을 얻으시고 애굽에서 구속하신 자기 백성 앞에서 열국을 쫓아내셨사오며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로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대상 17:20-22)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온 우주에 충만하십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는 절대자이십니다. 하나님입니다.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말을 바꾸면 우주만물의 주인이시요 보존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낳고 살고 죽고 하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우주만물 중에 하나님보다 더 영화로운 분이 있습니까? 누굽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만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십니다. 그분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누구입니까?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끼리는 간단합니다. 이름, 출신, 직업 등을 말하면 대충 밝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냐? 할 때 그런 것 가지고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신분을 말할 때 “내가 누구냐?” 대답은 간단합니다. “피조물이다.” 집안에 있는 것으로 말하면 ‘큰딸이 만든 인형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이 된지라”(창 2:7)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중의 하나입니다. 왜? 인생의 진면목을 밝히고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서해 위도에서 조난 당한 사람들 중에 경제기획원의 수재들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 기사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오늘 저녁에도 제가 그 기사를 읽고 왔습니다. 청춘의 꿈을 안고 고학하면서 이제 겨우 안정하고 살 만한 나이에 그 생명이 가고 나니까 그 영화가 아무리 똑똑하고 화려해 보여도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꽃과 같습니다. 다시 보려면 바람같이 없어집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누가 그걸 부인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구는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솔직합시다. 인생이 뭡니까? 하나님입니까? 천만에요. 피조물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또 누구입니까? 거룩한 분입니다. 우리 중에는 여호와 같이 거룩한 이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는 악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완전거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입니다. 자고 나면 악한 것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선하다고 봅니까? 천만의 생각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도 가끔 기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멍청하게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이 이리 저리 날아가는데 나중에 그 생각을 모아 보면 깨끗한 생각이 50%도 안됩니다. 나머지 50%는 시시껍질한 생각을 붙잡고 씨름한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목사가 돼도 그렇습니다. 마음에는 불순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새사람이 되었다 해도 이 몸을 입고 있으니까 자꾸 생각이 더러워집니다. 자고 나면 죄짓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라는 것, 악한 것은 가까이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자고 나면 죄짓는 것만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요 하나님께 원수된 사람들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사람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이 인류를 대표해서 죄를 범하지마는 그 아담과 하와의 허리에 있던 후손들이 모두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 이 세상에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죄인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씨름하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죄인이라는 소리를 자꾸 하니까 안 듣는 게 편하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눈물 콧물 빼며 그러느냐. 그게 약한 사람들이 그러는 거지. 좀 당당하게 살 만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그렇게 하면 좋지 않아. 건강치 못해.”

  가급적이면 안 들으려 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성경이 인간이 죄인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네가 죽을 것이냐, 안 죽을 것이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안 죽는다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죽는다면 죄인입니다. 성경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했으니까 일단 죽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안 죽을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안 죽으면 의인입니다. 자, 안 죽을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의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누가 안 죽습니까?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 머리 위에 임하여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가지 당부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에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지 말기 바랍니다. 천사가 와서 여러분의 오른손을 잡고 유인할지라도 절대로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은 유일하신 창조자요 거룩하신 분이신데 비해 사람은 피조물이며 죄가 많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둘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요? 사랑을 논할 처지가 됩니까? 우리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 사랑을 주고 받을 만한 처지가 됩니까? 상대가 되어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너무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데 비해 인간은 너무 낮고 비천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너무 거룩하신데 인간은 썩은 걸레 조각처럼 냄새나는 존재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러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사랑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랑할 만한 대상이 못되는데 사랑하면 이것은 빅뉴스입니다. 그야말로 감동을 자아내는 불멸의 드라마가 되든지 아니면 두고두고 눈물을 자아내는 비극의 스토리가 되든지 합니다. 여러분이 왜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합니까? 두 집안이 원수 아닙니까? 두 집안이 사랑이라는 것은 도무지 논할 처지가 못되는 사이에 사랑이라는 열매가 나타나자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인데 하나님은 거룩하고 우리는 원수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상 완전히 융합될 수 없는 원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수된 죄인인 나를 사랑한다니 기가 막힌 노릇 아닙니까?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바보 온달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실제로 있었던 실물 이야기입니다. 고구려 평강왕 때 찌들게 가난한 집안에서 눈이 먼 자기 어머니를 봉양해서 먹여 살리는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얼굴도 우습게 못 생겨서 사람들이 별명을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평강 왕이 딸이 어려서부터 자꾸 울기만 하니까 “너 자꾸 그러면 커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귀가 아프도록 말했습니다. 나중에 나이 16살 먹어 고씨 집안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하니까 공주가 “나는 거기 안 갑니다. 어떻게 임금이 식언을 하십니까? 저는 온달에게 가겠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갔습니다. 둘 사이에 어떻게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까? 하나는 왕의 딸이요 하나는 비천한 오두막에서 빌어먹고 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이라는 말이 오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결혼했습니다. 바보 온달이 나중에 유명한 장군이 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사랑해서는 안될 자기를 사랑해서 시집온 자기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 황송하고 기가 막혀서 열심을 다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 감동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감동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데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 같은 것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을 해도 적당히 사랑한 게 아니라 너무너무 사랑하셨습니다.

 

2.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구약에 보면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성령께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귀를 열어 주시고 하나님이 나를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파고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독생자는 외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죄를 범한 사람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친구의 죄를 자기가 짊어질 수 없습니다. 부정모혈로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하면 내 죄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런 위치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도 우리를 구원해 줄 구원자가 없습니다. 나의 죄를 다 용서하고 나를 하나님과 화목시켜줄 만한 어떤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구원할 수 있습니까? 조건 하나가 있습니다. 죄가 없는 분이 나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흙으로 태어난 인간 중에는 없습니다.

  어디서 다른 방법으로 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하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야겠는데 찾으시다가 결국은 내 아들을 보내겠다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입니다. 아버지가 짐승이면 아들도 짐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들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에서 구름 위에서 인간의 죄를 담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죄는 반드시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흘려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으로 범죄했나요?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신분입니까? 어쨌든 좋습니다. 모든 죄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그 죄를 용서받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용서받을 때는 감옥에 갔다 오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죄를 처리할 수 있는 길은 피를 흘려야 합니다. 생명을 대신 희생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없는 하나님이 하늘에 앉아서 피를 흘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피를 흘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의 모양으로 바꾸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했습니다.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할 때 “주셨으니”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내어 보내셨으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몸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내 대신 피를 흘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서기 위함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죄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었는데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설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참혹스러운 죽음이요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지웠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명해 주는 가장 찬란한 마크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을 볼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셨는가를 증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평범한 사랑이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내 대신 세상에 보내신 것이 어떻게 평범한 사랑일 수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내 대신 죽을 자리에 대신 집어넣으신 것이 어떻게 평범한 사랑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적당히 듣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랑이며 어떻게 듣고 피식피식 웃을 만한 사랑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이 여러분을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할 수 있습니까? 손가락 하나 자른 일 있습니까? 여러분, 부모 자식이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합니까? 죽을 때 같이 죽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따라 죽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단계를 뛰어넘습니다. 나를 대신해 죽는 자리까지 뛰어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동 아시아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그 흉년이 지긋지긋했는지 나중에는 끼니를 하루 한끼도 이어나가지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었습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들이 넷 있었습니다. 부부 둘이서 못 먹어 울 힘도 없이 드러누워 있는 아이들을 쳐다보면서 의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살려야 되겠는데 이제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길이 없으니 마지막 하나밖에 없는 것 같소. 노예를 사러 다니는 상인들이 있으니 아이들 중에 하나를 그들에게 팝시다. 그래서 돈 몇 푼이라도 받아서 얼마 동안이라도 다른 아이들과 끼니를 이어갑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지 않겠소.”

  부부가 너무 배가 고프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사는 것이 중요하지 죽으면 나중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해서 애 하나를 팔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누워 있는 아이들 중에 큰 아이를 보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어떻소?”

  “그 애는 장잔데. 못 팔아. 장자는 안돼.”

남편이 반대를 해서 첫애는 제껴 놓았습니다.

  “둘째 이 아이는 어떨까?”

  “그 아이는 사랑하는 당신을 쏙 빼 닮았어요. 당신 죽으면 이 아이를 당신인양 보고 살려고 했어요. 이 아이는 안돼요.”

  아내가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러면 셋째 이 아이로 하지.”

  “안돼요. 이 아이는 얼마나 정이 많은데요. 지난 번 내가 아플 때 잠도 안 자고 나를 간호해 주었어요. 이 아이를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할 수 없군. 막내로 하는 수밖에.”

  “막내도 안돼요. 이 녀석은 미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녀석이에요.”

  자, 이러니 내 녀석 중에 하나도 내 놓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못 팔았습니다. 나중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인지 잘 모르나 그 중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자기 아들을 내어놓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내어놓는 일은 막바지에도 못하는 일입니다.

  요사이 같이 비정한 세상에서는 이런 저런 일도 있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람이요,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자식을 팔아먹는다든지, 자식을 포기한다든지 죽는 자리에 내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는 자기가 죽으면 죽었지 자식을 내어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외아들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왜 내어놓으셨습니까? 그 외아들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셨습니다. 왜? 죄없는 자기 아들보다도 죄있는 나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죄있는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여러분을 하나님은 자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보다 극진히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 하사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하여 자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는 제물로 내어놓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만큼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해서는 안될 대상임에도 하나님은 최고의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먼저 사랑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하셨습니다. 유명한 문호 세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했는데 얻은 사랑은 좋다. 그러나 구하지 않았는데 얻은 사랑은 더욱 좋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구해서 얻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구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미워했는데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은 값으로 메길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 세상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어떤 문필이라도 그 사랑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최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다 당신에게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 사랑만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저에게 배짱이 있다면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 되신 그분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런 배짱입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 온 우주의 신이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배짱입니다. 심지어 제가 악해져 죄를 짓는 자리에 있어도 저는 배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미워 못해. 내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나를 미워 못해. 예수님께서 죽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나를 미워 못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하나님 옆에 앉아 계시는데 나를 미워할 수는 없어. 그 예수님은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분이야. 생명을 바친 자기 아들을 옆에 두고 나를 미워할 수는 없어.”

  저에게는 이 배짱이 있습니다. 이 배짱 때문에 저는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릅니다. 담대합니다.

  이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대충 들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이 황송한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예수님이 세상에 나를 위해 오셨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이제는 나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유일한 구원자라는 것, 나에게 영원히 사는 영생을 주시는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사랑 받고 싶지 않습니까? 저는 이 믿는다는 말을 항상 이렇게 봅니다. 군대에 있을 때 본 일입니다. 얼굴이 아주 잘 생긴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남자를 갈아 치웠는데 어느 날부터 달라졌습니다. 알고 봤더니 약혼을 했습니다. 약혼이 뭡니까? 지금까지 사귀었던 남자가 몇 명이든지 간에 불문에 붙이고, 이제 약혼한 한 남자만 평생 의탁하고 살겠다는 결정입니다. 그러니 주변정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혼하니까 남자들도 툭툭 낙엽처럼 떨어졌습니다. 그 여자는 한 남자만 붙잡고 결혼했습니다.

  믿음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 제가 예전에는 돈도 좋아하고 살았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잘난 것, 앞선 것 가지고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고만장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살았지만 이제 예수님 믿겠습니다” 하면 지금까지 사랑하던 것이 다 떨어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제 내가 좋아하던 것 다 손에서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같고, 더러운 욕심도 다 놓게 됩니다. 미움도 증오도 다 놓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만이 나의 살길 인줄 알고 그분에게 약혼한 처녀처럼 내 마음을 온통 주어 버리는데 그것을 일컬어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 당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사랑을 주기를 원하시는데 그 사랑을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얘야, 마음을 열어라. 열고 내가 너를 위해서 보내는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네 마음에 모셔라. 그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라. 이제는 이 세상을 살 때 너 혼자 걸어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손잡고 걸어가는 인생을 살아라. 그러면 너는 나의 사랑에 대하여 보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오늘밤에 여러분이 결단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그래. 옳다. 나는 죄인이요 피조물이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 나는 60,70년 살다가 떨어지는 가랑잎 같은 존재가 아니야. 나에게는 그 다음에 무엇인가가 있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되는 문제라면 나 예수 믿겠습니다. 하나님, 나를 그렇게 사랑하셨다면 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지만 그 사랑 내가 받아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 내가 이 사랑 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결심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잘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을 두고 두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 내 마음에 물이 자꾸 차 오릅니다. 성경을 배울수록 차 오르고, 신앙생활의 경력이 쌓여 갈수록 차 오르고 하나님의 사랑이 차 오릅니다. 차 오르면 내 마음을 지금까지 채우고 있던 것들이 다 밖으로 떠나갑니다.

  컵에 물이 들어가면 공기가 빠져나가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점점 차 오르면 내 마음 속에 지금까지 가득 찼던 것, 나에게 하나도 유익을 주지 못하던 것, 늘 고민과 번민과 공포와 불안과 원망과 시기를 일으키던 잡다한 것들이 다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가득히 채웁니다. 그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여러분에게 배짱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이 체험하지 못한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이 샘처럼 솟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 보이는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아내의 얼굴이 달라 보입니다. 남편의 얼굴도 달라 보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여러분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부족하다. 나는 열등생이다.’ 그런 자각증세로 살았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채우면 내가 불평했던 조건들이 감사의 조건들로 바뀝니다. 이 세상, 박대통령도 가는 세상, 그렇지 않아도 여러분, 다 가는 세상.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한 사람은 내가 좀 실패했다 해도 그것이 비굴해지는 이유가 못됩니다. 가정에서 설혹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 해도 아내가, 남편이 마음에 안들 수도 있습니다. 안 드는 게 정상입니다. 그래도 부부가 채우지 못한 공백도 하나님의 사랑이 채우게 되면 그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여러분, 심지어 예수님 믿는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억울한 일로 잡혀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은 찬송하면서 죽었습니다. 모든 원수들을 용서하고 죽었습니다. 그 여유만만한 마음이 어디서 생깁니까? 그 평안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만유의 주가 되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이 사랑을 하나님은 여러분이 마음을 열고 다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거부하지 마세요. 사랑한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영혼이 구원받고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박성도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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