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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강 의식주의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책망(1)(5:21-24)

by 【고동엽】 2022. 4. 16.

제34강 의식주의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책망(1)(5:21-24)

 

5:21-24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먼저 5:21∼27의 전체적인 내용을 개괄적으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21∼23절에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것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21절에는 절기와 성회, 22절은 제물들, 23절에는 노래와 비파 소리, 곧 하나님께 찬미하는 행위입니다.
2) 24절에는 하나님이 실제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암5:24은 아모스의 중심 주제와 같은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께서 꼭 암송하시면 좋겠습니다.
3) 25절에는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실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에서 열거한 그런 것들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인도해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4) 26∼27절에는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6절에 나오는 식굿과 기윤이라는 것은 이방신들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모스가 말하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공법과 정의를 구현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잡신들을 섬기는 이방 나라 족속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질적인 변화 없이 계속해서 가증스러운 행위를 계속한다면, 이 땅을 떠나서 이방 나라에 가서 마음껏 그들이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방 나라에 가되 곱게 가는 것은 아니지요. 마지막 27절에 있는 말씀처럼 사로잡혀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출애굽했지만 이제는 우상숭배가 만연하는 곳으로 포로가 되어서 끌려가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21절에서 24절까지 공부를 하고 다음 시간에 마지막 부분을 공부하겠습니다. 우선 21∼24절을 내용상 이등분을 해보면 어디를 자를 수 있겠습니까? 21∼23절을 자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 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을 한번 읽어봅니다.
(5: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21절에 동사가 세 개가 나옵니다. 1) "미워하여," 2) "멸시하며," 3)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이 세 단어 모두가 어감이 강한 단어입니다. 또 이 세 단어가 한꺼번에 사용된 것은 아주 특이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 일인지를 단적으로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거리에 대해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첫째로,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똑같은 단어가 5장에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5:10과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로 미워해야 할 악은 미워하지 않고, 그 대신에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 곧 바르게 판단하는 자를 미워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미움과 증오가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두번째 단어는 "멸시한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미워한다는 단어처럼 단순히 내적인 상태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무엇인지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지고 몸이 움츠려드는 등 외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마지막 세번째 단어는 "기뻐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절기나 성회를 기쁘게 열납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상식을 뒤엎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기뻐한다"는 뜻으로 번역된 단어가 본래는 냄새를 맡는다, 흠향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원문의 뜻을 잘 표현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21절의 제일 끝에 나오는 단어는 우리의 얼굴 중에서 무엇과 관련되어 있겠습니까? "흠향한다,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어디와 관련이 있습니까? 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절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돌아보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은 눈과 관련이 있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무엇과 관련이 있습니까? 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코, 눈, 귀의 세 기관과 관련이 되도록 단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단어를 하나 하나 선택하는데도 뜻 없이 선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다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썼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할 때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있는 것임으로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가 다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새기면 새기수록 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21절에는 하나님께서는 코를 막으시고, 22절에서 눈을 감으셨고, 23절에서는 귀를 닫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감정을 가지셨는지 여러 가지 동사를 사용해서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코를 막고, 눈을 감고, 귀를 한번 막아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질식해서 죽을 것 같지요? 하나님의 심정이 곧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거리에 하나님의 심장이 아마도 터질 것 같으셨을 것입니다.
21절로 돌아갑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멸시하시며,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너희 절기와 너희 성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에는 절기가 단수로 번역되고, 성회가 복수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 복수입니다. 절기도 하나의 절기가 아니라, 절기들, 곧 여러 개의 절기라는 것입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삼대 절기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1) 유월절, 2) 오순절(맥추절), 3) 수장절(초막절)입니다.
(출23:14∼17)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출34:23)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신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삼대 절기가 되면 유대인들은 한 자리에 모입니다. 아모스 당시에 남방 유다 왕국 사람들은 어디에 가서 모이겠습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모이겠지요.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로 갔겠습니까?
(암5: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위에서 보는 것처럼 금송아지가 있는 벧엘로 가거나 길갈, 혹은 남방에 있는 브엘세바까지 순례의 여행을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한다"는 말씀은 절기 그 자체라기보다는 절기를 당해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성회는 언제 열리는 것입니까?
(신16:8) 너는 육 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레23:34∼26)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와 같이 큰 절기의 끝날에는 그 절정으로서 성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단순히 절기들과 성회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단어 하나가 더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멸시하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시는 절기들과 성회들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시지 아니하나니." 아모스가 공격하고 있는 것은 절기 그 자체가 아닙니다. 또 성회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율법에 분명히 절기와 성회를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모스가 질책하고 있는 것은 "너희" 절기와 "너희" 성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드리는 껍데기 뿐인 의식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아니하시고 미워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시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22절로 넘어갑니다.
(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절기 때 성회로 모이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립니까? 제물을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 열납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실 뿐더러 아예 돌아보시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제물의 종류가 세 가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번제, 2) 소제, 그리고 3) 화목제입니다.
우선, 번제(燔祭)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번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일부만 태우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몽땅 다 태우는 것입니까?
(레1:9)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1:13)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1:17) 또 그 날개 자리에서 그 몸을 찢되 아주 찢지 말고 제사장이 그것을 단 윗불 위의 나무 위에 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남김없이 몽땅 다 태우는 것이 번제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을 한다는 것을 상징해줍니다.
두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소제(素祭)입니다. 여러분, 소 자가 무슨 소 자입니까?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본래의 뜻은 "흴 소"입니다. 하얗다는 것입니다. 예컨데 소복을 입는다고 하면 하얀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제가 또 물어봅니다. 우리가 손님을 청해놓고 대접할 때에 이런 말을 종종 쓰지요. "소찬이지만 많이 드십시오." 이때 소찬(素餐)이라고 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대찬의 반대입니까? 아닙니다. 이때도 똑같은 소 자를 씁니다. 그때 소 자는 채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해공군이 아니라 순전히 육군으로 이루어진 반찬, 즉 채소와 푸성귀로 된반찬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소제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마디로 피 있는 제사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피 없는 제사입니까? 피 없는 제사입니다. 곡물, 또는 농산물로 드리는 제사가 소제입니다.
그러면 소제는 어떻게 드립니까?
(레2:2)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2:9) 그 소제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2:12)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
위에서 보니까 소제는 단 위에서 불살라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화제, 즉 불에 태워서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번제처럼 몽땅 다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화목제(和睦祭)입니다.
(레7:11∼18) 여호와께 드릴 화목제 희생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 그 전체의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그것을 화목제의 피를 뿌린 제사장들에게로 돌릴지니라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 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화목제는 세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감사제와 소원제와 자원제입니다. 화목제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상징하는 제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가 중요한 것을 물어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세가지 번제, 소제, 화목제 가운데서 제물을 바치는 자가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가 무엇입니까? 화목제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몽땅 불에 태우지만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함께 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래서 22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영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셨는가 보세요.
(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왜 기름지고 살진 번제나 소제라는 말은 없고, 오직 화목제 앞에만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라고 묘사했겠습니까? 자기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살지고 좋은 것으로 잡고 그 나머지는 어떻게 했습니까? 뻔할 뻔자입니다. 대충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지를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냐는 것입니다. 받지 아니하실 뿐더러 돌아보시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쳐다보시기조차도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1절을 보니까 절기와 무엇으로 모였습니까? 성회로 모였습니다. 22절에 보니까 무엇을 드렸습니까? 각종 제물을 드렸습니다. 23절에서는 무엇을 한다고 했습니까? 노래 소리, 비파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것은 성회로 모여서 무엇을 하는 것과 같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노래 소리가 무엇입니까? 21절에서는 성회로 모였고, 22절에서는 제물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23절에서 말하는 노래 소리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일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렇게 서로 각 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파는 요즘의 오르간이나 피아노와 같이 그 당시에 반주해주는 악기를 가리킵니다. 6:5을 한번 보세요. 그 당시 사람들은 비파에 맞추어서 노래를 불렀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암6:5)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비파의 줄이 몇 개 있습니까?
(시33:2)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의 역사가였던 요세푸스의 역사책을 보면 열두 줄짜리 비파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비파는 현악기로서 줄을 튕기면서 노래를 부르는 악기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그칠지어다"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멈추라는 것입니다. 아주 강한 뜻입니다. 단순이 싫어하는 정도의 감정 표시가 아니라, 즉시 뚝 그치라는 것입니다. 매우 긴급한 상황인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에는 그것이 아름다운 찬미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시끄럽고 듣기 싫은 소음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즉시 그 시끄러운 소리를 멈추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러야 할 것은 비파 소리에 맞춘 찬미가 아니라 무엇이겠습니까? 5:1에 있는 단어로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불러야 할 것은 애가입니다. 장송곡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뚱땅거리면서,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이러고 앉아 있으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하시겠습니까? 스톱!하라는 것입니다. "즉시 그 노래 소리를 그칠지어다. 비파 소리도 내가 귀를 막고 듣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내용과 비슷한 말씀이 기록된 곳이 있습니다.
(사1:10∼17)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껍데기 뿐인 의식적인 종교 행위는 열납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바로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5:24)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여기 24절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무엇이 꼭 선결되어야 하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세 가지, 즉 절기와 성회, 제물, 찬미와 같은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가지고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공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경배,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배는 예배자의 마음속에 공법과 정의가 자리잡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5: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법을 무엇으로 변하게 했습니까? 인진, 곧 독이 있어 사람을 죽이는 쓴 쑥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정말 공법의 참된 기능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물같이 흘릴지로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고 하였습니다. 하수라고 하는 것은 1년 사시사철 메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강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와디"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와디는 우기에 비가 오면 물이 흘러내리다가 비가 오지 않을 건기에는 바짝 말라붙어 버리는 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1년 내내 끝임없이 물이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강을 의미해줍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공법과 정의를 한두 번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끝임없이 넘치도록 실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종교의 형식만 가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의를 소유하는 것만이, 그것도 넘치는 하수와 같이 계속해서 끝임없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가르침들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4:23에 보면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령이라는 말은 형식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껍데기 뿐인 예배가 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령은 인간 요소 중 가중 높고 가장 깊고 가장 고귀한 부분입니다. 그런 것을 다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진정이란 참된 것입니다. 거짓 것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해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롬12:1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과거에는 우리 몸이 더러움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결의 생활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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