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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행전 녹취 2

by 【고동엽】 2022. 3. 27.

세 번째 유대교는 철저하게 성전 중심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성전에 있는 겁니다. 성전을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집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성전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들이 어디에 있건 간에 그들이 함께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쉽게 얘기하자면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성막의 신학이 다시 회복된 곳이 바로 초대교회인 겁니다. 성막과 성전을 구분할 때 성막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뭡니까? 이동식 성소라는 겁니다. 백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겁니다. 성전은 고정식 건물입니다. 성전이 건축되고 나서부터 사람들의 뇌리 속에 어떤 생각이 지배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된다, 여기서 결국 뭐가 강화되는 거냐면 이원론적인 신학이 강화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되는 겁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성전이 아닌 곳에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신학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강화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유대교와 달리 초대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 대다수 초대교회가 가정을 중심으로 모임을 가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네 번째,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중요한 차이가 뭐냐면 유대교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성부 하나님 만이 하나님인 겁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성부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 그리고 오순절에 역사한 성령 하나님 모두가 하나님이시다 라는 삼위일체의 신학을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유대교와 초대교회는 크게 네 가지 신학적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똑같은 구약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 두 번째 남성 중심적인 유대교와 달리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이해하는 즉 여성에 대한 위상을 굉장히 높인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세 번째 유대교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 그들과 주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서 어디에서건 주님과의 만남이 가능하다 라는 것이 초대교회의 주장입니다. 네 번째로 유대교는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와 유사한 것이 이슬람입니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한 분 하나님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뭘 고백하는 겁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한 몸 되심 삼위일체를 고백합니다. 이 네 가지 중요한 신학적 차이로 말미암아 유대교로부터 초대교회가 끊임없이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외부의 유대교와 경험했던 신학적 갈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이런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만 신학적인 갈등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안에서도 신학적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면 율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율법 중에서도 할례, 음식 정결법, 절기 준수와 같은 제의법, 이 제의법을 여전히 우리가 준수해야 될 것인가,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가 라고 하는 이슈와 관련해서 초대교회가 오랜 시간 갈등을 한 겁니다.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이 뭐냐면 우리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왔던 할례를 받아야 된다, 음식 정결법 준수해야 된다, 절기 준수 해야 된다, 이런 입장을 견지한 곳이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그 예루살렘 교회 최고 지도자가 누구죠?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에 이 예루살렘 교회가 초대교회 전체의 90%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예루살렘 교회와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한 이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뭘 주장하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거지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지켜왔던 할례, 음식 정결법, 절기 준수 이런 것들을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들에게 율법과 제의를 강요하지 말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가장 대척점에 있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오랜 시간 동안 율법 폐기론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중간에서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는 바울과 같은 입장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면 베드로입니다. 처음에는 베드로도 예루살렘 교회와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바꿔 얘기하자면 할례를 받지 않고 음식 정결법을 지키지 않은 이방인 고넬료와 그 집안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 경험했던 똑같은 성령을 받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뭘 깨달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을 받는 것은 겉모습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 겉모습이라는 것이 뭐냐면 어떤 민족이냐 할례를 받았냐 받지 않았냐 음식 정결법을 지켰냐 지키지 않았냐 이것에 따라서 주의 성령이 임하거나 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에 성령 강림 받았던 사람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 강림이 임한 겁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와 그의 집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이 사람들 모두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할례를 받았냐 받지 않았냐가 성령 강림에 결정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가 중요한 겁니까? 할례를 받았냐 받지 않았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고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는 것을 바울은 주장한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랜 세월 지켜왔던 할례 받아야 된다, 음식 정결법 지켜야 된다, 절기 준수법 신실하게 해야 된다 이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겁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중요한 발언권을 갖고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와 대척점에 있던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 중간에서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 편을 들다가 나중에는 사도 바울의 입장으로 선회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점점 밀려나게 된 겁니다. 나중에는 로마에 가서 베드로가 사역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외적으로는 유대교와의 신학적 갈등이 있었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율법, 그 가운데 제의법을 여전히 준수해야 하는가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런 이슈를 가지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학적인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이제 사도행전 본문을 보면서 하나씩 설명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펴 주시고 성경을 보면서 하나씩 공부해나가면 좋겠습니다. 먼저 1장 1절에 데오빌로여 라는 수신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 데오빌로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가진 개인이다 라는 입장이 있고 또 하나는 데오빌로라는 것은 신앙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나누어 보시면 데오라고 하는 것은 신을 가리키고 빌로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뜻합니다. 데오빌로라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데오빌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개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 공동체에게 누가가 이 편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두 가지로 다 해석을 합니다. 1장 8절의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1장 8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1장 6절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1장 6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뭐라 질문합니까? 주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주님이 승천하기 전까지 제자들의 유일한 관심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유대 민족 중심적 사고에 머물러 있던 겁니다. 7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주권을 회복할 때가 이때이니이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바로 1장 8절입니다. 주의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너희가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바꿔 얘기하자면 유대 민족 중심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사도들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될 사람들이다 라고 하면서 제자들의 사명을 일깨워주고 계신 겁니다. 1장 8절에 보시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결과적으로 뭐에요?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된 우리들을 위해서 보내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고 성자의 영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그의 백성된 우리들을 돕기를 원하시는데 무엇을 돕기를 원하시는가, 크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하나가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간절히 알기를 원합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깨우쳐 주십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기 위해 갈망합니다. 그때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온전히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는 분이 누구냐면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그다음에 우리에게 어떤 열망이 생깁니까? 내가 깨닫게 된 말씀 따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뭘 깨닫게 되냐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렇게 큰데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고 우리의 의지가 너무나 박약하다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에스겔 36장 26~27절, 로마서 8장 4절 말씀입니다. 단순하게 압축시켜 설명하면 성령 하나님은 그의 백성된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신데 주로 무엇을 도우시는가, 첫째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고 두 번째 깨달은 말씀 따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우리의 순종을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성령은 우리로하여금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열망하는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겠죠. 성령은 우리의 순종을 도와주는 분이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자가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충만인 것이고 순종 충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열망으로 충만한 자가 결국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예수의 증인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뭐냐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권능을 허락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성령 충만하게 되면 일상의 삶에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다음에 1장 15절을 보시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120명입니다. 이 120명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120이라는 숫자를 나누면 12 곱하기 10입니다. 12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고 여기 10이라는 숫자는 뭐냐면 유대인들이 지역에 회당을 세울 때 회당을 세우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20세 이상 남성 10명이 있을 때 회당을 세울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는 한 지역이 말씀 가운데 온전하기 위해서는 20세 이상의 남성 10명이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120명의 문도가 모여 있었다 라는 것은 뭐냐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할 수 있는 12지파, 그다음에 한 지파당 10명, 회당을 대신할 교회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온전한 숫자가 모여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12지파 곱하기 10, 총 120명의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기를 사모한 것, 이것이 바로 1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저희가 1장까지 보고 다음 시간에 2장부터 초대교회가 어떤 아름다운 역사의 걸음을 내딛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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