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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

by 【고동엽】 2014. 9. 5.

메이천 박사(John Gresham Machen, 1881-1937)는 참으로 귀한 조직신학자이셨습니다. 아래의 글은 총신대학 김길성 교수님의 글입니다. 동역자 여러분께서 메이천박사님을 이해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던 소위 장로교 논쟁(the Presbyterian Controversy)에서 메이천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끝이 날 줄을 모른다.

교회에 대한 메이천의 시각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재세례파나 독립교회파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오히려 그의 관점은 신실한 개혁주의와 장로교 신학자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론을 포함한 그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프린스톤 신학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프린스톤 신학은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졌던 신념은 프린스톤 신학교 전임자들이 세워놓은 규범들을 맹목적으로 반복하거나 모방한 것이 아니었다. 특별히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과 명료성에 대한 확신을 비롯하여, 그의 이 같은 신념은 어릴 적부터 견고하게 형성되어 온 것이며, 나아가 그가 자라 온 남부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선임되면서 시작한 성경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특히, 당시 신약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자세히 살핀 연구 결과를 통해, 1915년에 이르러 그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을 살펴보면 메이천은 이미 자신의 남은 일생동안 수행하게 될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는 이 초기 작품들을 통해 이후 그가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독일에서 수학하는 동안 메이천은 그가 일생 동안 싸우게 될 자유주의 운동과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05년 그는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빌헬름 헤르만 (Wilhelm Herrmann) 교수와 만나게 된다. 그는 주로 신약 분야를 공부하였지만, 조직신학에 관한 헤르만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기도 하였다. 1905년 12월 10일 메이천이 그의 형 아더 (Arthur)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헤르만은 교의학 교수로서, 가장 지배적인 리츨 학파를 소개하고 있지만, 내겐 너무나 막연하게만 이해될 뿐이야. 그러나 헤르만은 내게 이 엄청난 운동의 배후에 깔린 어떤 종교적 힘을 보여주었지. 뿐만 아니라, 현재 이 운동은 미국의 북장로교를 손안에 넣기 위해 싸우고 있는 중이야.


비록 메이천이 말하고 있는 "미국의 북장로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장로교회가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파괴적인 주장들에 의해 위협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그는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아돌프 쥘리허 (Adolf Juelicher), 요한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 그리고 월터 바우어 (Walter Bauer) 등과 함께 공부하였다. 특히, 비록 헤르만 교수와의 만남이 다음 수년동안 그로 하여금 과연 자신이 목회자로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그를 뒤흔들어 놓긴 했지만, 메이천은 이 만남을 통해 이 후 자신이 가진 오랜 신앙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응하여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서 돌아오자, 메이천은 당시의 적대적 문화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메이천은 자유주의가 신학교와 교회 내에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가져 올 논리적인 의미들을 검토하고, 자유주의의 물질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전제들을 교회의 순결과 일치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메이천이 발견한 것은 교회가 실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교 교수로서, 그리고 안수 받은 목사로서, 자유주의가 가진 파괴적 전제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전력을 다해 고수하고 있는 현대 역사주의의 해로운 영향들을 교회에 알리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1906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과 강사로 봉직하게 된 메이천은 성경의 역사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연구 작업을 통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확성과 신뢰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그는 초자연적인 기독교가 참이라는 것과, 또한 그 사실은 지적으로도 변호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1915년 초,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성경에 따라 판단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이러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결국, 장로교 내에서 일치와 순결을 지키려는 그의 노력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대부분 그가 발표한 글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둘째로,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관찰을 통해 장로교 논쟁에서 그가 보여준 이후의 행동과 역할이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임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점차 넓어져 가는 자신이 소속된 교회와 학교에서 일치와 순결의 성경적 균형을 지키려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왔다. 로우악 (Roark)은 "장로교회 안에서 보여준 메이천의 행동은 교리적으로 '참된 장로교회'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메이천을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독립교회파 인물로 설명하고 있는 로우악의 묘사와는 맞지 않는다. 필자의 판단에는 그 같은 묘사가 성경적 순결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교회의 일치와 평화를 지키려는 로우악의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II. 메이천의 초기 신학과 사상


신약연구에 관한 메이천의 최초 작품은 그가 학생 때 작성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신약 기사에 대한 비판적 논의"란 글이다. 이 글은 1905년 8월과 1906년 1월 [프린스톤 신학평론]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연재되었다. 그는 또한 독일어로 작성된 3편의 연이은 글들을 [슈바르츠부르크분트] 지 (Der Schwarzburgbund)에 기고하였는 데, 이들은 이후 1906년과 1907년에 "Die Universitaeten der Vereinigten Staarten"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메이천이 발표한 신약에 관한 초기의 논문들은 주로 책에 관한 평론에 불과하였다. 그의 이러한 평론은 모두 [프린스톤 신학평론](5-10권)을 통해 발표되었는데, 1907년에 하나, 1908년에 넷, 1909년에 다섯, 1910년에 넷, 1911년엔 셋, 그리고 1912년에 하나가 발표되었다.

1912년에 이르러 네 개의 학술논문을 발표하면서 메이천은 학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 중 셋은 동정녀 탄생에 관한 것으로 [프린스톤 신학평론]를 통해 발표되었다. 네 번째 작품은 예수와 바울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다룬 것으로,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들에 의해 발간되었던 [성경신학연구](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라는 잡지를 통해 선을 보였다. 이 두 주제(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예수와 바울)는 신약 비평에 관한 메이천의 후기 작품인 [바울 종교의 기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1912년 메이천은 프린스톤 신학교 100주년 개막 행사 때 자신이 행한 연설을 이듬해 1913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기독교와 문화"란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1915년에 그는 또 다른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제목은 "역사와 신앙"으로, 이것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약학 조교수로 취임할 때 행한 취임 연설이었다.


1.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

1912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실린 메이천의 첫 논문 제목은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었다. 이 논문은 주로 누가복음 1:46-55의 (소위 "마그니피캇" [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찬양과 1:68-79의 (소위 "베네딕투스" [Benedictus]라 불리는) 사갸랴의 찬양을 다룬 것이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그의 두 번째 논문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은 세 번째 복음서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의 출처가 될만한 가능성 있는 자료들의 여러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는 특별히 '이 두 장이 의식적으로 칠십인 역을 모방하여 누가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라고 말한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메이천은 마리아 송가 (Magnificat)와 관련된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교부신학의 대표자인 하르낙의 주장을 굳이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피타 (Fridrich Spitta)가 이미 마리아 송가의 기원에 관한 하르낙의 이론을 충분히 반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이천은 이 스피타의 것과 유사한 방법을 이용하여 사가랴의 노래 (Benedictus)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구절들, 그리고 그 구조를 세심하게 분석하였다. 하르낙과 다른 이들은 이러한 언어적 세부묘사가 바로 누가의 저작임을 입증하는 표지라고 주장하였지만, 메이천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이 모든 사실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가설은, 마리아 송가가 본래 마리아가 노래하였던 아람어 송가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이것이 탄생 기사와는 별개로 회자되다가, 복음서 기록 시 영감 된 누가 자신의 손끝을 통해 탄생기사 안에 있는 현재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가라의 노래 (Benedictus)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이다. 후에 이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란 논문은 실제로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첫 장을 이루게된다.


2.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란 제목의 두 번째 논문을 통해,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기록된 탄생 기사를 각기 다른 요소들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에 반대하고, 탄생 기사의 통일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당시 신약학계의 세 가지의 가설을 다루었다. (1) 기록된 자료들을 사용하지 않고, 누가 자신이 작성하였을 것이다. (2) 누가는 아람어로 된 문서 자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3) 누가는 헬라어로 된 문서 자료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모든 언어적 증거로 보아 이 탄생 기사가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일 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따라서 누가복음 1장, 2장과 관련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하여졌다. 하나는 이 기사가 원시 유대 기독교와 팔레스타인 유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기사가 누가의 손길이 닿은 흔적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이 성경을 역사적인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탄생 기사의 문학적 통일성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이 탄생 기사의 저자가 "제사장들의 반열과, 적어도 그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방인이라면 자연적으로 하였음직한 설명들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 기사가 원시 유대 기독교적 배경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 메이천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실제 일어났었음을 알려주는 확실한 전통이 이미 그 시기에 보존되고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 같은 입장은 구속사적 기독교가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에 기초한 것이라는 그의 확신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메이천이 증거에 대한 잘못된 해석의 가능성을 무시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다시 한번 전제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시종 일관, 만일 탄생 기사에서 묘사되고 있는 사건들이 사실이라면, 그 사건들은 그 자체로 기록된 문서들 안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는 그 문서들과 관련하여 서로 모순된 가정들이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록 탄생 기사 속에 나타난 증거들이 확정적인 것이며, 나아가 합리적인 확신을 갖기에 더 없이 충분한 것이라고 판단될 때조차도, 그는 그러한 증거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메이천은 때로 세상일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진실로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방편이었다. 메이천과 여타 역사주의의 가정들을 받아들이고 있던 하르낙과 같은 성경학자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름 아닌 그 같은 신적 개입에 대한 메이천의 개방성에 있었다.

처음부터 메이천은 자신의 입장이 합리적인 논의에 의해 지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논문들을 써내려 가면서 그가 쏟은 모든 노력은, 유효한 역사적 증거들에 기초한 논리적 논의를 통해 누가복음의 첫 두 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참이라는 것, 곧 그 사건들이 기록된 그대로 실제 일어났었던 사건들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기독교의 역사성과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종교적 가치들 사이의 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때, 그가 의도한 바는 다름 아닌 그 가르침이 역사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그의 활동 초기부터 그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신앙은 모든 증거들을 배제한 비이성적 도약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하게 해석만 된다면 그 증거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확신이라고 하는 점이다.


3.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은 1912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실린 메이천의 세 번째 논문이다. 이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친 뒤 1930년에 출판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첫 장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수집 가능한 증거들을 하나 하나 검토하였다. 그는 사도신경과 사도신경의 기초가 된 고대로마의 신앙고백에서 드러난 증거와, 터툴리안, 이레니우스, 알렌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순교자 저스틴, 아리스티데스, 그리고 이그나티우스 등 교부들이 남긴 증거들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그는 'AD110년에 이르러 이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공동체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어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례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차례로 그 부당성을 입증했다. (1) 이교도 반대자들의 동정녀 탄생 부인, (2) 유대주의 반대자들의 부인, 그리고 (3)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말시온, 카르포크라테스, 그리고 세린투스와 같은 이들의 부인 등이 그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메이천은 당시 슈미트케 (Alfred Schmidtke)가 작성한 "Neue Fragmente und Untersuchungen zu den judenchristlichen Evangelien"라는 제목의 논문을 다루고 있다. 슈미트케는 '동정녀 탄생의 전통이 단지 4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 인물이었다. 메이천은 초기의 저자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에비온파의 영지주의적 성격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슈미트케의 작업이 비록 혁신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뒤집지는 못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메이천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의 두 가지 진술을 통해 요약하고 있다.


1. 동정녀 탄생에 관한 확고하고도 잘 정리된 신앙은 이미 2세기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 라 간다.

2. 2세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부인의 움직임은 참된 역사적 전통보다는 철학적, 교조적 선입관에 기초하고 있다.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전통"이란 논문에서 메이천이 내린 결론은, 특수한 현상들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후기 논거의 기초가 된다. 전달하고 있는 주된 주장과는 별개로, 이 논문이 갖는 중요성은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라고 하는 메이천의 접근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세기경의 기독교를 고려하지 않고는 1세기의 기독교를 정당하게 연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신약을 연구하되 최대한 완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연구하려 하였다. 그에게 있어, 동정녀 탄생이 2세기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이미 1세기 기독교의 독자적이고 기본적인 가르침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메이천은 자신이 가졌던 기독교 정신에 바탕한 철학적 전제들을 이용해, 당시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던 기존의 많은 사람들과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가 선택한 논의는 역사적 방법은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여러 역사가들에 의해 채택된 일부 전제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추구하였다.


4. 예수와 바울

한편, 1912년 신학교 설립 1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들에 의해 발간된 「성경신학연구」(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를 통해 메이천의 그 해 마지막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논문의 제목은 "예수와 바울"이었다. 이 논문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메이천이 「바울 복음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1921년 발표한 최초의 책은 그가 "예수와 바울"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보다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와 바울"에서 메이천의 기본적인 주장은 바울이 예수의 참된 제자였다는 것이다. 브레데(William Wrede)가 그의 책 [바울](Paulus, 1905)을 통해 밝힌 결론에서 시작하여, 메이천은 자유주의 학자가 시도한 예수의 재구성과 바울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더 나아가 메이천은 세 가지 서로 상반되는 시각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 하나 하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였다. 우선 그는 율법으로부터의 기독교적 자유라는 문제에 대해 바우어(F. C. Baur)가 지적한 팔레스타인 기독교와 바울의 기독교사이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리츨과 하르낙의 반론을 다루었다. 두 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관점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관점을 대조시킨 "현대 급진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선 바울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간에 어떠한 갈등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로,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잘 알지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부 견해를 다루면서, 실제로 바울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예수님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메이천의 말을 들어보자:

따라서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인간 예수의 생애를 계시하셨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에 그것들은 오히려 바울에게 증오심만을 조장했을 뿐이었다. 그가 회심할 당시 받은 것은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바울은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살아 계신 주님으로 또한 주인으로 영접하였다 . . . .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갑작스럽게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다. . . . 예수님이 그를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부름에 순종하였다. 예수, 과거에 그가?성전의 파괴자요,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자이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장사된 자로 만?알았던 그분이 살아 계신 주님이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직접적인 임재를 통해 그를 교통 속에, 영광스러운 봉사에로 부르셨다. 바울이 자신의 복음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했을 때, 바울이 의도한 의미는 이것, 바로 이것이다.


메이천은 계속해서, 바울이 살았던 경건한 삶의 본질은 바로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교통"이었으며, 바울사상의 중심은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의 삶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메이천은 "만약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바울사상 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영감 받은 선지자들의 숭고한 가르침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전혀 터무니 없는 오류에 기초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논문은 메이천의 작품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이해와 자연적인 이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이 둘 사이의 지적 중간지점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천에게 있어 초자연적 구속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타당성 있는 유일한 설명은 역사적 해석이다. 결국 메이천은 역사적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의 확신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자들만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논문들은 전체적으로 메이천이 이젠 모두가 주목할 만한 신약 신학자로서 부상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1913년 Theologische Literaturzeitung지를 통해 메이천의 논문들을 평가하면서, 자신은 비록 메이천의 주장에 찬성하진 않지만, 메이천이 발표한 논문들은 "감탄할 만하며,"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5. 기독교와 문화

한편, 메이천은 1912년 9월 20일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연설은 "기독교와 문화"라는 제목으로, 1913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을 통해 발표되었다. 메이천은 이 논문을 통해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엔 다음의 세 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기독교를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우, 둘째는, 기독교를 문화 파괴자로 보는 경우, 세 번째는, 기독교가 문화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드는 경우이다. 이 같은 대안들 중 메이천이 주로 지지한 것은 세 번째 것이다. 그는 이 세 번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다행히 세 번째 해결책이 가능 하다?즉, 헌신을 말한다. 예술과 과학을 파괴하거나 그것들을 무관심 하는 대신에, 최고의 인문주의자의 열정을 품고 그것들을 장려하자.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우리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도록 하자. . . .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과의 구별을 흐리게 하거나 세상에서 떠나 일종의 지적 수도원주의로 물러나는 것 대신에,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기 위해 기쁘게 열심을 품고 나아가자.


메이천은 두 번째 해결책, 곧 기독교에 의한 문화 파괴라는 식의 대안을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비성경적이고, 바탕부터 반지성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첫 번째 대안은 더 더욱 치명적인 것으로, 기독교 전반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선 기독교도 문화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이 같은 해결책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교회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일 기독교에서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나면?오늘날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기독교는 단순히 자연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인간의 고안물로, 인간 문화의 한 부분으로 비하되고 만다.


이미 메이천은, 기독교로부터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기독교 신앙을 자연과 문화, 역사적 힘의 산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 이면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사주의의 가정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기독교를 문화에 종속시킴으로써 실제 우리는 기독교를 파괴하였으며, 비록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메이천이 역사주의적 정신이 이미 교회에 침투하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 같은 이해는 그의 후기 작품인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통해 잘 설명되어 있다. 비록 조금은 고풍의 글이긴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유는 그것이 초자연적인 것들을 문화적 상대주의의 의미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기독교 교회 내에 엄청난 변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메이천은 이 같은 "지적 분위기"를 질타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기독교를 참된 것으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선 "종교적 감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지적인 작업들이 . . . . 요구된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는 바는 "그 동안 지적인 작업들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회는 점차 보다 쉬운 일들에 관심을 돌리고 있다. 지금 교회는 자신의 게으름이 빚어낸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우리는 메이천이 기독교에 대해 가장 심각한 사상적 적대 세력의 특징을 정확히 꼬집어 내었고, 활발한 지적 학문 활동이야말로 그것과 싸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6. 역사와 신앙

1913년 초여름부터 시작하여 메이천은 기독교 사역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뉴 브룬스윅 노회 (New Brunswick Presbytery)의 관리 아래 있게 된다. 1914년 6월에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1915년 5월에 신약신학 조교수로 임용된다. 이 때 그의 취임 연설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 조교수로 임용될 때까지, 그는 총회에서 발행하는 교재를 쓰는 일에 몰두했었다. 지금 여기서 이 글을 구석구석 살펴보는 것은 본 논문의 연구 취지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 메이천의 작업이 주로 역사에 기초하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그가 주장하는 바들은 그가 학생용으로 출판한 책 서론에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책의 목적은 기독교 경건을 보다 확고한 역사적 지식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마치 학교에서 행해지는 역사 연구 과정과 동일한 방법에 따라 연구되어야 한다.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사실들을 배우는 것이다. . . . 성경의 역사는 이 점에서 다른 역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성경은 사건들의 기록인 것이다. 복음은 일어난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이다. . . . 그러나 역사가 비록 신성하다고 해서 역사가 아닐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복음이 역사라면 그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방법을 통하여 연구되어야 한다.


나아가 메이천의 고백주의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도 바로 이 책을 통해서이다. 이 책에서 메이천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가장 뛰어난 진술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수 차례에 걸쳐 직접 인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한 것은 언제나 소요리 문답의 내용이었다. 메이천이 그것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그가 이미 처음부터 그것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 장로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표준문서들과 고백적 정통 일반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해 토론할 때, 교회사에 등장하는 특정 종류의 교의가 가진 역사적 오류들을 언급하고, 결론부에 이르러 소요리 문답에서 인용한 글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교회는 그 같은 온갖 종류의 오류로부터 벗어나 복음으로 새로워 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의 구속자는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신 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으니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가지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21) 간단히 말해, 이 것이야 말로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에 관한 기사인 것이다. 그 같은 정의를 담고 있는 매 구절마다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며, 초기엔, 때때로 심각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한 구절 한 구절마다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의 본질적 요소가 담겨져 있다. 구절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통해 검증되고 입증된 것들이다.


또한 메이천은 기독교가 반드시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역설한다. "기독교의 소망과 현재의 소유"라는 부분에서 메이천은 성령의 역사에 호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령을 소유한 교회는 단순히 구원을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을 받은 교회인 것이다. 성령은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며, 첫 선물이 모든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미치게 하시는 이시다. . . .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것들은 아직도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세상은 점점 악에 빠져 들어가고, 기독교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다. 마지막 영광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다.


메이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당대의 지적 투쟁에 대한 참여는 그를 근본주의자들과 구별시키는 요인들이다. 그는 실제로 근본주의 운동에 합류하였으며, 그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그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주의의 공격에 직면해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한편, 1915년 5월 3일, 메이천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신학 조교수로 취임하면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설의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고 있다.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이다. . . . 성경은 무엇보다 사건들의 기록인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줄 곳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할 것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역설하였다. 그는 이어 인간 예수가 바울에 의해 신격화되었다고 주장한 홀츠만(H. J. Holzmann)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메이천은 약간 풍자적인 어조로 현대 신약비평의 본질적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예수는, 공간적 거리와 신비로운 후광에 의해 미혹되기 쉬운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에 의해서 천상에 속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 것이야 말로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전체가 그 같은 망상에 뿌리박고 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또 메이천은 전에 그가 배웠던 말부르크 대학교의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글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예수님에 관한 자유주의적 재구성을 비판하였다. 메이천에게 있어,

복음은 '좋은 소식', 소식,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를 의미하였다. 달리 말해, 그것은 역사인 것이다. '역사와 무관한 복음'은 이미 표현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메이천은 당대의 신학적 자유주의를 현대 자연주의의 산물로 간주하였다. 그는 역사주의의 중심적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현대 역사주의자들에 따르면, 초자연적 인간은 결코 존재한 일이 없다. 그것이 바로 현대 자연주의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세계는 불변의 법칙들에 순응하며, 결코 끊어지지 않는 발전단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이, 메이천은 급진적 역사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 모두의 뿌리엔 자연주의적 가정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자유주의의 재구성을 "실패"라고 단정지었다. 그가 이렇게 단정한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메이천의 말에 따르면, 우선 복음이 전하고 있는 기사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전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둘은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메이천이 제시한 두 번째 이유는 설사 자연적인 것을 초자연적인 것에서 분리할 있다 해도, 이러한 분리 작업을 통해 남은 것들이 "의의 교사요, 영감 받은 선지자였으며,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긴 예배자"로서의 예수를 가리키는 요소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이천에 의하면 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실존 불가능한 인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전히 자신을 메시아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비록 이 같은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인정한다 해도, 그가 어떻게 자신의 제자들에게 초자연적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메이천은 이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한 예수는 "기독교회의 근원을 설명해 주기엔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연설을 마치면서, 메이천은 역사와 신앙의 관계 문제를 다시금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역사는 신앙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하며, 역으로 신앙은 역사를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메이천의 주장은 이 부활이야말로 기독교가 존재하게 된 타당성 있는 유일의 역사적 근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논쟁 자체가 부활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럴지라도 역사는 자체만으로 "완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경험을 통해 확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뭔가를 역사적으로 연구할 때 빠질 수 있는 뜻하지 않은 위험에 대해 메이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오직 개연성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연성이야말로 역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이러한 개연성은 적어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충분하다. 우리는 부활을 검증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부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검증 과정을 통해 우리는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역사에 대해 직접성과 즉각성, 그리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구원해 줄 확실한 친밀성을 더해준다.


역사와 신앙의 관계를 다루면서 메이천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날카롭게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바로 한 가운데 있다. 예수님에 관한 기사에 있어 그러할 뿐 아니라, 성경은 그 자체의 본질적 주장을 확증하여 주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 기초를 파헤치게 되면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너질 뿐 아니라 그 무너짐 또한 매우 심각할 것이다." 그는 이어 "기독교의 두 가지 개념"이 교회 내에서 항상 상호 갈등을 일으켜 왔다고 말한 뒤,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지금 혼돈 속에 있으며,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도저히 평화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평화, 평화를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선택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하나님이여,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하나님이여, 성경에 따라 판단 할 수 있도록 도우소서!


7. 소결론


이것은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 임명된 뒤 근 10년 간의 학문적 풍토를 자세히 살펴온 깨어있는 학자의 경고였다. 그러나 교회 내 거의 아무도 이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필자는 교회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성경에 관한 적합한 역사적 연구와 초자연적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를 통해 우린 그가 이미 이른 시기부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과 성경에 관한 역사적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깊은 확신을 발전시켜 왔으며, 또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필자는 메이천이 교회 내 일치와 순결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할 때마다, 그것은 단순히 장로교회 표준문서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기 위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메이천만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메이천은 장로교 논쟁에 심각하게 말려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성경의 신실함과 명료함에 대한 강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전혀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칼빈(John Calvin)이나,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하지(Charles Hodge),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A. A. Hodge),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등과 같은 자신의 믿음의 선배들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뿐이다.

메이천은 이미 그의 활동 초기에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정당한 것일 뿐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신약과 거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부분적으로는 그 당시의 역사적 환경이라는 제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그러한 역사적 환경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 결과 메이천은 역사주의의 본질적 교의들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그는 기독교 해석과 자신의 교회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당시의 주류적인 흐름에 대해서도 상반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한 메이천의 확신은 그가 자란 미국 남부 배경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에서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자신의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으나, 메이천은 1906년 프린스톤의 교수로 임명된 뒤 성경과 당대의 학문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그는 자신이 가졌던 최초의 확신을 재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의 관점은 1915년에 이르러 완전히 자리잡게 되었다.


III.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



메이천이 새 선교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은 소위 자유주의 및 중도파 진영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진영에서조차도 메이천의 후기 신학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논쟁의 핵심이 되고 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성과 곧 이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이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에 속한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성격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교단 소속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고(1932년), 이들에 의해 복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 메이천은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를 조직했다(1933년). 이후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는 뉴 브룬스윅 노회(the Presbytery of New Brunswick)에서 재판을 받고(1934년), 정죄되어(1935년), 결국 총회로부터 목사 정직을 당하기에 이르렀다(1936년). 이 즈음에 그의 오랜 친구였던 클라렌스 매카트니 목사(Dr. Clarence Macartney)는 메이천이 새 선교부에서 손을 떼기를 거절하자 메이천과 메이천이 설립한 새 신학교와도 인연을 끊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동시대와 후대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을 둘러싼 사태의 진전과 관련하여 메이천과 그의 행동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더욱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필자는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 설립과 관련하여 당시 메이천의 교회론적 관심을 우선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1. 메이천 이해에 있어서 최근 논쟁

잔 그레스햄 메이천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미국 교회사에 있어서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근본주의 운동은 몇 몇 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사회적인 부적응으로, 또는 농촌과 도시 문화 사이의 갈등의 산물로, 또는 반 진화론적이요 반 지성적인 감성의 표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서 근본주의 운동에 대하여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 것은 어네스트 샌딘(Ernest R. Sandeen)이라고 볼 수 있다. 샌딘은 197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인 [근본주의의 뿌리들](The Roots of Fundamentalism)을 통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뿌리는 그 교리적 전통을 포함하여 1920년대의 사회적 격변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그 뿌리가 깊다고 하는 사실을 제시했다.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를 이해하는 두 개의 열쇠는 프린스톤 신학과 천년왕국론이라고 단언했다. 샌딘은 말하기를, 전자(프린스톤 신학)는 근본주의 운동의 구조와 더불어 또한 잘 훈련된 이 운동의 전국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후자, 곧 천년왕국론은 근본주의 운동에 그 생명과 형태를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샌딘의 저서가 출판된지 10년 후, 조지 말스덴(George M. Marsden)은 그의 저서 [근본주의와 미국 문화](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에서 주장하기를, 근본주의 운동에 대한 샌딘의 논법은 당시 근본주의로 알려진, 1920년대의 전투적이며 반 현대주의적인 복음주의(the militant, anti-modernistic evangelicalism)라고 하는, 보다 큰 현상을 적절하게 다루는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말스덴은 근본주의 운동에 있어서 천년왕국론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샌딘과는 달리 근본주의 운동에 미친 다른 요인들, 곧 19세기 복음주의적 개신교, 부흥운동, 개신교 문화의 퇴조, 현대주의에 대한 반대와 반감, 그리고 개인의 도덕성에 대한 강조 등에 더 역점을 두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근본주의 운동의 교리적 기원에 관한 샌딘의 논지를 재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샌딘과 말스덴 두 사람은 모두 근본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교리적 기원에 관하여 프린스톤 신학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특히 근본주의 운동의 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프린스톤 학자들의 강조를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점은 상반된 것으로, 샌딘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말스덴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를 고찰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역사학자들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the Modernist-Fundamentalist controversy)을 기본적으로 교회론에 관한 분쟁으로 취급하였다. 예를 들면, 레퍼츠 레춰(Lefferts A. Loetscher)는 그의 저서 [넓어지는 교회](The Broadening Church)에서, 장로교 논쟁에서의 갈등의 골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교회론적이었다고 말하고, 특히 그 논쟁의 와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교회의 개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레춰는 말하기를, 장로교 논쟁에서의 갈등에는 주요한 세 그룹, 곧 극단적 보수주의자들과 온건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레춰에 의하면, 후자의 두 그룹이 결국 동일한 교회론적인 포용성을 근거로 합세하여, 교회론적인 배타성의 입장을 취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레춰의 논지는 일견 대단히 매력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논쟁의 와중에 있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신학적인 차이를 극소화하고, 대신에 주변의 문제들, 곧 행정상의 차이점들과 신학교와 교단 안에서의 권력 투쟁 등을 극대화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에 따르면, 이들 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서로 다른 교회론적인 관점으로부터 이런 차이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레춰는 메이천의 교회론은 장로교적이 아니며, 재세례파의 그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유사한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에드워드 카넬(Edward J. Carnell)은 메이천의 교회론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발견하고, 메이천은 개혁주의 교회론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클립튼 옴스테드(Clifton E. Omstead)는 그의 저서 [미합중국 종교사]에서 말하기를, 메이천이 교회를 자원단체로 보기 때문에 메이천은 "조합 교회 제도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에 덧붙여, 메이천 이해에 있어서 또 하나의 해석이 있으니 달라스 로우악(Dalla Morgan Roark)의 해석이다. 로우악은 그의 학위논문인 "제이 그레스햄 메이천과 교리적으로 진정한 장로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열망"에서 주장하기를, 메이천에 대한 레춰의 취급조차도 메이천의 교회론을 정당화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로우악은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안 장로교 논쟁에 있어서 메이천의 행동은 "마땅히 교리적으로 '진정한 장로교회'를 위한 그의 열망에 비추어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로우악은 메이천이 장로교 정치체제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거나, 아니면 장로교 정치체제와 일치하게 행동하지 못한 독립교회파의 사람이 분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아래의 세 가지 관점에서 고찰했다: (1) 종교개혁의 관점, 특히 요한 칼빈의 저작에 나타난 관점, (2) 장로교회 표준문서들의 관점, (3) 미국의 장로교 전통의 관점. 로우악은 주장하기를, 장로교회 안에서 그 표준문서들에 대해 완전한 서약을 요구한 메이천의 견해는, 메이천이 교회를 자원단체로 표현하데 대하여 레춰가 그를 "재세례파"라고 불렀던 바, 오히려 그보다는 로마 카톨릭의 "계급제도적"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메이천의 교회론을 "분리주의적"이라고 비난하고, 개인적으로 메이천처럼 정통적인 인물들이 메이천과 함께 분리하는데 동참하지 아니한 것을 지적했다.

로우악도 레춰와 유사하게, 논쟁 당시 장로교회 안에 세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메이천 이끄는 엄격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오번 선언서의 서약자들과 같은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중도 그룹에 속한 사람들, 곧 이들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단의 분열에는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자유주의자들에 대하여는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런데 장로교회의 결정적인 시기에 교회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무리들이 바로 이 세 번째 그룹이었다고 로우악은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메이천이 "교회론과 관련하여 장로교회의 표준문서로부터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메이천은 말하기를,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은 기독교의 한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의 논쟁이 아니라, 한 종교와 서로 다른 종교 사이의 논쟁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천에 의하면, 자유주의는 간단히 말해 기독교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주의"로 불려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 논쟁에 있어서 중대 사안은 정치라든지, 혹은 교회재판에서 흔히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은혜스러움이 아니었다. 실로 바른 신학, 건전한 신학을 거짓 교훈 또는 잘못된 신학으로부터 가려내는 중대 사안은 바로 성경의 권위이다.

필자는 메이천 박사가 본질적으로 신실한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자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본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신학이 그의 저술들을 형상화하였으며, 또한 장로교 논쟁 중에 그가 취한 행동을 지로했다고 하는 점은 이미 지적한 바 있다.

2. 새 선교부의 설립

메이천은 1937년 유작으로 출판된 그의 저서 [기독교 인간관](The Christian View of Man)에서, 가견교회(the visible church)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순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견교회가 "너무나 자주 오류와 죄악 속에 빠져 왔으며," 이제는 "심각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배교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메이천은 이 변화하는 세계(this changing world) 속에서 변화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the unchanging Word of God)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메이천의 이 말은 그가 소천(1937년)하기 몇 달 전에 했던 말이었다. 우리는 메이천의 말을 통해 그가 교회의 자원적인 면을 인정하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정직하게 서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하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기록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회론에 대한 메이천의 이러한 생각은, 특히 성경의 진리와 교회의 고백주의에의 헌신과 더불어 메이천이 속한 교단(PCUSA,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나타났다.

1932년 말에 [선교 재고: 100년 후 평신도들의 질의서]라고 하는 책이 전체 7권으로 출판되었다. 잔 록펠러(John D. Rockfeller, Jr.)씨가 재정을 후원한 이 책에는 15명으로 구성된 선교위원회가 인도, 미얀마, 일본, 중국 등지에서 행해진 미국의 해외선교를 검토했다. 이 연구는 미국 사회종교 연구소의 도움과 미합중국 장로교회를 포함한 당시 7개의 주요 교단 선교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당시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해외선교부의 책임자는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전체의 권수만큼이나 대중화되지 못했다. 이후 곧 강력한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하바드 교수였던 윌리엄 하킹(William Ernest Hocking)이 편집한 단 권으로 된 [선교 재고](Rethinking Missions)가 출판되었다. 단 권으로 된 [선교 재고]의 전반적인 어조는 합리주의였다. 이 책자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생생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당시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자유주의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다고 하는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이 책자는 출판되자마자 곧 보주주의자들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았다. 급기야는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집행위원들이 "복음적인 선교정신의 기조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확인하고, 또한 교단에 속한 장로교 선교사들에 대한 신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였던 메이천은 교단의 해외선교부가 작성한 그 보고서가 눈가림을 위한 허위이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격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되었으며. . .; 그것은 성경을 약화시키고 기독교 교리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며. . .; 그것은 교계에서 오랫동안 지켜온 영벌의 교리를 기각하였으며. . .; 그것은 전도와 분명한 회심과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약화시키고 있다.


당시 사태는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의 저자인 펄벅 여사의 잡지 기고문으로 말미암아 더욱 악화되었다. 펄벅 여사는 당대 최고의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는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 펄벅 여사가 [하아퍼즈 매거진]의 1933년 신년호의 기고문에서, 속죄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미신적"(superstitious)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선교 재고]라는 책자에 대해서도 "삶의 자리에서 종교에 대한 명 진술이자 동시에 종교의 자리에서 기독교에 대한 명 진술"이라고 펄벅 여사는 극찬했다. 결국 이 문제로 펄벅 여사는 해외선교부에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선교부의 위원장인 스피어는 "깊은 유감"의 표명과 함께 그 사직서를 받아 들였다.

펄벅 여사가 사직한 후, 메이천과 스피어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었고, 이 논쟁은 결국 메이천이 속한 뉴 브룬스윅 노회에 의해 1933년도 총회에 4개조의 헌의안으로 상정되었다. 소위 "메이천 헌의안"으로 불려지는 이 헌의안은 총회가 해외선교부에 사람을 선발할 때 "교회가 당면한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인사들만" 선발할 것과, 또한 각 선교사는 누구든지, "성경의 완전한 진정성, 우리 주님의 동정녀 탄생,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사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속, 그의 몸의 부활과 그의 이적"을 본질적인 진리로 선포하기로 요구할 것을 청원했다. 또한 그 헌의안은 "모든 목사 후보생들이 이들 진리를 받아들일 절대적인 필요성을 부인하는" 인사는 선교부 책임자의 자리에 앉히지 말도록 총회가 선교부에 지시하도록 청원했다.

그러나 이 헌의안은 부결되었고, 소수의견 보고서의 출판마저 해외선교부 책임자의 권고로 거부되고 말았다. 총회는 선교부와 소속한 사람들의 지지를 재확인하고 선교부에 "전폭적이며, 명백하고, 열광적이며, 애정이 넘치는 찬사"를 보냈다.

총회가 끝난 직후, 정확히 말해서 1933년 6월 27일에 독립 선교부를 설립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첫번 공식 모임이 있었고,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 정관이 채택되었다. 메이천이 새 선교부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 새 선교부의 합법성

이듬해 1934년도 총회는 독립 선교부의 폐지를 명했으며, 또한 모든 장로교 회원들이 그 선교부와 관계를 청산하도록 요청했다. 총회의 결의에 따라 뉴 브룬스윅 노회는 메이천을 재판할 7인 징계위원회를 임명했다. 다시 이듬해 1935년 3월 29일 메이천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청원서가 대회와 이듬해 1936년도 총회에도 제출되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1936년도 총회는 "1934년 결의"(the "1934 Mandate")를 확인하고, 총회 재판국은 뉴브룬스윅 노회에 메이천을 정직 시키도록 지시했다. 1936년도 총회가 끝난 지 오래지 않아서 새 교단이 조직되었다. 새로 출발하는 교단의 처음 이름은 미국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였으나, 1939년도 2월에 소집된 제 5회 때부터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결국 정통장로교회의 설립으로까지 진행된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에 대한 범 교단적 분쟁 동안에 표출된 메이천의 생각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독립 선교부가 장로교 원리에 위배되는지 고찰해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부와 독립선교부(들)을 항상 인정해 왔다고 하는 점이다.

1869년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 구학파(the Old School)와 신학파(the New School)가 재연합했을 때, 구학파는 해외선교부를 가지고 있었고, 신학파는 해외선교부를 대행하는 미국 해외선교부(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를 운영하고 있었다. 분리된 두 교단이 하나로 합쳐지기 전에, 구학파의 총회와 신학파의 총회는 각각 기독교적인 사역에 있어서 자유를 고려하는 견해를 명백히 표명하는 공동 선언서를 채택했다. 결의안 6번은 아래와 같다:


국내와 해외선교를 위한 선교부 또는 일단의 위원회, 그리고 교회의 다른 종교적 사업이 있어야 하는 바, 이것은 양 교회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장려되어야하며,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다른 경로로 자신들의 기부금(헌금)을 보내는 것은 자유이다.


위의 진술로 미루어볼 때, 이후에 조직된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이 합헌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의 법에 따르면 선교부가 통제하는 기구나 장로교회의 대행기관이 아닌 다른 기구에 교회의 회원들이 기독교적 자선을 위한 기부금을 내어도 좋다고 분명하게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위의 글을 미루어 관찰할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행동의 자유에 대하여 1869년 양 총회에 의해 지명된 해외선교 합동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n Foreign Missions)의 보고서에서도 명확하게 인정되었다. 이 보고서는 이듬해인 1870년도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총회는 미국 해외선교부 (the American Board)의 선교사들이 장로교 (해외)선교부의 기치 아래 일할 것을 희망하는 표현을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명했다:


이제 개인 기부자들과 교회들의 충분한 자유에 일치되는 한에 있어서, 전체 합동 교회의 위원회들과 에너지와 기부금을 우리의 해외선교부가 수행하려고 하는 그 일에 집중하도록 매진할 때가 왔다.


보고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도 먼저 이들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스도의 선교사들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계는 인격적이며 직접적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헌신된 생애를 바치게될 선교부와 지교회들에 대한 어떤 관계를 결정하는 자유와 책임은 그들 자신들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선교사역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어떤 단체를 통하여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또한 동등하게 자유하다.


이들 1870년도 총회의 선포는 1878년도 총회의 선포와 일치한다. 1878년도 총회는 "우리 교회[미합중국장로교회] 법정의 어느 곳에서도 지교회들에 대한 세금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고 선언했다. 위의 진술에 따르면, 총회에 참석하는 총대들의 여비계산과 같은 것까지도 총회가 의무적인 평가를 부가할만한 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20년에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가 미합중국 웨일즈인 장로교회(Welsh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와 연합할 때에도 동일한 원리가 선포되었다. 미합중국 웨일즈인 장로교회의 공식 명칭은 웨일즈인 칼빈주의적 감리교회 또는 장로교회였다. 1920년도 총회는 개인들과 지교회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기부를 하는 것은 자유라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모금에 대하여―우리 교단 안에서 교단적인 모금은 의무적이 아니라 자유로운 기부이다. 지교회들에게 유일하게 지정된 것은 범교회적인 비용뿐이다. 총회는 선교사들과 자선단체들이 모든 교회에 기부금을 호소하도록 하는 것과, 또한 때때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전체 교회의 관대함에 호소하도록 하는 권한을 부여한다.


위의 진술에 따르면, 장로교인들이 교단의 공식적인 선교부에 기부하지 않고 독립 선교부에 기부하는 것은 장로교회 헌법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선교부를 지원하는 것은 전혀 자발적인 문제라고 하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기 때문에, 메이천의 경우에도 그가 사람들에게 교단 선교부보다도 독립 선교부를 지원해달라고 권했을 때 그는 교회[교단]를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총회의 선포에 따르면, 교회의 공적인 선교부에 대한 반대가 장로교회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며, 오히려 장로교회 헌법이 허락한 범위 안에서 회원의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에 채택된 교회 연합 협정의 제 5조에 의하면, 독립 행위에 대한 권리를 다음과 같이 정하고 있다:


(4) 노회들의 승인을 받고 선교부와 더불어 그 대표에 의해 지원되는 모든 승인 요청서는 통상 규칙에 따라 호의적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하는 확신과 더불어, 웨일즈인 대회는 그들 자신들의 선교부를 가질 수 있으며, 혹 행정적인 비용을 절약하기를 원한다면 장로교 선교부에 정당한 대표자를 가질 수 있다.


위의 진술은 1933년도에 조직된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the 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 설립의 합법성을 지지하고 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PCUSA)는 웨일즈인 교회의 해외선교지를 흡수하지만, "웨일즈인 대회(the Welsh Synods)는 그들 자신들의 선교부를 가질 수 있으며," 또한 " 이들 선교지에서 사역을 촉진하기 위하여 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선교기금을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4년이 지난 1934년도 총회는 메이천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이 모든 것 속에는 놀랄만한 아이러니가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소수였을 때에는, 비록 저들이 교회의 헌법에 명백하게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관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저들이 중도파의 도움으로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에는, 메이천이 하고 있는 완전히 합법적인 것으로부터 마땅히 그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동일한 헌법을 내세워 메이천을 교회의 권징과 치리에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4. 메이천 재판에 대한 재고

메이천에 대한 재판은 일상적인 장로교 정책에서 벗어난 것임을 1953년도 총회[미합중국 장로교회]의 결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53년도 총회는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와 관련하여 로스 엔젤리스 노회록에 관한 특별위원회가 제시한 보고서를 채택했다. 1947년 풀러 신학교가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시에서 비교단 신학교로 설립되었을 때, 처음 교수들의 명단에는 해럴드 오켄가, 칼 헨리, 에드워드 카넬, 조지 래드, 찰스 뚈브릿지, 글리슨 아처, 에브렛 해리슨, 윌리엄 라소르(Harold John Ockenga, Carl F. H. Henry, Edward John Carnell, George Eldon Ladd, Charles Woodbridge, Gleason L. Archer, Jr., Everett F. Harrison, William S. Lasor) 등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신복음주의자들(neo-evangelicals)로 부르고, 엄격한 분리주의를 정죄하고 세대주의를 버리거나 덜 강조했으며, 근본주의자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학문과 문화에서 유용한 것은 충용하도록 역설했다. 이들은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 정치, 경제 관계를 포함하여 문명의 전체 방향에 관심을 갖도록 촉구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풀러 신학교가 위치한 지역범위에 속하는 로스 엔젤리스 노회가 그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장로교 목사들이 노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교수를 계속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했다. 이 항의의 결과로 글리슨 아처 교수는 1949년 11월에 만머스 노회(the Presbytery of Monmouth)에서 로스 엔젤리스 노회로 이명을 신청했다. 그리고 곧 이어 에브렛 해리슨 교수가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이명을 신청했고, 윌리엄 라소르 교수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명신청은 로스 엔젤리스 노회에서 거부되었다. 그러자 노회의 이러한 결의에 대한 고소장이 캘리포니아 대회와 총회에 차례로 제출되었다.

일곱 명으로 구성된 로스 엔젤리스 노회록에 관한 특별위원회가 1952년 총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 위원회의 목적은 "로스 엔젤리스 노회의 청원을 이행하여 그들의 조사결과와 추천서를 165회 총회에 충분히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별위원회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요청했다:


1. 비 장로교 사역에서 그 활동의 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장로교 소수파가 사실상 또는 법률상으로 이에 상응하거나 또는 필적할만한 공식적인 장로교 활동에 어느 정도로 반대가 되는가?

2. 미합중국 장로교회에 신학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또는 다른 이유로 비판적이며, 또한 어떤 활동적인 방법으로 장로교회 교인들을 그 견해에로 개종을 모색하며,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공식 입장과 다른 어떤 비 교단적 또는 독립 단체가 그것 때문에 장로교회의 적대자가 되며, 따라서 장로교회 목사가 직분자로서 마땅히 봉사할 수가 없는 단체인가?


위에 제기한 두 가지 질문에 답하여, 1953년도 총회 보고서는 장로교회에는 장로교회를 비판할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다만 교회를 파괴하는 자유는 없다고 명시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적인 기관과의 단순한 경쟁은 장로교회 안에서 적대적인 것으로 반대된 적이 결코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회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양심의 명령으로 믿는 것에 순종하도록 교인들의 권리를 기꺼이 옹호해 왔다고 말했다.

따라서 공식적인 장로교 프로그램과 유사한 비 교단적 또는 독립 사역은,


우리 장로교회[미합중국 장로교회]의 대부분의 역사동안 장로교 목사에 대한 적절한 기독교적 소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적절한 기독교적 소명이 되어 왔다.


고 그 보고서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교회가 기독교 사역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개입하는 경우는 비 교단적 또는 독립 사역이 이에 상응하는 공식적인 장로교 사역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상황에 제한된다.

두 번째 질문에 답하여, 보고서는 말하기를, 이 문제는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비록 그 추종자들이 소수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어떤 견해를 비록 매우 활동적으로 추진하려고 모색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없다, 만일 그 견해가 반 성경적이 아니고 그 추진 방법이 파괴적이 아닌 경우라고 한다면. 복음 전파의 자유, 탐구의 자유, 출판의 자유, 활동의 자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따르기로 고백하는 어느 교회에서도 전적으로 필요하다.


위 보고서의 관대한 언어 표현에도 불구하고, 아처, 해리슨, 라소르 교수들은 결국 로스 엔젤리스 노회에 이명하는데 실패했다. 로스 엔젤리스 노회는 이들 교수들이 본래부터 "분리적인" 신학교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이명을 거절했고, 1955년도 총회는 그 결정을 받아 들였다.

우리가 이 보고서의 기준을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에 적용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반대할 이유를 찾을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독립 선교부를 설립함에 있어서, 메이천은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교회[교단]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자유주의의 선언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적인 선교사들을 지원하기를 윈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안적인 선교부를 설립했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관들과 단순한 경쟁관계"였으며, 장로교회의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항상 보장된 것이었다. 독립 선교부는 교회의 공식적인 선교부에 직접적인 반대나 그 활동에 개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사역을 수행하려고 했다.

독립 선교부의 설립을 선언하는 성명서에는 이러한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새 선교부는 현재 선교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전한 선교사들을 지원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을 의도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정해진 기부금은 물론 계속적으로 기존 선교부를 통하여 조달될 것이다. 더욱이 새 선교부는 얼마가 되든지 간에 선교부가 받은 기부금을 널리 지출하는 것 외에 어떤 재정적인 책임을 보증하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독립 선교부는 간접적으로 교회의 공식적인 선교부를 반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쟁관계에 의한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메이천과 그와 함께 한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 선교사역을 계속 비판하였지만, 그들은 장로교회의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렇게 할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러 신학교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자유주의자들이 교단을 장악했을 때 말썽 많은 복음주의자들을 제거할 핑계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5. 소결론

지금까지 고찰해 온대로 총회가 채택한 여러 선언문들은 한결같이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이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이 어느 기관을 통하여 기독교 사역에 대한 기부를 행사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는 장로교회 헌법에 의해 모든 교인에게 보장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원리이다. 더욱이 이 권리는 교회가 교회 안에 있는 복음의 대적자들에 대해 싸우기를 거절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표준문서들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우에는 더욱 명확해진다고 할 것이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명시된 정치 제20장 2항; 제21장 2항과 3항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실로, 장로교회의 법은 교회의 기관과 대행기관에 의해 통제되는 기구들 외에 다른 기구들에 기독교적 자선을 위한 기부금을 교인들이 내는 것을 명백하게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 장로교회 헌법에 명시된 예배모범 제 6장 3항과 4항이 이에 속한다.

메이천을 중심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과 장로교 독립 해외선교부의 설립, 그리고 정통장로교회의 시작은 종교적인 자유주의에 대해 메이천이 반대한 논리적인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주의자들이 1920년대를 지나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장로교회 안에서 중도파의 도움으로 다수를 점령하게 되자, 보수주의 목소리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유일한 선택은 분리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메이천의 경우에는 스스로 분리한 것이 아니라 자기 교단에서 축출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단순히 스스로 분리했더라면, 그 분리는 정당화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일치하는 신실한 개혁주의 장로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면, 이전의 장로교회가 복음의 대적자들에 의해 주도된 경우, 그 분리를 어떻게 분리주의적 또는 비 장로교적이라고 간주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어떤 이들은 메이천이 너무 늦게 행동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계속된 장로교회의 역사는 그것[자유주의를 수용한 미합중국 장로교회]이 향하고 있는 곳을 메이천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확인해주고 있다.

이후 신학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쳤다. 1929년 메이천을 비롯하여 로벗 딕 윌슨, 앨리스(O. T. Allis) 등이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곧 이어 카이퍼, 반틸, 머리, 매크리, 스톤하우스, 울리(R. B. Kuiper, C. Van Til, John Murray, Allen MacRaee, Ned B. Stonehouse, Paul Woolley) 교수 등이 가담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프린스톤 신학교는 1936년 잔 매케이(John A. Mackay) 박사를 스티븐슨의 후임 학장으로 선출하고, 1939년에는 신정통주의자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를 조직신학 교수로 초빙하였으며, 발트주의자 홈리히하우젠(Elmer G. Homrighausen) 교수를 기독교 교육학 교수로 받아들이고,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와 화해의 교제를 터놓았다. 당시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학장은 바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교리를 부인하여 목사안수가 지연되었던 헨리 반 듀센이 1936년 이래로 학장직을 맡고 있었다.

마침내 자유주의자들이 장로교회를 주도하게 되었을 때, 메이천은 복음 전파를 현저하게 방해하고 있는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일치를 붙드는 것보다는 교회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메이천이 취한 행동을 판단함에 있어서, 메이천은 장로교 원리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또한 장로교회 헌법에 일치하게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성경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으며, 교회의 일치와 순결이라고 하는 성경적 원리를 적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만약 메이천이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그가 너무 멀리 나간데 대하여 비판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멀리 나가지 못한데 대하여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메이천과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교단과 신학교 내에 명백한 자유주의의 도발에 대해 낱낱이 교회의 권징과 치리를 사용했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암세포가 몸 속에 퍼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하기 전에 그렇게 했어야 옳았다. 아마도 이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장로교회를 지배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마도 독립 선교부에 대한 분쟁 이전에는 교회 안에서 관용을 부르짖고 있는 저 은밀한 자유주의자들이 장차 저들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보수주의자들에게 행할 일들을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훗날 오번 선언서에 서명한 자들에 대해 이단재단을 즉시 실시하지 못한데 대하여 메이천이 후회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하여, 필자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친 장로교 논쟁에서 메이천이 장로교회의 원리와 일치되게 행동하지 못했다고 비난한 로우악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비난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메이천은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자유주의 이단을 교회 안에 합법화하는 "관용"에는 물론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장로교 전통에는 전혀 일치한 것이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서 성경의 권위에 비추어서 메이천의 역할과 행동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프린스톤 신학교는 교단 신학교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교단에 있는 사람들의 견해를 대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린스톤 신학교의 실제적인 책임은 장로교회 헌법에 대한 책임이요, 나아가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책임이었다. 우리는 메이천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에 대하여 주장할 때와, 또한 그가 성경적인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보존을 주장할 때도 이 책임감이 그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1932년 "우리의 새 시대에 교회의 책임"이라고 하는 주제로, 미국 정치 사회 과학회(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에서 행한 연설에서. 메이천은 진정한 교회의 특징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로, 진정한 교회는 "철저하게 교리적" 교회가 되는 것이요; 둘째로, 진정한 교회는 "철저하게 비관용적" 교회가 되는 것이요; 셋째로, 진정한 교회는 "철저하게 윤리적"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특징 중에서 두 번째 점을 전개함에 있어서, 메이천은 "일단의 위원회와 이사회 아래 전 개신교 세계를 두는 하나의 전제주의적인 교회조직을 추구하는 우울한 꿈"에 대한 반대를 명확하게 했다. 그는 또한 "복음의 보편성"과 교회의 "높은 배타적 성격," 곧 "단지 구원의 한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일한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하는 것"을 옹호했다.

이것은 분리주의자나 분파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오히려 메이천의 말은 그의 일관된 신학사상에 비추어서 우선적으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의 진리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의 헌신, 그리고 그 결과 자연주의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메이천의 반대는 메이천의 시대에 널리 유행하고 있던 신학적 경향으로 당시 자신이 속한 교단을 파멸로 몰고 가고 있는 그 시대의 흐름과는 철저하게 서로 반목하게 하는 책임 있는 대응이요 크리스천 학자의 양심이었다.

/ 김길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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