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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6:13-16
제목: 구레네 사람 시몬의 가족을 동역자 삼은 바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오늘 이 본문은 원래 어저께 묵상해야 될 본문인데 어제 컴퓨터가 문제가 많아서 제가 설교를 다 녹음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다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여 녹음합니다. 오늘은 16장 13절부터 16절 짧은 구절입니다. 오늘 먼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 갑자기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는 말은 루포가 그냥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사역자로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의 이미 목회자처럼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는 이 말로 루포를 언급하는 것을 볼 때 루포가 로마 교인들에게 알려진 목회자이었거나 유명한 목회자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부들의 기록에 따르면은 “루포가 감독이 되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루포는 라틴어 이름이고 해방 노예의 이름이라고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보면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도대체 사도 바울이 어떻게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를 알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쓰여진 복음서입니다. 베드로의 구두 복음 전파를 마가가 통역하면서 적은 복음이 마가복음이죠. 140년경 이집트의 교부이었던 파피아스의 글에 이런 사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나오는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들이 알렉산더와 루포이었기 때문에 이 유명한 알렉산더와 루포가 이미 로마에서 유명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쓰여진 마가복음이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본다면은 바울과 루포는, 바울과 알렉산더는, 바울과 구레네 사람 시몬과 그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이들이 알았을까? 우리는 한 가지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9절 보면은 세계 각지에서 몰려있는 자유민들, 한때는 노예로 끌려갔다가 이제는 해방되었다가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그들이 따로 다녔던 회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유민들의 회당이죠. 이 자유민들의 회당은 구레네, 알렉산드리아,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자유민들이 함께 다닌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도 바울과 스데반이 이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어울렸던 친구들이라고 봅니다. 바클레이 같은 사람이 그렇게 보죠. 윌리암 바클레이(Wiliam Barclay 1907∼1960)요, 많은 주석가들은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자유민들의 회당이라는 말은 해방 노예들, 노예로 끌려갔다가 또는 다른 이유로 끌려갔다가 이제 자유케 된 사람들이, 교포들이 와서 회당을 만들어 놓고 그 해외 교포들의 회당이 바로 자유민들의 회당인데 이 자유민들의 회당에 바울과 이런 구레네 사람 시몬도 이 회당에 같이 다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린 시절, 12살부터 예루살렘에 유학을 했다고 생각할 때 어린 유학생이었던, 청소년 유학생이었던 그 청년 사울이 구레네 사람 시몬과 함께 자유민 회당에서 알았을 가능성이 있고, 이 어린 시절에 바로 어린 청소년이었던 사울에게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가 어머니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저는 이 추측이 가장 옳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루포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그 루포로 보지 않고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로 보지 않고 그냥 일반적으로 흔히 라틴어 이름을 가진 노예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마가복음 15장 21절로 재구성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왜? 루포는 이미 로마에서 알려진 사람이었고 마가복음 15장 21절은 로마에서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이 루포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에게 어머니 같은 호의를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유학 시절의 일일 가능성이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자유민 회당을 출입하면서 예루살렘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이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도열, 그 행렬에 통곡하는 여인들과 함께 걸어가다가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이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비극적인 십자가 처형을 보면서 충격을 받아서 그 억울한 죽음, 그 부조리한 죽음의 마지막까지, 순간까지 같이 가다가 십자가를 지게 된 거죠.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된 거죠.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지게 된 거죠.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나서 그가 그 집안 전체가 주 예수께 돌아오고 심지어 그의 아들 루포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아니죠. 우리가 억지로 또는 우발적으로 또는 예수님의 고통에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었더라도 십자가는 그를 구원합니다. 예수님의 비극적 고난을 보고 피해 가지 못하고 그 예수님의 비극적 죽음 한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함께 가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다가 그 가정 전체가 구원받은 이야기이죠.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 이것은 나를 구원한 삶이죠. 운수 나쁜 삶도 아니고, 재수 없는 삶도 아니고 한 마디로 가련한 삶이 아니죠. 십자가를 져달라고 주님이 내게 요구하면 그것은 내게 영광이죠. 그래서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십자가를 지기까지 오라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은 내 인생의 큰 영광이죠. 하나님은 당신이 진짜 신뢰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져달라고 부탁하죠.
그다음에 나오는 인물들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및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아마 전부 다 남자들 같습니다. 이들은 전부 다 노예 이름들입니다. 우리 앞서서 우르바노와 스다구도 노예 이름이죠? 우르바노는 라틴어 노예 이름입니다. 여기는 그리스 이름 헬라어로 된 노예 이름인데 아순그리도 이것은 가이사 아우구스도의 노예 이름 중에도 아순그리도가 나옵니다.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한’ 이런 뜻입니다. 블레곤도 노예 이름이고요, 허메와 바드로바 이것도 노예 이름입니다. 바드로바는 네로의 절친 노예 이름이기도 합니다. 물론 동일인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 노예들이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 말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과 27절에 보면은 너희들이 문벌 좋지 않고, 지체 높지 않고 존재감 없는 자들이었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네온타’입니다. 존재감 있는 자들은 뭐죠? ‘온타’입니다. ‘온타’. ‘네’는 부정의 말입니다. 존재감 없는 자들,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존재감 없는 자들을 택하여 존재감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자유, 로마의 그 유력시민들, 로마의 그 본토 시민들을 섬기기 위해서 40%, 로마 인구의 40%가 노예 노동력으로 충당됐습니다. ‘네온타’, 노예들은 존재감 없는 자들이었죠.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둘로스, 노예와 자유인이 하나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이고, 헬라인과 유대인이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다 하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불평등의 힘으로 굴러가는 사회라 하면은 로마 제국의 하층민들을 공략하는 바울의 ‘에클레시아-교회’ 하나님 나라는 이 로마 제국적인 불평등과 위계질서를 근원적으로 전복하고 하층민들부터 고귀한 하나님 시민으로 만들어주고, 노예들부터, 해방 노예들부터 하나님의 고귀한 시민들로 만들어주는 엄청난 놀라운 복음이 바울의 복음, 하나님 나라죠.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은 급진적인 평등화의 능력이 나오고 종과 자유인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와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와 젊은이와 노인이 하나가 되는 거죠. 여기서 기독교의 엄청난 위력은 하나 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를 거룩하게 평등하게 만듭니다. 재산상의 차이, 거주 지역의 사이, 신분상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은 모든 인간은 은혜받은 죄인으로서 평등케 되고, 평균케 되고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교제를 할 수 없던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만 들어오면은 거대한 하나님의 복음, 거대한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가향교회와 한국교회가 진짜 성경에 있는 이 복음, 바울의 복음을 전한다 하면은 고린도전서 1장 26절과 27절이 말한 바처럼 천한 것들을 택하여, 없는 것들을 택하여, 약한 것들을 택하여 부끄럽게, 강한 자를 부끄럽게, 있는 자를 부끄럽게, 지혜 있고 문벌 좋은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전복이 일어나고 사회 변혁이 일어나는 거죠. 오늘 노예들의 이름이 이렇게 많이 실린 것, 이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 역사가 로마 제국의 하층민들을 겨냥하고 정조준하며 그들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 사회의 하층민을 사로잡는 종교가 그 사회의 지배 종교가 됩니다. 너무 놀랍죠. 사회 상층부를 전도하여 연역적으로 하층민까지 바꾸려고 하는 전도는 이것은 이그나티우스 드 로욜라 같은 사람이 시도했던 예수회가 시도했던 방법이죠. 그래서 예수회 신부이었던 마테오리치도 황제를 전도하기 위해서 애를 엄청 쓰죠. 이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초기 전략은 노예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진 복음을 전파했고 그들을 자유인과 노예가 차별이 없어지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게 만들어 준 것이죠.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의 자매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이것도 유대인 출신으로서 해방 노예들입니다. 여기 성도라는 말은 절대로 이방인 신자에게 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는요. 이것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만 ‘하기오스’ 이렇게 썼습니다. ‘판토스 하기오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들은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는 전부 다 노예들 이름입니다. 노예들 이름에 많이 나옵니다. 이들도 아마 해방 노예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이들도 가정교회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많고 아마 가족들처럼 보입니다. 자매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볼 때요. 빌롤로고는 남편이었고 율리아는 아내이었습니다. 율리아는 여성 노예 이름에 많이 나옵니다. 그들이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 그러니까 빌롤로고와 율리아도 결국 가정교회의 지도자이었고 아순그리도와 블레곤도 가정교회 지도자이었다는 거죠. 이들에게 각각 문안하라. 이 말은 “이들이 나를 잘 알고 있다. 이들이 나의 신분을 보장한다. 이들이 나의 신임장이 된다. 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을 잘 듣고, 나를 영접해 주시오. 로마 교인 여러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로마의 하층민들, 로마 제국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없는 자들을 사로잡아서 로마의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이제 로마에 상륙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 모두를 언급합니다. 사도 바울이 16장에서 언급하는 사람은 모두 24명 정도 됩니다. 24명 정도 중에서 복음 전도에 열심이었던 남자는 5명, 복음 전도에 열심이었던 여성은 7명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남존여비 사상이 있었던 로마 제국에서 여성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고 이미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된 세계를 이루었던 것이죠. 그리고 우르바노와 스다구, 루포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내, 어머니, 아순그리도와 블레곤, 빌롤로고와 율리아 전부 다 노예들 또는 해방 노예들의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을 열거함으써 이들이 아마도 사도 바울과 뿌리 깊게 신실하게 동역한 바울 선교단의 일원이었을 것이라 봅니다. 이들이 바울을 지지했던 자들이고, 이들이 바로 자매 뵈뵈를 영접해 줄 사람들입니다. 겐그레아와 고린도 일대에 유명한 자매 뵈뵈를 이 사람들에게 편지를 주면서 영접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사도 바울의 인적 네트워크가 대단하죠?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어떻게 이렇게 대륙을 건너뛰어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을까요? 복음의 위대한 힘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혈혈단신, 단기필마에 능한 사람이 아니라 동역에 능한 사람, 독불장군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 주변에 항상 동역자를 만들어 내는 사람, 함께 일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동역의 사람이죠. 독불장군도 아니고, 독선적인 고독한 영웅도 아니고, 공동체 안에서의 바울이죠. 공동체와 더불어 일하는 바울, 동역자와 더불어 일하는 바울, 동역자의 신실함에 보살핌 받는 바울이죠. 좋은 목사님은 이렇게 신실한 동역자들, 이렇게 이름을 불러가면서 문안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깝고 절친한 동역자들 네트워킹 속에서 일하는 사람이죠. 그런 목사님이 좋은 목사님이고, 그런 목사님이 부르심 받은 증거를 가진 목사님이죠. 16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라.
거룩한 입맞춤은 성만찬 직전에 하는 인사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성만찬, 하나 됨을 맛보는 성만찬을 나누는 사이로, 성만찬을 사이에 두고 인사하는 사이가 되며, 성만찬을 나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접목될 만큼 친밀하게 서로 인사하는 사이가 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개척한 “모든 그리스도의 이방인 교회가 로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추천서가 참 좋지요? 오늘 이 말씀으로 바울과 같이 여러분도 동역자와 함께 일하는 복된 그리스도인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일터로 출근하고 가정에서 일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가며 말할 수 있는 절친 동역자들이 둘러싸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주 안에서 이렇게 다정하게 살갑게 문안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게 도와 주시옵시고 비대면과 고립과 격리의 시절인 코로나 시국에서 서로 문안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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