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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신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i

by 【고동엽】 202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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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 신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Eta Linnemann

 

 

에타 린네만의 저서역사비평 신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일부 발췌하여 소개한다.

 

린네만은 브라운쉬바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였고, 저명한 신약연구협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의 회원이였다. 그녀는 불트만의 제자였고 그녀가 회심하기 전에 내어놓은 „예수의 비유“는 신학계의 베스트 셀러였고, 당연히 철저한 역사 비평가였다. 그러나 교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릴 나이인 50세경에 회심을 하여 자신이 저술한 책 두 권을 자기 손으로 쓰레기 통에 버렸고, 교수직을 사임하고 역사비평 신학을 비평하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다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로도 활동하였다.

그녀는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진 책이 됨을 믿으며, 역사비평 신학이 왜 근거가 없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지를 논리적으로 밝히기 위해 이미 4권을 저술했으며, 82세(2008년 당시)의 고령으로 마지막으로 한권의 책을 저술하고 있다.

 

신학대학 정교수로서 대학 신학의 기본인 성서비평을 전문적으로 비판한 일은 독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그간에 미국 등지에서 성서비평을 비판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렇게 철저하고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비판은 드믄 일일 것이다.

 

참고로 이 책과 또 다른 책이 미국 트리니티 신학대학의Robert Yarbrough 교수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책명은: Historical Criticism of the Bible: Methodology or Ideology?, Biblical Criticism on Trial: How Scientific Is Scientific Theology?

그는 Trinity Journal의 편집장이며 그의 저서는 한국에도 소개가 되어있다.

 

필자는 린네만의 책 5권을 모두 번역할 예정이다. 먼저 „역사비평 신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의 번역에 착수하면서 그녀를 소개하기 위해 번역된 일 부분을 소개한다.

 

 

 

들어가는

 

„당신은 왜 역사비평학(역자 주:성서비평)“을 반대합니까?“

 

나는 이러한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먼저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자 한다:

„내가 역사비평신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먼저 나의 주님, 그리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골고다에서 나를 위해 이루신 아름다운 구원사역을 영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루돌프 불트만, 에른스트 푹스, 프리드리히 고가르텐과 게르하르트 에벨링의 제자로서, 역사비평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학자들이 나의 선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였다. 내가 처녀작으로 출간한 책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나는 브라운쉬바이크 공대 신학부의 정교수가 되었고, 교수자격논문으로 마부르크대학 신학부의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신약연구협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의 회원이 되었다. 이로 써 나는 동료 신학 교수들에게 점점 더 많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는 철저한 역사 비평가였으며, 나의 신학적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 봉사를 하고, 복음전파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관찰하고, 여러 가지 정보들을 접하면서 반복되는 깨달음을 통하여 성서본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는 어떠한 진리도 찾아낼 수 없으며, 이러한 작업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당시에 내가 더이상 부인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은 실제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이러한 신학의 성격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깨달음을 주셨다:

역사비평신학은 하나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고 철학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데, 철학은 먼저 진리의 정의를 스스로 내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제외시킨다. 성서의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 우리의 구세주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이러한 전제 아래서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역사비평신학이 일삼는 전횡과 이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롬 1;18이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예언하셨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하나님께서는 „효과있는 미혹의 능력“을 보내시어 „그들이 거짓을 믿게 하심“을 예언하신 바가 있다 (살후 2;11).

 

신은 죽지 않았다: 분은 보좌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며, 전과 다름없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그를 죽었다고 선언하거나 그가 선이나 악도 행치 못하는 하나의 우상임을 선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벌써 행하시고 계시다.

 

내가 이러한 통찰을 얻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나를 준비시키셨다는 것을 이제와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러한 깨달음으로 인해 먼저 깊은 좌절감으로 빠져들어갔지만, 그것을 견뎌내려고 무언가에 끊임없이 탐닉하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마취상태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TV의 노예가 되었고, 술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내가 이러한 쓰디쓴 경험을 배경으로 마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 진리임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진정한 신자들에게로 나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간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에서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한 형제를 통해 내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고 결국 나는 그 분의 큰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즉시 나의 생명을 그분의 장중으로 거두어 주시고, 나의 삶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셨다. 나는 (술)중독 증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말씀과 신자들과의 교제에 갈급하여 찾게 되었으며, 그 동안 지은 죄에 대해 변명만 해오던 것들을 분명하게 죄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검은 것을 검은 것으로, 흰 것을 흰 것으로 깨닫게 되고, 그것들이 구분이 가지 않는 회색으로 뒤섞는 것을 중단했을 때에 체험했던 그 큰 희열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나의 삶을 예수님께 위탁한지 한 달쯤 지나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의 약속의 말씀이 분명한 현실임을 확신을 주셨다. 네팔에서 활동하는 한 위클리프 선교사의 보고를 듣게 되었는데, 그의 언어선생이 그가 없는 사이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네팔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선교사는 계속해서 그 초신자가 법정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들려주었다. 그런데 내가 그 언어선생에 대해서 그 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얘기로 미루어 보아, 그가 결코 그의 능력으로는 법정에서 그렇게 말 할 수 없음을 나는 순간적으로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때 막 13,9-11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 말씀은 나에게는 단지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을 뿐인데, 나는 갑자기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며, 그분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돌연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 33,9). 내가 이전에 몇 달 동안 들어왔던 믿음의 모든 증언들이 퍼즐조각처럼 맞추어 졌으며,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역사 하시는 것을 보면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적들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장님을 인도하는 장님이었음을 깨닫고 회개를 하였다.

 

그 후 약 한 달 후에 나는 방안에 혼자 앉아서, 내가 계속해서 성경을 나의 이성으로 컨트롤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생각을 성령에 의해 변화시킬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결단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당시에 이미 요 3,16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므로 나는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키신 사실이 이제 나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는 예전처럼 이 구절을 영지주의로부터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성서기자의 하나의 신학적 진술로 치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력있는 약속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신학적인 주장들은 학문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 뿐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은 그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군림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셨으며, 메시아와 인자가 되시며, 이러한 호칭들이 인간의 생각에 의해서 그 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진 책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로는 이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동안 잘못 가르쳐왔던 것이 죄를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 임한 성령의 증거를 통해, 분명하게 깨달았고, 예수님께서 죄를 십자가로 지셨기 때문에, 죄가 사해진 것에 대해 기쁘고 감사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역사비평신학을 반대한다.

 

내가 나의 삶을 예수님께 드리기 전에 가르치고 저술한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기는 것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나는 이 기회를 통해 내가 저술한 두 권의 책 „예수의 비유…“와 „수난사 연구“, 그리고 전문잡지에 기고한 나의 모든 논문을 정죄했음을 밝힌다. 나는 집에 있던 그 책들과 논문들을 1978년에 내 손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러분들도 나의 책이나 논문을 소장하고 있다면 나처럼 하시기를 부탁한다.

 

에타 린네만 교수. 1985 7.5

 

 

 

역사비평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들어가면서: 나에게 왜 „역사비평 방법“이라는 용어 대신에 „역사비평 신학“이라는 사용하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가지 답변을 줄 수 있지만, 중요한 점 두가지만 들어보려고 한다.

 

I. „역사비평 신학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언어사용법에 있어서 무리가 없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크나이프 요양을 받으러 간다고 한다면, 이 말을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요양소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치료를 받는지를 안다: 즉 물을 밟고, 무릅에 물을 끼얹는 것등이다. 즉 그는 크나이프 목사가 개발한 방법에 따라 치료를 받게되는 요양소에 간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누구나 크나이프 요양은 이러한 방법에 따라 시행되며, 이 요양은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인해 다른 요양과 구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학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신학은 역사비평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독일 국가대학의 신학부에서는 단지 이 방법만이 사용될 뿐이다. 이 방법은 단지 주경신학(성경해석)에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조직신학의 범위와 방법에 까지 영향을 미치며, 교리문답이나, 설교학 그리고 윤리에 까지 영향을 준다. 아마도 자신이 이것을 전혀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시행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역사비평은 누룩과 같이 실제로 국가대학의 신학부 전체에 침입해 들어왔다. 만약 사람이 늘 누룩을 사용한다면, 비록 누룩이 악취를 풍긴다 할지라도 누룩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는 것과 같다.

 

II. 내가 신약연구협회(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 동료들에게 신학자라는 표현대신에 성서비평가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나에게 엄중한 항의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가 신학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대우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들의 연구가 역사비평 신학이라고 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신학을 함에 있어서 단지 역사비평 방법을 사용할 뿐이라는 진술과 무엇이 다른가?

더 할 말은 많지만 이것으로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신학과 과학에 있어서 전제되는 기본 원칙

 

I. 신학의 기본 전제는 „ut si Deus non daretur“,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자신의 말씀(성경)을 통해 계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학자가 인정한다고 해도 이러한 전제에는 변함이 없다.

 

II. 진리의 척도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과학성의 법칙이다.

성서에 기술된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 시간, 사건의 진행과정, 등장인물 중에서 단지 그들이 인정하는 법칙에 맞는 것들만 인정하고 나머지 것들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과학성이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III. 과학적 신학의 전제는,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들의 경전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를 하는 것이다.

기독교만의 독특성이 강조되는 내용마저도, 일반적인 종교학의 기본적인 전제에 맞추어 버린다. 이러한 균등화 작업은 실상은 사실이나 객관성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제거한 후에 남은 것으로 만들어낸 인공적인 형상과도 같은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는 자는 그의 생각을 이러한 날조된 가정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IV. 성서는 종교사에서 발생된 하나의 산물로 상대화 된다:

다른 종교들도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경전을 갖고 있으므로, 처음부터 성경이 유일한 경전이라고 전제를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일반적인 문서와 똑같이 다루어져야 한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과 신화 오딧세이를 연구하는 것에 차이를 두면 안 된다. 물론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로 이러한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복음전파에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비교의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단지 인간의 종교적 상상과 신학적 개념으로 축소시키고, 살아있는 말씀을 죽은 문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강단에서 이러한 죽은 문자를 살려보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잘 안되면 결국 심리학, 사회학, 사회주의나 다른 사상의 도움을 힘입어 문자에 생명을 부어 넣으려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면 이러한 것을 인정할 것이다.

 

V. 성경을 다루되 하나님 말씀으로 존중하지 않는다.

 

1. 성경의 말과 하나님 말씀은 동일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성경에 인쇄되어 있는 말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 그것들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에 확신이 들어올 때에만 하나님 말씀이 된다.

 

2. 신약을 들어서 구약을 공격하며,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새로운 신 개념을 도입했으므로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한다. 바울서신을 들어서 야고보서를 공격한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 바울은 로마서, 고린도서, 갈라디아서를 집필한 바울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누가는 객관적인 보도자로서 별로 높게 평가되지 않으며, 그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구구절절이 진실되게 보고한다고 간주하지 않고, 그의 신학을 부정적인 본보기로 삼는다. (역자 주: 누가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인 눈으로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주장함)

그들은 괴상한 문학비평이라는 것을 사용하여 (삶을 어느정도 개관할 수 있는 시인이나 신학자, 예를 들어 괴테나 칼 바르트의 작품에 그 방법을 적용해 본다면 이 문학비평 방법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싑게 알게된다) 목회서신과 에베소서, 골로새서가 바울서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사도 바울 다음 세대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저술되었다고 한다. 성서의 각 권들 사이의 차이점을 부풀려서 상호간 서로 모순이 된다고 떠들어 댄다.

 

3. 그들은 성경의 영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성서의 각 권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본다면 성경에서 남는 것은 구속력없는 인간의 작품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작품 속에 성서작가 자신들의 신앙이 들어있다고 인정을 하지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직접 그들 안에서 증가하고 있음을 깨닫는 사람들은 없다.

다른 말로 표현을 하자면 그들은 성경을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2-3천년 전에 고대인이 같은 고대인을 위해 쓰여진 책이므로 현대인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4. 그들은 성서 속에서 성서를 찾는다. 성서처럼 구속력이 있는 것이 있어야 교회가 성립이 되고, 학자 스스로에게도 방향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에게는 로마서 7장,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복음 10장, 마태복음 25장의 세계심판, 이 몇 가지만 남게되고, 다른 학자들에게는 좀 더 많은 본문들이 진짜 성경으로 인정된다. 이것들이 판단의 척도가 되어 전체 성경이 재구성되며 나머지 내용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 로마서를 통해 야고보서가 평가절하가 되며, 사도 바울의 믿음의 이해를 빙자해서 고전 15:5-8이 비판된다: 즉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예수의 부활이 마치 역사적인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신학에 걸맞지 않는다고 한다.

 

5. 성서는 단지 신학적인 저술에 불과하므로 각각의 성경말씀은 구속력 없는 신학적 진술이다. 예를들어, 요 3:16은 1세기 말경에 복음서를 집필한 어떤 신학자의 신학적 진술에 불과하며, 그는 영지주의자가 아니면, 그가 영지주의를 그들 자신의 언어로 공격을 하려고 했거나, 아니면 다소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역사비평학에게는 요 3:16이 구속력있는 구원의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구속력없는 한 인간의 의견에 불과하다.

이 말씀은 하나님 말씀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와 „아멘“임에도 불구하고 (고후 1:20)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이와같은 방법으로 다룬다.

 

VI. 성서를 해석이 요구되는본문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누구나 성서를 읽으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방법은 주관적인 것으로, 독자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실존적인 해석“으로 치부되며, 역사비평 방법을 거치지 않는 해석은 단지 개인용으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즉 설교나 가르침을 위한 책임성있는 해석은 그것이 객관성을 갖기 위해서 법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여기서 배제가 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언제 자신이 성령을 갖고 있는지 보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트만). 성령을 해석방법이 대체한다. 이 방법이 해석의 객관성을 보증하고 성서 본문을 올바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은 그들을 경멸하신다. 몇 가지 기본적 전제와 방법론상에 있어서의 합일점을 제외하고는, 두 명의 신학자가 그들의 연구결과를 놓고 상의할 때 두 가지의 서로 상이한 의견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영접하는 성경선생이 성경을 신뢰하면서 그들이 영접한 것을 나누는 곳에서는 항상 영이 하나가 되고 가르침이 서로 일치가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세계 어느 곳에 살고 있던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던지 교파를 초월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VII. 구약학자나 신약학자에게 통용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이것은 명문화되지 않았다):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성서해석학자는 성서본문에 있는 난제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해석자가 명석하면 명석할수록 그의 창의력이 발휘가 된다. 왜냐하면 그가 교수로서의 역할을 하려면 자기의 이름을 내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교수의 봉급을 무위로 받지 않으려면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 그는 진퇴양란에 처해있다: 즉 그는 결코 명예욕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명예를 추구해야 한다. 나의 옛 동료 교수들은 대부분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학신학의 시스템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야하고 명예를 좇지 않으면 안된다 .

우리의 주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 5:44).

아직 명예욕에 물들지 않은 신학생들도 똑같은 압력을 받게된다. 신앙심이 있는 많은 신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믿음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믿음 생활에서 방황을 하게되는 것이다. 배운 것들이 그들의 생각과 마음 속에 남아있게 된다. 그렇게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는가? 그들은 그것을 위해 공부를 하지 않는가? 수업시간에 하나님 말씀이 삭제되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중 많은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도 말씀 그대로 체험할 수가 없게 된다.

„목회서신은 바울의 것이 아니다“라고 배운다. „요한복음의 기자도 물론 세배대의 아들 요한이 아니다“. „모세오경도 모세의 것이 아니며 여러가지 문서를 편집한 것이다“. 6학기가 되어서도 아직 이것을 배우지 못한 학생은 얼간이로 여겨진다. 이렇게 되어 하나님의 좋은 포도원(교회)은 작은 여우들(신학생)에 의해 훼파되어 버린다. 이러한 것들은 아직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아! 믿음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해!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이러한 것들을 통해 도전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은 구속력을 잃게되며, 이것은 우리가 편안해질 때 큰 악영향을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쥐구멍 하나가 큰 제방을 무너뜨릴 수가 있다. 큰 비가 오게되면 그 결과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VIII. 역사신학 비평에서는 비판적 이성이 성경내용 중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사실이 아닌지를 결정한다.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이 결정의 기준이 된다. 통상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만을 사실로서 받아들여진다. 영적인 것이 육적인 눈에 의해서 판결이 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험은 완전히 무시된다.

그들이 이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전제로 인해 우리의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신뢰가 갈 만큼 증거를 한다고 할 지라도, 그리고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여질 만한 능력이 사라진 것 같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기적을 증거하는 책들은 애당초부터 학문적인 가치가 별로 없는 책들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출처 :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개혁)

글쓴이 : Songd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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