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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돌아가자(눅 15:11-24) 옥한흠 목사님 전도설교

by 【고동엽】 2022.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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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말씀인데 세계에서 제일 간단하면서도 제일 심오한 내용을 짧은 이야기 중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가 말을 반복해야할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는 담겨 있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유대나라의 문화배경을 잘 모르시니까 몇 가지를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유대나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통은 수천 년의 전통입니다. 동양에서는 중국과 버금 갈 정도의 고집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나라에서는 좀 돈이 있는 가정에서는 유산이라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차지합니다. 부모가 돈을 모아 놓으면 자식들은 당연히 그래도 얼마 정도는 유산으로 받게 되는 것을 권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두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유산을 가르는 법이 있어요. 첫 아들은 ⅔를 주고 차자는 ⅓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산을 줄 때에는 아버지가 아직도 연세가 많지 않아서 건강할 때는 자식이 감히 유산 내놓아라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세상 떠날 때쯤 돼서 건강이 악화되어 유언을 해야 될 상황이 되면 그때 비로소 아버지는 아들들을 불러놓고 “첫째 너는 무엇 무엇을 가져라, 둘째 너는 또 무엇을 가져라” 전부 유산으로 나누어 줍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둘째 아들은 좀 망나니 기질이 있는 아들입니다. 유산을 받는 것은 당연한데 아버지가 아직 건강합니다. 그렇게 재산을 내놓으라고 할만한 처지가 아닌데도 아버지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 아들이 비록 버릇은 없고 도리는 어긋났지만 아들이 요청하니까 그래 나누어주마 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아들 몫을 떼어놓고 작은 아들 몫을 정리해서 주었습니다. 주었더니 이 작은 아들은 얼싸 좋다해서 그 재산을 다 정리해서 아버지의 간섭이 미치지 아니하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 아들이 돈 있다고 흥청흥청 쓰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재산을 다 날렸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뒤에 보면 여자들, 창녀들 하고 재산을 다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급해지니까 직업을 구했는데 무슨 직업을 구했지요? 가뜩이나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니 돼지치는 직업을 구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지요. 유대나라에서는 저 산에다 돼지를 치는 일들을 유대나라 사람들은 하지 않습니다. 유대 나라 주변에 사는 가나안 족속들은 돼지를 방목해서 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양을 치듯이 아니요, 염소들 치듯이 그렇게 칩니다. 주인이 그 돼지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배고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하겠다. 가서 아들 대우 못 받을 바에야 그 집에 일군 중에 하나로 살아도 아버지 집에 가서 이 배고픔을 면하고 이제는 이 고통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생각하고 그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날마다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소식이 없는 아들 걱정에 날마다 대문 밖에 나와 지나가다가 보고 돌아오다가 보고 저 길 모퉁이에 아들 같은 사람이 올라오나 늘 눈 여겨보던 아버지에게 아들은 금방 눈에 뜨였습니다. 아버지가 정신없이 달려가서 그 아들을 얼싸안고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무슨 말을 하기는 하는데 아버지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금방 종들을 불러 빨리 새 옷을 내어 오너라 냄새난다 목욕시켜라 가락지 끼워라 신발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하자. 그래서 왜 그렇게 했느냐 했더니 24절에 아버지가 그렇게 말을 하지요.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 15:24)

  이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고 죽었다가 살았으니 얼마나 우리가 기뻐해야 하겠느냐? 여러분, 여기 이 주인공이 오늘 자기 자신이라고 발견하면 여러분은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나 하고는 관계없다 하면 여러분은 아직도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남은 시간 동안 저하고 이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마음을 열고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자,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 믿고 있는 분들은 다 알고 믿고 있는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모시고 온 아직 예수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계신다는 사실을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지금까지 세상을 살았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아버지하고 불렀죠. 우리에게도 하나님 아버지하고 불러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기초가 됩니다.

  한때 미국에서 뿌리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노예생활을 하던 흑인들이 나의 족보가 어떻게 되며 나의 조상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 뿌리의 줄거리이지요. 그래서 아프리카에 가서 조상을 찾아 헤매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뿌리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사셨어요? 뿌리가 누굽니까? 뿌리를 찾아 보셨어요? 그 뿌리를 깊이 마음에 두고 그 뿌리가 누구냐? 나의 뿌리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셨는가 말입니다.

  벌써 여기에서 여러분이 걸려들어 갑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이 시행착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 만물은 뿌리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의 손에서 전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만든 자가 있고 나의 주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뿌리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밑에 성경구절 보세요.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

  나는 온 인류의 하나님이다. 전 인류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 한 아버지를 모시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계셔요. 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것을 모르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아,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이 계신다. 아버지가 계신다. 우리의 뿌리가 있다 하는 말입니다.

  참 종교의 필수적인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참 종교를 가져야 할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필연성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면 이 하나님이 바른 관계성 속에서 살지 않으면 나는 세상을 잘못 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하나님, 이 사실을 바로 확인한 사람은 인생의 괘도를 바로 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확인하지 못하는 사람은 괘도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 하나님은 바로 찾아야 합니다. 바로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놓고 나의 문제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죠?

 

2.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닙니까?

  작은 아들이 아니냐 그 말입니다. 이 작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이 살기 싫어서 재산을 받아 가지고는 멀리 떠났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처지에 있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뭐하기야 우리 모두 세상에 태어날 때 내가 어떤 신분으로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면 우리는 잘못 태어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작은 아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태어났어요.

  흑인 아이가 태어날 때 자기가 검둥이인줄 알고 태어납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집안에서 태어나죠. 그래서 수년이 지난 다음에 그것도 아프리카 골짜기에서 살면 자기가 정상인줄 알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인들을 보고 황인종들을 보기 시작하면 서로 비교하면서 나는 검둥이구나 하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작은 집안에서 잘못 태어났는데 잘못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못 태어난 줄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셔서 이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왜 잘못되어 잘못 태어났느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제맘대로 사는 집안 조상 밑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 보세요. 왜 재산 가지고 아버지 곁은 떠납니까? 아버지 떠난 이유는 가급적이면 아버지 떠나 아버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하고 싶어서 떠난 것 아닙니까? 우리도 자식 키우니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레곤에 있는 오레곤 대학에 갔더니 거기에 계시던 우리 교회 교수님 한 분이 말씀을 하셔요. 참 대학이 아름답고 캠퍼스가 좋습니다. 너무 숲속에 멋있죠. 그런 좋은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게 되니까 학생들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이 대학은 오레곤에 있는 학생들이 주로 오겠군요? 했더니 그 교수님이 “아니요. 목사님 생각하고는 정 반대입니다. 이 오레곤에 있는 개학의 학생들 거의 ⅔가 저 멀리 다른 주에서 온 학생들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여기 학생들은 어디로 가나요?” “더 멀리 가지요. 예를 들면 시카고로 간다든지, 저 동부로 간다든지, 저 남부 텍사스로 가든지 멀리 갑니다.” “왜요?” “부모 곁에 있고 싶지 않아서 다 멀리 떠납니다.” 멀리 갑니다. 물론 대학에 가면 다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습니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부모에게 간섭받고 싶지 않은 것이 아이들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똑 같은 심리입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 얻어 가지고 젊었을 때 신나게 한번 살아보자 하고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편지를 알 수가 있나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나요. 그러지도 못하는 곳에 가서 자기 혼자 독립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왜 잘못 태어났는지 아십니까? 이렇게 독립해서 하나님과는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 지배받지 않고 내가 자유스럽게 살고 싶어하는 작은 아들집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잘못 태어난 후예들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 가만히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이것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의 부분입니다. 교회를 가자 하면 나 간섭받기 싫어. 나 부담스러워. 싫어. 가급적이면 하나님하고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오면 남편 꼬셔 가지고 가급적이면 시아버지 시어머니하고는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살려는 똑같은 심리를 가지고 멀리 떨어져서 삽니다.

  여러분 웃으시는 것 보니까 동감입니다 하는 뜻이로군요. 그러면 하나님을 이렇게 멀리 떠난 작은 아들과 그 후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압니까?

 ①자기 중심으로 삽니다.

   자기 중심으로 산다는 말은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없어요. 내가 하나님이요.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제일입니다. 세상은 나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나의 한 생도 나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②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합니다.

   자, 여러분 스스로를 분석하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서 내맘대로 사는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간섭받고 싶지 않다, 자유하고 싶다는 본능이 작용하고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이고 자기가 삶의 중심입니다. 그 다음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합니다. 무슨죄? 옥목사 무슨 말을 하고 있어. 무슨 죄를 범했다고.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를 떠나서 수십 년 동안 소식하나 전하지 않고 사는 아들은 아무 나쁜 짓을 사회적으로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버지 앞에 죄인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30,40년을 살면서 하나님을 여러분이 찾아 보았나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이나 해보셨나요? 나에게 아버지가 따로 계신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 찾아 한번 나서 본 일이나 있나요?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삶이 아니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고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한번 자문자답하며 고민하며 생각해 보신 일이 있나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는 죄입니다. 그것이 바탕이 되어 가지고 이기적인 본성의 욕심을 따라 움직였기 때문에 생각마다 더러운 죄밖에 더 있나요. 욕심, 질투, 시기, 분쟁, 여러분 마음 속에 가득한 것들, 옥 목사 마음에 가득한 것들, 여러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시궁창이죠. 무엇이 선한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자유하고 싶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가지고 나쁜 짓을 해도 나쁜 짓인 줄을 모르고 사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면 주로 세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말하면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고, 잘못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보세요.

  첫째 뭐요? 부정하는 사람. 성경말씀 한번 봅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아닙니까? 할 때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다.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부정해 버리니까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부패하고 더러운 일을 행하니 선을 행하는 이가 없구나. 마음에서부터 선한 것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보세요.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성경말씀을 봅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만 어리석어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무시합니다. 섬기지 않아요. 무시합니다. 섬기지 않고 무시해 버리니까 잘못 찾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봅니다.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 형상에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우상을 섬기고 있다. 이것은 잘못 찾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기는 찾아야 되겠는데 찾다가 보니 제맘대로 찾았어요. 제맘대로 찾다보니 잘못 찾았어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하나 만들어 놓고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놀라운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작은 아들이 아닌지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기를 반성할 수 있는 지혜를 이 시간 주시는 것입니다. 아,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을 가급적이면 멀리 떨어져 살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결국 내가 하나님이 되고 나는 선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죄를 범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부정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기도 하고 급하면 엉뚱한 데 가서 하나님이라고 하고 허리를 굽히고 절하지 않았는가?

  분명히 작은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여러분처럼 잘못 길을 들어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3.하나님 없는 생활에서는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고 그리고 그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결국은 허탈감에 빠집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 가운데서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해서 제 가진 것 다 날려 버리고 나중에는 돼지를 치다가 돼지가 먹는 것을 같이 먹으면서도 배를 채우지 못해 그야말로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 하나님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의 종말은 이와 같이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바로 밑에 있는 성경말씀 보세요.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전 2:22)

  제가 아는 이야기를 여러분이 공감하실지 모르겠어요. 문명이라는 것 있지 않습니까? 문명. 우리나라는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기막힌 과도기에 서 있습니다. 선지대열에 들어간다 하지만 선진대열에 들어가고도 남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단, 국가적인 경제수입이 좀 떨어진다는 것뿐이지 하고 사는 모습을 보면 물론 우리나라 전국민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20%만 좀 생각합시다. 그 20%가 살고 있는 생활수준이나 패턴을 보면 선진국 뺨칠 정도로 살고 있습니다.

  유럽에 가보세요.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호화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명이 매우 발전한 시대에 복이 터지게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아두세요. 문명은 마약입니다. 마약, 마약을 젊은이가 계속 복용한다든지 주사를 맞으면 사람이 소극적이 되고 사람이 무력해집니다. 무기력해집니다.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폐인이 됩니다. 문명이 계속 발전해지면 사람들은 나중에 참 행복해질 것 같은데 결과에 가서 보면 무력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자, 보세요. 요즘 단추 문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탁기, 과거에 저희 어머니 이불 빨래할 때 보면 혼자 못하고 이쪽 잡고 사람 불러 저쪽 잡고 비틀어서 이불을 짰습니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죠. 그런데 지금은 이 맛이 없습니다. 짤순이가 착착해서 물을 쏙 빼줍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밥솥, 누르면 됩니다. 보일러도 누르면 됩니다. 또 뭐 있어요? 가스레인지, 기가 막힙니다. 요즘은 식기를 말리는 식기 건조기도 나왔습니다. 손으로 누르면 됩니다. 손으로만 누르니까 손가락이 아파요. 냉장고는 발로 누르면 열리게 됩니다. 그러니 참 기막힌 세상입니다. 언제 우리가 이런 꿈을 꾸어 봤나요.

  앞으로 로보트가 나온다고 합니다만 저나 여러분이나 20년만 앞으로 살면 로보트가 정말로 보급되어서 가정마다 단추만 누르면 물건을 가져오는 세상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이불도 깔아주고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으면 일으켜 주기도 하고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여러분, 이렇게 문명이 발전해 갈수록 사람은 일하기를 싫어하고 그 다음에 가급적이면 귀찮은 일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어느 파출부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러대요. 자기가 가는 집에는 이틀만 가지 않으면 쓸 그릇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애고 어른이고 먹고 나면 갖다 놓을 줄을 몰라요. 파출부가 올 테니까 그리고 씻을 줄도 몰라요. 그러니 새그릇 빈 그릇만 꺼내다가 자꾸 먹어대는 것입니다. 먹고 두고, 먹고 두고 그러니까 파출부가 이틀만 안 가면 쓸 그릇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설겆이 할 그릇만 산더미처럼 쌓이게 됩니다. 이것이 좋으냐 나쁘냐를 저는 이 시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문명의 이기 속에 우리가 계속 살다보면 나는 무기력해지고 그 다음에 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고 더욱 더욱 이기주의자가 되어서 웬만하면 귀찮은 일은 손 안대고 살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여자들이 가사에서 해방되고 싶어합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여성들이 해방을 받습니다. 그러면 여유가 생기지요. 여유가 생기면 뭘 합니까? 즐기고 싶죠. 즐기고 싶어요. 즐긴다는 것이 뭐 별거 있나요. 쾌락을 따라서 과거에는 감히 손을 대보지 못하던 일들도 과감하게 손을 대보는 것이고, 과거에는 감히 곁에 가보지도 못하던 곳에 가서 슬그머니 맛을 들여보는 것이고 그래서 재미 붙으면 거기에 자꾸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죠. 그러면 생각이 가정에 있느냐? 아니요. 생각이 자녀에게 있느냐? 아니요. 생각이 남편에게 있느냐? 아니요. 생각이 인생은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고상한 철학적인 신학적인 사상에 있느냐? 아니요. 즐겁게 하루 하루를 즐겁게 사는 일에 매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결국 남는 것은 쾌락은 더 큰 쾌락을 부르고, 더 큰 쾌락은 더 큰 공허함을 불러 들입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으로도 그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는 아주 불행한 사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것이 문명이 주는 종말입니다. 마약이 주는 결과와 똑 같습니다.

  주사 한대로 만족하던 사람이 두대를 맞아도 안되고 세대를 맞아도 안됩니다. 나중에는 팬티도 팔아 마약을 맞아야 되는 사람이 됩니다. 나중에는 쓸모 없는 인간으로 전락되어 버립니다. 오늘 하나님을 떠나서 제맘대로 사는 인생이 결과가 이렇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사람일수록 말년에 가서는 더 비참합니다. 이 세상에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여행을 많이 했다는 사람일수록 허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저는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미국 같은데 가서 여행을 많이 했다는 의사 부인들 만나서 어때요 어디 더 가고 싶은데 있어요 물어보면 없어요 갈 데도 없고 오라는 데도 없어요. 당신보다 내가 더 행복하구먼 나는 갈 데가 너무 많은데 당신은 갈 데가 없다니 했더니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이젠 더 가고 싶은데도 없고 갈 데도 없어요. 즐기고 싶은 게 없습니다. 다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방랑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아닙니까? 평생을 수고하여도 근심과 걱정만 남고 나중에는 마음에도 쉼을 얻지 못하는 헛된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작은 아들의 운명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거부감을 갖고 듣지 마세요. 진실입니다. 인생의 진면목입니다.

  여러분의 아파트가 60평, 70평일수록 위기는 더욱 빨리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추앙 받는 인물일수록 위기는 더욱 빨리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근심, 걱정이 전혀 없는 사람으로 삶을 엔조이 하면 할수록 그 위기는 하루 아침에 몰려올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제맘대로 허랑방탕하며 살던 둘째 아들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제맘대로 사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말하는 죄를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자식이 부모님을 떠난 마음대로 방탕 하는 게 죄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을 떠나 무시하고 제맘대로 사는 것이 죕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바로 우리의 현주소가 사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당신은 영혼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앞면의 본문에서 우리 하나 봅시다. 재미있는 말 하나가 있는데. 17절 말이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그제서야’ 이게 참 묘한 말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아들은 언제 자기 자신에 돌아오는 때를 맞았습니까? 언젭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다 없어진 다음에 자신감도 없어진 다음에 모든 사망의 문들이 다 닫혀서 사면초과가 되었을 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기회가 일생 중에 한 두번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돌아오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가 참으로 묘한 기회들이 많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그제서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하십니다. 아, 그 예가 얼마나 많아요. 다양합니다. 이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자 그제서야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가장 순수한 순간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저는 그제서야 예수님에게 돌아온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어떤 자매의 이야기를 제가 소개하지요. 이 자매는 원래 예수를 잘 믿는 집에서 태어난 자매입니다. 아버지도 장로고 작은 아버지, 여러 친척들도 유명한 교육가입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너무 좋은 것만 얻어 가지고 사니까 귀한 줄을 몰랐지요.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어린 애들이 그것이 복인 줄을 모릅니다. 제맘대로 적당하게 들락거리다가 스스로 결혼할 나이가 되니까 예수 안 믿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약사이기에 돈버는 일에만 수년을 보냈습니다. 신앙생활도 다 포기했습니다. 돈 벌고 즐기고 신앙생활은 하지 않고 가정생활에 재미를 붙여서 가정생활을 그저 천국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기를 11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을 벌면 아빠가 가지고 나가 탕진합니다. 도박을 하느라 돈 날리고 돈 날리고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데도 이것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13년 전에 아빠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제서야 그 자매 이야기가 그제서야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눈을 떴습니다. 내가 지금 잘못 와 있구나 그래서 아빠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이제는 얼마나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서울 대학교 근처에 작은 약국 차려놓고 어렵게 살지마는 서울대 다니는 아들, 그리고 신학교 다니는 아들, 이 두 아들을 아주 꿈을 가지고 키웁니다. 앞으로 예수 복음전하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이 아들은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이 부인은 남편을 잃어버린 시간이 그제서야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계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러가지의 그제서야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제서야는 이 자리에 주님이 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돌아오는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그제서야 하는 계기가 생기면 은은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 드디어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아, 이제 나는 ‘그제서야’ 하는 계기가 왔구나 하고 인정하시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밑에 요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음성이 여러분에게 들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기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정말 뜨겁게 축원합니다. 둘째 아들이 드디어 거지가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는 돌아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내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돌아갈까요? 어디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까요? 길이 어딜까요? 분명히 아십시오. 죄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갈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내 힘으로 못 갑니다.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주지 않으니까 미국 들어갈 길이 있었나요?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서울 한복판에서 발버둥을 쳐도 못갑니다.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허랑방탕하며 제맘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갈 수도 없습니다. 다 차단되었습니다.

 

5.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길을 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우리 길을 열어 주었습니까?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하나님을 떠나 제맘대로 살던 둘째 아들처럼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 틈에 오셔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얼마나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으며 고생하고 고통 하는가를 몸으로 실제 체험하시고 그들을 그 무서운 죽음의 계곡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둘째 아들이 범한 모든 죄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대신 져주시는 방법으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죄가 없으면서도 인간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잘못을 자기가 다 짊어지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래서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 죽음을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드디어 죄없는 그분이 하나님없이 제맘대로 다녔던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무서운 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저주를 홀로 당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제일 비참한 저주의 죽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죽음을 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할 죽음을 그가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 때문에 이렇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죽임을 당하심으로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삼일만에 살려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지고 무덤에 들어가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두실 리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삼일만에 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셨는데 그게 뭐냐? 자, 너 이제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는 둘째 아들, 이 아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이 길을 위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너는 나를 믿으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길을 가르쳐 주마. 믿으라는 말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꼭 붙잡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 가는 길로만 따라와 그러면 너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어. 이런 이야기입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져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6.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천국의 축복을 안겨주실 것    입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뭐라고 자기 잘못을 고백하는 것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신을 신겼습니다. 이것은 그 아들에게 다시 명예를 회복해 준다는 말이요, 가락지를 끼움으로 아들의 권위를 다시 인정해 준다는 말이요, 신을 신김으로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당시에 종과 노예는 신을 신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너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니? 돈 다 어떻게 썼니? 하고 묻지를 않았습니다. 전부 묻어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했습니다.” 하자 그 말한 마디에 과거는 다 묻어 버렸습니다. 묻지도 않았어요. 왜? 하나님이 너무 그 아들을 사랑하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 덮어 버립니다. 우리가 설령 하나님 앞에 와서 “아버지,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내맘대로 살았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 그 한 마디로 과거는 그대로 묻어 버립니다. 다 용서해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꺼이 받아주시고 안으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또 봅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갈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예수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사는 영생, 영원히 사는 축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좋은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여러분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 나는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정신이 없이 살았지만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주여, 내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주여, 나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한 마디만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끌어안아 주시며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모든 축복을 안겨 주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다리고 계십니다. 자신의 현주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30,40년의 생활이 어딘지 빗나갔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예수 믿으십시오.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을 바쳐주신 예수님,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하나님 앞에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실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붙드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태어난 것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또 한 생을 사는 것도 한번으로 끝납니다. 연습도 못하고 다시 반복도 못합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어떤 종점을 향해 가야 합니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을 왜 잘못된 장소에서 살아야 합니까?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면 그 아버지가 없고 그 아버지 간섭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 어떻게 정상입니까? 아무리 내가 성공하고 아무리 내 만족을 위해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종말은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맘대로 살았던 인생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이처럼 비참한 결과에 내맡겨 놓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너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삶을 살다가 망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보내서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로 살면 영원한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 이것을 거부해야 합니까? 왜 이것을 여러분께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으셨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그제서야’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오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문밖에서 두드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 들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사 1:1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귀한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이 시간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모르고 하나님 무시하고 내맘대로 살았던 모든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 나의 구주 되시고 나의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믿고 돌아왔사오니 이제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남은 생을 정말 보람되게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자매들을, 이 형제들을 인도하느라 지금까지 눈물로 기도한 주의 귀한 자녀들에게 오늘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주시고 하나님 아버지여, 그들의 눈물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귀한 축복을 주시옵소서. 이 시간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아들 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시간 듣고 간 말씀이 마음 속에 계속 살아나 움직이게 하시고 남은 시간 어느 시간이든지 하나님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셔서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합니다. 이번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시고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좀더 열심히 전도하고 좀더 열심히 데리고 와서 듣든지 말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는 이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출처 : 전도카페
글쓴이 : 박성도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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