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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저는 “당신에게 예수의 피가 필요합니다” 하는 제목을 놓고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성경 한곳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6:28, 한 절만 읽어 드립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한번 더 읽겠습니다. 우리 몸에는 혈관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그 혈관의 길이를 한 줄로 이으면 9,500Km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부고속도로를 열 번 이상이나 왕복하고도 남는 긴 혈관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사방으로 퍼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혈관에는 끊임없이 묵은 피와 새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매초 1500만개 이상의 세포가 새로 태어났다가 죽고 태어났다가 죽고 합니다. 생명의 역사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그렇게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는데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릅니다.
이렇게 참 중요한 피입니다만 우리가 본능적으로 피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피를 보면 불길한 생각이 들고 붉은 빛깔로 얼룩져 있는 핏자국을 보면 섬찟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피 하면 공포, 아니면 잔혹함의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인간은 피를 안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는 피를 굉장히 많이 이야기하는 종교입니다. 어떤 면에서 잘못 이해하면 피를 좋아하는 종교처럼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예수 믿는다고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나온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의 글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고문을 하면서 “이 새끼, 너희는 피를 좋아한다지. 어디 피 좀 볼래?” 이런 욕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방이 피가 낭자하도록 두들겨 패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는 “너희는 못 박는 것 좋아한다면서 어디 내가 못 좀 박아줄까?” 자,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고문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말하는 용어 중의 하나가 피, 십자가, 못 박는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 한마디가 따지고 보면 소름이 끼치는 말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면 이런 말들을 귀가 아프도록 듣게 되고, 나도 모르게 쉴 사이없이 말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만큼 피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보면 피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피라는 말이 피, 피, 피, 피 하고 나옵니다. 성경에 얼마나 나오는지 제가 세어 보았습니다. 세어 보았는데 저와 같이 흐리멍텅한 수학적인 머리를 가지고는 정확하게 세지는 못합니다. 적당히 세어보았더니 성경 안에 피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가 하면 418번이나 나와요. 그러니 이만한 성경 안에 피라는 단어가 418번 들었다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중에 레위기서라는 성경 하나가 있습니다.
레위기는 조그마한 성경인데도 80번 이상 피 소리가 나옵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피를 중히 여깁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해도 성경책 대부분이 여기에다 무슨 색을 칠했는지 아십니까? 새빨간 칠을 해놓았습니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그게 피색깔입니다.
제가 어릴 때 기억인데 돈이 없어 성경책을 하나 얻었는데 지금처럼 은색으로 칼라가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성경 같지 않다 해서 일부러 빨간색 물감을 칠해 새빨갛게 만든 일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면 예수 믿는 것과 피하고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이 자리에 와 앉으셨지 않습니까? 예수를 이해하려면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여러분이 피에 대하여 먼저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듣기 싫지만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제가 피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는 굉장히 기본적인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공식이 뭐냐하면 피는 곧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피 즉 생명, 이것이 하나님이 만든 공식입니다. 이것을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또 하나의 공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피를 흘림은 곧 죽음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피 즉 생명, 피를 흘림은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는 피 흘리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하고, 또 하나는 죄의 삯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다’ 성경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죄지은 사람이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가 사함을 받는다든지 그가 죄에 대한 댓가를 자기가 보응을 받으려면 피 흘려서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보세요.
‘피 흘리는 것이 죽음이다. 죄의 삯이 죽음이다.’ 그러므로 뭐가 같습니까? ‘죄의 삯은 곧 피 흘리는 것이다.’ 여러분, 공식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입니다. 총명하신 분들이니까 제가 반복을 안해도 되겠지만 저도 늙어서 약간 기우(杞憂)가 많거든요. 그래서 또 한번 반복 좀 하죠. 하나님의 공식, 피는 뭐라고요? 생명입니다. 그 다음에 피를 흘리는 것은 곧 뭐를 상징합니까? 죽음입니다. 죄의 삯은 뭐라고 그랬어요? 죽음입니다.
그러면 죄의 삯은 뭐와 같습니까? 피 흘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기독교에서 왜 그렇게 피를 중시하나 하는 것, 영적으로 열리신 분들은 금방 여러분들이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고 싶은가? 피를 흘려라!” 그 말입니다. 너 죄에 대한 댓가를 정확하게 지불하고 싶으냐? 누군가 죽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내가 죽든지 누군가 죽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하니까 “옥한흠이 너 죄인이지?” “예. 죄인입니다.” “그러면 너는 죽어야돼. 네가 죽기 싫으면 누군가 네 대신 죽어야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피를 흘려야 합니다. 죄지은 사람이 자기 죄값을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죄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죽는 것은 절망입니다. 소망이 없어요. 죄지은 탕자가 죽으면 죽는 것으로 절망입니다. 더 이상 어떤 기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적인 심판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자가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죄의 값을 치르고 내가 죽어야 한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옥은 만원이 될 것이고, 천국은 어떻게 됩니까? 분양이 안된 아파트처럼 되겠죠. 하나님이 이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잔인하셔서 “이놈들, 죄지은 놈들, 동정할 것 있느냐 지옥을 아무리 확장공사를 해서 늘리더라도 집어넣자” 하면 끝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신 그분인 동시에 무엇도 만드셨습니까? 천국도 준비하신 분입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천국을 만들어 놓고 텅텅 비는 것을 어떻게 참으시겠어요. 그래서 죄값은 죽는 것이지만 “죄를 지어서 죽어 마땅한 이놈들, 이놈들을 살려놓고 누가 죽어줄 사람이 없나” 이것이 하나님의 궁리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일찍부터 대리죽음, 대리 피흘림을 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죽음을 짊어질 대리죽음을 당할 자가 없나? 누가 이 죽음을 대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관심사 중에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역사를 우리는 주전이라고 말합니다. 주전역사라고 그러죠? 성경에서는 구약역사라고 말합니다. 구약시대인데 이때는 하나님이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을 대신해 대리로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짐승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도 용서해 주시고 죽을 죄인도 살려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게 구약시대입니다. 그러나 아무 짐승이나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정한 짐승이라야 가능했습니다.
주로 황소든 암소든 소, 그 다음에 양, 염소, 주로 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죄지은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소와 같이 비싼 것 끌고 와서 죽일 수 없으면 비둘기 같은 것, 그것도 없으면 반죽을 해 가지고 하나님이 특별히 지시한 방법으로 떡을 만들어 가지고 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주로 양이나 염소, 소. 그것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눈이 빠졌다든지, 다리가 절룩절룩한다든지, 그 다음에 또 버짐이 나가지고 시커멓게 되었다든지 하면 절대 안됩니다.
완벽한 사람의 눈으로 보아 틀림없이 완벽한 짐승이라야 하나님이 죄를 대신해서 피를 흘릴 수 있는 속죄양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7:11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무엇을 속해요? 죄를 사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피를 짐승의 피로 대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 피가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습니다. 짐승의 피가 연일연야 흐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다는 기록을 안했지만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사람이 죄를 하루에 몇 번 범합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답이 제대로 안나옵니다. 왜냐? 셀 수가 없으니까. 행동으로 범하는 죄야 몇 가지 말하라면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생각으로 범하는 죄, 마음으로 범하는 죄야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약시대 사람들은 마음으로 매일같이 죽일 놈 해서 이를 날마다 갈았습니다. 어느 날 그것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구나 어떻게 하지 목장에 가서 가만히 내 대신 죽을 놈 있나’ 둘러봅니다. ‘저 놈이 좋겠구나.’ 깨끗한 놈을 끌어다가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를 지냅니다.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서 “당신의 죄는 이 양의 피 때문에 용서받았소” 하면 자기 죄가 용서받은 줄 알고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한 시간도 안돼서 무슨 생각이 납니까? 죽일 놈, 그러면 또 목장으로 가서 어느 놈이 나를 위해 죽을 것인가?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하루에 죄를 도대체 몇 번 범합니까? 줄잡아 다섯 번 범한다고 생각해도 하루에 양이나 소가 다섯 마리씩 없어진다고 하는 이야기니 구약시대의 백성들이 죄를 범한 대로 양을 끌고, 짐승을 끌고 왔다면 그 제사가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제사였겠어요. 그래서 구약시대 제사 지내는 장면은 피를 보는 장면입니다. 제사장들의 몸에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가지고 묻어 있지요. 제사 지내는 곳에 가면 죽어 가는 짐승들의 소리가 요란하지요. 여기저기 피비린내 냄새나지요. 기름 타는 냄새나지요. 그러므로 제일 가지 싫은 곳, 가기 더러운 곳이 짐승 잡아 제사하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인간의 죄가 그만큼 많고 지독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시대입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흠이 없는 짐승을 잡아다가 죽여도 그 짐승의 피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었어요. 짐승의 피는 죄 지을 때마다 잡아야 하니까 일회용 반창고와 비슷해요. 매번 죄지을 때마다 끌고 가야 하니까 세상에 할 짓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였고 그 다음에는 아무리 짐승을 잡아도 죄짓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한번 짐승을 잡아서 바쳤으면 그 짐승이 애처러워서도 마음에 죄를 지으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짐승 잡아서 제사해 놓고 와서 죄용서 받았다고 똑같은 짓을 하니까 마음에 근본적인 치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은 죄를 범하고 겉으로는 제사지내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중에는 그 제사 안 받았어요. “너희 마음으로는 죄짓고 겉으로는 와서 제사만 지내는구나. 그 제사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만큼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피는 아무리 많이 흘려는 죄에서 우리를 완전히 구출하지도 못하고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좀더 완전한 일이 없을까 찾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얼마나 좋으신 분입니까? 매번 죄지을 때마다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어떤 일이 없을까? 단 한번 피 흘리고 죽으면 그것으로 해서 수백 년 수천 년 죄를 범해도 그 죄를 다 용서할 수 있는, 씻을 수 있는 그런 피가 없을까? 하나님이 찾는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피를 흘리면 그 피가 너무나 신비스러운 효력을 가지고 있어서 죄를 짓던 사람이 처음에는 열 번 짓다가 나중에는 다섯 번 짓게 되고 그 다음에는 한번 짓게 되고 점점 더 마음이 새롭게 되어 죄를 짓게 하지 않을 수 있는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피가 없을까? 하나님이 이런 피를 찾으셨어요.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한번 죽음으로 영원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피, 그 다음에 단순히 죄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마음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피, 이 피를 하나님이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를 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기가 막힌 피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은 조건이 있었습니다.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의 피라야 한다. 짐승의 피 가지고는 안된다.’ 사람의 피라야 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죄가 없는 자의 피라야 한다. 이 두 가지 조건, 이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피를 하나님이 찾으셨어요. 사람의 피입니다. 사람의 죄를 씻어야 하니까 짐승의 피를 가지고는 안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지만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처음 나온 분들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런 피를 세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런 조건을 갖춘 피가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피라고 다 피입니까? 피라고 다 피가 아닙니다.
제가 아까 사회하신 남목사님에게 얼마 전에 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 교회 성도의 가족 중에서 일종의 암이지요. 백혈병을 앓는 젊은이가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을 해서 수술을 하는데 수혈이 필요합니다. 저도 하루는 교회에 나와서 보니까 저 밖에 매직펜으로 써 가지고 광고판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어요. 이 형제가 피가 O형인데 피가 없어 수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오형의 피를 가지신 분들은 빨리 병원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메모가 붙었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가야 하는데 생각을 했지만 저는 피가 O형이 아니라서 못 갔지요. 야, 이거 우리 교인 중에 누가 보고 빨리 병원에 갔으면 좋겠는데... 했는데 나중에 남목사님이 “목사님, 저 서울대학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당신의 피가 O형이었나?” “예, O형이라서 갔는데 목사님 저는 실망스럽게 퇴짜를 맞고 왔습니다.” “왜 퇴짜를 맞았나?” 자기는 이미 사십대에 들어선 사람인데 사십대 이상인 사람은 안된대요. 안된대. 여러분, 사회할 때 보세요. 얼마나 젊고 터질 것 같습니까?
나도 십 년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쪼그라졌지만 얼마나 싱싱해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다섯 병을 뽑아도 될 것 같은데 안된다고 그러더래요. “당신 같은 사람이 안되면 누가 피를 헌혈하려고 온 사람이 있었나?” 물었더니 우리 교회 대학생 여러 명이 와서 피를 뽑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래요. 피라고 다 핍니까?
여러분, 싱싱한 피가 있지요, 십대 이십대 싱싱한 피가 있다고. 요즘은 그런 피만 찾아요. 또 그렇게 젊은 피가 아니라도 얼마나 피를 많이 가립니까? 잘못 맞았다가는 가니까 피를 잘못 맞았다가 어린 나이에 골골 말라가는 사람을 여러분이 신문에서 보신 일이 있지요. 생을 저주하다가 이를 갈면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보았지요.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 천벌을 받느냐고 이를 갈면서 이럴 바에는 다른 사람까지 물고 늘어져 에이즈를 확산시켜 버리는 사람이 있죠. 피가 다같은 피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육체를 살리기 위해서도 피가 다같은 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꼭 필요한 피가 있고, 꼭 받아야 할 피가 있어요.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가 죄값으로 영원히 죽어야 하는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하여 피라고 다 받을 수 있나요. 하나님이 찾는 피는 너무나 고귀한 피라 우리는 그 피를 구할래야 구할 수 없고 이 세상 어디를 헤매고 다녀도 그 피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피를 찾았어요. 죄가 없어야 된다지요. 사람이어야 한다지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지 안찮습니까? 하나님은 신이시지요. 그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불러 가지고 “너 세상 좀 갔다 오너라.” 주님께서 “예, 아버지의 명령대로 가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은 죽으라고 보내는 것인데 그것을 네가 아느냐?” “예.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가서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이라야 되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찾아오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서 우리와 똑같은 혈육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건 여러 가지가 완전히 충족되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찾던 사람이요, 하나님이 찾던 피입니다.
드디어 우리 예수님은 저나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노예들 아니면 반역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는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사람 대접하는 사람은 절대로 로마 제국에서 가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근지근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그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제가 가끔 이야기를 합니다만 어려서부터 십자가, 십자가에 못을 박혔다는 말을 해 가지고 못을 박는 것이 어떤 것이냐 나도 한번 해보기로 했습니다. 큼직한 왕개구리를 잡아가지고는 도마 위에 얹어 놓고는 손바닥으로 눌렀습니다. 그런데 개구리가 말이죠. 살이 물렁물렁하니까 그냥 붙어있지를 않더라고요. 짝 짜개져 가지고 안 붙어 있어요. 그래도 못박는 게 신기해가지고 두 다리 두 발에다가 못을 박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하면서 어린 나이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제 나이에도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개구리를 못을 박아놓고도 볼 수가 없더라고요. 비참해서. 너무 잔인해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씻고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기 위하여 저주받은 자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나를 위한 피였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셨어요.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여러분의 이름을 짓기도 전에 하나님에게는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름을 갖기도 전에 하나님에게는 여러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언약의 피니라. 약속의 피라는 말입니다. 왜 언약의 피라고 하느냐?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어요.
하나님이 예수님과 약속을 하셨어요. “내 아들 예수야, 네가 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준다면 네가 흘리는 피를 두고 내가 약속하마. 네 피 때문에 모든 사람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마.” 약속입니다. “네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를 보고 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마. 네가 피를 흘리기만 하면 네 피를 보고 모든 사람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주마.” 약속하셨어요. 예수님과 약속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겠다, 우리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주겠다.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겠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십자가를 붙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죄를 놓고 무조건, 영원히, 완전히 용서해 버립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있는 조그마한 사건 두 가지를 소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양을 끌고 제사장 앞에 가서 자기 죄를 자복합니다.
“제사장님, 제가 이웃집에 있는 소 한 마리가 너무 탐이 나서 몰래 잡았습니다. 1개월 전이지요. 그런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제가 이 염소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처방하는 방법이 있어요. 우선 하나님 앞에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니까 “당신,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고백합니다. 그 다음에 당신이 먼저 잡으십시오.”
끌고 온 사람이 죽여요. 그 다음에 제사장이 그 피를 받아 가지고 제사를 지냅니다. 피를 단 주변에다 부리고 그 다음에 피가 마르니까 그릇에 담아가지고 번제단에 쏟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에 그 양을 올려놓고 그리고 제사장이 말합니다.
“당신이 남의 소를 훔쳤으니까 소 네 마리를 얹어서 갚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보세요. 그 사람이 양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서 결국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네가 안 죽으면 내가 죽는다. 내가 안 죽으려면 네가 죽어야돼.” 결국 그 얘기 아닙니까? 그렇죠? 그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뭐라 말하는 것과 같으냐 하면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삽니다. 당신이 안 죽으면 내가 죽어요. 그러니 당신이 대신 좀 죽어 주세요” 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다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범한 죄도 다 뒤집어 씌우고, 내 조상이 범한 죄도 다 뒤집어 씌우고, 내가 오늘 범한 죄도 뒤집어 씌우고, 내가 내일 범할지도 모르는 죄도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했어요? “내가 대신 죽어주마.”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는 내가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에 예수님을 다른 사람이 죽이지 않았어요. 내가 죽인 것입니다. 내가 못박은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와 같이 내 대신 죽었고 내 대신 감당했다는 의미도 있지만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고 나서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내려고 하는데 애굽 왕이 끝까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한 가지, 두 가지, 세 가지, ..... 아홉 가지 재앙을 막 내렸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으니까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보냈어요. 그런데 애굽 사람들과 한곳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그래서 애굽 사람들의 장자는 다 죽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너희들은 천사가 내려와서 장자를 죽이는 밤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새빨갛게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기둥이 문설주지요, 가로지르는 기둥이 인방이지요. 가로로 지르는 인방과 세로로 지르는 문설주에 피를 바르라고 했어요. 그러면 천사가 와서 그 문에 있는 피를 보고 그 집은 넘어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씀대로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나와서 문지방과 문설주에다가 우슬초로 피를 발랐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또 명령했습니다.
누구든지 피바른 집안에 있어야지 밖에 있으면 안된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를 바르고 집안에 들어가 꼼짝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날밤 천사가 돌아다니며 피가 없는 집에 들어가 모든 장자를 누구든지 할아버지라도 장자로 태어난 사람은 다 죽여 버렸어요.
피를 발라놓은 문설주 뒤에만 숨으면 아무리 천사가 무섭게 칼을 들고 돌아다니는 밤이라도 안전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피를 바르고 십자가 뒤에만 숨으면 천하가 흔들려도 걱정 없습니다.아무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끌고 갈 사람도 없고 우리를 지옥에 던질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들먹이며 우리를 괴롭힐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뒤에만 숨으면 안전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까지 아무 탈없이 갈 수 있습니다. 이만큼 십자가는 굉장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토록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완전히 의인입니다. 죄값으로 죽을 일도 절대 없습니다. 육신으로는 죽지만 예수 믿는 사람의 죽음을 죄값으로 죽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있습니다. 60이 되어 죽든, 70이 되어 죽든 어쨌든 죽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죽는 것을 죄값으로 죽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양식으로 하나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왜?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죽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보는 눈이 달라요.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러니 예수님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큰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는데 사람이 안 변할 수가 있나요.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하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루마니아 안이숙 사모라 할 수 있는 범브란트 목사입니다. 비록 남자이지만 그분이 오십니다. 그분의 책 중에 한 토막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옛날에 두 형제가 살았는데 형은 참 착한 아들인데 동생은 좀 난폭했습니다. 형이 동생에게 “애야, 너 그런 식으로 살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빨리 마음을 고쳐먹고 바로 살자” 했지만 동생은 형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점점 더 악해졌습니다.
어느 날 밤에 후닥닥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납니다. 형이 놀라서 보니까 옷에 피를 낭자하게 묻히고는 눈이 뒤집혀 동생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동생이 형을 붙잡고는 “형님, 나를 좀 살려주세요.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그런데 경찰관이 나를 지금 따라오고 있어요. 나를 좀 숨겨 주세요. 나 이러다가는 큰일나요. 형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때 형님이 잠깐 생각을 하더니 “야, 옷 좀 바꿔 입자.” 그러니까 동생이 제정신이 아니니까 피묻은 옷을 훌렁 벗었습니다. 형은 자기 옷을 벗어 동생에게 입혔습니다. 피묻은 옷을 형이 입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피했습니다. 경찰관이 달려왔습니다. 피묻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물으나 마나 아닙니까? 끌고 갔습니다.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형이 사형집행되는 그날 마지막으로 간수가 찾아와서 소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형이 조그마한 종이쪽 한 장을 간수에게 건네주며 이걸 꼭 내 동생에게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편지를 전해 받은 동생이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너를 위하여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나는 네가 사람을 죽이느라고 피묻은 옷을 입고 죽지만 너는 부디 내가 네게 준 흰옷을 입고 제발 착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먼저 죽는 형이 절대로 섭섭하지 않겠다.” 이런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난 동생이 놀래 가지고 형님 살려야 한다고 형장으로 뛰어갔습니다만 형은 벌써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 동생은 형이 입혀준 그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옛날에 함께 깡패 짓을 하며 살던 친구들이 찾아와서 “너 뭐 그렇게 째째하게 그러냐. 우리 한탕 하자” 말할 때마다 “아니야. 나는 내 형의 옷을 입고 있어. 나는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오늘 저녁에 나오신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피묻은 옷을 예수님이 입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옷을 입고 싶지 않습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 죄를 짓지요.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하고 사세요? 나 그것 묻고 싶습니다. 굉장히 궁금합니다.
그 죄를 처리를 해야지 처리하지 않고 남겨놓으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 그 죄가 여러분을 좀먹어 죽입니다. 여러분의 영을 죽입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육체까지 좀먹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 무서운 죄를 자기도 모르게 짓고, 알고도 지으면서 매일 수십 번, 수백 번 지으면서 그 죄를 어떻게 처리하고 사시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용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일 죄를 쌓아놓고 살면서 시간이 가면서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것으로 그저 마음의 위안을 받고 날마다 살고 있으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은 매일 매일 병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면 살수록 욕심은 점점 더 많아지고 세상을 살면 살수록 사람은 더욱 미워지고 옛날에 그렇게 은혜를 입었던 사람도 한 두 가지 잘못한다고 마음에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흉악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가질 것은 다 가졌는데도 더 갖고 싶어 밤낮없이 씨름하는 무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바로 죄를 처리하지 않고 날마다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이고 있는 증세가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매일, 살겠습니까? 이렇게 살래요? 비참합니다.
아까 어느 자매 간증하는 것 들으셨죠? 남편을 미워했든 술을 마셨든, 뭐했든 간에 그 죄를 처리하지 않고 살아가니까 그 인격이 파괴되어 가는 것을 여러분이 들으셨죠? 그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이 죄를 처리하지 않고 살면 인격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꼭 예수 믿으시라고 제가 권하고싶은 것은 교인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나오라는 말도 아닙니다. 안나와도 돼요. 다른 교회 가셔도 됩니다.
전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죄를 지으면서 그 죄를 그렇게 덮어두고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 죄가 당신을 죽입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건강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죄를 무조건 씻겨 주시는 분, 우리 죄를 완전히 씻겨 주시는 분, 우리 죄를 영원히 씻겨 주시는 분, 예수님을 믿으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조그마한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무릎꿇고 “예수님, 나의 죄를 아시지요.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회개하오니 용서해 주옵소서” 하면 주님께서 피묻은 손으로 싹싹 비벼서 깨끗히 씻겨서 평안함으로 잠자리에 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죄용서 받는 것이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죄만 짓습니까? 비참한 생활이죠. 또 하나 질문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이 평생동안 그 무거운 죄를 쌓아놓고, 쌓아놓고, 쌓아놓고, 쌓아놓고 하나님 앞에 설 자신 있습니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요 하나님이 말씀했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는 죄를 평생동안 쌓아 가지고 뒤집어쓰고, 하나님 앞에 설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과신하지 마세요. 공부를 많이 하셔서 박사가 되었든, 돈을 많이 모아서 재벌이 되었든, 뭐 장관을 하셨든, 여러분, 젊었든 늙었든 자신을 과신하지 마세요.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압니까?
밤에 자다가 악몽을 꾸면 자기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리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비명을 지르고 벌떡 일어나 껌뻑껌뻑 한 연후에 정신이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악몽을 꾸어도 그 정도로 비참해지고 나약해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요? 그리고 하나님이 지옥으로 보내는데 지옥으로 들어가서 살 수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못됩니다. 참 약합니다. 그런 주제에 이 죄를 처리할 방안도 찾지 않고 70,80년 살다가 죽으면 죽으면 죽겠지 하면 산다는 것은 너무너무 어리석은 삶입니다. 너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예수만 붙들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면 나 예수님 믿겠습니다. 붙들기만 하면 여러분의 과거의 죄, 오늘 지은 죄, 남은 여생 지을지도 모르는 죄까지도 무조건, 완전히, 영원히 씻어주시고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설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렇게 준비해 주셨습니다.
단,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그와 같은 놀라운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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