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제33강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릇된 기대(5:18-20)

by 【고동엽】 2022. 4. 16.

제33강 여호와의 날에 대한 그릇된 기대(5:18-20)

 

5:18-20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지금까지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전에서 애가를 지어서 불러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어떠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한번 가정해봅니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여러분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여러분이 아직도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데 여러분이 죽었다고 하면서 장송곡을 처량하고 구슬프게 부른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내가 이와 같이 사지가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데 내가 죽었다고 장송곡을 불러? 저런 미친 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은 아모스를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들은 14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서 자기들은 번영과 부유함,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군사적인 강성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대적이 바로 여호와의 적이 됨으로써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 날이 곧 여호와의 승리의 날이요, 구원의 날로서 찬란하게 빛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잘못된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아모스는 공격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꿈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모스는 세 가지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그릇된 기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18∼20절의 말씀입니다. 두번째는, 저들의 의식주의적, 형식주의적 종교 행위에 대한 기대감입니다. 5:21∼2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절기와 성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드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아모스는 분명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외식적인 제물은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을 뿐더러 돌아보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부강으로 인한 현실적 만족입니다. 6:1∼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군사적으로 안전하고, 물질적으로도 풍성함으로 현실적으로 그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서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마지막 14절에서 군사적으로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은 한 나라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중해서 제일 첫째에 해당되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스라엘의 그릇된 기대감을 아모스가 책망하는 내용을 잠시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구절은 18절에서 20절까지 세 절로 되어 있는데, 내용적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8절은 여호와의 날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9절은 비유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의 실상을 보다 실감있게 설명해줍니다. 마지막 20절은 수사학적 의문문을 사용해서 여호와의 날을 다시 한번 강조를 해줍니다.
그러면 한 절 한 절 읽어가면서 자세하게 공부를 하겠습니다. 18절 말씀을 봅니다.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여기에 보면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책망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항시 문장 제일 앞에 등장합니다. 그리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책망 받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화 있을진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날이란 무엇인지를 굉장히 복잡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면 아마도 책을 한 권을 쓰고도 남을 정도의 분량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학술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기 쉽게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8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을 바로 앞에 나오는 17절과 연결해서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여호와의 날은 정체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17절을 한번 읽어봅니다.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날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날이라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인간들 사이에서 지나가시는 날입니다. 바로 그날은 큰 역사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좋은 의미로 생각을 했겠지요?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 날은 빛의 날, 곧 구원과 승리의 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암2:9) 내가 아모리 사람을 저희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지 아니하였느냐
위에 있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억 속에는 과거의 출애굽을 위시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신원해주시고 대적을 무찔러주신 사건들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 그날, 곧 여호와의 날은 자기들에게 있어서는 승리의 날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모스는 정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심판의 날이요, 어둠의 날이요, 흉한 날이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암2:16)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3:14)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암6:3)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암8:3) 그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 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8:9)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
(암8:13)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단지 꼭 한 군데 그날이 이것들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쓰인 곳이 있었습니다.
(암9:11∼15)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그때에 밭 가는 자가 곡식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산들은 단 포도주를 흘리며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저희가 황무한 성읍을 건축하고 거하며 포도원들을 심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내가 저희를 그 본토에 심으리니 저희가 나의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뒤에 다시 회복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심판의 날이 바뀌어 축복의 날이 되는 것이지요. 이 한 곳을 제외하고서는 여호와의 날이 좋은 의미가 아니라 전부 좋지 못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라고 하는 낱말이 심판의 날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경우를 찾아봅니다.
(사13:6∼16) 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피곤하며 각 사람의 마음이 녹을 것이라 그들이 놀라며 괴로움과 슬픔에 잡혀서 임산한 여자같이 고통하며 서로 보고 놀라며 얼굴은 불꽃 같으리로다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내가 사람을 정금보다 희소케 하며 오빌의 순금보다 희귀케 하리로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그들이 쫓긴 노루나 모으는 자 없는 양같이 각기 동족에게로 돌아가며 본향으로 도망할 것이나 만나는 자는 창에 찔리겠고 잡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겠고 그들의 어린아이들은 그 목전에 메어침을 입겠고 그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 보라 은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금을 기뻐하지 아니하는 메대 사람을 내가 격동시켜 그들을 치게 하리니
(겔13: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겔30:3) 그날이 가까웠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열국의 때이리로다
(욜1:15) 오호라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욜2:1∼2)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습1:7)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습1: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모스 사이에 보는 견해가 서로 달랐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을 했습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승리, 또는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심판, 또는 멸망이라고 정반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아모스는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며." 이 질문이 유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것이 잘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한 마디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18절 마지막을 봅니다.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여기서 그날이란 여호와의 날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의 날의 실상이 무엇인지 비로소 설명해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실상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두움이라는 것은 심판, 또는 재앙과 파멸 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반대로 빛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구원과 승리를 상징합니다. 제가 한번 물어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을 무엇이라고 생각을 했습니까? 저들에게는 한 마디로 빛, 그리고 자기들의 적에게는 어두움이라고 생각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모스가 완전히 180도로 뒤집어놓은 것입니다. 범죄한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그날은 어두움이지 결코 빛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입니다.
19절로 넘어갑니다.
(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아모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한 가지 물어봅니다. 19절에 나오는 사건이 한 가지 사건의 연속입니까? 그렇지 아니면 따로 독립된 두 가지 사건입니까?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사자를 피했다가 그 뒤에 곰을 만나고, 또 그것을 피했다가 뱀에게 물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자를 피했다가 곰을 만난 사람과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린 사람이 서로 다른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두 가지로 따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면 어떤 사람이 손을 벽에 대는 이유가 무엇인지 불분명합니다. 왜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 벽에다가 손을 대겠습니까? 사자를 피하고, 곰을 피했으니 얼마나 기진맥진했겠습니까?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지친 몸을 가눌 길이 없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손을 벽에 대는 것이지요. 이제는 위험을 다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 속에서 또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무서운 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피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기치 못한 위험이 계속 도사리고 있어서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 더 문맥에 부합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자신들이 걸어온 역사적 발자취를 죽 생각해 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용케도 잘 피해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번만큼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아모스의 본래 직업이 무엇이었습니까?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비유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아모스서에 보면 아모스가 자신의 목자 생활을 통해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만 한번 찾아볼까요?
(암3:4)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
(암6: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
(암9: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본문을 조금 더 깊이 살펴봅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제일 첫 단어가 "마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단어가 "같도다"입니다. 여기서 "마치……같도다"고 하는 것의 주체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마치 그런 일을 당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까? 18절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설명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니까 19절에서도 여호와의 날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마치 이러 이러함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라고 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주로 요단 강 근처 숲속에서 사자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렘50:44)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그 외에도 그 당시에는 사자가 상당히 흔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삿14:5) 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삼상17:34)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왕하17:25)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사자를 피했더니 무엇을 만났습니까? 곰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사자가 무서울것 같습니까? 곰이 더 무서울 것 같습니까? 사실은 둘 다 똑같이 무섭습니다. 흔히들 곰이라고 하면 미련하고, 또 둔한 짐승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자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줍니다. 특별히 팔레스타인 지방의 곰은 사자보다도 더 사납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왕하2:24)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사11:6∼9)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에 보면 이리가 공격하는 것은 어린 양입니다. 표범이 공격하는 것은 어린 염소입니다. 사자는 송아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곰은 무엇을 공격한다고 했습니까? 제일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암소를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리보다는 표범, 표범보다는 사자, 사자보다는 곰이 더 힘이 세고 사납다는 것을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호13:7∼8을 찾아봅니다. 거기에 보면 대표적으로 무서운 짐승들이 세 가지 등장합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사자와 표범과 곰입니다.
(호13:7∼8)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 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같이 저희를 만나 그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같이 저희를 삼키리라 들짐승이 저희를 찢으리라
본문을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서 처음에는 사자를 만났다가 용케도 사자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번에는 더 사나운 곰을 만났습니다. 또 그것을 피하려고 죽어라고 도망쳐서 겨우 집으로 들아갔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고 하면서 지친 몸을 가누기 위해 손을 벽에 대고 기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뱀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속된 말로 재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사24:18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24:18) 두려운 소리를 인하여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여기서 뱀에게 물렸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뱀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독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치명적 독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21:6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무엇을 보내서 물게 하셨습니까? 불뱀을 보내서 많은 사람이 물려 죽었던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렘8:17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렘8: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뱀은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뱀에게 물렸다는 말은 사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봅니다. 사자를 피했는데 곰을 만났고, 곰을 피해서 집에 들어왔지만 뱀에게 물렸다는 비유가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죽음이 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도처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사용했습니까? 무엇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도처에 깔려 있는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을 가져오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오히려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습니까? 그래서 "어리석도다," "슬프다"라는 뜻으로 18절 초두에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아모스는 자신의 메시지를 시작했습니다.
20절로 넘어갑니다.
(5: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20절은 18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 "그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는 말씀을 재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20절에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문문의 형태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질문이 몇 개입니까? 두 개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입니까? 아니면 아니오라는 대답입니까? 그렇다는 것입니까? 안 그렇다는 것입니까?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두워서 빛이 없다는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캄캄해서 빛남이 없음이 맞다는 것입니다. 대답은 예입니다. 실제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질문하는 것을 수사학적 의문문(rhetorical question)이라고 합니다.
또 여기에 보면 18절 하반부보다 더 좀더 강한 의미를 주기 위해서 똑같은 단어를 일단 한번 반복했다가 그 뒤에 그것보다도 더 강한 의미의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어두움"이라는 말 대신에 20절에서는 그 어둠을 한층 더 강조해주기 위해서 무슨 단어를 사용했습니까? "캄캄하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깜깜하다는 것입니다. 새까맣다는 것입니다. 매우 어감이 강한 말입니다.
또 한 가지, 18절과 20절에 나오는 빛이라는 단에 대신 20절 하반부에서는 무슨 단어를 한번 더 썼습니까? 빛남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빛과 빛남은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앞에서 빛이라는 뜻은 빛을 발하는 발광체를 말합니다. 뒤에 있는 빛남이라는 단어는 거기서 나오는 광선이나 그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빛이 나는 발광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어스름하게 새어들어오는 한 줄기 광선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칠흑같은 어두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여호와의 날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여기까지 공부하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잠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고전10:12에 있는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굉장한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대적이 되셔서 저들을 이제 곧 치시며 멸망시킬 텐데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일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대적이 되시리라는 사실은 추호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해서 저들은 늘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일한 생각은 이처럼 위험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늘 하나님 앞에 비춰보면서 과연 내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으로 되어 있는지를 조심하면서 떨리는 심정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코람 데오(Coram Deo), 즉 신전의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신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과 같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면서 울던 세리의 모습이 되자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훨씬 더 바람직한 모습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산 믿음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2:26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가증스럽게 여기시면서 저들이 속히 그 행위를 고치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행위 자체는 조금도 바꾸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면서 구원과 승리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계속 가리는 삶을 살면서도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면서 믿는 척하는 교인들과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 행함이 따라오는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큰 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러한 통계가 나왔습니다. 교인 중 20%가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놀러나가고, 비가 온다든지, 할 일이 없을 때나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25%는 기도하는 법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기도를 시키면 교회에 안 나오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또 30%가 평상시에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40%의 교인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50%의 교인은 헌금에 무관심합니다. 70%의 교인이 교회 활동에 기울이지 않습니다. 85% 교인이 아직까지 한 사람의 불신자도 인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100%가 천국에는 다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얌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주여! 주여!"하면서 주님을 속이려고 들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속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속 중심을 환히 들여다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실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을 행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우리의 진실된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