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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② -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by 【고동엽】 2022. 3. 9.

사도신경② -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설교자 : 마경훈목사

 

오늘은 사도신경 두 번째 시간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살펴보겠습니다.
천지의 기원에 대한 설 중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따르는 설이 창조론과 진화론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 둘 중에서 진화론은 거부하고 창조론은 받아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되는 성경이 창조론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의 첫 번째 장의 첫 번째 절인 창 1:1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언하면서 시작합니다.
창 1:1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도미노 게임을 생각해 봅시다. 일정한 간격으로 블록을 세워놓습니다. 제일 앞의 블록을 쓰러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쓰러지면서 두 번째 블록을 쓰러뜨립니다. 이것은 또 쓰러지면서 세 번째 블록을 쓰러뜨립니다. 이것이 계속해서 진행되면서 전체 블록을 다 넘어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블록이 창조신앙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첫 번째 도미노입니다. 이것이 쓰러지면 하나씩 차례로 쓰러지게 되고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다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걸고 창조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히 3:4에 보면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는 서울에 수많은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 중에 단 하나의 집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저절로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진 집이 없습니다. 단 하나의 집도 예외 없이 모든 집이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집들도 만든 이가 있는데 하물며 이 광대하고 섬세한 우주가 만든 이가 없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님이 진화론자들이 우주가 우연한 폭발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는 주장을 비웃는 듯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들어보세요.
먼 훗날 공장에서 하는 일을 로봇이 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뒤에서 조종만 하고 로봇들이 현장에 나가서 싸움을 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구에 화학전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동물이든 식물이든 다 씨가 없이 죽었어요. 로봇만 남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다음에 로봇들이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지? 설명해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연구를 해 보았습니다. 자기 몸을 분석해 보니까 납도 있고 철도 있고 구리도 있고 아연도 있고 인도 있습니다. 땅을 조사해 보니 땅에 똑같은 성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땅에 있는 것들이 어느 날 자기들끼리 폭발을 하면서 우리 같은 로봇들이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습니다. 이 어리석은 로봇들의 주장과 오늘 진화론자들의 주장과 무엇이 다를 바가 있을까요?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천지창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창 1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이 음성을 들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이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언제나 내 가까이에서 나를 도와주시는 친밀하신 하나님으로 믿어지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성경 사 66:1에서 하나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도 땅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인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릴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 안에서 우리가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려야 함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첫 번째 방법은 십일조 생활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 3:7-12을 보면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 받은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3:7-12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은 이유는 십일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처남과 함께 작은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회사가 작으니 수입이 적었지만 그래도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내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처남이 말했습니다. “형님, 나도 예수를 믿지만 참 어리석고 답답하네요. 넉넉할 때 말이지, 이렇게 어려운데 무슨 십일조 떼고 감사 떼고 그래요? 우리는 넉넉할 때까지 십일조 안 해요. 하나님이 우리 사정 알 거예요.” 그래도 집사님은 부요하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손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 계속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회사는 점점 더 어려워져서 5년간 더 내리막길을 걸어 결국은 두 사람이 갈라섰습니다. 여러분 망할 때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두 사람이 갈라서자마자 집사님의 사업이 기적적으로 잘 되어 큰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처남은 망해서 집사님이 처남 가족을 다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계산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길게 보면 축복입니다. 지금은 어려워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두 번째 방법은 주일성수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므로 모든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토요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왜냐하면 십계명에서 제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 개신교에서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신앙적 사건이 주일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 즉 주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일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도 바로 주일에 이루어졌습니다.
둘째, 초대교회 때 이미 주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성경과 초대교회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도행전 이후에 안식일이라는 말이 단 한번 골 2:16에 나옵니다. 놀랍죠? 한번이라니... 거기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그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갈등이 있었던 몇 가지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음식문제로 갈등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은 피하고 율법에서 정결하다고 하는 음식만 먹었습니다. 이것을 코셔음식법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갈등이 절기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서 명하는 절기를 지켰으나 기독교에서는 그 절기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갈등은 초하루제사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안식일 문제였습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지켰다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기독교인들을 비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안식일문제로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뒤집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답이 골 2:17에 나옵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구약시대에 지켰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은 그림자이고 그 그림자가 보여주는 것이 몸인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음식문제와 절기문제 그리고 초하루문제와 인식일문제가 새롭게 해석된 것입니다.
성경 고전 16장 앞부분에서 바울은 헌금에 관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전 16:2에서는 “매주 첫날에(주일입니다)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헌금은 예배시간에 드리는데 매주 첫날 드렸습니다.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매주입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당시에 이미 주일 예배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식과 신앙생활의 일면을 전해주는 2세기경의 문서인 [디다케]에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매주 첫날인 주의 날을 특별한 날로 알아 이 날에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느냐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 날에 공동체로서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롬 14:5,6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바울은 음식문제와 주일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음식과 날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먹고 주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세 번째 방법은 모든 일의 결정권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종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이 종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으로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 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너무나 쉽게 결정해 버립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며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생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세 가지로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십일조, 둘째는 주일성수, 셋째는 모든 일의 결정권을 그분에게 넘겨드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창 1:2에 보면 천지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성경 요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천지창조뿐만 아니라 인류의 구원사역도 성부하나님 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부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셨고, 성령님은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구원을 계획하셨기에 그 계획에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누구도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삼위하나님은 창조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사역도 연합해서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서로 연합하여 긴밀하게 협력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하나님과 연합해야 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속에 오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살기를 원하시는데 만약 내가 그분에게 길을 내드리면 그분이 나를 통해서 나가시는 것이고, 만약 내가 그분에게 길을 내드리지 않으면 그분은 나를 통해서 나가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나를 죽이는 사람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그분이 원치 않으시면 나의 원함을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어도 그분이 원하시면 하기 싫어하는 나를 죽이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면 하나님이 역사를 하십니다. 나를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이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 신령한 생활입니다. 하지만 나를 죽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요나는 알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지만 요나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 중심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지만 내가 살아 있어서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 육신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신령한 생활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생활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연한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 고집 때문에 인생에 아픔과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요나도 자기 고집 때문에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집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가 요나를 삼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기회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과한 요나가 변화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자기 뜻대로 했는데 이제는 자기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기 위해서는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이런 생활이 바로 신령한 생활입니다.

3.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역사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인생의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됩니다. 시 107:19을 보면 고통을 만난 사람들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 고통에서 건져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고통에서 건지시는 방법을 말씀하는데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을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말씀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금동에서 목회할 때 경험한 간증입니다. 우리가 세 들어 있는 건물에 이단이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경 시 16;6을 주셨습니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저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김요한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셨고 저와 교우들이 이곳에 와서 이곳에 계시던 분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변화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건강상태가 결정되고 심지어 성격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먹으면 간이 좋아지고 위장에 좋은 약을 먹으면 위장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으면 여러분 안에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여러분은 영육간에 강건하게 될 것이며 성경에 약속한 복들이 믿어지고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경 읽기를 통해서, 또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의 인생에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섬기시는 교회의 한 안수집사님은 매출이 엄청나게 큰 회사의 대표이사입니다. 큰 회사의 대표이사이니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분은 주일 밤 예배는 물론 수요 예배, 새벽 예배에도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그 집사님이 목사님과 교회에 오신 강사목사님에게 식사대접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회사 일이 어렵고 힘들 때는 성경을 읽습니다.” 왜 어렵고 힘들 때 성경을 읽을까요?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집사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이 만지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무슨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창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보시기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나라와 저 북녘 땅과 이스라엘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창조’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아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개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무로 의자를 만들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야차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모델을 앞에 놓고 그 형상을 본 따서 만드는 조각가의 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창조는 ‘바라’라는 말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천사나 사탄 그리고 사람은 아사 창조나 야차르 창조는 할 수 있지만 바라창조는 할 수 없습니다. 바라 창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님이 주신 영감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내가 그야말로 바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역사,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격이 바닥이어도, 내 능력이 바닥이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내 인맥이 바닥이고 내 소유가 바닥이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바닥에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위대한 역사를 이룬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80세의 모세는 바닥이었습니다. 그는 늙었고, 말도 둔했고, 배경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창조적인 역사를 하시니 그가 그 당시 대제국의 바로왕 앞에 섭니다. 그리고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숨통을 조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 앞에서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바닥에서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을 날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내 인생에 역사하시면 비록 지금 인격이나 능력이나 인맥이나 소유가 바닥이라도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성공 동기 연구원의 설립자인 폴 마이어 회장의 간증입니다. 그는 청년시절에 길거리에서 노숙자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그의 앞으로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쑥 지나갔습니다. 폴 마이어는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누구는 고급차를 타고 누구는 깡통을 차고 다녀야 합니까? 저도 정말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로수를 붙들고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쓰임 받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그처럼 거리에서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무를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기도하자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어서면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사업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세일즈맨부터 하겠습니다. 저에게도 성공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때부터 세일즈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일즈의 효율성을 위해 사장들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사장들은 대개 바쁘니까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끈질기게 나가니까 점차 한 사� �한 사람 사장들을 고객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장은 여러 핑계를 대며 계속 그를 만나주지 않습니다. 어느 날, 성경 약 1:5을 펴놓고 막 따지듯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구절을 보니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로 되어 있네요. 지혜를 구하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이 말씀대로 제게 그 사장을 만날 지혜를 주소서. 지혜를 주시지 않으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이니 성경에서 빼 주소서.” 그런 식으로 끈질기게 기도하자 마침내 지혜가 떠올라 사장한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사장님, 저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사장님은 한 번도 못 만날까요? 사장님이 하나님보다 높은가요?” 그리고 예쁜 포장지로 포장을 한 상자에 편지와 선물을 넣고 비서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자 사장이 편지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마침내 물건을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그는 30대에 거부가 되었습니다. 노숙자였으니 경제적으로 완전 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고 매달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 ⊙뗌岵�역사를 일으키셔서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백성들에게 비록 그들이 가진 것이 없어서 인생의 바닥 수준에 있어도 무에서 유의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2.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3.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4. 하나님이 만지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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