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문제가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죄의 의미, 빚의 의미를 다 포괄하여 ‘호바’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텐데 헬라어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괄하는 단어가 없다 보니까 죄로 번역하거나 빚으로 번역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본에서 어떤 사본에는 빚, 어떤 사본에는 죄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시면 어떤 영어 성경은 죄로 번역하고 어떤 영어 성경은 빚으로 번역합니다. 물론 빚으로 번역한 영어 성경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번역 성경은 대다수가 죄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6장 12절처럼 이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로 되어 있습니다. ‘호바’라는 단어는 죄나 빚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것을 죄로 번역하게 되었을 때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가 되냐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처럼 이렇게 되면 우리는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주는 거니까 여기 우리는 뭐가 되는거죠?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죄를 범한 자는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주기도문대로 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었는데 내가 그 가해자를 먼저 용서해 준 것처럼 내가 하나님께 저질렀던 모든 죄도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실제 이런 식의 해석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성폭력 당한 여인에게 이런 식의 적용을 하는 겁니다. ‘야 너가 아무리 그 사람이 밉고 죽이고 싶겠지만 너가 그 사람의 죄를 먼저 용서해야해. 너는 하나님께 죄 안 범했어? 너가 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만이 너도 하나님께 죄 용서 받을 수 있는거야.’ 이런 식으로 적용을 많이 합니다. 80년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당했을 때 광주에 있는 목회자들의 일부가 그런 식의 얘기를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전두환과 노태우가 너무너무 밉겠지만 그들의 죄를 용서해야 당신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한글 번역 성경에 근거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은 약자들에게 어떤 식의 적용을 한 겁니까? ‘너가 너무 싫겠지만 그들의 죄를 너가 먼저 용서해야 너의 죄도 용서받을 수 있어’ 이런 식의 해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나와 있는 ‘호바’라는 단어를 빚으로 번역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밑에 각주에 나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도 탕감해 주옵소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우리는 뭐가 되는 겁니까?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 거니까 우리는 채권자인 겁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는 채무자가 되는 겁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강자가 되는 겁니다. 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호바’라는 단어를 죄로 번역하면 우리는 약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고 ‘호바’라는 단어를 빚으로 번역하면 우리는 강자가 되고 채권자가 됩니다. 저는 어떤 단어를 선택해도 상관 없다고 봅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다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 한글 번역 성경은 죄로만 번역한 결과 여기 우리를 약자와 피해자로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도리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은 약자들에게 ‘너가 먼저 그 사람 용서해야지’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말씀으로 적용되는데 저는 이제는 한국 교회가 여기 나와 있는 것을 죄로만 번역하지 말고 ‘빚’으로도 번역하여서 이 시대의 강자들, 더 많이 배운 사람들, 힘 있는 사람들, 부유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네가 먼저 약한 자들을 품어야 된다,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된다 그럴 때 하나님으로부터 너도 긍휼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호바’라는 단어의 의미를 조금 더 풍성하게 바꿔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 자체가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씀하셨는데 헬라어로 번역된 1차 번역서라는 것을 아셔야 되고 특별히 여기 나와있는 것처럼 아람어가 담고 있는 포괄적 의미를 헬라어가 담아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다양하게 번역했는데 한글 성경에서는 주 본문에서는 죄라고 번역하고 대신 각주로 빚으로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죄라고 번역하면 우리는 약자가 되는 것이지만 빚으로 번역하면 우리는 강자가 됩니다. 그래서 강자로 하여금 연약한 자들에게 먼저 긍휼과 자비를 베풀 것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누가복음은 여러 별명이 있습니다. 이후에 사도행전 공부할 때 누가복음 이야기를 잠깐 할 텐데 누가복음은 이방인의 복음, 여인의 복음, 가난한 자들의 복음, 기도 복음, 성령 복음 등 굉장히 다양한 별명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본문이 누가복음입니다. 이방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복음이 누가복음입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서 이방인의 대표로 나오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뭘 기억하셔야 되냐면 이스라엘은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남쪽의 유다 지방, 중앙의 사마리아, 북쪽의 갈릴리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넓게 보면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남쪽에 있는 유다 사람들이 제 1국민입니다. 여기가 1등 국민이고 북쪽의 갈릴리 사람들이 2등 국민입니다. 중앙의 사마리아 사람들이 3등 국민입니다. 그래서 1등 국민 유다 사람들하고 2등 국민 갈릴리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3등 국민인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했던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시면 사마리아 사람들을 우호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 10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함을 받았는데 사마리아 사람만 와서 감사함을 표하는 내용들이 대표적입니다. 누가복음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계속해서 우호적인 기술을 많이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인데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이방인의 대표가 누구냐면 유대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 취급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신앙을 세계 선교 신학으로 전환시켜 강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주님이 곧 재림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자신들이 기다리던 때에 주님의 재림은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교회는 고민하고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림이 지연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왜 하나님은 재림을 연기하시는가 라고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하나님의 백성 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하면서 세계 선교 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누가 행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복음이 왜 확장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 공부할 때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공관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는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공관복음이라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질적으로 다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셨던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음을 강조하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을 보실 때 주목해야 될 것이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일어난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소위 팔레스타인 땅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일어났던 예수 사건을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가진 이방인들에게 설명해내려고 하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려고 할 때 전도가 가능하려면 내가 하는 말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관이 다르거나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단어의 의미가 다르면 소통이 쉽지 않습니다. 복음을 이방 지역에 전파하게 될 때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난 겁니다. 유대적인 세계관 안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것을 이방 땅에 전하려고 할 때 이방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세계관은 헬레니즘적 세계관입니다. 이스라엘에 존재했던 세계관을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헤브라이즘입니다. 즉 헤브라이즘 세계관에서 일어난 예수 사건을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시면 위 아래,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참과 거짓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용어들이 많이 사용됩니다. 왜 그러냐면 이런 이분법적인 용어가 전형적인 헬레니즘 사고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심하셔야 될 것이 뭐냐면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원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통전적인 겁니다. 일원론적인 사고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복음에는 참과 거짓, 빛과 어둠, 하늘과 땅, 생명과 죽음 이런 식의 이원론적인 용어가 많이 사용된 거냐면 요한복음은 헬레니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 사건과 예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관의 틀 안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이런 이분법적인 용어, 이원론적인 용어들이 많이 사용된 것을 보면서 기독교는 이원론적인 신앙이라고 이해하시면 안 되고 그런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익숙한, 그들이 잘 알고 있는 단어와 개념을 사용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핵심은 뭐냐면 우리가 정말 붙잡아야 될 참된 생명과 지식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이 땅으로 가져오셨다는 겁니다. 그것을 붙잡을 때만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구조로 가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이 자기를 설명할 때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많이 쓰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는 길이다 이런 식의 표현을 많이 쓰십니다. 이런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이 ‘에고 에이미’라는 것이 뭐의 헬라어인 거냐면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히브리인들에게 당신을 뭐라고 소개할까요 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한글 번역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 보게 되면 ‘예흐에 아셰르 예흐에’라는 말입니다. 이 ‘예흐에 아셰르 예흐에’라는 말을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경입니다. 70인경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시면 모세가 내가 당신을 뭐라고 소개할까요 라고 할 때 하나님이 자기를 뭐라고 말씀하시나면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자기를 ‘나는 뭐뭐이다’라고 할 때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누가 사용하는 표현입니까?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이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이 말을 하고 있는 예수가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이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야말로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끊임없이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고 또 하나 요한복음 9장 22절에 보면 출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도 앞에 설명드린 마태복음의 ‘저희 회당’이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주후 70년 이후에 유대교회와 초대교회가 완전히 갈라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교는 초대교회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당에서 출교시켰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출교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을 보면 이것은 70년 이후에 유대교회와 초대교회가 갈라 선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복음서를 살펴보고 설명드리지 못한 많은 내용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후에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공부하면서 하나하나 설명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8번의 강의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통해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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