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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강 애가의 결론(5:16-17)

by 【고동엽】 2022. 4. 16.

제32강 애가의 결론(5:16-17)

 

5:16-17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본문은 암5:1∼17의 마지막 결론이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아모스 5:1∼17을 "애가"라는 제목으로 계속해서 공부해왔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5:1∼17 전체의 구조는 X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3절까지는 애가, 4∼6절까지는 권면, 7절은 책망, 8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는 찬미, 8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니라"는 구절이 클라이맥스로 전체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해서 순서가 거꾸로 다시 반복됩니다. 9절은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는 찬미, 10∼13절은 책망, 14∼15절은 권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16∼17절은 애가로 되어 있습니다.
16∼17절의 애가는 문맥상으로 한편으로는 1∼3절에 있는 애가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앞에 있는 14∼15절의 권면과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16∼17절을 공부하면서 이쪽저쪽을 다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러면 우선 1∼3절에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봅니다. 1∼3을 읽어봅니다.
(암5:1∼3)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1절은 애가의 서론, 2절은 애가의 가사, 또는 내용, 그리고 3절은 애가의 이유입니다. 그 다음에 16절을 보십시다.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서로 연결이 잘 됩니까? 잘 안됩니까? 연결이 아주 잘 됩니다. 16절 제일 서두에 나오는 접속사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라는 것은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앞에 나오는 어떤 원인과 이유에 의해서 뒤에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는 접속사가 "그러므로"입니다. 예컨데 "나는 오늘 아침을 많이 먹었다. 그러므로 배탈이 났다"고 할 때 밥을 많이 먹은 것은 원인이고, 결과는 배탈입니다. 오늘 본문에 경우 앞에 나오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3절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천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 명만 남고." 다시 말해서 900명의 인원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또 "백 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 명만 남으리라." 90명이나 되는 인원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러므로 나타난 결과가 16절입니다.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울음과 애곡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인이 3절에 있는 죽음이고, 그 결과는 16절에 있는 울음과 애곡으로, 3절과 16절이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연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두번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16∼17절을 바로 앞에 있는 14∼15절을 연결시켜서 해석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에 대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14∼15절을 제가 한번 천천히 읽어볼 테니까 그러므로에 대한 이유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암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여러분, 연결이 잘 됩니까? 안됩니까?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14∼15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권면을 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너희를 긍휼히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선을 구하도록 해라." 이렇게 실컷 권면하고 나서 그 다음에 16절에서 "그러므로"라고 하면서 그 결과로 울음과 애곡이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두어서는 연결이 도무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 부분이 X형 구조로 되어 있어서 본래는 이 16∼17절이 1∼3절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3절과 16∼17절을 연결하지 않고 이와 같이 분리해서 16∼17절을 14∼15절 뒤에 애가의 결론으로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는 줄 압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봅니다.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14∼15절에 기록된 권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들었겠습니까? 잘 듣지 아니했겠습니까? 안 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들었더라면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해서 공의를 세우라는 권면을 끝내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16∼17절에 있는 말씀과 계속해서 연결이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내 권면을 듣지 않고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이스라엘 온 땅에 울음 소리가 진동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결과는 울음 소리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결은 그렇다 치고, 왜 16∼17절이 14∼15절 뒤에 오겠습니까? 14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또 15절 하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희망을 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과 17절은 여기에 대해서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14∼15절의 하반부에 기록된 희망적인 말씀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김치 국물을 너무 많이 마시고 있지 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10∼13절에 기록된 불의와 부정을 저질렀기에 저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 정리를 해봅니다. 16∼17절은 X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1∼3절을 연결시켜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그러므로"에 대한 원인은 3절에 나오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16∼17절에 나오는 울음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록된 순서에 따라서 생각해본다면 조금 논리를 비약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공의를 행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은 그 권면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16∼17절을 읽어가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보니까 하나님을 무슨 말로 표현을 했습니까?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주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여!"라고 부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십니다. 인간의 생명도 그분의 손에 달려 있고, 나라의 흥망성쇠도 다 그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대통령이 주인입니까? 국민이 주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누구에게 있습니까?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이 되십니다. 여러분, 가정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우리집 주인양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집의 주인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가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일만 만(萬) 군사 군(軍)자를 씁니다. 그러면 만군의 하나님이 거느리는 군사가 누구입니까? 이 말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악인을 무찌르시고 심판하실 때 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암3:13∼15)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아울러 하나님께서 의인을 돌보시고 보살피실 때 사용하는 칭호이기도 합니다.
(암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아무튼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칭호는 하나님이 전쟁의 당사자가 되어서 싸우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이 거느리시고 싸우시는 군사가 과연 누구냐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한 가르침을 주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의 군대를 가리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이니까 해당되지 않겠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천체, 곧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가리킬 때도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재, 즉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군사로 쓰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엄을 잘 전달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여러 칭호 가운데 특별히 우리가 언약적 칭호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여호와"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그 언약, 약속,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고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씀이 주는 뉘앙스가 대단합니다. 우선, 하나님은 만유의 주재로서, 모든 것의 주가 되시므로 만물을 마음대로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가 있는 수많은 군사가 항시 대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본질상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변역치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분이 이제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가만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6∼17절에 보면 울음이 터져나오는 장소가 세 군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1) 모든 광장, 2) 모든 거리, 3) 모든 포도원입니다.
"모든 광장"이라고 했습니다. 광장은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 광장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문 안에 넓은 공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모여서 장사도 하고, 모임을 갖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성문은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정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든" 광장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문 안에 있는 공터 이외에도, 성전 뜰이라든지, 또 시골의 타작 마당 등이 다 포함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울음 소리가 모든 광장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거리"에서도 난다고 했습니다. 집과 집 사이의 거리거리마다 역시 울음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람이 그만큼 많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집 저집에 안 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많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로 울음 소리가 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포도원에서도 운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안에서만 우는 것이 아니고, 성밖 포도원에서조차도 울음 소리가 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음이 온통 나라 구석구석에, 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본시 포도원이라고 하는 곳은 울음이 있는 곳이 아니라,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입니다.
(사16:10) 즐거움과 기쁨이 기름진 밭에서 떠났고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 이는 내가 그 소리를 그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제는 포도원이 다 황폐해져서 포도 소산이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 있습니다. 대적이 지나가면서 사람을 다 죽이고, 포도원도 다 짓밟고 가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울음이 터져나오는 세 장소를 들어서 이스라엘에 있을 슬픔을 강조했습니다. 그 다음에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있을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서 울음과 관계되는 단어를 몇 번 사용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운다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 도합 몇 번 나옵니까? 16∼17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여러분은 운다는 것과 관련되는 말이 몇 번 사용되었는지 손꼽아 보시기 바랍니다.
(5:16∼17)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일곱 번이 사용되었습니다. 짤막한 말에 울음과 관련되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애절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호라 오호라"라고 하는 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사람이 죽었을 때 상여꾼이 지나가면서 곡하는 소리입니다. "오호라 오호라" 딱 두 번만 하고 끝낸 것은 아닌 줄 압니다. 계속해서 장례가 끝날 때까지 반복을 하겠지요.
그 다음에 세번째로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있는 슬픔을 더욱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직업적인 울음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니까 누구를 불러다가 울게 한다고 했습니까?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울음꾼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직업적인 상여꾼이 있었지만, 옛날 이스라엘도 슬픔을 최대로 표시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삯을 주고 울게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대하35: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렘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눅23:27∼28)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런데 보통 보면 우리 나라도 그러했습니다만 상여꾼들이 나갈 때 울음꾼들이 있고, 거기에 동원되는 악기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무슨 악기가 동원됩니까? 나팔입니까? 그런데 옛날 이스라엘은 어떤 악기가 동원이 되었을 것 같습니까?
(렘48:36)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같이 소리하며 나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하여 피리같이 소리하나니 이는 그 모았던 재물이 없어졌음이니라
(마9: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장례식에는 피리가 동원이 된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암8:10을 찾아봅니다.
(암8:10) 너희 절기를 애통으로 너희 모든 노래를 애곡으로 변하며 모든 사람으로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게 하며 모든 머리를 대머리 되게 하며 독자의 죽음을 인하여 애통하듯 하게 하며 그 결국으로 곤고한 날과 같게 하리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당시 장례식 관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옷은 어떤 옷을 입었습니까? "굵은 베."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서 머리는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싹 밀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슬픔을 더욱더 고조하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가슴을 치기도 하고, 옷을 찢기도 하고, 먼지를 머리에 뒤집어쓰기도 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울음꾼 이외에 또 누구를 불러다가 울게 한다고 했습니까? 농부를 불러다가 울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 구태여 농부를 불러서 울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그 이유를 검토해볼 수 있습니다. 농부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더 우렁차기 때문입니까?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어서 울음꾼이 부족하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죽은 사람이 많아서 울음꾼이 모자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이러니한 일일 것입니다. 가난한 농부들, 다시 말해서 자기 재산을 강한 자에게 다 빼앗긴 농부들이 자기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자들의 죽음을 애곡하는 데 동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겉으로는 울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죽음은 도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도, 시골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온 땅에 죽음이 쫙 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제일 마지막 가능성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전역의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 가지 표현 방법을 동원을 했습니다.
1) 지역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첫째, 모든 광장, 둘째, 모든 거리, 셋째, 모든 포도원에서 울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2) 울음에 관계되는 용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3) 직업적인 울음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7절 하반부를 봅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이라는 말은 이유를 나타내주는 접속사입니다. 모든 광장에서, 모든 거리에서, 모든 포도원에서 죽음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로 지나가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병이나 대적이 아닙니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각처에 애곡이 있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4:12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4: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싸울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경고에 따라서 이제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지나가실 때에 죽음과 함께 울음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언제였습니까? 출애굽할 때였습니다.
(출11: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출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과거에는 하나님이 애굽을 지나가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는 것을 보시고 넘어가셨습니다. 그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아무런 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나가실 때 애굽 백성의 집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망이 있었습니다. 집집마다 곡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애굽 백성이 곡하듯이 이제는 누가 곡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애굽 백성을 치시듯이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게 된 것입니다. 그 옛날 히브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출애굽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180도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각처에 죽음이 있는 이유입니다.
17절 마지막 부분을 봅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전달자 양식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날 처참한 상황이 너무나도 분명한 일임을 전달자 양식에 의해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대한 심판은 아모스가 자신의 감정과 분노에 의해서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어디까지나 전달자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그 말씀 그대로 될 것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을 몇 가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나중이 처음보다 못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시작은 좋았습니다. 저들은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애굽 땅을 지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애굽 백성의 집에서 곡소리가 나면서 자신들이 해방의 큰 기쁨을 누렸던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작은 좋았지만 끝은 어떻게 됩니까?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작이 귀하기는 하지만 끝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초지일관하고 시종여일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이 되서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그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이스라엘의 사울 왕은 키가 다른 사람보다도 어깨 위로 머리 하나가 더 있는 정도였고 힘이 세고 모든 것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추대할 때 모든 백성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세웠지만 나중에 스스로 자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처음에는 12제자 가운데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돈궤를 받아서 관리하는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생애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직분받는 것이 참 귀합니다. 교역자로서, 또 교회를 위해 이런저런 직분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직분을 잘 감당해서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딤후4:7에 있는 말씀과 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 인생길에서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끝까지 우리가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 옛날 애굽 백성들은 약한 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가심에 따라 큰 울음 소리가 저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겪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큼은 그런 짓을 되풀이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쉽게 잊어 버린다고 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과거는 잊어 버리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억압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저들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저들 가운데로 지나가는 심판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악을 심지 말고, 언제나 기쁨으로 선을 심어야겠습니다. 미움을 심지 말고, 사랑을 심어야겠습니다. 게으름을 심지 말고, 성실을 심어야 합니다. 거짓을 심지 말고, 정직을 심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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