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도행전 5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나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4장 마지막에 바나바가 자신의 소유를 초대 교회에 헌금한 것으로 인해 초대 교회의 많은 교인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입니다. 우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을 보면서 먼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초대 교회에서 자기 땅이나 집이 있었던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그것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재산 모두를 바쳐야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자신들의 땅이 있었다, 그 땅을 팔았다, 그 가운데 일부를 바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5장에 보시면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땅을 팔았죠, 일부를 바쳤죠, 그런데 사도에게는 자신들이 마치 땅을 판 전부를 바친 것처럼 자신들의 헌실을 과장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문제는 전체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전체를 내야 될 의무가 있던 것이 아닙니다. 일부를 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일부만 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초대 교회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누렸겠습니까. 그런데 아나니나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이 50만큼의 헌신을 했는데 교회에는 100 정도의 헌신을 한 것처럼 자기들의 헌신을 과장한 겁니다. 그다음에 정말 그러하냐는 질문을 했을 때 거짓말을 한 겁니다. 사도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야기가 바로 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부부 되게 하셨을 때 기대하셨던 모습이 뭐죠?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보면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의 돕는 배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반대하며 돕는다 라고 할 때 여기 뭐가 전제되는 거냐면 사람이 그릇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을 진짜 돕는 것이 뭐겠습니까? 이 잘못된 생각이 현실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반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짜 돕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가운데 누가 먼저 이야기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먼저 이런 얘기를 했을 겁니다. “여보 우리가 땅을 판 가격 전부를 바치게 되면 너무 아깝지 않아? 일부만 내고 베드로 사도가 물어보면 다 낸거 라고 합시다”라고 누군가가 먼저 솔깃한 제안을 했을 때 진정한 돕는 배필이 되기 위해서는 배우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제안을 반대해야죠.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님이 다 주목하고 계신데 그런 거짓말은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이고 사도를 속이는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면서 누군가의 제안에 대해서 반대함을 통하여 이 사람을 진짜 도왔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한 사람의 제안에 대해서 반대하지 못하고 둘 다 욕망의 지배 가운데 한 마음이 된 겁니다. 자기들의 마음을 속였고 사도와 교회 공동체를 속였고 무엇보다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그 결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5장에 나옵니다.
그다음에 6장을 보시면 성령의 임재 이후에 너무 아름다운 걸음을 내딛었던 초대 교회 안에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오순절날 주의 성령이 교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초대 교회 많은 신앙인들이 나만을 위한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심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인해서 한 가족된 자들에게 기꺼이 자기의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냐면 초대 교회는 소비 공동체였지, 생산 공동체는 아닙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자기 땅이나 집이 있던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처분한 다음에 교회 공동체에 헌납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소비하는 구조였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결국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내어 놓았으니까 가진 것들이 점점 줄어들겠죠. 그런데 초대 교인들은 점점 늘어나죠. 늘어난 교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재화는 점점 줄고 사람들의 필요는 점점 많아집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충족시키기 어려운 겁니다. 그러니까 만약 초대 교회가 소비만 하는 곳이 아니라 소비한 만큼 생산하는 공동체였다면 이런 초대 교회 모습이 조금 더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 교회는 소비 공동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재화는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의 필요는 더욱더 확장되고 그래서 어떤 문제가 벌어지게 된 거냐면 공동체의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결국 재화가 제한되어 있고 도움을 받으려는 과부들은 많다 보니까 유대 사도들이 팔이 안으로 굽어 버린 겁니다. 과부들 가운데 유대파 과부들도 있고 헬라파 과부들도 있는데 결국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자기와 같은 유대파 과부들에게만 구제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헬라파 사람들의 불만이 고조된 겁니다. 이것 때문에 문제가 벌어진 것이 바로 6장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라고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가 본토 유대인들이고 또 하나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본토 유대인이라 함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성장한 사람들로서 이들은 보통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유대인은 유대인이지만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태어난 겁니다. 거기서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예루살렘으로 온 겁니다. 이 사람들은 헬라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정통 유대인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던 본토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언어가 다릅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말은 소통이 쉽지 않다는 겁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끼리끼리 문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았을 겁니다. 그 결과 과부들을 구제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결국은 유대인들이 본토 유대 과부들만 챙기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디아스포라 유대 과부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문제 상황에서 사도들은 6장 2절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다.” 지금 초대 교회 안에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사도를은 뭐라고 얘기하고 있냐면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책임이라는 겁니다. 사도들은 자기 책임 추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게 될 때 이 갈등이 장기화되는 이유가 뭐냐면 어떤 갈등과 문제가 벌어지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갈등과 문제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다고 추궁을 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타자의 책임을 추궁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얼마나 성숙했냐면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 때 자기 책임 추궁적인 자세를 가진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될 자신들이 이런 접대를 행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이런 문제가 벌어졌다고 하면서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꾼들을 뽑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뽑힌 사람들이 우리가 잘 아는 일곱 집사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일곱 집사들은 행정적인 일만 담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 일곱 집사들은 말씀의 선포자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뭐냐면 8장을 보시면 빌립이라는 사람이 사마리아 그리고 가사로 내려가는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나기도 하고 가이사랴에 가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유대인들 앞에서 구약을 꿰뚫는 명설교를 합니다. 그러니까 일곱 명의 일꾼 가운데 한 명이 스데반이고 또 한 명이 빌립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구제와 관련된 행정적인 일만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때로는 말씀 선포자이기도 하고 때로는 치유자이기도 합니다. 여기 나와 있는 일곱 명은 이름을 보시면 다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 거냐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히브리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 나와 있는 일곱 집사는 헬라파 유대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는 열두 제자들이 그 사역을 감당하고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는 여기 나와 있는 일곱 집사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장에서 주목하셔야 될 것은 4절의 말씀입니다. 4절을 보면 사도들이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초대 교회 안에 문제가 벌어졌잖아요. 구제 문제 때문에 본토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있어서 사도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습니까?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 일곱 명의 일꾼을 뽑게 한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념하겠다, 이 6장 4절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 개혁을 꿈꾸는 많은 분들이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목회자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연구하고 선포하는 일에 집중해야 된다, 그리고 교회 행정적인 일들은 집사들과 같은 소위 한국 교회 표현으로 하자면 평신도들이 전담해야 된다, 이런 주장들을 많이 하십니다. 여기 6장 4절을 이해하시면서 우리가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오늘날 목회자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전념하겠다고 했을 때 오늘날 목사님들이 주로 말씀 사역하는 대상은 크리스천들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주로 말씀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당시에 왜 사도들이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겠다 라고 했냐면 이 당시에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예수를 믿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한 신앙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주와 지지난 주에 계속 본 것처럼 사도행전 앞부분을 보면 베드로가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합니까? 믿지 않는 불신자들, 초대 교회에 대해 의심어린 눈초리를 보내는 정통 유대인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말씀 선포라고 했을 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자들을 대상으로만 말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 초대 교회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 적대자들, 심지어 재판관들 앞에서 말씀을 선포한 겁니다. 그 말씀 선포의 결과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7장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6장 4절의 사도들이 구제, 교회 공동체 안의 구제와 관련된 일은 일곱 집사에게 전담하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담당하겠다는 역할 분담을 하는데 여기서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이 뭐냐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일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이 사도들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냐면 우리가 보통 인간적인 판단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좀 더 어렵고 힘든 일을 전담하고 나는 조금 더 쉽고 수월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인간의 죄된 본성입니다. 그런데 이 열두 사도가 얼마나 성령 충만하였습니까? 목숨을 걸어야 될,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자신들이 감당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초대 교회가 성령 충만한 공동체였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거룩한 공동체의 모습인 겁니다.
모세오경 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어떤 공동체가 되길 기대하신 겁니까?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제사장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상호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위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위계는 다른 나라의 위계와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냐면 다른 나라의 위계는 위에 있는 자들이 밑에 있는 자들을 지배하고 때로는 억압하고 착취하고 빼앗는 군림하는 위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떤 위계입니까? 가장 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위계입니다. 이것을 거룩의 위계질서 사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거룩함이 어떤 삶인가,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순종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가장 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겁니다.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일반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의 종과 노예들, 이방인들 이런 위계가 있는데 아래 있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모방하고 따라하는 겁니다. 이것을 가정으로 제한하면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가정에서 그 자녀들은 어머니, 아버지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모방하고 따라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이 땅의 부모들은 신앙의 선생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거룩의 위계질서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난 곳이 어디였냐면 초대 교회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공동체 안에서도 문제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뭐냐면 문제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이 사람들이 정말 성령 충만한 자들이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문제와 관련해서 사도들은 자기 책임 추궁적인 자세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그다음에 목숨을 걸어야 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자신들이 전담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거룩의 위계 질서의 모습을 6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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