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시편 6)
여러분 시편 6편을 보면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돼 있죠? 스미닛이라는 말은 여덟 개라는 뜻입니다. 8현금. 또 8가지 현악악기에 맞춘 노래라는 뜻도 되는데, 8가지로 연주하면 현악기 소리가 어떻게 납니까? 곱고 맑게 나는 현악기가 있죠? 아니면 낮은 저음을 낼 수도 있고, 현악기에 맞춘 노래인데 영장이 지휘를 했단 말입니다. 이 말은 합창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모두 7개의 회개 시편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회개하고 싶을 때 이걸 읽으면 회개가 저절로 됩니다. 기도의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우리의 폐부를 파고드는 언어로 돼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왜 회개시편이 많이 줄어들었을까요? 우리가 왜 회개의 모티브를 고대 시편 시인처럼 찾지 못할까? 고대 시인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불쾌하심, 진노가 자기를 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째, 재난이 일어날 때.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날 때는 한 군데를 제외하고, 에스겔서 38장, 39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 빼고는 전부다 모든 전쟁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때 모든 전쟁은 힘이 센 나라가 침략하는 것도 전쟁이고 힘이 적은 나라가 침략하는 것도 전쟁인데,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환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언어로 해석해버리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하도 인본주의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사건 심판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하나님의 알파벳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건으로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원적으로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은 모든 전쟁. 에스겔서 38장 39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입니다. 이런 전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착하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이 있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38, 39장에 나오는 완전히 한 번 갱신된 백성들에 대해서 곡과 마곡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쏟아 붓는데 하나님께서 곡과 마곡을 격파해주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가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일 때는 내 죄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뭔가가 잘못됐다, 하나님에 대한 불쾌하심을 나는 하나님께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사람한테 잘못한 게 하나님께 잘못한 겁니다. 내가 한 마리 독수리인데, 암탉을 만나는 겁니다. 암탉이 독수리가 무서워할 만큼, P48 탱크처럼 막 달려들 때는 암탉이 악이 바쳤다 이 말이죠. 손아랫사람, 나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공격해올 때는 내가 매우 저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들이받을 때는 아버지가 아들한테 엄청난 노여움을 사고 있는 겁니다. 웬만하면 아들은 아버지를 들이받지 않습니다. 자녀한테 받치는 부모들은 일단 내가 우리 아이한테 노여움을 사는 일을 했다는 걸 일단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 나보다 힘이 센 나라가 집접 거리는 겁니다. 아람이라는 나라가 항상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의 약점을 이용해서 괴롭히는 것도 나의 죄와 관련된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분규입니다. 개인적인 분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심판받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는 하나님 진노가 딸린 심판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말을 잘 안 하는 배우자가, 말이 적은 배우자가 한 마디 뱉는 순간은 최후의 심판이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말 안 하는 배우자가 한마디 할 때는 이것 다음에 하나님 직접 손으로 내리치신다는 말이에요. 형제들 잘 묵상합시다. 두 번째는 질병입니다. 전쟁이 가장 큰 진노라면 다음은 질병입니다. 오늘날은 전부 의학적으로 medical solution, 병이 걸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까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약으로 그걸 해결합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 영혼이 회개로 풀려고 하지 않고 약으로 풀려고 합니다. 여러분 죄를 약으로 풀려고 하는 게 현대 회복 심리학입니다. 오늘날은 죄, 인간의 고의적인 반역죄를 병리학적으로 생각합니다.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모섹슈얼도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연애도 병이라고 생각하면 치료해야 할 대상이지 회개해야 할 대상이 아니죠. 도둑질도, 지금 도둑질을 막하는 것도 너 어릴 때 가정환경이 이상했냐? 그다음 살인범도 이 사람이 이렇게 살인범이 된 이유는 어릴 때 아버지께 얻어맞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전생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질병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표현하는 도구가 됐는데,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그러나 자기가 아플 이유가 없을 때 아프면 자기가 고백해야 할 죄와 자기의 몸 상태를 항상 일치시켰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자기 몸 안에는 하나님의 알파벳이 써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정말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로, 전쟁, 질병 다음에는 상실입니다. 이 말은 재산의 상실, 자녀의 상실, 인적상실과 물적 상실이 대개 그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게 일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소득이 안 벌린다,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소득이 없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키지 아니하면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수고의 떡이 헛되다 그랬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동이 무가치해진다 이거죠. 인적상실은 뭡니까? 갑자기 자녀가 죽는 것. 솔로몬 앞에 태어났던,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났던 아이가 먼저 죽습니다. 그다음에 물적 손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불쾌하심을 표현하는 심판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질병입니다. 모든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필요는 없는데,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 내가 죄 지은 게 없나 강박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데 우리 모두가 회개의 기도를 하려면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면 토마스 아 캠피스가 말했듯이 회개를 하려면 내 죄를 많이 보지 말고 하나님의 성스러운 사랑을 많이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사랑에 대한 지식이 나의 회개를 깊게 하지, 내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회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죄 지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회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지은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록 죄를 회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 역설이죠? 토마스 아 캠피스는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몰두보다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에누리 없이 대면할 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미안한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마음, 내 슬픔을 알게 되고 회개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영혼과 육체가 병든 한 시인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견책과 징계, 이런 단어는 거의 사라진 단어죠? 일단 왜 오늘날 이렇게 되냐면 사람에게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사람이 최고다, 인본주의가 너무나 판을 칩니다. 오늘날 교육학은 무조건 잘 한다, 이 말은 죄를 회개하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현대인들과 안 맞습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 이 시편은 너무나 가학적 변태처럼 보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현대인들이 기준이 될 때는 고대인들의 시편의 언어는 sadistic. 자기를 너무 가혹하게 내리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현대인이 기준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어떤 병에 걸렸는지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뼈가 떨리고 살이 빠지는 이 병이 무슨 병입니까? 뼈가 떨리고 수척하였고, 암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이건 분명한 표시가 나는 거죠? 지금 이 사람은 병이 걸렸는데, 고쳐달라는 말을 회개를 통해서 고쳐달라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병리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기 때문에 이런 병이 난다고 하지 않고, 그냥 병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시인은 내가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에 이 영혼과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참 격렬한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몸이 수척되고 뼈가 떨리는 고통. 그래서 이 떨리는 고통이 언제까지 허용하시렵니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지금 구원을 기대하는 딱 한 가지 근거는 내가 너무 비참한 병에 빠져 있기 때문에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무궁무진한 의리 있으심, 신실하심, 내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격에서 솟아나오는 엄청난 오래 참으심, 그 엄청난 계약적 신실성 그것을 근거하여서 저를 돌봐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해도 우리 죄를 보고 기겁하면서 도망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가 막심할 지라도 우리 죄를 능히 감당할만한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이너스 장부를 가져가도 하나님은 순식간에 밸런스 제로로 만들 수 있고, 흑자로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 서너 줄 읽었다고 하나님 아는 게 아니죠? 우리 신앙생활은 무엇 때문에 박진감이 납니까? 우리 신앙생활이 박진감 넘치고 지루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 부요한 인자하심을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깨달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박진감이 넘치고 지루함이 없는 거죠. 작년과 올해 신앙생활이 똑같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시간을 다투면서 깊어져 갑니다. 안 깊어져 가면 그건 이상한 겁니다.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이 말은 나를 구원할 어떤 조건도 내 속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구원해줄 만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건져서 당신이 이득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나를 구원해달라고 내가 부탁드리는 것은 주님 자신 안에 있는 다함없는 엄청난 의리, 신실하심 그것으로 저를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제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이 말은 살려 주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영적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태의 사람이죠? 사망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가 없는 사람은 음부에 떨어진 겁니다. 고도가 마이너스에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병든 영혼이 감수성이 예민했을까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음부에 떨어져 있으면 주님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영적으로 이렇게 처박아 두시면 안 됩니다. 나를 시궁창 안에 처박아두셔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하려면 주님이 나를 이 시궁창 안에서 건져주셔야 합니다. 주님 나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지 마시고, 나를 영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주님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음부, 시궁창 안에 집어 던져졌다면 주님을 향해 감사할 수도 없고 주님을 기억할 수도 묵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내 병입니다. 육체가 병들어서 내가 불안한 것은 내 마음이 음부에 떨어진 사람처럼 사망 중에서 다시는 주님의 예전에 베푸신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 기억납니까? 매번 기억나세요? 여러분이 어제 받은 은혜가 오늘 기억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하게 만드는 방법은 감사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감사하는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양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간다. 감사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가장 속 깊은 대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을 기억하고 감사해야만 음부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오죠?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저는 이 경지를 알기 원합니다. 얼마나 자기 죄에 대해서 민감했으면,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십니까? 이 경지는 감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막연하게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봅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여러분 왜 근심합니까? 내 죄가 용서받지 못하면 어떡할까? 내가 지금 죄 용서 받지 못한 채 주님의 재림을 맞으면 어떡할까? 내가 지금 주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지 못한 채 갑자기 뇌졸중에 빠지면 어떡할까? 내가 중풍에 걸리고 암에 걸리면 어떡할까? 이런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좌절하고 신앙을 잃어버리면, 나에게 신앙 가졌다고 조롱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대적자가 시편 시인 옆에는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여러분의 신앙을 골똘하게 관찰하다가 손가락질하고 중상모략하며 여러분의 신앙을 격동하는 대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는 게 좋습니다. 시편 시인은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가 아무 적도 없고 무골호위처럼 미워하는 세력도 없고 좋아하는 세력도 없는 것은 영적 전쟁에 돌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시편 시인의 대적들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하려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 이것에 대해서 공세적인 마음을 취할 때만 우리의 대적들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당연히 맞서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 아예 가담하지 않으면, 우리 편과 남의 편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신앙의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편에 강력하게 소속되고 나면 나의 대적임과 동시에 하나님 대적들이 갑자기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대적을 가르는 것은 참 위태로운 일이죠?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포교인들이 제일 견디지 못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릅니다 라는 말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라 통째로 교회인데, 어떻게 미국이란 나라가 세속적인 사회가 될 수 있습니까? 미국이란 나라자체가 교회인데. 가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크리스천인지 모릅니다. 유치원도 크리스천이죠. 모든 데가 다 교회인데 이 나라를 세속과 교회로 나누면 안 됩니다. 그럼 우리가 곤란해집니다. 이것이 미국 교포교인들이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오늘날 도시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우선순위를 나누라고 하면 교회의 우선순위를 부탁하면, 이러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접촉하고 삽니까, 말 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의 적들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을 앗아가는 대적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옅어져 가고 있습니다. 시인들은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저는 이 말을 아마 제가 이용도 목사님의 시에서 이런 경지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곽선희 목사님 설교를 아무리 읽어도 이런 곡성적인 영성이 안 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 유명한 사람 설교를 읽어봐도 시편적인 영성이 안 나오고, 제가 볼 때는 이용도 목사님과 옛날 은성수도원 엄두섭 목사님, 목민선교회 고영근 목사님, 제가 알기로는 극히 적은 목사님입니다. 아마 또 이름 유명하지 않은 많은 좋은 목사님들도 이런 좋은 곡성의 기도를 드렸을 텐데, 성공의 신화에 몸을 빠뜨리면 목회가 너무 신나기 때문에 너무나 교회 성장이 신나기 때문에 교회 일이 너무 신나기 때문에 시편에 낮게 깔린 저음의 영성, 비통의 언어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 수가 늘어나면 영적으로 그 교회가 영성적인 사람이 더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설프고 얼뜨기 같은 영성들이 많이 모입니다. 사람 수가 늘어나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충분한 사람의 비통의 언어, 시편의 고백의 언어를 이해하는 수준 높고 조용한 사람들이 일정량 확보되고 나서 그 분들이 섬길만한 사람이 서서히 모여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제일 하나님께 바라야 할 것은 그것입니다. 제가 볼 때 200명 정도의 사람을 섬기려면 20명 정도의 영적인 기백과 시편적인 비통의 언어와 자기 책망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확보돼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도할 것은 앞으로 우리가 두 달 동안 이 시편에 있는 비통의 언어, 신앙의 적들에 대한 탄식의 언어, 그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승인하면서 자지러지는 고백의 언어들을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가야 합니다. 제가 부르짖는 기도라고 했을 때 그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영혼의 지방질이 너무 많이 껴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니켈과 크롬 같은 중금속에 의해서 영혼이 오염됐기 때문에 이런 비통과 예민한 감수성을 잃어버렸어요. 저도 가끔 제 자신이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혼자 있으면 제가 이러다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이것에 대해 몰두하면 참 고독해집니다. 적당하게 세속적이 되면 아는 사람도 많고 어울릴 데가 있는데 시편의 언어들과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어버리면서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광신자가 아닌가 이렇게 느껴질 만큼 성경의 언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그렇게 신앙이 진진해집니다. 우리가 오락과 여흥처럼 신앙을 갖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알파벳입니다. 우리 몸에 영혼의 떨림 뼈의 떨림 우리 눈의 쇠약함 이런 모든, 내 몸 안에 일어나는 연약함을 하나님의 심판 책망의 언어로 받아들였던 이 시인의 고백을 우리가 광범위하게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성령의 근심을 깨달으면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했는데, 성령의 근심을 못 느끼고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애통하는 걸 못 느낀다면 시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죄를 지었는데, 여러분이 실수했는데, 잘못을 범했는데 너무너무 고통스럽고 비통한 자기 책망의 언어가 나오고 견책의 언어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여러분은 성령 안에 사는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시편의 영성을 두달 동안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시편의 영성은 마냥 비관적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해주는 언어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해결해야 할 이 영적인 무감각을 음부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내 생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감동을 상실해버린 내 삶, 이 음부에 빠져버리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주님을 기억 않는 세포가 죽어버린 내 몸을 이 비통의 언어에 노출시키고 내 영혼이 수척 되고 그래서 제가 금식이 좋다고 한 겁니다. 금식을 하면 죄가 생각납니다. 금식하지 않고 욕망을 다 충족시키면 죄가 생각나지 않지만 금식을 해보면 죄가 생각납니다. 글을 써도 죄가 생각나고, 자기 혼자 가만히 있어도 죄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군중적 요란과 소란 속에 섞이면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8현금 영장에 맞춘 시편 6편의 기도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이런 시편 6편을 우리 삶을 에우는 자리에서 써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떨림과 수척함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견책과 심판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이런 의사소통도 여러분과 제가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재 여러분의 질병을 제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몹시 연약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은 연약함에 빠질 때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자 이런 뜻입니다. 주님의 견책을 맛보면서 영혼의 쇄신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시편 시인의 비통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한없는 자기긍정과 자기옹호 속에 사는 저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책망하는 언어, 너무나 멀리 잊어버렸던 언어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자기 영혼의 수척함과 육체의 연약함을 보고 하나님의 견책과 책망을 듣고 영의 쇄신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음부와 지옥에 빠진 것처럼 영적 무감각 속에 살 때도 비통해하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저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 한국이 사회전체가 성장주의 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성장하고 무한히 성장하는 신화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성장을 원치 않고 성숙을 원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원치 않고 내실 있는 열매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우들 중에서 시편 6편의 회개의 시편을 이해할 수 있는 교우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 중에서 연약한 질병 속에서 몸서리치는 고통 속에 사는 교우들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견책을 맛보고, 쇄신을 맛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기도문)
여러분 시편 6편을 보면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라고 돼 있죠? 스미닛이라는 말은 여덟 개라는 뜻입니다. 8현금. 또 8가지 현악악기에 맞춘 노래라는 뜻도 되는데, 8가지로 연주하면 현악기 소리가 어떻게 납니까? 곱고 맑게 나는 현악기가 있죠? 아니면 낮은 저음을 낼 수도 있고, 현악기에 맞춘 노래인데 영장이 지휘를 했단 말입니다. 이 말은 합창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 102편 130편 143편 모두 7개의 회개 시편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회개하고 싶을 때 이걸 읽으면 회개가 저절로 됩니다. 기도의 언어가 매우 직설적이고 우리의 폐부를 파고드는 언어로 돼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왜 회개시편이 많이 줄어들었을까요? 우리가 왜 회개의 모티브를 고대 시편 시인처럼 찾지 못할까? 고대 시인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불쾌하심, 진노가 자기를 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째, 재난이 일어날 때. 전쟁이나 재난이 일어날 때는 한 군데를 제외하고, 에스겔서 38장, 39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 빼고는 전부다 모든 전쟁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때 모든 전쟁은 힘이 센 나라가 침략하는 것도 전쟁이고 힘이 적은 나라가 침략하는 것도 전쟁인데,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 환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언어로 해석해버리기 때문에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분별해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은 우리가 하도 인본주의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사건 심판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하나님의 알파벳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건으로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원적으로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인들은 모든 전쟁. 에스겔서 38장 39장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입니다. 이런 전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너무 착하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이 있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당하는 전쟁이 있습니다. 에스겔서 38, 39장에 나오는 완전히 한 번 갱신된 백성들에 대해서 곡과 마곡이라는 나라가 전쟁을 쏟아 붓는데 하나님께서 곡과 마곡을 격파해주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가 크고 작은 분규에 휩싸일 때는 내 죄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뭔가가 잘못됐다, 하나님에 대한 불쾌하심을 나는 하나님께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사람한테 잘못한 게 하나님께 잘못한 겁니다. 내가 한 마리 독수리인데, 암탉을 만나는 겁니다. 암탉이 독수리가 무서워할 만큼, P48 탱크처럼 막 달려들 때는 암탉이 악이 바쳤다 이 말이죠. 손아랫사람, 나에게 적대심을 가지고 공격해올 때는 내가 매우 저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들이받을 때는 아버지가 아들한테 엄청난 노여움을 사고 있는 겁니다. 웬만하면 아들은 아버지를 들이받지 않습니다. 자녀한테 받치는 부모들은 일단 내가 우리 아이한테 노여움을 사는 일을 했다는 걸 일단 믿어야 합니다. 두 번째 나보다 힘이 센 나라가 집접 거리는 겁니다. 아람이라는 나라가 항상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나보다 힘이 센 사람이 나의 약점을 이용해서 괴롭히는 것도 나의 죄와 관련된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면 분규입니다. 개인적인 분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심판받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똑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때는 하나님 진노가 딸린 심판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말을 잘 안 하는 배우자가, 말이 적은 배우자가 한 마디 뱉는 순간은 최후의 심판이 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말 안 하는 배우자가 한마디 할 때는 이것 다음에 하나님 직접 손으로 내리치신다는 말이에요. 형제들 잘 묵상합시다. 두 번째는 질병입니다. 전쟁이 가장 큰 진노라면 다음은 질병입니다. 오늘날은 전부 의학적으로 medical solution, 병이 걸리면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메시지를 줄까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대부분 약으로 그걸 해결합니다, 하나님께 잘못을 범한 영혼이 회개로 풀려고 하지 않고 약으로 풀려고 합니다. 여러분 죄를 약으로 풀려고 하는 게 현대 회복 심리학입니다. 오늘날은 죄, 인간의 고의적인 반역죄를 병리학적으로 생각합니다.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모섹슈얼도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성연애도 병이라고 생각하면 치료해야 할 대상이지 회개해야 할 대상이 아니죠. 도둑질도, 지금 도둑질을 막하는 것도 너 어릴 때 가정환경이 이상했냐? 그다음 살인범도 이 사람이 이렇게 살인범이 된 이유는 어릴 때 아버지께 얻어맞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전생까지도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질병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표현하는 도구가 됐는데,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의 표현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그러나 자기가 아플 이유가 없을 때 아프면 자기가 고백해야 할 죄와 자기의 몸 상태를 항상 일치시켰기 때문에 고대인들은 자기 몸 안에는 하나님의 알파벳이 써 있다고 믿었습니다. 고대인들은 정말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로, 전쟁, 질병 다음에는 상실입니다. 이 말은 재산의 상실, 자녀의 상실, 인적상실과 물적 상실이 대개 그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부지런하게 일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소득이 안 벌린다,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소득이 없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키지 아니하면 밤늦게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수고의 떡이 헛되다 그랬죠?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동이 무가치해진다 이거죠. 인적상실은 뭡니까? 갑자기 자녀가 죽는 것. 솔로몬 앞에 태어났던,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났던 아이가 먼저 죽습니다. 그다음에 물적 손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불쾌하심을 표현하는 심판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질병입니다. 모든 질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필요는 없는데,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 깨닫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너무 내가 죄 지은 게 없나 강박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데 우리 모두가 회개의 기도를 하려면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로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면 토마스 아 캠피스가 말했듯이 회개를 하려면 내 죄를 많이 보지 말고 하나님의 성스러운 사랑을 많이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사랑에 대한 지식이 나의 회개를 깊게 하지, 내가 죄를 많이 짓는다고 회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죄 지은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회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지은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을수록 죄를 회개하지 못하게 됩니다. 참 역설이죠? 토마스 아 캠피스는 참된 회개는 죄에 대한 몰두보다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를 에누리 없이 대면할 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미안한 마음,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마음, 내 슬픔을 알게 되고 회개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영혼과 육체가 병든 한 시인이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견책과 징계, 이런 단어는 거의 사라진 단어죠? 일단 왜 오늘날 이렇게 되냐면 사람에게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사람이 최고다, 인본주의가 너무나 판을 칩니다. 오늘날 교육학은 무조건 잘 한다, 이 말은 죄를 회개하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 감수성이 현대인들과 안 맞습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 이 시편은 너무나 가학적 변태처럼 보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현대인들이 기준이 될 때는 고대인들의 시편의 언어는 sadistic. 자기를 너무 가혹하게 내리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준이 아닙니다. 현대인이 기준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어떤 병에 걸렸는지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뼈가 떨리고 살이 빠지는 이 병이 무슨 병입니까? 뼈가 떨리고 수척하였고, 암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이건 분명한 표시가 나는 거죠? 지금 이 사람은 병이 걸렸는데, 고쳐달라는 말을 회개를 통해서 고쳐달라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병리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반역,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기 때문에 이런 병이 난다고 하지 않고, 그냥 병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시인은 내가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에 이 영혼과 육체의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참 격렬한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몸이 수척되고 뼈가 떨리는 고통. 그래서 이 떨리는 고통이 언제까지 허용하시렵니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지금 구원을 기대하는 딱 한 가지 근거는 내가 너무 비참한 병에 빠져 있기 때문에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무궁무진한 의리 있으심, 신실하심, 내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격에서 솟아나오는 엄청난 오래 참으심, 그 엄청난 계약적 신실성 그것을 근거하여서 저를 돌봐주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합시다. 우리가 아무리 비참해도 우리 죄를 보고 기겁하면서 도망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가 막심할 지라도 우리 죄를 능히 감당할만한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이너스 장부를 가져가도 하나님은 순식간에 밸런스 제로로 만들 수 있고, 흑자로 만들 수 있는 분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 서너 줄 읽었다고 하나님 아는 게 아니죠? 우리 신앙생활은 무엇 때문에 박진감이 납니까? 우리 신앙생활이 박진감 넘치고 지루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 부요한 인자하심을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깨달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박진감이 넘치고 지루함이 없는 거죠. 작년과 올해 신앙생활이 똑같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시간을 다투면서 깊어져 갑니다. 안 깊어져 가면 그건 이상한 겁니다.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이 말은 나를 구원할 어떤 조건도 내 속에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나를 구원해줄 만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건져서 당신이 이득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나를 구원해달라고 내가 부탁드리는 것은 주님 자신 안에 있는 다함없는 엄청난 의리, 신실하심 그것으로 저를 건져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제가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할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이 말은 살려 주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감사가 없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주님에 대한 영적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어떤 상태의 사람이죠? 사망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가 없는 사람은 음부에 떨어진 겁니다. 고도가 마이너스에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병든 영혼이 감수성이 예민했을까요?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음부에 떨어져 있으면 주님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영적으로 이렇게 처박아 두시면 안 됩니다. 나를 시궁창 안에 처박아두셔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주님께 감사하려면 주님이 나를 이 시궁창 안에서 건져주셔야 합니다. 주님 나를 영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들지 마시고, 나를 영적으로 능동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주십시오. 그래야만 제가 주님을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음부, 시궁창 안에 집어 던져졌다면 주님을 향해 감사할 수도 없고 주님을 기억할 수도 묵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내 병입니다. 육체가 병들어서 내가 불안한 것은 내 마음이 음부에 떨어진 사람처럼 사망 중에서 다시는 주님의 예전에 베푸신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 기억납니까? 매번 기억나세요? 여러분이 어제 받은 은혜가 오늘 기억납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하게 만드는 방법은 감사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감사하는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양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간다. 감사가 하나님을 알현하는 가장 속 깊은 대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을 기억하고 감사해야만 음부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오죠?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저는 이 경지를 알기 원합니다. 얼마나 자기 죄에 대해서 민감했으면,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십니까? 이 경지는 감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지입니다. 다만 우리가 막연하게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봅니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여러분 왜 근심합니까? 내 죄가 용서받지 못하면 어떡할까? 내가 지금 죄 용서 받지 못한 채 주님의 재림을 맞으면 어떡할까? 내가 지금 주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지 못한 채 갑자기 뇌졸중에 빠지면 어떡할까? 내가 중풍에 걸리고 암에 걸리면 어떡할까? 이런 큰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만일 내가 지금 여기서 좌절하고 신앙을 잃어버리면, 나에게 신앙 가졌다고 조롱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대적자가 시편 시인 옆에는 있습니다. 여러분 옆에 여러분의 신앙을 골똘하게 관찰하다가 손가락질하고 중상모략하며 여러분의 신앙을 격동하는 대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는 게 좋습니다. 시편 시인은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우리가 아무 적도 없고 무골호위처럼 미워하는 세력도 없고 좋아하는 세력도 없는 것은 영적 전쟁에 돌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시편 시인의 대적들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하려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화 이것에 대해서 공세적인 마음을 취할 때만 우리의 대적들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당연히 맞서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 아예 가담하지 않으면, 우리 편과 남의 편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신앙의 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 편에 강력하게 소속되고 나면 나의 대적임과 동시에 하나님 대적들이 갑자기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대적을 가르는 것은 참 위태로운 일이죠?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포교인들이 제일 견디지 못하는 말이 이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릅니다 라는 말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답니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라 통째로 교회인데, 어떻게 미국이란 나라가 세속적인 사회가 될 수 있습니까? 미국이란 나라자체가 교회인데. 가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크리스천인지 모릅니다. 유치원도 크리스천이죠. 모든 데가 다 교회인데 이 나라를 세속과 교회로 나누면 안 됩니다. 그럼 우리가 곤란해집니다. 이것이 미국 교포교인들이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오늘날 도시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교회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우선순위를 나누라고 하면 교회의 우선순위를 부탁하면, 이러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접촉하고 삽니까, 말 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신앙의 적들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을 앗아가는 대적들에 대한 이해가 점점 옅어져 가고 있습니다. 시인들은 말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저는 이 말을 아마 제가 이용도 목사님의 시에서 이런 경지를 발견했습니다. 저는 곽선희 목사님 설교를 아무리 읽어도 이런 곡성적인 영성이 안 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 유명한 사람 설교를 읽어봐도 시편적인 영성이 안 나오고, 제가 볼 때는 이용도 목사님과 옛날 은성수도원 엄두섭 목사님, 목민선교회 고영근 목사님, 제가 알기로는 극히 적은 목사님입니다. 아마 또 이름 유명하지 않은 많은 좋은 목사님들도 이런 좋은 곡성의 기도를 드렸을 텐데, 성공의 신화에 몸을 빠뜨리면 목회가 너무 신나기 때문에 너무나 교회 성장이 신나기 때문에 교회 일이 너무 신나기 때문에 시편에 낮게 깔린 저음의 영성, 비통의 언어를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 수가 늘어나면 영적으로 그 교회가 영성적인 사람이 더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설프고 얼뜨기 같은 영성들이 많이 모입니다. 사람 수가 늘어나면 참 곤란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충분한 사람의 비통의 언어, 시편의 고백의 언어를 이해하는 수준 높고 조용한 사람들이 일정량 확보되고 나서 그 분들이 섬길만한 사람이 서서히 모여드는 게 제일 좋습니다. 제일 하나님께 바라야 할 것은 그것입니다. 제가 볼 때 200명 정도의 사람을 섬기려면 20명 정도의 영적인 기백과 시편적인 비통의 언어와 자기 책망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확보돼야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기도할 것은 앞으로 우리가 두 달 동안 이 시편에 있는 비통의 언어, 신앙의 적들에 대한 탄식의 언어, 그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승인하면서 자지러지는 고백의 언어들을 우리가 익숙하게 배워가야 합니다. 제가 부르짖는 기도라고 했을 때 그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는 영혼의 지방질이 너무 많이 껴있습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니켈과 크롬 같은 중금속에 의해서 영혼이 오염됐기 때문에 이런 비통과 예민한 감수성을 잃어버렸어요. 저도 가끔 제 자신이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혼자 있으면 제가 이러다 너무 극단적인 사람이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이것에 대해 몰두하면 참 고독해집니다. 적당하게 세속적이 되면 아는 사람도 많고 어울릴 데가 있는데 시편의 언어들과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순진하게 그대로 믿어버리면서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광신자가 아닌가 이렇게 느껴질 만큼 성경의 언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그렇게 신앙이 진진해집니다. 우리가 오락과 여흥처럼 신앙을 갖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알파벳입니다. 우리 몸에 영혼의 떨림 뼈의 떨림 우리 눈의 쇠약함 이런 모든, 내 몸 안에 일어나는 연약함을 하나님의 심판 책망의 언어로 받아들였던 이 시인의 고백을 우리가 광범위하게 적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었을 때 성령의 근심을 깨달으면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했는데, 성령의 근심을 못 느끼고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서 애통하는 걸 못 느낀다면 시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죄를 지었는데, 여러분이 실수했는데, 잘못을 범했는데 너무너무 고통스럽고 비통한 자기 책망의 언어가 나오고 견책의 언어들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면 여러분은 성령 안에 사는 민감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런 시편의 영성을 두달 동안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시편의 영성은 마냥 비관적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단을 정확하게 해주는 언어입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해결해야 할 이 영적인 무감각을 음부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내 생애,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감동을 상실해버린 내 삶, 이 음부에 빠져버리고 감사를 잃어버리고 주님을 기억 않는 세포가 죽어버린 내 몸을 이 비통의 언어에 노출시키고 내 영혼이 수척 되고 그래서 제가 금식이 좋다고 한 겁니다. 금식을 하면 죄가 생각납니다. 금식하지 않고 욕망을 다 충족시키면 죄가 생각나지 않지만 금식을 해보면 죄가 생각납니다. 글을 써도 죄가 생각나고, 자기 혼자 가만히 있어도 죄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군중적 요란과 소란 속에 섞이면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8현금 영장에 맞춘 시편 6편의 기도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이런 시편 6편을 우리 삶을 에우는 자리에서 써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떨림과 수척함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견책과 심판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이런 의사소통도 여러분과 제가 배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현재 여러분의 질병을 제가 이렇게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몹시 연약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과 같은 연약함에 빠질 때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자 이런 뜻입니다. 주님의 견책을 맛보면서 영혼의 쇄신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시편 시인의 비통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한없는 자기긍정과 자기옹호 속에 사는 저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책망하는 언어, 너무나 멀리 잊어버렸던 언어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인은 자기 영혼의 수척함과 육체의 연약함을 보고 하나님의 견책과 책망을 듣고 영의 쇄신을 경험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음부와 지옥에 빠진 것처럼 영적 무감각 속에 살 때도 비통해하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저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 한국이 사회전체가 성장주의 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성장하고 무한히 성장하는 신화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성장을 원치 않고 성숙을 원합니다. 우리는 성공을 원치 않고 내실 있는 열매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우들 중에서 시편 6편의 회개의 시편을 이해할 수 있는 교우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 중에서 연약한 질병 속에서 몸서리치는 고통 속에 사는 교우들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견책을 맛보고, 쇄신을 맛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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