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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사도행전 녹취 4

by 【고동엽】 2022. 3. 27.
성령이 임했을 때 초대 교인들이 모여있던 장소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하나는 솔로몬의 행각 같은 성전의 어느 공간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초대 교인들이 모였던 곳은 마가의 다락방이고 마가의 다락방에 그들이 모였을 때 주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왜 성전의 어느 한 장소라고도 생각하냐면 초대 교인들이 방언을 할 때 세계 각지로부터 온 사람들이 초대 교인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목격을 하는 것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처럼 어느 한 집에 있을 때 그것을 목격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전의 어느 한 공간처럼 오픈된 공간에 초대 교인들이 모여있을 때 목격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가 성전에 모이기를 여전히 힘썼습니다. 그들이 오픈된 공간에 모여있을 때 주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고 주의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을 때 그들이 방언을 했고 그 방언을 하는 것을 세계 각지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사람들이 목격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맥락에서 보면 어느 한 개인의 집에 모여있었다면 어떻게 세계 각지로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초대 교인들이 방언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까, 그렇다기보다 성전에 모여있을 때 그들이 방언을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초대 교인들이 방언한 것들을 목격한 것이 아닐까 라고도 주장되어 집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이 임했던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사사기 같은 곳을 보시면 하나님의 영이 특정한 사사에게 임합니다. 구약 시대에도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개인에게 임했거나 부분적으로 임했거나 잠정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성령이 어떤 개인에게 임했다고 해서 계속해서 그 개인에게 주의 성령이 역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구약과 달리 보편적으로 그곳에 있던 하나님의 사람 모두에게 임했다 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고 나서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를 하고 그다음에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었던 초대 교인들은 개인의 이기심을 뛰어 넘어서 물질을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탄생시킨 이야기가 2장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3장부터 8장까지 보시면 초대교회가 유대교로부터 어떻게 분리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 배경 역사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3장부터 8장까지입니다. 초대교회가 처음부터 유대교로부터 나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할례 준수, 음식 정결법 준수, 절기 준수 등을 철저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초대교회와 유대교가 분리하게 되는데 초대교회가 유대교로부터 나오게 된 것을 통해서 우리는 뭘 알 수 있냐면 교회사 2천년의 역사를 보시면 내부 개혁이 성공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기존의 종교 체제가 잘못되고 타락하고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그것을 개혁하려고 했을 때 그 내부 개혁이 성공한 역사가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래 초대교회도 유대교 안에 머물려고 했지만 결국은 유대교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 칼뱅, 쯔빙글리 이런 종교 개혁가들도 처음부터 가톨릭에서 나오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가톨릭은 기존의 체제와 기존의 교리를 사수하려 했습니다. 결국 가톨릭으로부터 개신교회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가 되길 원했던 사람들은 결국 새 부대를 만들었던 것이 바로 교회사 2천년의 현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장부터 8장까지는 초대 교회가 유대교로부터 어떻게 분리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 역사적인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3장부터 8장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3장 앞부분에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가 구걸을 하고 있는 지체 장애인을 만나는 사건, 여기서 베드로의 그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3장 6절입니다. 지체 장애인은 베드로에게 돈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 합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겠다 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체 장애인을 치유하는 모습이 3장 앞부분에 나옵니다. 초대교회가 힘이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초대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깝게도 교회사 2천 년의 역사를 보시면 교회가 은과 금은 넘쳤지만 예수의 이름을 점점 상실하였습니다. 그것이 안타깝게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교회사 2천 년의 역사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도 합니다. 교회가 예수의 이름도 갖고 있고 은과 금도 소유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러면 참 좋겠지만 교회가 은과 금을 소유하게 되는 순간, 은과 금에 집착하는 순간, 예수의 이름, 예수의 능력, 예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상실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지체 장애인을 치유한 다음에 베드로가 솔로몬의 행각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3장 11절 이하에 나오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3장 17절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뭘 그리했다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자기들을 찾아오기를 소망했습니까? 그런데 정작 메시아가 자기들을 찾아왔을 때 대다수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되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아왔지만 그 하나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 예수에 대해 어떤 사건을 저질렀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율법학자, 장로,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얼마나 역설입니까? 입만 열었다면 하나님 사랑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이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정작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심방과 방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의 상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립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뭐라고 하냐면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무지해서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말씀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깨달음, 분별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미명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 일을 열심을 다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누굽니까? 이후에 우리가 보게 될 사도 바울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까? 바울 입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깨우침을 받게 된 거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통해 들려온 이야기는 뭐죠? 왜 네가 나를 괴롭히느냐. 여러분 이때 사도바울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이런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열정과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헌신은 참된 분별력 위에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보시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엄중한 심판이 뭐냐면 영적 인지능력을 붕괴시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말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됩니다. 말씀의 기근에 시달리게 되면 뭐가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면 나에게 유리한 것, 나의 유익에 부합되는 것 이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붙잡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상상하고 내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뜻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 결과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을 때 내가 그동안 만들어 낸 가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진짜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분별력을 갖춘다고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베드로는 뭘 얘기하고 있냐면 너희가 영적 인지력이 붕괴된 결과 결국 너희가 알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진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회개하고 예수가 메시아 되심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 예수에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라는 겁니다. 이것을 담대하게 외친 결과 사도들이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습니다. 그게 바로 4장의 이야기입니다.


4장에 베드로가 재판 받는 이야기를 보면서 베드로가 정말 과거의 베드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전혀 주눅 들어 있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 베드로에게 이런 협박을 합니다. 너 한 번만 더 예수 부활했다는 이야기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벌벌 떨면서 각서 썼을지 모릅니다. 다시는 예수 부활을 선포하지 않겠습니다 라도 각서 썼을 겁니다. 그런데 4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대제사장을 도리어 훈계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당신의 말을 듣는 것 가운데 뭐가 옳은지 말해보라 하면서 대제사장을 훈계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유대교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구원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담보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이것을 4장 12절에서 너무나 용기 있게 선포합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서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변화되는가, 그런데 변화된 베드로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다, 주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초대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있는 참 하나님인 것을 확신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 세상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에만 집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 존재를 다 바치게 된 겁니다. 4장 마지막 36~37절을 보면 바나바라는 중요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입니다. 한 마디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인데 레위 족속입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은 정통 예루살렘, 유대교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과도 너무 가까운 사람이고 디아스포라이기 때문에 이방 세계에 대한 이해도 해박한 사람입니다. 이 바나바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았습니다.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헌금을 바쳤습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로부터 바나바는 더 존경을 받았겠죠. 박수를 받았겠죠. 이것을 보고 시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시기의 결과 결국 죽임을 당한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다음주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강건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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