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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처음으로 우리 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또 어제 나오시고 오늘 나오신 분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신 줄 알고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특별히 누가 처음 오셨고 초대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서 꽃을 준비를 좀 했습니다. 그런데 꽃 만들어놓은 것이 동이난 것 같은데요. 오늘 처음으로 모시고 왔는데 꽃이 없는 분들 우리 교인들만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되세요. 그 외에는 다 달고 계시네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진작 그래야 하는데 미처 머리가 돌지를 못해서 그랬습니다.
오늘 저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좀더 하나님이 활짝 열어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에서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먼저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목이 용서받아야할 죄인입니다. 거기에 맞추어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리가 좀 문학적인 감각이 있다면 이 짧은 스토리 안에 있는 장면을 상상으로 그려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모였을 때에 항상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진리를 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어요. 예수님의 목적은 병고치는데 있지 않았고, 예수님의 목적은 귀신 쫓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그들의 만족을 채워주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더 깊은 주님의 뜻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캄캄한 영혼 속에 허덕이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자기를 발견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르치는데 사람들은 유대나라의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 바리새파 하는 사람들은 유대나라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적인 지도자들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먹지 못해 항상 불을 켜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끌어넣기 위해서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현장에서 부정한 성관계를 하다가 잡힌 여자입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성경에 의하면 소위 성적인 범죄를 하다가 잡히면 영락없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이 제일 크게 죄로 생각하는 것이 첫째는 우상숭배요, 둘째는 살인이요, 셋째는 성범죄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죄를 범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기만 하면 무조건 사형입니다. 레위기 20:10, 구약성경을 보면 부정한 관계를 맺는 남녀를 발견하면 둘다 끌어다가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동정의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엄중한 죄로 다루었습니다. 그러니 현장에서 잡혔으니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남자는 발이 빨라 도망을 간 것 같습니다.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법대로 하시오” 하면 끝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쳐죽이라고 했으면 쳐죽이시오” 하면 끝나는데 여기 만약 이렇게 대답을 할 때는 예수님이 매우 정치적으로 난처한 입장에 놓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유대나라가 로마나라에 식민지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식민지 나라에는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형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절대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그랬죠. 죽이고 살리는 것은 일본 정부의 명령대로, 일본 법대로 해야지 한국 사람이 함부로 죽이고 살리는 재판을 하지 못합니다. 재판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입니다. 유대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재판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설령 잘못해서 타인을 죽여도 꼭 로마의 허락을 받고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이 시간에 “율법대로 이런 사람은 죽여야 합니다” 말하면 로마의 법을 깨는 모순에 빠지고 정치적으로 말려들게 됩니다. 이것을 노리고 지금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음흉한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무 말씀 안하시고 가만히 땅에 앉아서 글을 쓰셨죠. 우리가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떻게든지 구실을 잡아 올가미를 씌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는데 한 분은 지금 대답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5공비리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있는데 질문하는 사람이 악을 쓰면서 그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하나 찾아내려고 악을 쓰는데 그 비슷한 모습이 우리에게 연상이 되어집니다. 예수님이 땅에 글을 쓰셨어요. 무슨 글을 쓰셨는지 몰라요. 성경에는 아무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 추리를 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말로 대답을 할지 몰라서 시간을 벌기 위해 잠깐 앉았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만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벌기 위해 앉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예수님이 이때 앉으신 것은 그 여자를 고발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죄를 땅에다가 쓰기 위해 앉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글을 쓰고 계시니까 그들이 보았을 것 아닙니까? “너는 무슨 죄를 범했니? 나는 다 안다. 너는 전에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않았느냐?” 하고 쓰셨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상상인 것 같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글쓰는 것을 보고는 모든 사람들이 멈칫하고는 입을 다물었으니까요. 그리고는 일어나셔서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먼저 돌로 치라”
사람들이 아무리 더럽고 부패해도 100% 악한 사람은 없죠. 그래서 1-2%의 양심은 남아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다 찌그러진 자동차 엔진 비슷하지만, 그 기능은 굉장히 희박하지만 그래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서 죄없는 사람이 돌로 쳐 하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어른들로부터 시작해서 아이들까지 뒤로 빼서 전부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여자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자들이 어디 갔느냐?”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는 다시는 그런 못된 짓 하지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여자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표정으로 돌아갔을까요? 이것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보는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예수님 믿으라고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믿겠다고 들어와서 오늘 간증하는 어느 자매처럼 몇 개월이 지나서 ‘내가 죄인이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나와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죠. 이와 같은 표정이 이 여자의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기쁨, 이런 표정의 모습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끌려가서 서게 된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나요? 이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림이요, 저와 여러분입니다.
성범죄라는 것은 모든 범죄에 있어서 말기적인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기적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어느 나라든지 망하기 전에 크게 일어나는 범죄가 있다면 성문란입니다. 과거에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로마가 그랬고, 지금 서구문명이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학교 가는 딸의 가방에 피임약을 넣어주어야 하는 곳이 서구의 모습입니다. 성문란은 어느 시대나 말기현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더럽고 추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 치고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성문제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과거에 정조를 잃었느냐 잃지 않았느냐, 정절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다 쾌쾌묵은 이야기로 다 받아들여집니다. 웬만한 집에는 누구나 VTR을 사가지고는 어디서 빌리든지 구해서 밤에 자녀들 몰래 음란 비디오를 보고 있는 부부들이 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요. 그렇게 정신없이 VTR을 보고 있는 부모를 자녀들이 모를 리가 있나요.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저게 뭐길래 저렇게 입을 헤벌리고 보고 있나? 그게 뭔지 몰라도 보고 싶어 애를 쓰다가 부모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면 고등학교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보다가 교사에게 들킨 일이 한 두건인 줄 아십니까?
요즘 신문을 보세요. 돈벌기 위해서라면 국민학교 어린이에게도 외설 잡지, 외설 비디오 보여주고 돈벌어서 축재하겠다는 인간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악마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남의 자식은 망하든지 말든지 돈만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민학교 근처에 외설 비디오, 외설 만화방을 차려놓고 애들을 유인해서 그 캄캄한 방에서 그런 것을 보여주면서 돈 뜯어내는 인간들, 점점 더 많아지고 요즘의 국산영화는 무조건 벗기기 작전이야. 나는 하나도 아직 안 봤지만. 목사가 봐야 한다면 무슨 영화가 그렇게 잘 벗겼는지 한번 가서 볼려고 그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직접 간접으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문제는 이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이 성적문란 문제를 방지하면 이 사회가 살고 이 나라가 살지만 만약에 이것을 조금이라도 묵계하고 동조하는 스타일로 나간다면 이 사회가 드디어 구제불능의 상황에 빠지면 이 나라는 아무리 잘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썩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있다면 손을 들어보세요. 여러분 중에 내가 돌을 던지겠습니다 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말입니다. 누구나 다 조그마한 양심은 살아있습니다. 아무도 여자에게 돌을 던지 도망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했어요. 우리가 현장에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이성을 향해서 악한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를 범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샛별 같은 맑고 밝은 눈으로 우리를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현장에서 실제로 나쁜 짓을 하다가 잡힌 사람이나 날마다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이나 마음이 더러워진 것은 똑같고, 추악한 것은 똑같고, 어떤 면으로는 행동으로 범죄하지 않고 마음으로 범죄 하는 사람이 더 악취가 날지도 모릅니다. 누가 돌을 들고 던질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돌멩이가 날아올까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내가 범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벌을 내리실지 몰라서 두려움을 안고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큰 아파트에 살든, 작은 아파트에 살든, 인물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어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죄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피상적인 것을 놓고 하나님이 자꾸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죄는 너무 심각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 자체가 벌써 죄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고 자체가 벌써 죄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나를 위하여 짧은 70,80년을 멋대로 살아버리는 이것만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너는 그렇게 살다 가면 망한다 가르쳐 주는데도 픽하고 웃어버리고는 무시했던 이 뻔뻔스러운 태도가 하나님 앞에 가면 무서운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멀리 떠난 아이는 무엇이든지 대범하게 마음대로 한번 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웬만한 일은 두려움없이 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도 해버립니다. 남의 것을 떼먹기도 합니다. 미워하고 질투합니다. 남편도 속일 수 있습니다. 아내도 속일 수 있습니다. 대범하게 행동합니다. 그리고는 대범하게 잊어버립니다. 이와 같은 모든 죄들이 오늘날 우리를 형편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인정하십시오.
아무도 돌을 들고 다른 사람을 칠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하게 남아있는 이상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죄인은 늘 불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가책을 받습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무슨 일을 하나 해보고 싶어도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책과 불안이 점점 더 짙어지면 정신질환까지 일으킵니다. 그래서 정말 어떤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암을 안고 살 때 암이 완전히 퍼지기 전까지는 건강한 것처럼 착각하고 삽니다. 어떤 암은 그 사람 몸에서 5년을 자라야 밖으로 표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밖으로 표가 나기까지 3-4년은 끄떡 안하고 건강한 것처럼 허허하고 웃고 자신만만하게 산다 그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허풍도 떨 수 있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멸시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내가 죄인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은 여러분은 평안한 생활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불렀습니다. 암이 있는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가 진찰시켰다고 잘못했습니까? 잘못했나요? 잔인한가요? 우리의 본질이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여러분을 여기까지 모시고 온 사람이 잔인한 사람인가요? 몇 년 더 행복하게 살고 난 뒤에 데리고 오든지 하지 왜 이렇게 젊었을 때 데리고 와서 벌벌 떨게 만드느냐고요?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현대인은 굉장히 약은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대단히 좋습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가급적이면 최소화시켜 보려고 합니다. 우선 현대인은 굉장히 듣기 싫어합니다. 지금 아마 굉장히 뒤틀려 가지고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틀려도 괜찮습니다. 뒤틀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풀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풀어주실 테니까 귀만 막지 말고 들으세요. 오늘 현대인들 치고 죄의 이야기 듣고 싶어하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비교적 죄의 문제를 솔직하게 많이 이야기하는 교회인데도 그래도 교인들이 모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현대인들은 죄의 문제를 표현부터 바꿔볼려고 노력들을 하지요. 예를 들어서 약점이라는 말로 바꾼다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불안증세 등으로 바꾼다든지 여러분 여러가지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표현을 바꾸어 가급적이면 죄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죄를 범하는 어떤 요인이 나타날 때에는 내가 쉽게 그 책임을 벗을 수 있는 제 3자에게다 떠 맡기려하는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 저렇게 남을 미워하고 그야말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뇌에 종양이 있어서 그러는지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서 세밀하게 뇌파 검사를 받아보라고 한다든지 하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정말 병원에 가서 뇌파 검사를 받았더니 미국에서 말입니다. 사랑해야하고 남을 관용해야 하는 뇌세포를 종양이 꽉 누르고 있어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었다는 어떤 의학적인 발표가 난 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양을 떼어 냈더니 그 다음부터 너그러워지고 좋아지더라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죄! 죄!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신체 안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러니까 그 결함을 찾아내면 된다 하는 식으로 이제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이 사람이 자란 배경을 조사해보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느냐, 아니면 유복자냐, 아니면 형제들이 하나도 없었느냐, 아니면 고아원에서 자랐느냐,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에 어떤 성적인 타격을 받았느냐 한번 조사를 해보자. 거기에서 피해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와 같은 나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해서 과거를 추적을 합니다.
그래서 무엇 하나를 발견하면 “당신이 이와 같이 나쁜 짓을 한 것은 당신이 악해서가 아니고 당신이 자란 과거가 이래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너무 과히 염려하지 말고 모든 책임은 과거에 있으니까 거기에다 책임을 떠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오늘 현대인들이 죄를 처리하는 방법입니다.
죄가 아는 신박사는 그래요. 상담 클리닉을 만들어 놓고는 역시 미국입니다마는 부부가 너무 싸우니까 “언제 당신이 오시고, 언제 남편은 오시오.” 스케쥴을 짭니다. 그래서 스케쥴이 짜인 대로 남편이 오기도 하고 부인이 오기도 합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마음 속에 스트레스가 쌓여 가지고 그것을 풀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우는 것이요. 그러니까 내가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그대로 하시요.”
그래 가지고 옆의 빈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의자를 하나 가운데 놓고 그 위에 이름 같은 것 하나를 얹어 놓습니다. “자, 지금 이것이 당신 남편이오. 지금부터 내가 야구 방망이 하나 줄 테니 실컷 두들겨 패시오.”
자, 이런 식으로 해서 신박사는 어떤 부부는 굉장히 효력을 많이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실컷 두들깁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아휴 - 정말 이제 후련합니다.” “그러면 다음 시간에 또 오십시오.” 이렇게 해서 모든 죄의 원인이 제 3의 어떤 책임져야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거기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죄를 책임져야할 제 3의 어떤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계속 죄를 회개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하나님처럼 바보스러운 존재가 없습니다.
제 3의 구실을 하나님이 모르고 계신다는 이야기니까 심리학자만도 못하고, 정신분석학자만도 못하고 카운셀러만도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든 죄의 원인이 우리의 부패하고 썩은 마음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제맘대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그의 마음이 부패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생각이 악한 것뿐입니다.
선하게 보이는 것도 그 밑뿌리를 보면 전부 자기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악입니다. 이 세상을 보세요. 고아원을 하는 사람, 구제를 하는 사람, 남 앞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보세요. 하나님을 모르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의 뿌리를 찾아보면 전부 불순한 어떤 자기 욕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부패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 그 생각이 발전해서 나타나는 행동, 그 행동이 또 발전해서 나타나는 남을 해치는 행위까지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은 똑같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죄요 악입니다.
다른 데다가 책임전가하면 안됩니다. 내가 자란 환경이 이러쿵저러쿵 책임전가하는 것은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내 몸에 이상이 있어서 스트레스가 쌓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근본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조그만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해서 그렇게 남을 미워하고 증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내 더러운 마음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네 마음에 있는 모든 악이 깨끗하게 씻음 받지 아니하면 너희는 내 앞에 올 수 없다. 그리고 네 모든 악을 완전히 해결하지 아니하면 너는 그 죄값으로 영원한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우리가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 심지어 조그만 생각 하나까지도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대상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의 대상은 다같이 따라 하십시오. “하나님이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애요. 여러분 뭐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보세요.
어머니가 애를 키우다가 솔로몬 앞에 나왔던 어떤 여자처럼 좁은 방에서 잠을 자다가 몸부림을 치다가 애를 깔아 죽였다고 합시다. 자기애 죽였는데 무슨 상관이요. 내 아이 죽었는데...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합니까? 자기가 낳은 애 자기가 죽였는데 왜 다른 사람하고 관계가 있습니까? 그런데 왜 그 여자가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하느냐 그말입니다.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살인하면 이런 형벌이 따른다는 국가의 법을 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애는 내 애지만 법을 범한 대상은 국가입니다.
내가 실수해서 우리집이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영창에 가 앉아 있어야 합니까? 모순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이 법입니다. 국가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국가의 법을 어긴 것은 국가가 주는 벌을 받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지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워서 하는 이야기고 우리가 성경을 펴보면 우리가 범하는 죄는 이웃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국가가 대상도 아닙니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 자연법을 만드신 하나님, 죄에 대한 모든 벌을 규정해 놓으신 하나님, 죄는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을 상대하는 행위가 바로 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죄가 뭐냐?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가 뭐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문제지 사람과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용서받아도 끝까지 마음 속의 가책과 불안과 공포가 남고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가서 설 때 그 죄 때문에 그는 그 앞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자, 그렇다면 심각한 문제가 하나 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누구로부터 용서받아야 합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아야 한다는 절대 과제가 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눈에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조용히 들으세요.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고 내린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
여러분, 왜 오늘 나쁜 짓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둡니까? 왜 당장 죽여버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굉장히 용감하지요. 내버려두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용감했는지 모릅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이 가운데 나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할 분이 있나요? 그리고 그들은 수근거리며 서로 헐뜯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건방지고 교만하며 무자비합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사람은 죽임을 당한다는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이런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옳다고 두둔까지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다 그런데 뭐. 여러분, 성경말씀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우리의 깊은 마음을 찔러서 헤쳐내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도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단입니다. 안 믿는 사람,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심지어 보세요. 그들의 마음, 양심까지 더러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해결 받아야 할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여러분,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암을 안고 껄껄거리며 웃는 사람과 같습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 다음을 봅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죄를 통해서 다같이 “모든 사람이” 처음에는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들어왔다고 했는데 그 한 사람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 온 인류에게 죽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세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비참합니까? 이 모든 것이 죄의 값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의 죽음을 한번 당하는 것은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육신의 죽음을 당하기 전에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얼마나 심각합니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육신이 죽은 다음에는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삽니까?
제가 지난 여름에 미국에 들렸을 때 십년 만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갔습니다. 하도 마음도 컬컬하고 해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자연 속에 있고 싶어서 같습니다. 갔는데 저를 안내하는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 전에 이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 100M 지점을 가리키면서 저기에서 기적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무슨 기적이요?” 했더니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 200,300M 지점부터는 물이 얕기 때문에 파도가 심합니다. 그리고 1Km 정도 올라가면 경계선이 있습니다.
그 위에는 보트들이 얼마든지 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선을 넘어오면 안됩니다. 넘어오면 구제불능입니다. 물살에 밀려들어가기 때문에 60M의 폭포에 떨어지면 끝장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기적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얼마 전에 남자 둘이 저녁에 낚시를 나왔다가 고기가 너무너무 잘 낚이니까 신이 나서 술을 마셔가면서 밤새도록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술기운에 뻗었습니다. 기분 좋게 자는데 배는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아주 높은 산에서 그랬는데 몇 시간을 떠내려갔습니다. 떠내려가서 밤중 1시 그쯤 됐는데 사람이 술이 깨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경계선을 넘어와 버렸습니다. 폭포소리가 들립니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습니까?
막 소리를 지르는데 둑에서 누가 보았는가봐요. 그래서 비상이 걸렸습니다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내려가다가 물이 얕으니까 배가 바위에 걸리면서 두 사람이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그 둘이 바위가 약간 튀어나온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게 매달려 새벽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좀 해보세요. 그래가지고 살아났대요. 구조대 가서 헬리콥터가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그래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술먹고 고기 많이 낚고 기분 좋게 잘 때야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지요. 그러나 자기가 탄 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즐기기만 한 것입니다.
오늘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 그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예측하지도 않는 사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픽 웃는 사람, 그 사람이 꼭 지금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계선을 넘어온 사람과 같아요.
그러니 이 죄의 문제는 해결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의 입시문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짜증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벗어나는 게 우선이 아닙니다. 고부간에 갈등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 아닙니다. 여러분 남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제일 우선을 두어야 하는 문제! 이것은 죄의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면 한 시간도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면 굉장히 곤란한 문제입니다. 왜 곤란한가 하면 죄용서 받는다는 문제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 사람에게 잘못했다면 찾아가서 잘못했다고 빌고 용서받는 것은 간단한 문제이지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 앞에 무슨 재주로 가서 죄를 용서받습니까? 어떻게 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구약에 있는 미가 선지자 같은 사람은 이런 문제를 생각하니까 하도 답답해서 이런 말까지 했어요. “내가 내 맏아들을 데리고 가서 제사 드리고 용서를 받을까” 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무슨 재주로, 무슨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며, 무슨 변명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용서를 받느냐 그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완전한 거룩자입니다. 죄라는 것은 절대 용서 못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죄의 결과가 꼭 따라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는 죄의 댓가를 내가 무슨 재주로 드리며 갚을 수 있느냐 그말입니다. 이것만큼 심각한 문제가 없어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괜찮다 괜찮다” 백마디 해도 소용없고 상담하는 사람이 “당신 그것은 시간 보내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가라앉습니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속 시원한 말 한 마디 듣기 전에는 내 안에 자책과 불안은 끝까지 남아버립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보지 않습니까? 집안에서 야구 방망이를 가지고 놀다가 아이들이 어머니가 아끼는 화장대를 망가뜨려 놓았다고 합시다. 동생이 야구공을 던지다가 망가뜨려 버렸어요. 애가 부들부들 떨면서 “형, 어떡해 어떡해” 하는데 형이 “괜찮아, 괜찮아. 내말들어. 괜찮아.” 아무리 형이 동생보고 괜찮다 괜찮다 해도 그 동생 마음은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화장대의 주인이 어머니야. 그 주인 되는 어머니가 무슨 말 한 마디 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아무 형제들이 눈물 닦아주고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의 죄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한 마디 하시기 전에는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하나님을 찾아갑니까? 무슨 재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그분에게 드릴 수 있습니까? 자신 있어요. 여러분, 무슨 선행을 그렇게 많이 하셨나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간은 죄용서 받아야 할 필연적 상황에 놓여 있지만 죄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도 없고, 죄용서 받을 수 있는 수단도 없고, 죄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체념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아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는 줄 아시고 자기가 우리를 위해서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는 어릴 때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뭘 해라 하는데 어떤 때는 안합니다. 왜냐하면 학교에 가서 숙제하고 내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일을 시켜 놓았으니까 일을 해야 하는데 죽어도 일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책가방을 들고 슬그머니 빠져나가 버립니다. 일을 안합니다. 그러면 저녁에는 매맞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그럴 때 어머니가 중간에서 중개역할을 합니다.
내가 듣지 못했지만 추측에 화가 나있는 아버지에게 “그 애가 지금 시험 때 아니요. 당신 왜 그래요. 그런 것은 봐줘야지. 아무리 농사를 짓지만 그 애가 그렇게 일만 해서는 어떻게 공부를 따라가오.” 하고 무슨 말을 했겠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누구보고 화를 냅니까? “뭐라카노!” 경상도 사투리로 이러죠. 우리 아버지 어머니 농사 지으셨기에 말투도 그런 사투리를 많이 쓰십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버지 앞에 호되게 한번 당합니다. 나는 겁이 나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러면 둘이서 어머니는 제 변명하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소리지르고 그러시다가 시간이 좀 지나서 “애가 안 들어오는데.” 하고 걱정을 합니다. 아버지가 “당신이 나가서 한번 찾아봐” 그러면 내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누가 마련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마련해서 어머니에게 지시하는 것이죠.
이 말은 들어와도 내가 아무 말 안할 테니까 데리고 와라 하는 것이죠. 하나님 편에서도 똑같은 입장이 되셨어요. 가만히 두면 제가 내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가서는 안될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도저히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아들 되신 예수님을 보고 “네가 좀 내려가라. 네가 내려가서 중간에 서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 기쁜 마음으로 “내가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영광 다 내어놓고 그 화려한 그 모든 지위와 권세 다 포기하고 말구유에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태어나셔서 인간 세계에 찾아오셨습니다. 귀족의 모습으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분의 모습은 죄인 중의 죄인, 제일 불쌍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죠.
그리고는 그분이 이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역할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중재역할을 하려면 꼭 그분이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범한 죄의 댓가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댓가를 자신이 대신 짊어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방법을 택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욕을 먹듯이 나 때문에 어머니가 욕을 먹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내가 받을 죄값을 다 송두리채 짊어지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걸어가신 곳이 골고다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목에도 십자가가 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집에 십자가 모양의 벽걸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십자가를 좋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 그것은 정말 끔찍한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 개구리를 잡아 네 다리를 벌리고 못을 한번 쳐봤어요. 왜냐하면 하도 어릴 때부터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해서 도대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어떤 것인가 사람을 잡아서 못을 칠 수는 없으니까 개구리를 잡아 판자 위에다가 못을 쳐봤어요. 아유 - 못보겠대요. 세상에 그거. 총으로 꽝 쏴서 죽이는 것은 양반이야. 약과지요. 얼마나 어려워요. 십자가에 한번 매달리면 건장한 사람은 일주일동안 고통받다가 죽습니다. 파리, 모기 등 해충들이 입,코를 다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꼼짝 못하지요. 십자가는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하나님 앞에 죄용서 받으려면 피를 흘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피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서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잃게 이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다시 그 생명을 잃게 한 죄에 해당하는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것도 더러운 죄인의 피가 아닌 죄없는 의인의 피를 흘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없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범한 모든 죄의 값을 하나님 앞에 지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이 무참하게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흘리신 보혈의 피를 보시고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모든 세상의 사람들로부터 죄의 값을 요구하지 않겠다. 이제는 내 마음에 만족해. 내가 요구하는 죄의 댓가가 완전히 지불되었어.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내가 그 사람의 죄를 묻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겠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죄용서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보고 하나님께서 과거부터 수십년 동안 범한 죄의 명세서를 써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을 불러놓고 밀실에 앉아서 “네가 지금까지 무슨 죄를 범했느냐”고, “내가 비밀 지킬 테니까 다 말하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공갈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앞에 두고 “너 어디서 그랬냐? 상대가 도대체 누구야?” 예수님께서 그런 질문하시지 않았어요. 그런 질문하지 않아도 주님은 다 알고 계셔요. 내 생각의 토막 토막까지도 다 알고 계시는 주님,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예수님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나를 좀 살려 주세요.”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는 길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용서받는 길밖에 없다고 하니까 “예수님, 제가 예수님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지 않고 살던 이 못된 죄, 다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 주시고, 나를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해주세요.” 하고 주님만 붙들면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내가 예수님 믿겠습니다” 하는 그거 하나 너무너무 귀하게 보시고 모든 죄 깨끗하게 씻어주시기로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뭐라 하셨습니까? “나도 너를 죄인 취급하지 않겠다.” 이것은 의인 취급하겠다 하는 말씀하셨지요?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예수님은 “나도 너를 죄인 취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다루어 주십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떤 죄를 지은 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회개하기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마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은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김일성이 회개하고 장로 되게 하시고, 김정일이 목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못된 놈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는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이라도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받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좋다는 것이지요. 뭐 다른 것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지 아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 내가 죄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증거하고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심을 믿습니다. 그러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들이 일어나느냐? 마음에 있을 때는 불안이 싹가십니다. 그리고 항상 가책감을 갔던 것이 불안해집니다. 아 이거 진짜 놀라운 일입니다. 거짓말 같애요. 그리고 기쁨이 솟고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한 이유가 이런 놀라운 일이 있으니까 알려주려고 오시라고 그랬지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원자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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