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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샴 메이천의 변증세계

by 【고동엽】 2014. 9. 20.

"그레샴 메이천의 변증세계"


조봉근
大韓예수敎 長老會 光州改革神學硏究院
2-637-9101-03
pp.8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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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샴 메이천 박사가 개혁신학계에 알려지기는 보통 신약학자로 소개되고 있다. 사실 그가 영향력을 끼친 분야는 분명히 신약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와 업적은 기독교의 복음진리에 대한 변증사역으로 일관되었다. 특별히 그가 쓴 "신앙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nity and Liberalism) 그리핀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 of Christ)등은 변증학적 차원에서 그 공적을 인정해야 될 줄로 믿는다.

1. 그레샴 메이천의 생애
메이천은 19세기 말엽인 1881년에 태어났다.

메이천의 부모들은 영국계보로부터 유래된 초기의 개척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상은 식민지 버지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그들은 남부 장로교인들로서 사회적으로 저명하고, 중상류층으로부터 존경받는 가문이었다. 그야말로 메이천은 상류층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연히 돈을 버는 직업을 택할 필요가 없었고, 그의 전공은 문학과 법학같이 학문을 즐기는 방향으로 전진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개성을 키울 수 있는 사관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일찍부터 탁월한 지성적인 능력을 함양할 수가 있었다.

그는 "죤스 홉킨스"(Johns Hopkins)대학에 다녔고, 그곳에서 그는 미국의 위대한 고전주의자 중 하나인 바실 길더 슬리브(Basil L. Gilder Sleeve)박사로부터 학문상의 호평을 받았고, 그 대학을 졸업한 후에,1902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진학하였고, 거기서 많은 선배들로부터 학자석인 재능을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1905년에 독일로 유학하게 되었고, 깊은 학문을 접하는 동안에, 긍정적인 충격과 도전을 받았으나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충격을 받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성경 등 비평학자들의 과격한 비평학적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의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요동함이 없이 정경의 절대적 가치를 신뢰하는데, 더 강열한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의 말베르 대학과 베힝겐 대학에서 꼭 수학은 전화위복이 되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걸과가 되었다.

그가 겪은 쓰고 단 여러가지 경험은 의지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지성인들의 불신앙과 회의를 선도하고 상담하는데 있어서, 진지하고 깊이 있는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그의 저서인 "기독교와 자유주의"와 "신앙이란 무엇인가"란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젊은 지성인틀에게 "성경적인 기독교"와 "성경적인 신앙"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푸는 애정어린 열심을 보여주고 있다.

1906년 메이천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모교인 프린스튼 신학교의 조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는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교를 순방하면서 당시에 자유주의 신학사상이 숭배했던 신신학 사조로 말미암아 일시적이나마 상당한 유혹을 받았기 때문에, 한때는 믿음이 흔들리고 가셨으나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성령님의 역사로 새로운 확신과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가장 탁월한 수식학자로서 성장했다. 왜냐하면 그는 무려 23년 동안을 오로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봉직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과 그 이후에,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계가 소강상태에 있을때, 그의 열강과 강열한 필치로 정통파기독교를 재수립하는 업적을 쌓게 된다.

그가 쓴 "바울 종교의 기윈"(The OFlgin of Paul's Religion)에서 그의 공헌은 너무나 크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를 다르다고 해석함으로 정통 기독교를 몰아붙이는 데 쐬기를 박으려고 시도했던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의 파괴적 도전을 그는 유감없이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rith of Christ)은 415면이나 되는 방대한 걸작으로써 가장 학구적이고 깊이있는 연구논문이요, 정통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능란하고 철저하게 해설한 책임에 틀림없다 사실 그 책은 교회사 둘 가장 발전된 중요 교리를 방어할 책으로서 개혁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호평기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메이천의 열심과 깊은 배려와 영향력 그리고 유연있는 유우머는 반 틸(Yan Til)과 와아드(De Waard)같은 유능할 후진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누구든지 코넬리우스:반 틸(Van Til)과 대화를 하면 그가 자주 메이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메이천은 학문적 토론을 즐기는 변증가였으나 그러한 그의 변증적 성향은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려는 심정을 절대적이며 열정적으로 가졌기 때문이었다. 자주 쓰고 있는 표현으로서, "왕되신 예수이 왕권을 위한 열정"은 보통 스코흘골즈의 개혁가들의 열망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심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여졌는데, 마찬가지로 이와같은 말은 메이천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메이천을 쉽게 평가하려는 사람틀은 누구든지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메이천의 사상이나 그의 행동을 옳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당시에도 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몇몇 친척들과 친지들은 그가 교육하는 일에만 충실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논쟁하는 일에서 멀리하도록 여러 차례 충고하였다. 사실 그 자신도 인간애적인 면에서 그들의 충고를 따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집권적으로 역사하시는 정통 신학자로서의 사명의식은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오로지 우리 주님의 인격과 그 사역을 증거하여 이러한 복음의 근본진리에 도전하는 그릇된 사상을 여지없이 공격하려고 힘썼던 것이다. 그가 만일 연약한 인간성에 빠져 자신의 안일과 불의에 타협하려는 정치적 두뇌를 가졌다고 한다면 일선에 나서지 아니하며 태풍의 눈에 위치하여 욕먹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와같은 신학적 투쟁을 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는 그의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았으며, 또한 정통신학자로서 도덕적 겁장이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를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내면으로부터의 타오름이 그를 왕되신 주의 병기고로부터 지시된 병기를 들고 경기장으로 나가게 하였다.

메이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기장에서 그의 상기된 영혼의 모든 열정으로 복음의 칼을 휘둘렀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천은 너무나 비싼 값을 치루었다. 그가 학문활동을 하던 신학적 도장인 프린스톤 신학교가 1929년에 드디어 자유화되었다. 자유주의의 "오번선언 "이 스티븐슨과 어드만에 의해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메이천은 유럽의 자유주의 사조들을 상기하면서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논박하였다. 그러자 몇몇 교수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학생들이 그의 강경한 태도에 대하여 도전하면서 그를 저지시키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를 교계에서 매장시키려고 중상모략하여 참을 수 없는 곤경에 몰아 붙였다. 그래서 그들이 볼 때에는 메이천은 그야말로 교계의 말썽꾼이었던 것이다.

어떤 소문에는 "메이천의 가정이 양조업을 해서 돈을 벌었으며, 메이천은 맥주왕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물론 이 소문은 신앙도 염치도 없는 악의에 찬 거짓말이요, 하등의 근거도 없는 말이었다. 메이천은 십자가의 군병처럼 그와 같은 수모를 당하면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내리시는 질책으로 여기면서 성령의 인내로써 견디어냈다 그리고 오히려 그는 "나는 좋은 사람들과 사귀고 있다. "고 하면서 슬픈 상처를 신앙적 미소로써 대처하고 그의 친구들에게 나쁜 감정을 하소연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때에 따라서 나쁜 소리도 듣고, 또한 좋은 소리도 들으며 그의 사명과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고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레샴 메이천의 각오와 결심은 대단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바리새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미쳤다고 할 정도로 주님을 핍박하였다."고 상기시키면서, "주님의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왜 비난을 회피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

메이천은 그의 후진들이 본받고 따를만큼 정통 보수신학을 사수한 신학자임에 틀림이 없었고, 개혁교회를 위하여 투쟁한 가장 용기있는 지도자였다.

메이천은 1929년에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를 창설하고, 구 프린스톤 신학교에 있던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초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핫지(C.W.Hodge)는 프린스톤에 그대로 남아있었으나 반 틸(G.Van Til)과 후에, 죤 머레이(John Murray)등이 초빙되었다. 그리고 1936년 미측 북장로교회에서 메이천을 면직시키고 추방하였으며 결국 새로 정통 장로 교단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이천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할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며, 장엄한 교리적 투쟁에서 얻어낸 열매들을 다 거두기도 전인, 1937년 1월 1일 56세를 일기로 애절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죤 머레이 교수에게 유언이 되는 전보를 쳤는데, "나는 그리스도에게 전심으로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없이는 내게 전혀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메이천은 결국 승리하였으며 미국에서는 반 틸과 죤머레이 같은 후진들이 그의 사명을 계승하였고, 한국의 정통 보수신학계의 거성 박형룡 박사를 배출한 것이다.

씨 더불유 핫지(C.W. Hodge)는 말하기를, "그레샴 메이천은 앵글로 색슨(Anglo-Saxon)이 낳은 최대의 신학자요, 복음주의의 최대의 신학자였다. "고 평하였고, 미국 남 감리교 총회장 마크는 말하기를, "미국에서 제일 훌륭한 장로교 목사요, 복음주의 기독교의 가장 유능한 변증인이었다. "고 진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일신교도(unitarian)인 디펜 바하(Dleffen bach)박사도 평하기를,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 간 사도적인 인물로서 복음 진리를 근면하고 경건하게 헌신적으로 추구한 위대한 기독교인이었다. 또한 현재 프로테스탄트 핀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도적 투사였다 "고 말하였다. 이처럼 연두가 메이천의 사상을 흠모하고 있으며, 그를 가리켜서 20세기의 정통적 칼빈주의 신학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정통 보수수의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메이천에 의하면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이요, 결코 "신학은 학문자체의 욕구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의 목적은 불신 사회와 자유주의를 대항한 선교적 차원의 본질신학이었다.

2 그리삼 메이천의 신학사상(神擊思想)
첫째로, 메이천의 사상은 문화론적 입장(文fh論的 立場)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입장에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였다.

메이천에 의하면,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목적이요, 어떤 목적을 위하여 방편과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서 공산주의를 기독교가 절대 배격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위하여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역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추구해야 될 절대적 과제가 제일차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지상의 정의로운 사회건설이나 세계평화를 도모하나 이를 위하여서도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메이천의 사상은 경험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입장을 배격하고, 철저하게 성경교리 중심적인 노선을 추구해 나간다.

자유주의는 "기독교는 경험이지 교리가 아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메이천의 주장은 "기독교는 인간의 경험과 감정에 근거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의 인식과 이해에 근거한 종교, 즉 성경교리에 근거한 종교인 것이다.

이와 같은 메이천의 사상에 대해서 "자유주의는 피안성적 안주라."고 악평했으나, 이 에 대하여 메이천은 여유있는 자세로 "피안이 있기 때문에 차안이 있다. "고 논박하였다.

또 자유주의는 메이천 사상을 주지주의적 독단이라고 비평하나, 메이천은 "교리가 없으면 오리무중의 삶을 거닐게 만든다. "고 명확하게 답변함으로써 성경교리(신조)를 아주 긍정적인 면에서 진술하고 있다.

이점이 바로 메이천 신학의 위대성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신학자(신약학자)들은 성경의 문맥(context)을 잘 살피면서도, 조직 신학자들처럼 통일된 원리인 교리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쉬운데, 메이천에게 있어서는 별로 그와같은 이원론이 보이지 않으며, 신학일반에 대한 이해가 잘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메이천의 경우는 성경이 교리이고, 교리가 성경인 것처럼 성경의 전체적 조망이 분명히 엿보이고 있다.

세째로, 메이천은 "바울종교의 기원"이란 그의 책에서 "두 개의 종교론"(Theory of Tow Relions)을 언급하면서, 바울의 기독교는 동방의 종교들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바울의 기독교를 헬라화된 동방의 종교라는 명칭아래 다른 모든 종교와 같이 취급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고 주장하면서 예를 들면서 "동방의 모든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관용적이나 바울의 종교는 이스라엘의 고대 종교처럼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메이천은 설명하기를 ,"이시스(Isi:s)나 미트라(Mithras)의 신비종교에는 이전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입문할 수 있었으나, 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이교신자가 교회에 들어오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른 모든 신앙적 대상을 포기해 버려야 했다."고 하면서, 이와같은 차이는 바울의 업적을 동방의 다른 모든 신비종교의 성공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이다.

정녕, 메이천이 주장한 대로 "단순히 신전 존재와 접촉하기 위한 하나의 부수적 방법으로서 새 신앙과 새 종교를 제공하는 것과 오직 하나의 구주에 대해서 온전한 신뢰를 바치기 위해서, 현존하는 다른 모든 종교적 신앙과 실천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였으며, "사실상 후자의 경우가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메이천에 의하면, 혼합종교(Syncro tism)가 널리 퍼져 있던 헬라와 로마시대에서 바울이 깨달은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종교와 더불어 완전히 고립된 입장에 있었다. 그러므로 동방종교의 성공은 바울의 업적의 독특성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것들은 고대 세계가 구원에 대한 필요성과 그 구원에 대해 갈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가리켜 주고 있으나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게 하기 위한 준비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복음의 도래는 항상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경륜의 일부로서 "때가 찼 다. "는 하나의 징후로서 경하 해 마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임 에도 불구하고 그 필요성을 만족시키려고 최선의 충성을 다한 바울의 업적은 결코 무의미하게 생각되어서도 안되며,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고 메이천은 논술하면서, 제1세기의 유대교 역시도 적극적으로 선교하는 독특한 종교였다는 것 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메이 천은 기독교가 다른 이방종교와 근븐적으로, 다른 독특한 계시종교임을 주지시키면서, 그러나 그와 같은 계시의 사건은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역사 속에서 진행되었고, 그 복음의 계시 의 절정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고, 대속적 죽으심을 당한 사실을, 충성스런 사도 바울을 예비하셨다가 죽기까지 헌신하게 하시므로 때가 찬 경륜을 이루게 하 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이다만, 바울의 충성함을 역 사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업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네째로, 메이천은 앞에 거론한 같은 책의 제4장인, "바울과 예수"(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란 논문에서, "바울은 예수의 존재 상태에 하나의 위대한 변화(전기)가 생기게 된 것은 닥활에 의해서라고 굳게 믿었다. "고 주장하면서, 그리고 그는 "일관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동일한 인격이었다. "고 확인하고, "바울서신 중에는 마치 전자는 갈릴리에 살고 있던 역사적 인물이고, 후자는 부활한 주의 이름인 것처럼,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별한 뚜렷한 어떤 흔적조차도 찾아 볼 수 없다. "고 하였으며 따라서 "바울서신에는 역사적 인물 예수와 신적 그리스도 사이에 그노시스주의적 분리와 같은 흔적은 조금도 없다. "고 분명한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에게는 "그노시스론의 어떠한 흔적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바우어(Baur)는 바울과 베드로의 투쟁이라는 가설을 바을 서신에 기초를 두고 수립했다. 그와 더불어 초기 튜빙겐학파의 학자들은 반바울적 쟁론을 계시록 중에서 발견했다.

그와같은 여건 속에서 예수님의 교훈과 바울 신학의 일치와 통일성을 메이천은 재화 인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메이천은 19세기와 20세기의 와중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신학사조를 딛고, 가장 정통적인 본질신학을 재확립하였고, 너무나菉_대담하고 장엄한 일생을 보낸 보수신 학자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의 저작중 잊을 수 없는 대작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싱"과 "기독교와 자유주의" 그리고 "신앙은 무엇인가?"등은 허물어가고 잊혀져가는 개혁교회의 좌표를 다시 세우고, 정림하는데 최선의 수고를 다한 거장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개혁신학의 보류인 레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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