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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강 의식주의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책망(2)(5:25-27)

by 【고동엽】 2022. 4. 16.

제35강 의식주의적인 종교 행위에 대한 책망(2)(5:25-27)

 

5:25-27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 본문 25절에서 아모스는 역사적인 실례를 들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의식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절과 27절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이 결국 어떠한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지를 예언적으로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25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5: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25절은 질문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예!"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니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 소제를 드렸습니까? 드리지 않았습니까? 본문에서 "내게 드렸느냐?"는 질문은 무엇을 유도하고 있습니까?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대답이 "아니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한번 찾아봅니다.
(렘7:21∼2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이와 같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가 원하는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정 사실을 질문으로 만들어 하는 것은 "수사학적인 의문문"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게 드렸느냐?"는 질문이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광야 40년 동안 내게 희생과 소제물을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섭섭하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서 지금 그 일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죄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동안 희생과 소제물을 드리지 않았어도 저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암2:10)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로 차지하게 하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분명히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주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친 제물 때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렘7:22에서 읽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제물을 아예 명하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우선 희생을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는 목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희생이란 피 있는 제사로 동물을 잡아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번제를 위해서, 그 많은 수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목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먹을 물도 제대로 없는데 목축인들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 희생을 드릴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또 소제물은 피 없는 제사, 곧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 소제물이 제대로 바쳐지기 위해서 무엇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정착해서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습니까?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고 살았던 것은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지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로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짐승을 기르는 대신에 하나님은 무엇을 보내주셨습니까?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시내 산이 있는 쪽으로 가다보면 메추라기들이 떼를 지어서 많이 날아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새보다 조금 큽니다. 그리고 땅에 거의 붙어서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물이나 막대기 같은 것으로 쳐서 잡을 수 있습니다. 또 농사를 짓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내주셨습니까? 만나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그와 같은 제사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렘7:23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렘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명하신 그 길, 바른 길, 정의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25절 말씀을 다시 정리해봅니다. 25절이 문맥상 의도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린 적이 있느냐?" 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면서 광야 40년을 인도해주지 않았느냐?"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경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사나 제물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아 알라는 뜻입니다.
26절로 넘어갑니다. 26절을 보십시다.
(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우선 25절에서 설명된 사건은 언제의 사건입니까? 과거의 사건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사건입니까? 미래적 사건입니까? 과거의 사건입니다. 주전 1400년대의 사건입니다. 그러면 26절의 사건은 어떻습니까? 26절 제일 끝 부분을 보면 "지고 가리라"고 했습니다. 미래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주전 722년에 멸망했으니까 25절과 26절 사이에 약 700년의 간격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25절에 있는 "너희"와 26절에 나오는 "너희"는 사실 동일인이 아닙니다. 25절의 "너희"는 지금 아모스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까마득한 선조들입니다. 그리고 26절에 있는 "너희"는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될 수도 있고 그 후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모스가 이 말씀을 한 시기로부터 약 3, 40년 뒤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되었기 때문입니다.
26절 말씀은 해석이 구구하고 대단히 어려운 구절입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다 살펴볼 필요는 없고 꼭 필요한 것만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낯이 익지 않은 단어 두 개가 등장합니다. "식굿"과 "기윤"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 이 단어 옆에 쭈글쭈글한 줄을 그어놓았습니다. 원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식굿과 기윤은 장차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앗수르 사람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입니다. 식굿이나 기윤이나 똑같이 앗수르 말로 하늘에 떠 있는 별의 하나인 토성을 가리킵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토성을 신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식굿과 기윤을 무슨 형상이라고 했습니까? 본문에 보니까 "별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또 여기에 보니까 식굿과 기윤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너희 왕 식굿"이라고 했습니다. 식굿을 왕이라고 했습니다. 또 "너희 우상 기윤"이라고 했습니다. 기윤은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우상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으로 정의를 내리면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26절 말씀을 조용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 여기에 보면 세 요소가 나옵니다. 첫째 요소는 "인간 자신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왕상14:9) 너의 이전 사람들보다도 악을 행하고 가서 너를 위하여 다른 신을 만들며 우상을 부어 만들어 나의 노를 격발하고 나를 네 등 뒤에 버렸도다
(호8: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호13:2)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공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장색이 만든 것이어늘 저희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두번째 요소는 "만든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왕하17:29∼31)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호8: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세번째는 "신으로 삼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 자신을 위해서 신으로 삼은 형상"이 바로 우상에 대한 정의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을 왕으로 표현했습니다. 옛날 고대 사회에서 인간의 신분 가운데서 제일 높은 지위가 왕입니다. 또 왕은 신처럼 숭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26절 끝 부분에 보면 이러현 형상을 어떻게 하리라고 했습니까? "지고가리라"고 했습니다. 몸의 어느 부분에 지고 갔을 것 같습니까? 머리에 지고 갔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등에 지고 갔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어깨에 지고 갔겠습니까?
(사46:6∼7)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여호수아 6장에도 보면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도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깨에 둘러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지고 가리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27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로잡혀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서 더러운 이방신을 지고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26절이 궁극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면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 곧 공법과 정의는 실현하지 않고 껍데기만 드리는 제사는 잡신들을 섬기는 이방 나라 족속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질적인 변화없이 계속해서 가증스런 일을 행한다면 이제는 이 땅을 떠나서 이방 나라에 가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방에 갈 때 곱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로잡혀서, 포로가 되어 이방신들을 지고 처량한 신세로 끌려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보세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출애굽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여호와의 성막을 지고서 기쁜 마음으로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스라엘이 앞으로 겪게 될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의 참담한 모습입니다. 이제는 우상 숭배가 만연한 이방의 포로가 되어서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이방의 잡신들을 어깨에 지고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성막을 지고서 가나안 땅을 향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이 아닙니다. 이방의 잡신을 메고서 이방 나라에 끌려가는 포로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26절을 넘어가기에 앞서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행7:42∼43을 한번 찾아봅니다.
(행7:42∼43)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는 스데반 집사가 유대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니까 스데반이 선지자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스데반이 인용한 선지자란 아모스입니다. 그런데 내용이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비슷하면서 다른 부분이 있습니까? 약간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다릅니까?
우선 식굿과 기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식굿이라는 말 대신에 "몰록의 장막"이라고 했고, 기윤이라는 말 대신에 "신 레판의 별"이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바뀌어졌습니까? 우선 신약 성경 속에 기록된 레판은 애굽에서 토성에 해당하는 이름입니다. 여러분, 신약 성경이 어떠한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어떤 말로 되어 있습니까? 히브리어로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70인경}이라고 합니다. 70인경이라는 말은 70인이 70일 동안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다고 해서 나온 말입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히브리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70인경}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70인경}에서 기윤을 레판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70인경}이 어디에서 번역되었는지 아세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니 앗수르 말인 기윤이 애굽 말인 뜩같은 뜻의 레판으로 바뀌어도 별반 이상한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떡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떡이라는 말보다는 빵이라는 말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각 나라의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식굿이 몰록의 장막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식굿이라는 단어 앞에 너희 왕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왕이라는 단어는 몰록과 철자가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식굿을 그대로 히브리어로 쓰면 장막이라는 단어와 철자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식굿은 장막으로, 왕은 몰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식굿과 기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살펴보고, 또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모스서에서는 27절에 보니까 포로로 끌려가는 곳이 어디로 되어 있습니까? "다메섹 밖으로." 그러나 스데반은 이것을 "바벨론 밖에"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아모스는 미래적인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스데반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모스가 막연하게 "다메섹 밖으로"라고 했던 것을 스데반은 구체적으로 "바벨론 밖에"라고 지적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한 도시였습니다.
(왕하17:23∼25)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 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 다음에 우리는 아모스가 본시 말했던 의도와, 이것을 인용한 스데반의 의도가 다소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공의를 행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이방 나라에 끌려갈 것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로서 예언적으로 이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우상을 숭배한 것으로 정죄하는 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서로간에 다른 의도로 사용한 것입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상황과 문맥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의도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27절로 넘어갑니다.
(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보면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되리라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게 될 종말이 무엇입니까? 5:18에 보면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게 될 화가 27절에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로잡혀 가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끌고 가는 일에 총사령관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너희를"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방하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다메섹 밖"입니다. 그때의 처참한 광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암4:2)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
(암7: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 여호와의 날이 과연 빛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빛이 아니라 어두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가 애가를 지어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27절 제일 마지막 부분에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여기에 기록된 말씀과 심판의 확실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으로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묘사되어 있고, 그 반면에 이방 잡신들은 26절에 보니까 그저 지고 가는 신,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만든 신으로 그 묘사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두 가지 교훈을 잠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 새벽기도로부터 시작해서 각종 예배 시간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오히려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 헌금을 많이 드리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힘에 과할 정도로 많이 드리면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암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열심히 찬미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암5:23)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24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해서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코메디언이 있었습니다. 연극 도중에 건물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관객들에게 불이 났으니 어서 피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에 있는 관객들이 모두가 웃으면서 잘한다고 깔깔대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모두가 불에 타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세지말이라고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날이 매우 가까웠다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 옛날 소돔 성안에 살던 롯의 사위들은 심판이 임박했다는 말을 듣고도 농담으로 여기고 웃었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유황불 속에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나 나까사끼에 원자탄을 투하하기 전에 그 지방 사람들에게 공중전단을 뿌렸습니다. "몇월 몇일 몇시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엄청난 위력의 폭탄이 히로시마나 나까사끼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지정된 지점에서부터 50㎞밖으로 즉시 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일본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해지기 쉽고 마음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사40:8에 있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인간의 모든 영화는 풀과 같이 마르고 꽃과 같이 시들고 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영히 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늘 그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제는 깰 때가 되었습니다. 깨어 근신하여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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