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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3

by 【고동엽】 2022. 6. 22.

한국 교회사 3
제5편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네비 우스 선교정책 : 
선교방법론에 탁월한 네비우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원칙으로 
선교사는 폭넓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하며,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모든 예배단은 신자들 자신들의 힘으로 건축되어야 한다. 
모든 신자들은 조직적인 성경공부를 해야 하며, 
엄중한 훈련과 치리를 해야 한다. 
적어도 지역을 분할하여 일한다. 
보통 3자정책으로 부르는데 자치(自治), 자립(自立), 자전(自傳)이다. 
선교지 분할 정책은 예양협정으로 
북장로교회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북을, 
남장로교회는 전라도, 충청도를, 
캐나다장로교회는 함경도지역을 담당하여 선교하기로 합의하였다.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고,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호의를 보였으며 
서구와 서구의 종교에 반감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전도열이 뜨거웠고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일찍 확보하였다. 
한국이 문자와 언어의 통일이 되어 있었고 
교인들의 기도운동이 뜨거웠으며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초 기 선교사 순교자들 : 
데이비스, 헤론, 윌리엄 메켄지, 기포드, 조지 렉, 헨리 아펜젤러, 
월터 존슨, 안나 밀러 부인, 번턴 부인, 윌리엄 헌트 부인, 
피터스 부인, 사무엘 무어, 전킨, 게일목사 부인등 
어린 생명들이 의료시설이나 의사 부족으로 이국 땅에서 죽어갔다.
제6편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서민들의 입교 : 
조선의 40년간의 기독교의 통계표는 다른나라의 1백년의 선교보다 
더 나은 성적을 보고한다. 
천주교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전도인 반면, 
개신교는 아래에서 위로의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학교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기관이었고 
교회는 차별없이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서민들의 기독교 입문은 이기적 내지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을 것이며 
국가가 이제에 넘어가는 불안한 상황에서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안정을 구한 것으로도 보인다.
지식층의 입교 : 
그 동기는 초기에 유학자들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심에 접함으로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고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였다. 
기독교를 통하여 이 땅의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보다 국가의 안위와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수난 : 
가족 중 신앙을 받아들인 경우, 이름을 호적에서 삭제하였고 쫓아냈다. 
1888년에 '어린이소동'이 있었고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이 
신자를 체포 구타한는 사건이 있었다. 
1899년 경무사 김경준이 1900년 12월1일을 기해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인을 박멸하려고 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천주교에 의한 박해도 있었으나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다.
제7편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대부흥운동 (1907) : 
1903년 감리교선교사들이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를 갖었고 
강원도에서 선교에 실패한 하디의 통회자복이 불씨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함을 목도하며 
부흥의 불길이 시작되었다.  
1906년 평양의 선교사들은 하디를 초청하여 일주간 기도회를 갖었고 
이때 뉴욕의 존슨목사가 방문하여 인도와 웨일즈의 부흥을 
전해 주었는데 장로인 길선주가 일어났다. 
1907년 장대현에서 열린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1907부흥운동의 직접적원인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
길선주 목사 :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관성교 등 종교편력이 다양했지만 아무것도 
그의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본 후 
김종섭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1907년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여 20년간 목회였고 
1935년 11월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강대상에서 졸도한 뒤 하늘나라로 갔다.
대 부흥운동 결과 : 
기독교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축첩, 노비소유 등의 죄악을 고백하고 참회하였다. 
신자들의 전도에 힘입은 교회의 부흥이어서 
1906년 54,987명에서 1907년 73,844명으로 34% 증가했다.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어 
새벽기도회, 통성기도, 철야기도가 시작되었다. 
에큐메니컬정신이 구현되어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간에 
갈등이 해소되고 형제의식이 굳어졌다.   
백만명 구령운동 : 
1909년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갬불, 리드 등 3인이 
사경회와 기도회를 갖은데서 비롯되었다. 
이 운동 기간에 가난한 교인들은 물질로 헌금할 수 없었기에 
시간을 바치는 '날연보'를 하였다.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 
한국에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나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 교회의 비협조적 태도로 실패했다. 
또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에 대한 열의 부족이라고 했다.
1905년 개신교 복음주의선교 협의회가 구성되어 연합학교, 
신문위 연합 발행, 선교지 분할 문제가  이루어졌다.
예양협정 : 
장로교와 감리교는 지역분할을 한 후 
그 지역내의 교인들을 바꾸기 시작했다. 
선교지 분할과 교인들의 교환은 한국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발현이었다.
성서공회 : 
1889년 문서선교를 위해 '죠선성교서회'가 조직되어 연합찬송가 발행,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 공과 등을 한국어로 출판하였고 
1910년에 신약성경이 완역, 구약도 1911년에 완성, 출판되었다.

 

출처 : https://blog.daum.net/parkland/2769196?category=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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