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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by 【고동엽】 2014. 9. 24.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김길성 교수의 <메이천저작선집>을 읽고

제1장 메이천 박사의 신학에 대한 이해

Ⅰ. 서론

메이천의 신학적 시각은 주로 프린스톤 신학의 영향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받은 것이다. 프린스톤 신학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통해서 강화되었고 정통 칼빈주의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다. 메이천이 가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서 성경”에 대한 확신과 분명한 의식은 어린 시절 신앙훈련으로 형성되었다.
메이천은 1905년 독일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mann)교수와 만나게 된다. 그는 주로 신약 분야를 공부하였지만, 조직신학에 관한 헤르만 교수의 강의를 수강하기도 하였다. 헤르만 교수와의 만남으로 메이천은 자신이 목회자로서 사역을 하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해서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메이천은 헤르만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오랜 신앙에 대 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주의의 기독교 비판에 대응하여 역사적 기독교를 옹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메이천은 독일에서 돌아온 후 당시의 적대적 문화 속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메이천이 발견한 것은 교회가 실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1906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과 강사로 봉직하게 된 메이천은 성경의 역사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연구 작업을 통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명확성과 신뢰성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다. 메이천은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 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Ⅱ. 메이천의 작품에 대한 고찰

1.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

1912년 「프린스톤 신학평론」에 실린 메이천의 첫 논문 제목은 “누가 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었다. 이 논문은 주로 누가복음 1:46-55의 ‘마그니피갓”(Magnificat)이라 불리는 마리아의 찬양과 1:68-79의 “베네틱투스”(Benedictus)라 불리는 사가랴의 찬양을 다룬 것이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그의 두번째 논문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은 세번째 복음서의 첫 두 장의 출처가 될만한 가능성 있는 자료들의 여러 문제점들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 두 장이 의식적으로 칠십인 역을 모방하여 누가 자신이 직접 작성 한 것’이 라고 말한 하르낙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메이천은 마리아 송가와 관련된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교부신학의 대표자인 하르낙의 주장을 굳이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스피타’가 이미 마리아송가의 기원에 관한 하르낙의 이론을 충분히 반박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이천은 이 스피타의 것과 유사한 방법을 이용하여 사가랴의 노래(Benedictus)에서 사용된 단어들과 구절들, 그리고 그 구조에 대해서 메이천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리아 송가가 본래 마리아가 노래하였던 아람어 송가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이것이 탄생 기사와는 별개로 회자되다가, 복음서 기록 당시 영감된 누가 자신의 손끝을 통해 탄생기사 안에 있는 현재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가랴의 노래에서도 일어났다고 메이천은 주장한다.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이란 논문은 메이천의 저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첫 장을 이루게 되었다.

2.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이란 제목의 두 번째 논문을 통해, 누가복음 1장과 2장에 기록된 탄생 기사를 각기 다른 요소들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에 반대하고, 탄생 기사의 통일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세 가지의 가설을 다루었다. (1) 기록된 자료들을 시용 하지 않고, 누가 자신이 작성하였을 것이다. (2) 누가는 아람어로 된 문서 자료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3) 누가는 헬라어로 된 문서 자료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모든 언어적 증거로 보아 이 탄생 기사가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일 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 두 논문을 통해 메이천이 성경을 역사적인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탄생 기사의 문학적 통일성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통해 묘사되고 있는 사건들의 역사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메이천은 때로 세상 일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였다. 메이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은 진실로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신 방편이었다. 메이천과 여타 역사주의의 가정들을 받아들이고 있던 하르낙과 같은 성경학자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다름 아닌 그 같은 신적 개입에 대한 입장의 차이였다. 이미 그의 활동 초기부터 그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접근법을 통해 신앙은 모든 증거들을 배제한 비이성적 도약이 아니라, 오히려 정확하게 해석만 된다면 그 증거들과 완전히 일치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3. 2세기의 동정녀 탄생

이 논문에서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수집 가능한 증거들을 하나 하나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AD 110년에 이르러 이미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공동체에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메이천은 2세기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례들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차례로 그 부당성을 입증했다. 1) 이교도 반대자들의 동정녀 탄생 부인, 2) 유대주의 반대자들의 부인, 그리고 3) 자칭 기독교인이 라고 하는 말시온, 카르포크라태스 그리고 세린투스와 같은 이들의 부 인 등이 그것이다. 메이천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의 두 가지 진술을 통해 요약하고 있다: 1) 동정녀 탄생에 관한 확고하고도 잘 정리된 신앙은 이미 2세기 초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 2세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부인의 움직임은 참된 역사적 전통보다는 철학적, 교조적 선입관 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2세기 경의 기독교를 고려하지 않고는 1세기의 기독교를 정당하게 연구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신약을 연구하되 최대한 완 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연구하려 하였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추구하였다.

4. 예수님과 바울

“예수님과 바울”에서 메이천의 기본적인 주장은 바울이 예수의 참된 제자였다는 것이다. 브레데(Wimam Wrede)가 그의 책 「바울」(Paulus, 1905)을 통해 밝힌 결론에서 시작하여, 메이천은 자유주의 학자가 시도한 예수의 재구성과 바울이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그 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두번째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울의 관점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관점을 대조시킨 “현대 급진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선 바울과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 간에 어떠한 갈등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담하였다. 세 번째로, 메이천은 실제로 바울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예수님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였 다. 이 논문은 메이천의 작품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이해와 자연적인 이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이 둘 사이의 지적 중간지점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메이천에게 있어 초자연적 구속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타당성 있는 유일한 설명은 역사적 해석이다. 결국 메이천은 역사적 신앙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다. 그의 확신은 교회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자들만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논문들은 전체적으로 메이천이 이젠 모두가 주목할 만 한 신약 신학자로서 부상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인 하르낙은 1913년 Theologesche Lifteraturzeitung지를 통해 메이천의 논문들을 평가하면서, 자신은 비록 메이천의 주장에 찬성하진 않지만, 메이천이 발표한 논문들은 “감탄할 만하며,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5. 기독교와 문화

메이천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중 그 대안에서 대해서 첫째는 기독교를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우, 둘째는 기독교를 문화 파괴자로 보는 경우, 세 번째는 기독교가 문회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드는 경우라고 말했다. 이 같은 대안들 중 메이천이 주로 지지한 것은 세 번째였다. 메이천이 역사주의적 정신이 이미 교회에 침투하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메이천은 30년 동안 “기독교 교회 내에 엄청난 변절이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이 같은 “지적 분위기”를 질타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기독교를 참된 것으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선 “종교적 감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오히려 지적인 작업들이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메이천은 기독교에 대해 가장 심각한 사상적 적대 세력의 특징을 정확히 꼬집어 냈다. 그의 활발한 지적 학문 활동이야말로 역사주의, 자유주의와 싸우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6. 역사와 신앙

메이천의 작업은 주로 역사에 기초하고 있었다. 메이천은 기독교가 반드시 동시대의 시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을 역설했다. 메이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당대의 지적 투쟁에 대한 참여는 그를 근본주의자들과 구별시키는 요인들이다. 그는 실제로 근본주의 운동에 합류하였으며, 그 운동의 지도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그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유주의의 공격 에 직면해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한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한편, 1915년 5월 3일, 메이천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신학 조교수로 취임하면서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연설의 제목은 “역사와 신앙”이었다. 그는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다”고 연설을 시작했다. 현대 역사주의자들에 따르면, 초자연적 인간은 결코 존재한 일이 없 다. 그것이 바로 현대 자연주의의 근본적인 원리이다. 세계는 불변의 법칙들에 순응하며, 결코 끊어지지 않는 발전단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메이천의 말에 따르면, 우선 복음이 전하고 있는 기사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구분 자체가 전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그 둘은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서로 얽혀 있다.” 메이천에 의하면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예수는 “실존 불가능한 인물”이었다.
메이천은 연설을 마치면서, 역사와 신앙의 관계 문제를 다시금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역사는 신앙의 객관적 기초를 제공하며, 역으로 신앙은 역시를 경험적으로 확증하는 역 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메이천은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이러한 경험은 역사에 대해 직접성과 즉각성 그리고 우리를 두려움에서 구원해 줄 확실한 친밀성을 더해준다고 강조했다. 역사와 신앙의 관계를 다루면서 메이천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날카롭게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성경이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만약 이 기초를 파헤치게 되면 교회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너질 뿐 아니라 그 무너짐 또한 매우 심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Ⅲ. 결론

메이천의 성경에 관한 적합한 역사적 연구와 초자연적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살펴보았다. 메이천은 교회 내 일치와 순결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단순히 장로교회 표준 문서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들기 위한 그의 관심 때문이었다. 메이천만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메이천은 장로교 논쟁에 심각하게 말려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성경의 신실함과 명료함에 대한 강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었다.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자, 신앙과 행위의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서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한 메이천의 확신은 그가 자란 미국 남부 배경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서론에 이어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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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예수님과 바울

메이천은 「예수님과 바울」 서문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언급이 바울 서신에 거의 없다고 하는 점은 과장되고 잘못된 해석이라고 한다. 바울 자신이나 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예수님의 참 제자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신학의 핵심은 지상의 예수님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통이라고 주장한다.
메이천은 위대한 부흥은 바로 바울 신학의 부흥이라고 주장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은 그것의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에 있어서 단순히 바울을 재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바울 자신을 위해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주의 수수께끼를 독립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바울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바울을 단순히 종교철학자로 보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예수와 바울 간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이 가장 필수적이다. 바울은 항상 예수의 가장 위대한 제자로 인식되었다. 기독교회는 전에도 그랬듯이 전진할 것이다. 그러나 메이천 당시에는 바울을 예수로부터 떼어놓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도 이런 사고는 여전하다) 어떤 학자는 바울을 “제2의 기독교창시자”라고 칭했다. 만일 그 말이 맞는다면 기독교는 그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수와 관계가 없다면 그는 더 이상 교회의 선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 위에 기초하고 있다. 바울 신학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재현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가설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바울의 신학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료에서 기인했다고 인정된다. 하지만 바울의 실제적인 신앙 생활을 보면 그는 예수의 진실한 제자였다. 바울의 종교적 체험의 풍조가 강렬해져서 심지어 수 세기가 경과된 후에라도, 또한 심지어 또렷하지 않은 인쇄 매체를 통해서 독자들의 가슴을 거대한 홍수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도덕적인 훈계에 있지 않다. 오직 그것은 서신서에 나타난 위대한 신학적인 구절들 (갈라디아서 2장, 고린도후서 5장, 로마서 5장에서 8장까지)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구절에서 바울의 종교적 체험과 신학이 어느 비평서에서도 용해시킬 수 없을 정도로 한데 어울려져 있다. 더군다나 바울 자신의 삶에서 바울의 신앙과 비울의 신학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생활에 서 그것들을 분리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논할 때 바울을 먼저 시작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우선 바울이 예수보다도 쉽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모든 면에서 수긍이 갈 것이다. 예수는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았고 그의 말씀에 관한 모든 현존하는 기록은 다른 사람들에 의한 보고이다. 바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완전한 전기가 되기에는 참으로 부족하다. 양적으로 부족한 자료는 질적으로 보충된다. 바울은 엄청난 자기 폭로의 능력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것은 그의 서신에서 최대한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울 서신에서 예수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하며 살아온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예수가 평범한 광신자였거나 균형 감각이 없는 공상가였다면 예수의 메시아 의식은 신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1세기 그러나 예수는 일상 중에 있을법한 광신자도 아니었고 과대망상증환자는 더욱 아니었다. 반면 그는 아주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사람이다. 그가 지닌 평온함, 이타심, 그리고 강력한 힘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예수의 초자연적인 인성을 받아들이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 바울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아마 예수를 이해하는 길에 이르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선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조사하기 위해서는 예수보다는 바울과 함께 시작되어져야 한다. 바우어는 유대교인들과 원래의 사도들 간의 관계는 주로 우호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만일 바우어의 견해가 옳다면 바울이 예수의 진짜 제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바우어는 바울이 예수와 가장 가까이서 있었던 사람과 중요한 갈등을 일으킨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우어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전한 ‘교제의 악수’(갈 2:9)를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위선 때문에 베드로를 질책한 것이다. 즉 잘못된 견해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하여 바른 신앙원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질책한 것이다. 베드로의 실생활을 비난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의 신앙원리들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유대법을 지켰다. 그들은 부지런히 성전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켰고 음식에 관한 규정을 준수했다. 피상적으로 그 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은 단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상 그때 당시 그들은 단순히 경건한 유대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그들의 구원의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사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 위에 근거를 두었다. 내부적으로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단순히 유대교의 연속이 아닌 전 혀 새로운 종교였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보면 초대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의 메시아사상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과 단순한 유대교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평상적으로 지킨다는 면에서는 일치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유대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양측의 구별은 확연해졌다. 예수의 참 제자인 사도들은 이방인들의 외적 자유를 수용하면서 그들 자신의 내적 자유를 증거 하였다. 하지만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인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그렇다면 보편적인 기독교의 창시자는 아니었다. 바울이 이룩한 참된 업적은 다른 영역 즉 사상이라는 숨겨진 영역에 있다.
원래의 사도들은 지상에 계신 예수와 함께 나누었던 교제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체험을 통해 원칙상으로는 유대교의 선민의식을 초월하였다. 내부적으로 그들은 율법에서 지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 들이 자유했는지를 몰랐다.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이 왜 자유하게 되었는지를 몰랐다. 그러한 자유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기독교의 자유는 그 저변에 있는 원칙들이 세워질 때까지는 일정 기간 불안정하게 지켜질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는 신학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최초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는 바울이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의 교리를 강조하는데 있어서는 바울은 혁신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전에 암시적이었던 것을 명백하게 했을 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그의 사도직 을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유대교인들과 심각한 대립관계에 놓여있다. 바울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라고 말하지만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서가 아니라 사람에게서”라고 주장했다. 만일바울이 그가 사도직을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그의 사도직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을 증명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수는 또 다른 예수였다고 말한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었다. 바울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온전한 복음을 명이하게 하여 고린도교인들 앞에 드러내었다(고후 11:5, 6). 그는 “그리스도도 육체를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했다. 개종 후에 잠시 동안은 그가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 즉 유대인 메시아로 인식했음을 의미할 가능성은 없다.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이제 바울이 지니게 된 고상한 지식으로 변하게 해준 것은 차후에 일어나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가 아니라 명백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곧 회심)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이들이 나타난 것은 확실히 바울의 기독론에서 가장 핵심적 인 요소가 된다. 바울이 행한 기독교적 인 활동을 제외하고 무엇이 바울을 박해하게 했는가? 사도행전의 증거가 옳다면 바울은 개종 후 겨우 3년 후에 예루살렘에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유대교회는 바울 속에 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바울이 만난 하늘의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해 의견 대립이 있었을 법도 하지만 그러한 대립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와 직접 상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로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예수와 관련하여 혁신자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을 그런 사람으로 인식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대답만 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주님이요 주인이었다. 예수의 말씀과 비교하는 것을 별문제로 하더라도 바울 서신은 그가 생각한대로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였다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가? 첫째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통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 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인간 대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다. 땅에 서 살았던 예수는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예수였다. 하늘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을 더 강화하기 위해 바울은 나사렛 예수와 조금이라도 연관을 가졌던 것을 저버렸다. 둘째로 역사적인 전통을 똑같이 낮게 평가하는 내용이 서신서, 즉 예수의 말씀과 행위가 적힌 얼마 안 되는 참고기록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이러한 두 가지 논제 중에서 두번째 것은 과장과 오역이 있을 때에만 설정될 수 있다. 우선 바울은 때때로 사람들이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지식을 펼치고 있으며 둘째로 그는 그가 내보인 지식보다도 더 위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바울이 그의 펀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혹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비방을 견딘 그의 신실함으로 권면할 때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와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나타난 대로 은혜로운 성육신의 행위와 열정을 주로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땅에 계실 때 그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예수의 성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표현은 단순하게 예수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예수의 성품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를 입증한다. 비울이 예수를 본받는 자 된 것은 그의 윤리적인 생활에서 당연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 관해 바울이 기록해 놓은 자료에서 보여지는 예수의 그 밖의 성품을 보면 그러한 성품자체가 바울은 자신이 말하려고 선택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그들이 눈앞에 밝히 보였다고 쓸 때 바울은 속죄의 교리 이상의 어 떤 것을 언급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그린 그림이 감탄할 수밖에 없는 힘을 갖는 것은 거기에 묘사된 죽음이 사랑의 삶의 극치의 행위라는 확신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와 짧은 만남을 가진 동안에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 관한 주제를 애써 회피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바울이 그의 믿음의 기초를 이루는 한 부 분으로 예수의 생애에 관한 그의 지식을 언급하지 않은 진짜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서 사실에 입각한 그러한 지식은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 따라서 예수의 지상생활에 관한 적나라한 사실이 비울의 마음에 “복음”을 심어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 즉 제자들뿐 아 니라 바리새인들도 예수의 지상생활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바울을 불렀다. 바울은 아마도 최초의 제자들의 부름을 들었을 것이다. 즉 그는 새로운 선생을 따르기 위해 가족과 친지를 떠나는 제자들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단지 정좌 하려고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의 차례였다. 예수님은 부르셨고 바울은 그 부르심에 복종하였다. 현재 자기 자신과 살아있는 교통을 하기 위해 부르셨다. 예수님은 바로 나타나셔서 바울을 교통과 영광스러운 섬김의 한가운데로 부르셨다. 이것, 그리고 이 것만이 바로 자신의 복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받았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복음서가 기술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예수가 아니라 바울 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와 바울을 비교하는 것은 예수와 바울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비울을 비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정신은 바울서신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요한복음이 비울에 의존하고 있다는 가설이 잘못되었다 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공관복음이 바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 이전의 생각이 나타나 있는 단 한 장의 서류도 현존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놀랄만한 일이다. 예수의 원래 제자들은 예수가 땅에 있을 때 친 분을 나누었고 그들로부터 가장 권위 있는 정보를 기대할 수도 있는 사람들인데, 예수의 생애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가 소문으로만 말할 수 있는 한사람의 영향으로 달라지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갈등이 없이 즉 갈등의 흔적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는 생각하기 어렵 다. 공관복음에서 바울의 사상이 담긴 것으로 여겨지는 구절을 보면 성경 기자는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에 의해 대치되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의 기독론과 공관복음의 예수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공관복음이 바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기독론은 또한 근본적으로는 예루살렘에 있던 초대교회공동제의 기독론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의 고상한 기독론이 바울의 기독론과 유사하다는 것이 공관복음이 바울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의 기독론은 초대교회 기독론의 핵심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기독론은 예수의 생애에서 그 정당성을 찾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지상에 있었던 예수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교통을 하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그의 삶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여긴 것이다. “누구든지 그 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것이 바로 바울의 복음을 거대한 로마제국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해준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바울의 고백이 기독교에 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 기독교는 세계의 변모를 바꾸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과 단순히 지상의 예수를 본받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차이점이 때때로 간과되어졌다. 바울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느라 바울신학의 핵심이 이면으로 밀쳐진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를 신적 존재로 이제는 영광 중에 살아 계신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울 자신의 평가에서 근본적이라는 것은 인정된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하늘의 존재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도덕적인 성품이라고들 한다. 바울이 만난 하늘의 그리스도가 지닌 자애로운 성품은 오직 역사적인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오직 바울이 핍박했던 예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의 사랑의 영 때문이었다. 바울 서신서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에 열중하고 있다. 교제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즉 그것은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스도는 바울 “안에” 있었다. 부 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관계는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이었다. 그리고 바울신학이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것이 핵심 이 라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예수님 의 말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고 하신 말씀이 약간의 연결이 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에 대한 인증은 바울 서신에서 거의 전무하다. 예수가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바울은 예수의 제자이고 예수가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만일 예수가 단지 인간으로서의 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면 바울신학은 설명의 여지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가지는 관계와 똑같다. 원사도들은 그들의 신앙생활에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를 가졌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매 일 매일 교제를 나누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다. 이러한 요소는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며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감정도 우리에게 이러한 요소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의 신앙생활 에도 초기의 사도들만이 가졌던 이러한 요소는 전혀 없었다. 우리는 예수가 초자연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신앙체험을 우리자신의 것으로 공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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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

메이천은 누가복음 1장에 나타난 찬양시들에 대한 하르낙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세주의 탄생과 연관된 사건들을 하나의 시적 양식으로 취급하면서, 누가는 잘 알려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사실적으로 묘사했지만, 탄생기사를 다룰 때는 70인경의 문체를 모방하였다.” 하르낙은 누가복음 1장 5절에서 2장 52절의 대표적인 부분들을 검토하여 신약의 저작들 또는 다른 곳 중에서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단어들이나 구절들이 신약의 나머지와 특히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의 다른 곳들에서보다도 더욱 빈번히 나타난다는 누가의 특정들을 지적한다. 하르낙은 엘리사벳이 저자라고 추정하는 마리아 송가와 사가랴의 노래를 가지고 검토를 시작했다. 하르낙의 주장에 따르면 이 찬송들은 첫 번째 외양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전적으로 누가적이기 때문에 서술문설이 배제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누가 자신이 마리아 송가와 사가랴의 노래를 만들었으며, 자기 서술문의 등장인물들의 입술에 불어넣었던 것이다. 물론 누가가 이 시가들을 자신의 언어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70인경으로부터 그것들을 조합하여 짜 맞추었다는 것이다.
메이천의 견해는 어떠한가? 하르낙이 발견한 미세한 사실들이 어느 정도나 찬송들의 저자들에 의해 의도된 것 인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이 메이천의 생각이다. 누가의 저작권을 증명하려면, 하르 낙은 첫째, 누가 작품들과의 유사성, 둘째, 이것들과 비누가적인 찬송들과의 불일치성을 보여주었어야만 했었다. 첫번째 요구조건을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만일 누가가 무엇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시의 어떤 사례들도 후손들에게 남기지 않고 있다. 가장 가까운 가능성은 이 찬양들이 시적 형식에 있어서 셈족 계통이기보다는 헬라적이며,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만이 이러한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리라는 것과 셈어적인 기원 없이 단순히 히브리 자료들을 히브리시의 모방물 속에 삽입하여 만든 것임을 보여준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사례들을 발견하기 는 분명히 어렵다. 하르낙에 의해 그 용례들이 산출되고 있지는 않다. 하르낙이 마리아 송가 및 사가랴의 노래와 논쟁의 여지없는 누가 작품들과의 유사성을 보여줄 수 없었다고 해도, 이 찬송들 과 비누가적인 작품 그리고 특히 구약의 찬송들과의 불일치성은 보여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용례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증명은 불충분한 것으로 남게 된다. 만약 하르낙이 누기복음 1장의 두 찬송들에 적용한 정교한 연구방식으로 70인경의 시편의 일부를 조사해 본다면, 어쩌면 작품의 유사한 특성들이 발견되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르낙은 누가복음 1장 68-75절의 사가랴의 노래 첫 부분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문장을 누가복음 1장 1~4절의 서두와 비교하기 위해 강조한 것이라면, 이 비교는 상당히 불운한 것이다. 두 문장은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이 다. 누가복음 1장 1-4절은 하나의 완결된 종지부를 지니므로 문법적으로 거의 끝 부분에 이르기까지 분리할 수 없다.
마리아 송가가 전적으로 구약의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의 구절에서가 아니라 유대인 성경의 아주 다양한 부분들에서 유래한다. 예를 들어 마리아 송가는 사무엘상 2장 1-10절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러나 다양한 요소들과 함께 이 노래 속으로 완벽한 통일성과 아름다움으로 합쳐져, 가장 고상한 형태로 히브리시의 평행성을 유지한다. 하르낙은 이러한 결과는 한 이방인의 의식적인 기교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의 구절들이 접합부분들을 드러내지 않는 채, 인위적인 아주 미세한 느낌도 주지 않으면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있음직한 경우가 아니다. 이 찬송의 저자는 구약의 분위기 속에서 살았으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 언어에 익숙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자료들에서 유래한 요소들이 작위성 없이 하나의 시 안에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종합은 그것이 문학적 형식으로 만들어지기 오래 전에 이미 삶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메이천의 견해다. 그러므로 메이천은 마리아 송가가 원래 단일한 유대 찬송으로 순수한 서술문 속에 삽입된 하나의 외래적 요소라는 가설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그의 등장인물들에게 그들이 실제 말한 바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 비추어 그들이 말했을 수도 있는 내용을 불어넣음으로 고대 역사가로서의 자유를 실천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송가가 기독교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반박되어 진다. 부활 이전에 유아기 서술문이 잘 쓰여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공동체의 기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창작할 동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이후라면, 한 사람의 기독교 저자가 주의 어머니를 위한 찬송을 만드는 데 있어, 성자의 삶과 죽음 혹은 부활에 대한 보다 명확한 예언을 삽입하는데 실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마리아의 임종 이전에 서술문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러 한 시대 표시의 잘못된 기록은 반대를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그는 결코 찬송을 창작하려는 시도를 감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리아 송가와 사가랴의 노래에서 기독교적인 개념이 없다는 사실, 예수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 사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구약의 예언 용어 안에 여전히 메시아적 희망이 표현되고 있는 그러한 한 시기를 지칭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찬송들이 어떤 미지의 상황 속에서 동떨어진 단순한 유대 찬송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만일 이것들이 단순한 유대 찬송들이었다면, 누가복음 1~2장의 그 곳에 위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찬송들은 반드시 서술문안의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져야만 하며, 구약의 예언이 아직은 성취된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는 시기에 만들어졌어야만 한다. 성취가 문전에 이르렀으며, 더 이상 희미한 미래의 사건은 아니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약속된 왕이 마침내 오셨다. 그러나 그의 통치방식은 여전히 예언의 희미한 지침들을 통해 추측해야만 한다. 메시아가 이곳에 계신다. 그분을 아직은 분명히 알 수 없다. 이 찬송들은 복음서 기자가 그것들을 위치시킨 바로 거기에 있던 것이다.
만일 찬송들이 실제로 마리아와 사가랴에 의해 만일 찬송들이 실제로 마리아와 사가랴에 의해 불려진 것이라면, 그들은 찬송을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 가설은 구약의 정신, 시의 색채, 구약의 평행구 등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리고 제사장 사가랴가 적어도 일상 언어보다는 신성한 언어로 찬양을 만든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선험적인 것은 아니며, 사실 그리스도 당시의 언어에 대한 전문가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더라도, 더욱 가능성 있는 답으로 선언되었을 것이다. 마리아가 히브리어로 찬송했으리라는 점은 다소 자연스럽지 못하다. 만일 찬송들이 아람어로 만들어 진 것이라면, 번역자의 과업은 좀더 어려운 것이다. 그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70인경의 표현들을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먼저 찬송들의 아람어 표현들과 등가를 이루는 구약 히브리어의 표현 들을 고려해야만 했을 것이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의 유사성의 관점에서 볼 때, 특히 히브리어, 아람어 및 헬라어 성경들에 익숙한 사람에게 작업이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람어 찬송들은 구약의 구절에 익숙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람어 찬송들이 구약의 시장 과 언어로 가득 차 있는 사실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아람어 형태로 된 성경은 회당에서 구두번역을 통하여 모두에게 익숙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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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제4장은 메이천의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에 대한 논증이다. 메이천은 우선 벨하우젠의 입장을 비판한다. 벨하우젠은 누가복음 2장 14절이 누가복음 19장 38절과는 독립적이라고 상당히 확신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누가복음 1,2장은 완성된 복음서에 덧붙여진 것이라는 이치에 닿지 않는다. 누가복음 29장 38절은 누가복음 2장 14절에 의존해서 뒤집어 졌다는 이 가설은 흘츠만, 바이쓰, 그리고 고울드가 선호한다. 누가복음 19장 38절에서 흘츠만은 승리에 찬 외침의 어법은 영광송의 회상으로 교환되었고(누가복음 2장 14절), 그것은 이미 기독교 회중의 찬송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가설에 전혀 개연성이 없지는 않다. 비록 만약 올바른 관점이 복음서의 날짜와 관련 되어 유지된다고 해도, 영광송은 흘츠만이 추정하는 것 훨씬 전에 교회의 찬송가가 되어 있었어야만 할 것이다. 만약 의존성이 있다면, 그것은 누가복음 1,2장이 자료와 다소간 의존성을 지니지 않을 수도 있으며, 마치 그것이 지금 나타나는 것처럼 그 자료 안에 영광송이 이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존성이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누가의 성실성과 모순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리의 입성에 대한 군중들의 외침은 동사적인 정확성으로 기록되어지지 않았다. 사실, 아마도 그것은 애당초 고정화된 것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어떤 이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말해진 것들의 전승이 정확하게 한결같지 않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도시로 내려가는 동안에 반복되어 들려진 군중들의 함성의 특징은 듣는 이에게 영향 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헬라어로 번역하면서, 군중 속의 어떤 사람에 의해 말해진 정확한 단어들로부터 보다 큰 일탈이 부득이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아람어 단어인 호산나는 세 명의 복음서 저자에 의해 보존되었다. 누가는 그의 헬라 독자들을 위하여 헬라어 단어들로 그것을 대체했다.
지금까지의 조사는 누가복음 1,2장이 복음서의 나머지 및 사도행전과 놀랄만한 언어적인 인척관계를 보여준다는 하르낙과 다른 사람들의 논쟁점이 결코 평판이 나쁜 것만은 아님을 알려준다. 하르낙은 그것들을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의 저자는 또한 유아기 서술문의 저자이며, 또한 이 서술문에서 그가 쓰여진 자료들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해석한다. 누가복음 1,2장과 누가복음의 마지막 및 사도행전에서의 수많은 평행구들은 단순히 보통 70인경에 의존하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마도 누가복음의 경우, 70인경에 의존하고 있고, 누가복음 1,2장의 경우도 70인경에 덧붙여, 70인경의 문체를 만드는 동일한 힘의 독립적인 작용에 의존하고 있다. 하르낙 자신은 유아기 서술문의 문체는 전적으로 누가적이지 않다고 인정한다. 그는 2장의 서술문은 언어학적으로 저자 자신에게 속한 헬라어를 가지고 쓴 성경(70인경) 헬라어의 산물로 간주된다고 말 한다. 누가복음 1,2장의 문체는 “예술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70인경의 헬라어를 모방했지만, 이것과 더불어 그 서술문은 거의 모든 절에서 저자 자신의 문체인 요소들 및 어휘들과 함께 섞여있다.”고 말한다.
누가는 부자연스럽지 않게 “성경 문체”의 단순한 웅장함과 시적인 품위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자신의 신성한 서술문에 구약의 모델을 따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은 왜 구약만에 의해 영향을 받아야만 한단 말인가? 만일 누가복음 1, 2장이 첫눈에 구약의 바로 그 토착적인 토양에서 생성된 시적인 이야기로 보이는 것이라면, 그리고 구약의 시적 형식이 아직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었던 어떤 때, 이 서술문이 누가의 손에 떨어졌던 것이라면 구약과 마찬가지로 이것 자체가 그의 마음과 심상에 영구히 인상을 남기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겠는가? 틀림없이 이것은 구약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것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기독교인의 생각에 가장 자극을 주는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신성한 용도를 위해 헬라 역사가의 문학적 인 재능을 형성하는데 있어 구약과 나란히 그것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70인경에 대해 누가복음 1,2장의 밀접한 관계가 더 깊어졌다는 인상을 야기한다. 누가의 특징들이라고 추정되던 많은 것들이 단순히 70인경의 특정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하르낙 자신은 누가복음 1,2장에 널리 70인경의 요소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조사는 하르낙이 추정한 것보다 그 요소가 더욱 널리 있음 을 알린다. 70인경의 언어에 대한 누가복음 1,2장의 이 두드러진 유사성은, 누가복음의 나머지와 사도행전에 인용된 평행구들에 대한 단어들과 구들의 경우에도 나타나고 있으며, 그 서술문에 대한 한 유대 기 독교인의 기원을 지적해 준다.
누가복음 1,2장은 오직 팔레스타인의 전통에서만 유래 할 수 있었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그러한 익숙함을 보여주는 특별한 지표들을 포함한다. 페인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서술문들의 존재자체가 팔레스타인을 지적한다고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니면서 주장한다. 누가복음 2장 36,37절에 나타난 안나의 묘사 또한 그 서술문의 팔레스타인 유래를 가르치는 것으로 간주될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렇게 놀랄 정도로 풍부하고 미세한 세부 사항들은 전적으로 서술문의 상상할 수 있는 한의 목적과 연관시키지 않고서는, 화자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묘사된 사람과 혹은 그녀의 친구들이나 친 척들과 안면이 없다고 한다면, 거의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두 가지 사실들이 누가복음 1,2장과 관련되어 이루어진다. 첫째, 이 서술문은 원시 유대 기독교적이면서 동시에 팔레스타인 방식의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것은 누가 서법의 표지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두 가지 사실들은 반드시 서술문의 기원과 관련되어 제기될 수 있는 모든 가설을 고려하여 다루어 져야만 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 세 가 지 가설들이 제기되어왔다.
첫째, 누가복음 1,2장은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의 저자 자신이 어떤 쓰여진 자료들의 사용도 없이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의 저자가 실제로 탄생서술문을 스스로 작성한 것이라면 그 자신은 팔레스타인 환경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정은 결코 자연스럽지가 않다. 만약 저자가 바울의 동역자인 누가라면, 그는 틀림없이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시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혹은 이전의 상황에 대해 아무 것도 분명히 알려진 것이 없는 채, 그는 스스로가 상세하게 팔레스타인 환경들에 익숙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분명한 팔레스타인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그 정도까지의 탄생 서술문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스스로가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것이라면, 만약 그가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에 관련된 팔레스타인의 전승을 완전히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그 전승을 조금의 지체도 없이 문자로 써 내려간 것이라면, 그가 어떤 쓰여진 자료들의 도움 없이 탄생 서술문을 써내려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봄직 하다. 그러나 누가복음 1,2장의 비셈족적인 누가의 요소들은 쓰여진 자료들의 가능성을 배제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두번째 가설은, 누가복음 1, 2장에 대해서 누가 자신이 아람어로 쓰여진 한 자료를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한편으로는 누가복음 1,2장의 내용이 철저하게 팔레스타인 적인 특정을 지니고 있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며, 문체에 있어 부정할 수 없는 누가의 요소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누가가 번역할 정도로 충분히 아람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람어 자료의 가설은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의 아람어 자료 가설을 거절하는 것으로 기울었던 하르낙은 누가가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아람어 자료를 번역했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며, 간단한 아람어 텍스트를 번역할 충분한 아람어 지식이 안디옥 태생의 사람,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에게 돌려지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가설은 더할 나위 없이 그럴듯하다. 그러나 첫 가설같이 이것도 증명될 수 없다.
세번째 가설은, 누가가 헬라어로 쓰여진 자료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가복음 1장 13~17절에서 요한의 사역에 대한 묘사가 “사건으로부터 예언”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예언이라면, 이것은 동등하게 천명되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예언이란 명확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장에 의하면, 구약은 여호와의 도래를 통한 미래의 구속과 연결되었다. 여호와 가 오시는 정확한 방식은 아직은 완전한 명확성으로 구약에서든지 예 수님 탄생의 바로 앞에서조차 나타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마 도 누가복음 1장 5절에서 25절의 비기독교적인 특징은 그것의 기원이 비기독교의 분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역사적인 확실성 을 가지고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입증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한사람의 기독교인 저자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면, 만약 그 기독교인 저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한 사람의 요한적인 저자에 의해 구성되었어야만 할 것이다. 그때에야 하르낙의 이 가설은 반박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누기복음 1,2장이 역사적인 것으로 또는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어느 쪽이나 완전히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누가복음 1,2장이 역사적인 것이라면, 누가복음 1장이 비기독교인인 요한의 전승이라는 가설은, 그것이 반박되는 것 이상으로 증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은 단지 요한의 제자들의 한 분파에서만이 아 니라,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에서도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 의 탄생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있어 누가복음 1장 5절에서 25절 등에 나타난 것은 단지 서술문이 팔레스타인과 주님의 가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집단들에 기원을 가진다는 점을 가르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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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2세기의 동정녀 탄생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은 이레네우스 시대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2세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러한 믿음이 점차 커졌을까 아니면 초기에 확고히 굳어졌다고 추적할 수 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은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 기원한 것인가? 동정녀 탄생에 대해 익나시우스가 증거하고 있는 증언의 중요성은 그의 서신들의 전반적인 목적을 염두에 둘 때만이 바르게 판단될 수 있다. 익나시우스는 가현설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논박하고 있다. 그들을 논박하기 임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치 않고 그의 진정한 탄생을 증명하는 것만이 필요했다. 서머나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익나시우스는 동정녀 탄생을 변호할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하게 대적지들 스스로도 평범한 출생 에 대항하여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이고 있으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모든 다른 사건처럼 그것을 단순한 유사성으로 간주했다. 익나시우스는 자기 시대에 동정녀 탄생이 안디옥에서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 인상을 명확히 주고 있다. 다른 오류들과도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평범한 발생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만드는 오류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익나시우스의 증언은 명백하다. 서기 110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그 뿌리가 교회의 삶에 깊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더욱 경이로울수록 그 실재를 정당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해진다. 저스틴은 첫째로, 자신의 계획이 사도적 교부들의 계획보다도 더욱 포괄적이므로 동정녀 탄생을 언급했다. 그는 전체적으로 기독교를 방어하려고 했으므로 주님의 동정녀 탄생과 같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본질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둘째로, 동정녀 탄생은 특별한 공격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방어가 필요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를 조사하기 위한 최초의 자료는 저스틴의 “트라이포와의 대화”이다. 그러나 유대인 트라이포는 기독교 적 기사를 반대하는 어떤 구체적인 사실들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동정녀 탄생을 반박하는 이런 종류의 유대인 논박의 흔적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야고보의 원시복음과 정경인 마태복음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음행 이야기가 얼마나 초기의 것이었던 간에, 그것이 독립적인 전통을 대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단지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독교적 기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편 적으로 일치한 견해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적자들에 의한 동정녀 탄생의 부인은 절대적으로 그 사건의 역사성에 역행되는 만큼이나 어떤 비중을 갖지 못한다. 대적자들은 기독교 교리를 전제로 하고 그것을 대신할 자신들만의 역 사적인 전통은 없다. 그들이 반대한다는 단순한 사실은 예상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전혀 중요치 않다. 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려고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었을 때 두개의 가능성이 열려지게 된다. 만약 예수가 동정녀(처녀)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다면, 요셉에 의해 태어났거나 아니면 전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후자의 견해를 가졌던 사람들은 현재의 조사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동정녀 탄생에 대한 그들의 부인은 분명히 역사적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철학적인 이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출생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세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같다.
저스틴은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그 반대로 그는 동정녀 탄생이 기독교 변증가들이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들 중의 하나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하는 분명히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저스틴이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저스틴 시대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유대인 기독교 대적자들은 동족들에 의해서도 무시될 만큼 사소했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유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신앙을 기독교의 특성으로 간주했다. 에피파니우스에 따르면, 에비온은 나사렛파로부터 출발하여, 나사렛파가 자리잡은 요단강 동쪽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자신의 특별한 가르침을 시작했다. 에피파니우스의 흔란스럽고 모순적인 말을 보면 그가 묘사하는 에비 온파는 단순히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영지주의적 사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적어도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이 구약성경의 일부를 인정하지 않는 점, 제사에 대한 견해, 또한 세례 시 그 사건에 대한 해석 등은 그 문제에 대해 의문의 여지가 없게 한다. 에피파니우스에 의해 제공된 그들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개인적 관찰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롬은 동방에서 사는 동안 그들과 가깝게 접촉을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쓴 글에서 그들에 관한 산재해 있는 설명은 주의 깊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롬에 따르면, 동방의 유대인 회당 전체에 퍼져 있는 나사렛파 사람들은 유대 율법을 계속해서 준수하고 이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둘 다 되려고 하므로 둘 중 어느 쪽도 되지 못했으며, 새 술을 낡은 병에 넣으려고 시도했다. 그래도 그들은 단순히 기독교인들인 척하는 에비온파 보다는 한 단계 위다. 에비온파 사람들이 바울을 율법 위반자로 거부하지만 나사렛파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이방인들을 비추는 등 불의 나타남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에 의한 복음서에서 동정녀 탄생기사에 대한 존재를 확실하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가능하게는 한다. 이런 결론의 중요성은 그 복음서 자체의 고대성이나 가치에 부분적으로 달려있다. 만약 그 복음서가 하르낙이 상상하듯 1세기에 쓰여졌다.
메이천은 이어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부인과 관련한 앞선 논의의 결과를 요약한다: 1) 에피파니우스가 묘사한 영지주의적 에비온파에 의해 동정녀 탄생이 부인되었다. 그러나 이 분파의 성격은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전통에 관한 매우 좋지 못한 가정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원시 유대인 기독교로 알려진 모든 것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들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부인은 동정녀 탄생에 대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긍정에 의해서 대부분 중화된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긍정은 적어도 그 부인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 부인은 저스틴 마터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그 방식은 그 당시 전혀 가공할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비기독교 유대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대단치 않았다. 저스틴이 바로 잡을 때까지는 유대인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이 동정녀 탄생과는 별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 2세기 초에 익나시우스는 유대주의자들을 반대할 때 분명히 예수의 탄생에 대 한 그들의 견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익나시우스 편에서 무관심 때문이라든지, 또는 동정녀 탄생이 아직 교회의 교리로 확고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뜻이 아니다. 익나시우스는 마리아의 동정(처녀)에 대해 그가 정한 자리에서 후대의 어느 작가에게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에게 동정녀 탄생은 오랫동안 지연된 계시가 세계사에서 신기원을 연 삼대 신비중의 하나이다.
2)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인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특징이 자신들의 긍정을 선호하는 하나의 가정을 세웠다. 원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나사렛파 사람들은 스스로 유대 율법을 계속 준수했다. 그러나 또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비울의 저작을 승인했다. 이외는 반대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요하고, 바울을 배교자로 간주한 강 경파 에비온파는 예수께 가장 가까이 서있었던 사도들의 영적 계승자가 아니라, 유대교를 신봉하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의 영적 계승자였다. 일반적으로 이들 나사렛파 사람들은 동방에서 격리되어 살면서 저들만의 고대의 복음서를 시용하였다. 자신들의 교리적 확신과 쓸모없는 복음서로 에피파니우스가 언급한 에비온파 외에는 뚜렷이 상반되게 보수주의와 옛 것의 인상을 창출해 내었다.
3) 만약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에비온파 사람들이 영지주의 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이유로 그들은 특별한 원시성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예로, 그들의 언어는 아람어가 아니라 헬라어였다.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원인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러한 부인은 예수님의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원시적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에피파니우스가 에비온파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인용하는 복음서가 유일한 복음서인 어떤 분파도 원시 유대인 교회와 직접적이고도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될 이유가 전혀 없다. 전체적인 논의에서 항상 유념해야할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유대인 기독교는 이단들의 목록에 들어 있는 분파적인 유대인 기독교인들에 한정되어있지 않았다. 오리겐과 그밖에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이단적인 유대인 기독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는 카톨릭교회에 합병된 다수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완전히 제외시켰다. 그리고 어떤 견해를 가졌거나 분파주의자들이 아닌 이들이 예수의 생애와 관련하여 가장 원시적인 역사적 전통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설을 모든 것이 가리키고 있다. 동정녀 탄생에 대한 2세기의 증언을 앞에서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동정녀 탄생에 대한 확고하고 잘 정리된 신앙이 2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2세기 초 이후에 나타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부인은 순수한 역사적 전통에 기초하기 보다는 철학적 또는 독단적 편견에 기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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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기독교문화

교회를 혼란시키고 있는 커다란 문제들 중에 지식과 경건, 즉 문화와 기독교 사이의 관계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과학적 혹은 학구적인 경향성과 이른바 실용적인 경향성이라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경향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개념들과 기초들을 이루는 과업에 주로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무시할만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 의해 진리는 즉각적인 실용적 중요성과 관계 없이도 그 자체로 소중하게 여겨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복음의 본질적 인 단순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양쪽 경향들의 대표자들은 모두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고 여기지만, 너무나 자주 그들 사이에서 조금의 형제애라도 찾기 힘들다. 학구적 성향의 크리스천은 그의 형제를 마땅치 않는 감상주의자이며, 천박한 논쟁을 하고, 하찮은 연구방법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한편, 실제적인 사람은 인간성의 비참한 요구들에 대해 학구적인 이들이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는데 목소리를 드높인다. 신대원에 입학하고서, 우리는 전적으로 다른 과정 속으로 갑자기 소개된다. 종교는 격리된 위치에서 갑자기 옮겨진다. 앞서 자연과학과 역 사를 위해 잡혀져 있던 똑같은 연구방법들이 종교에도 적용된다. 우리 는 이제 성경을 도덕적, 영적 진보를 위한 유일한 바램으로서만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연구한다.
그러면, 투쟁 중에 있는 기독교와 문화는 오직 논쟁중인 세력들 중 기독교이거나 문화거나 어느 한쪽을 파괴해야만 해결되어질 것인가? 다행히도 헌신이라는 세 번째 해결책이 기능하다. 예술과 학문을 파괴하거나, 그것들에 무관심 하는 것 대신, 더할 나위 없는 인문주의자의 열정으로 그것들을 양육하자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우리 하나님께 쓸모 있게끔 헌신케 한다. 주어진 즐거움들을 질식시키는 대신에 지식의 습득으로 혹은 아름다운 것을 이해함으로 이 즐거움들을 하늘의 아버지가 주신 선물들로 받아들이자. 그 왕국과 세상의 차이를 제거해 버리거나, 다른 한편으로 세상으로부터 일종의 현대화된 지적 수도원 생활 속으로 몸을 빼는 대신, 세상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기쁨으로 전진하자고 메이천은 촉구한다.
메이천은 기독교의 장은 바로 세상이라고 선언한다. 기독교인은 어떤 인간 활동이라도 기독교에 반대하거나 기독교와의 모든 관련성 밖에 있는 것이라면 만족할 수 없다. 기독교는 단지 모든 족속들에게 충만할 뿐 아니라, 인간 사고의 모든 곳에 충만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결코 인간이 진지하게 노력하는 어 떤 분야에서도 무관심 할 수 없다. 오류를 입증하기 위해서든 하나님의 왕국을 앞당기는데 유용해 지도록 하기 위해서든 그것은 연구되어야만 한다. 왕국은 단순히 외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전진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각 사람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정복하도록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무릎이 꿇어 절하며, 모든 업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때를 생각하면서 낙담에서 자신을 격려하는 데 익숙하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잘못된 사고들이다. 메이천이 볼 때 30년간 기독교 교회로부터 엄청난 이탈이 있어왔다. 거대한 이탈의 원인은 무엇인가? 메이천은 그 원인이 주로 지적인 영역에 있다고 말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로부터의 이탈은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본다. 메이천은 지적인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한 사람을 크리스천이 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회심도 일찍이 단순한 논증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적은 없다. 마음의 변화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의 즉각적인 사역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추정되는 것처럼, 지적인 활동이 불충분하여, 마음의 변화가 불필요해서, 마음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즉각적인 역사로 모든 지적인 장애들을 극복하실 지도 모르며, 그것은 사실이다 때때로 그분은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매우 드물게 그렇게 행하신다. 그분은 대개 자신의 능력을 인간 지성의 어떠한 조건들과 연관되게끔 하여 사용하신다. 그분은 대체로 전적인 준비 없이는 왕국 안으로 능력을 도입하시지 않으시며, 그들의 생각과 공상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개념들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입 하시지도 않으신다. 교회는 오늘날 사고의 과잉 때문이 아니라 사고의 결핍 때문에 죽어 가고 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개선의 분야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 교회는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교회의 투쟁을 맡아서 하며,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사람들 그들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이 신대원 생활에 있어 단 하나의, 가장 크게 고무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반드시 지각 있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들 모두가 탁월한 조예가 있는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반드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영적인 그리고 지적인 나태함에 대항해 열심히 싸워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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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역사와 신앙

메이천은 “신약을 공부하는 학생은 우선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성경의 중심이자 핵심은 역사이다. 성경에 포함된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역 사적 틀에 맞추어져 있고 결국은 역사적 정점으로 이끈다. 성경은 우선 이러한 가정은 도전을 받을 것이다. 현대 교회는 역사를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대로, 역사는 죽은 것이다. 역사를 포기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것을 존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적 신론은 세상에서 결코 강력한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고상한 윤리적인 관념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항 즉 결코 복음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은 “좋은 소식”에 관한 정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역사를 의미한다. 역사에서 벗어난 복음은 명확히 모순이다. 예수에 관한 성경의 설명은 신비를 포함하고 있지만 그 핵심은 거의 한마디로 정해질 수 있다. 나사렛 예수는 세상의 산물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옹 구세주였다. 그의 탄생은 신비였다. 그의 삶은 완전한 순수, 경외심을 일으키는 정의로움과 자비롭고 탁월한 힘이 있는 삶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히 거룩한 순교가 아니라 세상의 죄에 대한 희생이었다. 그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의 중심에서 우러난 열망이 아니라 전능한 하나님의 행위였다. 그는 살아있으며 만약 우리가 그에게로 향 한다면 우리를 돕기 위해 이 순간에도 현존해 있다. 그는 사람의 아들 이상이며 영원한 하나님과의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고 있다.
현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초자연적인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 자연주의의 근본 원리이다. 세계는 고정된 법칙에 순종하면서 절대 중단되지 않는 발달로서 설명되어져야한다고 말한다. 복음서에 있는 초자연적인 그리스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초자연적인 사람이며 그는 실제 사람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사람은 결코 실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해답은 무엇인가? 예수가 죽은 후에 다시 말해 절망적인 실패를 암시하는 방식으로 죽은 후에는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할까? 그러한 사람들이 그런 시점에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무슨 희망을 품을 수 있었겠는가? 더군다나 그 가설에 도움을 주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기독교는 결코 죽은 선생님이 계속하는 과업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과 최초의 기독교 설교 사이의 짧은 기간에 뭔가가 일어났다는 것이 증거이다. 그렇게 약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세상을 영적으로 정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을 설명하려면 뭔가가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하나의 사건은 그 사건의 결과에 의해 가치가 측정된다. 현대 자유주의에 따르면, 그 사건은 기독교 교회 설립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비전과 환상이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그 사건은 바로 죽은 자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이다. 현대 자연주의의 가설은 여러 형태를 점해왔으며 현대 학문의 모든 가르침은 그것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모두 헛되다! 자연주의 철학이 환상적인 가설을 요구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역사가에게는 그것은 만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혹독할 정도로 분명하다. 교회의 기초는 설명될 수가 없거나 굳이 하자면 예수그리스도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로 설명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정된다면 예수의 고상한주장들은 입증될 것이다. 그때에 예수는 단순한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면서 사람 즉,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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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투쟁하는 기독교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투쟁의식, 곧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만일 우리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신자와 옹호자가 되는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다른 곳보다는 주로 볼티모어에 있는 나의 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나의 형제인 아더 메이천 주니어(Arthur Machen Jr.)와 토마스 메이천(Thomas Machen)과 함께 자랐습니다. 1915년 88세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1931년 82세로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모두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어떻게 기독교가 특정한 현대의 대체물들과 다른지를 배웠습니다. 나는 또한 기독교적 신념이 폭넓은 인생관과 학문의 추구를 동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메이천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셨는데 그분의 사무실은 메릴랜드 주에서 가장 뛰어난 변호사 사무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메이천 부친의 특별한 “취미”는 초기 판본들, 특히 15세기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 판본들에 대한 연구와 수집이었다. 그는 몹시 기독교적인 사람으로서, 거룩한 신앙 속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들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탐독했다. 진지하게 명상하였다. 그의 기독교적인 경험은 감정적이거나 경건주의적 유형에 속한 것이 아니라 깊이 흐르는 물을 가진 조용한 시내와도 같았다. 하지만 진정한 학문과 참된 경건함이 동반되었다.
메이천은 모친의 영향은 훨씬 강했다고 말한다: “나의 아버지처럼, 어머니도 대단히 폭넓은 독서가였습니다. 그녀는 보다 더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또한 숲과 들의 그 무한한 감미로움을 사랑했습니다. 내가 이따금씩 무정한 세상의 조직들과 슬프게도 명목상으로만 그리스도께 헌신적인 무정한 교회기구의 조직으로부터 벗어나서 나의 영혼을 그 언덕의 친절함으로 새롭게 하는 것을 배운 것은 바로 어머니로부터 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시에 대한 사랑은 또 다른 사랑과 더불어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으로서, 그 근저에는 모든 미와 진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만유였으며, 그녀는 오직 성경이 가르쳐 주는 새롭고 산 길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비록 다른 무언가가 기독교 속에 있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항상 확신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나의 어머니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던 것이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어떤 공로도 없이 오늘날 많은 신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성경내용에 관한 더 나은 지식들을 12살에 얻었다고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소요리문답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천의 어머니는 그에게 성경과 우리 교회의 신앙에 관한 지식을 가르쳐주신 것 이상의 더 많은 것을 하셨다. 메이천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녀는 또한 의심하고 있었던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자신이 지적인 투쟁을 경험하셨고 청년기부터 기독교 종교의 진리에 대한 반대들에 대하여 용감하게 맞섰기 히 나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점에 대하여 나는 내가 대단히 존경했던 나의 형 아더 메이천 주니어와 내 사촌 르로이 그레스햄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신앙과 불신 사이의 전투를 오로지 홀로 싸워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애처로운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메이천은 1902년 가을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때 나는 마침 신학교 총장의 직책을 맡았던 프랜시스 패턴의 격려를 받았다. 그는 메이천에게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의혹들을 이겨내도록 하였고, 곤경 속에서 그를 도와 주었다.
메이천은 “현대적인 비평 방법론을 신약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신약 성경이 가진 신뢰성에 대하여 유해하지 않으면서도 확증적인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때 나에게 있어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라면서 현대적인 비평에 대해서 언급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이 가진 매력 알고 있었다: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
메이천은 말부르크(Marburg)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나는 신약학 교수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신약 과목들에만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리츌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의식 가운데 자신의 존재 중심에 도덕적인 모 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변증적 난제들에 대한 리출의 해결책이 실패했던 두 번째 이 유는 그것이 보존하고자 애쓰는 종교적 체혐의 유형이 전혀 진정한 기독교적 체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르만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접촉했던 어떤 사람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도 고매한 지지자였던 그 종교가 진정한 기독교적 종교였습니까? 그것이 의심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신약분야의 경우, 나는 말부르그에서 네 명 정도의 교수에게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평가로는 율리허가 분명히 으뜸이었는데, 당시 그는 최고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내가 말부르크에 있었을 때, 바이스는 다소 율리허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습니다.…그는 명석하고 인기 있는 강사였습니다. 하지 만나는 그를 심오한 학자라기보다 통속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이러한 인상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그의 놀라울 정도로 풍 부하고 학문적인 고린도전서에 대한 그의 주석은 나로 하여금 현대 신 약학자 가운데 가장 유능한 한 사람에 대한 나의 청년기의 오해를 뉘우 치도록 하였습니다.”
메이천은 독일에서 놀란 사실을 언급하면서 성경을 대하는 신학도들의 자세에 대해서 호소한다: “최소한의 수면을 취하면서 한 독일 학생이 성취할 수 있는 지적인 활동의 양이었다. 분명히 그 비밀은 독일 학생들이 즐거운 대학의 학기들이 시작되게 전에 김나지움에서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개의 경우 공부하는 것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25년 전의 학생들 이 얻을 수 있었던 지적인 열정과의 적은 교제마저도 오늘날에 와서는 한편으로 상향이 아니라 지나친 하향 평준화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으로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우리 미국의 위대한 교육학적 발견이 가진 자유로운 운영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절망적인 시대에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희망에 대해서 논한다: 수많은 반대들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모든 보이지 않는 세 계는 저 멀리 희미하게 잊혀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우리는 이 상황을 직시합시다. 이전에 우리에게 그처럼 소중하게 느껴졌던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진정으로 포기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할 때에 삶은 우리들에게 절망적인 공허함처럼 보여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을 장난삼아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은 것이지만,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번쯤 상상해본다면, 진정 우리의 미음 중심과 정신의 한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 주님을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이 사라져 버렸고, 파멸이 내 영흔을 구성하고 있다고 내가 생각 하였을 때, 램프가 희미하게 빛나는 저녁에 어머니께서 나에게 종종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의 말씀은 그 모든 것들보다 훨씬 심오한 무언가를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란 우리가 매순간 이상적으로 완전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신앙하도록 우리 자신을 유지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못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 의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습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교수로서 프린스톤에서의 일정은 다소 힘겨운 것이었지만 나는 그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활발하게 만드는 고급 과정들이 있었으며, 나도 역시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초 헬라어를 가르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 고역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것에 관하여 흔히 퍼져있는 것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그 경험들을 나의 보잘 것 없는 책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 속에 구체화하였습니다. 나는 언어 교사, 혹은 초급 교재의 저자가 결코 자신의 언어학적 지식을 과시하려는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언어에 대한 독해 지식을 전해주는데 다른 모든 것들을 가차없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종교”라고 선언한다: “나는 나의 작은 책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그 문제는 같은 종교의 두 가지 다양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사고와 생활 방식의 두 유형 사이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 분류들을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현대주의와 초자연주의, 혹은 다르게 비교리적 종교와 역사적 기독교라는 그 두 경향은 판이한 근원으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메이천은 프린스톤이 자유주의적 흐름에 편승하게 된 것을 통탄하면서 프린스톤과의 결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 프린스톤 신학교가 처음에는 시대의 대세에 저항하였지만 이후 그것에 굴복하였습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의 재편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사람들은 구 프린스 톤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학문적 전통이 지상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그것에 동감하지 않는 새 이사회 밑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프린스톤에서 성공적으로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했지만, 다른 곳에서 그러한 학문적 전통이 계속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전통은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교회의 참된 소망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내가 기도할 때와 일할 때에 그들을 만나게 되면, 나는 이 적대적인 세상 속에서 그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의 교제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신학에서 ‘보수주의자’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들이 만일 단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어떤 것을 필사적으로 고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진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생각되어진다면, 심각하게 잘못 전달된 것입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단지 현존하고 있는 조건들이 지속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힘이 충만하기를 기대합니다.” 메이천은 보수주의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입장을 밝힌다: “나는 ‘근본주의자’라는 용어를 스스로에게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나는 스스로를 그와 같은 용어로 부르는 사람들과 매우 온정어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그토록 장구하고 명예로운 역사를 지니는 기독교가 갑작스럽게 “~주의”가 되어야만 하고 낯설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려져 야 하는지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메이천은 반지성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1925년, 「신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나는 신앙과 지식사이에 설정된 그릇된 분리인 현대주의적 교회의 반지성주의와 논쟁하였으며, 신앙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신약의 가르침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 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논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 논쟁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당연한 결과로 뒤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메이천은 기독교 통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됨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통일을 저해하는 교회 연합에는 분명히 반대한다: “나는 기독교 통일에 가장 치명적인 적인 교회 연합을 반대합니다. 나는 전개신교 교계를 한 경향을 지닌 전제적인 위원회와 이사회 아래에 두는 독점적인 개신교 교회 연합에 대한 암울한 이상을 옹호하는 마음과 노력을 반대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들 안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점진적으로 방해받는 것을 반대합니다. 나는 은밀한 교회의 임원회의나 권정 위원회를 반대합니다. 나는 교회가 채택하도록 제시한 법안들에 관하여 그것을 공포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지난번 장로교 총회의 결정과 같은 의결들을 나의 온힘을 다해 반대합니다. 나는 단지 자유를 믿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발적인 모임이 가진 정당성을 믿습니다. 나는 장로교회와 같은 자발적인 모임의 정당성을 믿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나는 교회의 현 상태에 대해서 심각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평화가 없을 때 평화를 를 외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로서는 장로교회에 관한 두 가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1) 장로교회가 근본적으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며, 2) 성령께서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우리들이 매우 겸허하게 그분이 그렇게 해 주시도록 부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도 피상적인 낙관론과 같이 참된 기도를 소멸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비열하게 반 지성주의 속으로 도주하지 않고 논쟁을 비난하지 않으면서 장로교회와 다른 교회 안에서 시종일관 기독교의 남은 자들이 된 사람들은 가견 교회가 그 방황으로부터 참된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하나님께 무릎꿇고 기도해야 합니다.…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메이천의 신학 연구 방법론에 대해


1. 역사적-문법적으로 신학 연구: “성경영감에 대한 확신으로 신학 연구”
메이천은 역사의식을 대단히 강조햇다. 그가 볼 때 신약은 역사(적 사실)였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철학적 전제 위에 세워졌으며 무력하게 될 뿐이라고 경고했다. 메이천은 “기독교와 문화”에서 기독교가 문화를 헌신케 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역사적인 연구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봉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이천이 볼 때 신학적 자유주의를 역사주의의 산물이며 기독교신앙을 봉사하는 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역사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볼 때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었다. 메이천이 지적 학문활동에 열정을 쏟은 이유는 역사주의로 기독교를 파괴하고 변질시키려는 자유주의에 맞서고 기독교 복음을 변호하기 위함이다.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선물로 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가만히 들어온 형제들’을 경계한 것과 같다. 이처럼 메이천은 기독교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과 지성으로 무장하여 투쟁한 학자요 목자였다. 메이천은 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 사이에서 성경적 균형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개혁주의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철저히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를 분석하되, 누가복은 첫 두 장의 문학적 통일성을 밝혀냈다. 동시에 첫 두 장의 기원에서 역사성을 주장했다. 메이천은 하르낙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와 달리, 누가복음의 첫 두 장의 기원을 탐구한 결과, 성령의 감동으로 된 누가의 작업이라고 밝혔다. 언어적 증거를 추적하고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천은 하르낙과 같은 역사주의자들과 자신이 역사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연구하지만 본문의 ‘기원’에 대해서 다른 결론을 내리는 이유는 “신적 개입을 인정하는 여부”에 있다고 말한다. 메이천은 성경에 대해서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 겸손하고 철저하게 본문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메이천은 “2세기의 동정녀 탄생”을 연구할 때도 철저하게 역사적-문법적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입증해 줄 있는 증거들을 찾아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문법적-역사적 접근을 통해서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AD 110년에 이미 기독교 공동체에서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밝혔다. 메이천의 연구에 의하면, 서기 110년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믿음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고 이미 그 뿌리가 교회의 삶에 깊이 내리고 있었다. 예컨대, 저스틴의 문헌을 연구한 결과 유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을 공격하는 것이 기독교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보고 공격했다. 반면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반대자들의 공격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메이천이 볼 때, 동정녀 탄생에 대해 확신한 자료는 2세기 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2세기초부터 동정녀 탄생 신앙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다. 메이천은 역사적-문법적 연구를 하기 때문에 2세기 초까지의 자료를 찾아내서 연구를 했다. 메이천은 2세기 경의 기독교를 연구해야 1세기의 기독교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며 신약을 연구했다. 메이천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 기사들에 대해 단순히 개연성 있는 설명만 아니라 보다 정확한 설명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역사적인 접근을 한다고 하지만 분명하게 증명하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개연성만 부여하거나 설명되지 않으면 교회의 신앙이라면서 원문의 영감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메이천이 얼마나 신앙과 학자적인 자세를 겸비한, 정직한 신학자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메이천은 “예수님과 바울”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는 브레데의 입장에 반대하여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며 예수님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메이천은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이며 예수님의 견해와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 낼 때, 초자연적인 구속 종교인 기독교를 역사적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신앙’을 말하지만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을 반대했다. 동시에 역사주의에 빠져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며 기독교적 성경해석을 하는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에서 자유주의적 접근을 성경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 반대하고 변증했다. 메이천은 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을 박해했고, 초자연적으로는 바울이 예수님과 교제했다고 주장했다. 바울은 이처럼 역사적 해석과 초자연적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메이천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바로는 바울은 기독교의 창설자가 아니라 열렬한 추종자요 제자였다. 바울 복음의 기원은 다메섹 사건에 있으며 예루살렘 교회가 알고 있었던 복음과 다르지 않았으므로 새 종교의 창설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따라서 그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바울은 예수와 관련하여 혁신자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2. 개혁신학적 신학연구
메이천은 성경을 해석할 때 문법적-역사적인 입장과 함께 신학적인 접근을 했다. 메이천이 세 가지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증거가 된다. 메이천이 신학적인 접근을 할 때, 그는 개혁주의적인 신학을 전제로 갖고 있었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하나의 전통으로만 소유한 것을 넘어서서 어려운 시절, 즉 자유주의자들이 지성주의로 혹은 반지성주의로 기독교를 공격할 때 위안을 주는 신학 사상으로 생각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나는 일관된 기독교가 방어하기에 가장 용이한 기독교이며 그 일관된 기독교, 즉 오직 철저히 성경적인 기독교는 개혁 신앙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본다.”고 했다.
메이천은 개혁주의 신학자로서 자긍심을 가졌으면서도 노력을 강조했다. 메이천은 신학자나 신학도가, 특히 성경의 무오를 믿는 개혁주의자들은, 성경 연구에 정열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할 수 없다. 메이천은 독일 신학도들과 미국 신학도들을 비교하면서 미국 학생들이 하향평준화 되고 성경에 대해 열정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지적한다 그는 “전적으로 비어있는 지성”이라면서 지적인 훈련이 결핍된 문제를 꾸짖는다. 개혁주의자인 메이천은 보수주의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보수는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신학적 지식, 새로운 지식에 대해서 무지할 것이라는 사실이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신학적 보수주의자이지만 새로운 발견들을 진심으로 기쁘게 맞이한다고 했다. 메이천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안에서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데, ‘주의’를 붙여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부분에 항의한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으로 성경을 연구했다는 것은 성경무오의 입장을 가졌다는 말이다. 메이천은 개혁신앙의 핵심이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확신이라고 보고 장로교회의 목사는 성경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성경 해석에 있어 개혁신앙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로 하여금 장로교 목사가 되도록 할 목적으로 그에게 어떤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을 반대 합니다.”
메이천은 개혁신학의 방법론을 가지면서도, 개혁신학을 실제 신앙생활에서 경험했다. 메이천은 많은 반대와 회의적인 시대의 모습이 주는 불신의 현장에서 칼빈주의가 주는 유익을 이렇게 말했다: “칼빈주의는 실로 매우 위안이 되는 교리입니다.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거대한 절망의 성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메이천은 칼빈주의가 주는 위안과 소망 안에서, 곧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

3. 지성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신학방법론
메이천은 신앙을 강조했지만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경계했다. 사람들은 현대 신학의 흐름이 대단히 지성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이천은 오히려 현대주의적 신학이 반지성적으로 흐른다고 경계했다. 놀라운 지적이다. 그는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라고 여겨 역사적인 탐구에 열정을 보였다. 반지성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역사적인 기독교를 부정하고 종교심을 강조하기 때문에 메이천은 “처음부터 참된 기독교는 항상 철저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라면서 역사적 탐구를 강조한다. 그러면서 메이천은 지성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기독교가 학문적 변증을 필요로 하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변증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한 사람이 오직 논증에 의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습니다. 중생에는 또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시는 신비로운 사역이 분명히 있습니다.” 반틸의 전제주의처럼, 메이천은 지성주의적 접근으로 신앙을 갖도록 하는 한계를 지적했다.
메이천은 “신학은 원칙과 기초에서부터 견실하게 출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신학의 원칙과 기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제대로 원어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면 탁상공론에 빠지지 않으며, 이 능력은 배경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메이천은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를 집필하는 등 원어 탐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심을 보였다. “누가복음 첫 두 장의 기원”, “2세기의 동정녀 탄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원어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 능력은 당대 최고였다. 그는 프린스톤 생활에서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원어 교육을 하는 일에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했다.
메이천이 강조한 지성적 투쟁은 성경연구에도 나타난다. 메이천은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면서도 성경을 역사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모범을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연구하였다. 메이천은 신약 원전에 대한 자세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성경무오에 대한 확신에 따라 메이천은 당대의 사상에 대해 철저히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성적 투쟁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의 일치와 순결의 교리를 ‘지성적으로’ 옹호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확신을 교회 활동을 통해 구체화시키고자 하였다. 여러 면에서 이러한 초기의 지적 성장은 이후 그가 현대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정면으로 반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메이천은 기독교가 동시대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메이천이 역사적인 접근을 시도한 부분에서 오늘날의 근본주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연설, “역사와 신앙”에서 “신약학 학생들은 무엇보다 우선 역사가여야 한다. 성경의 중심과 핵심은 바로 역사다”고 외쳤다. 메이천은 기독교적 경험은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4. 신실한 신자로서 신학 연구
메이천은 당대 최고의 신약신학자이면서도 그의 신앙이 참으로 충성스럽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메이천은 신앙으로 신학을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신학방법의 뿌리에 ‘신앙’이 있다. 따라서 메이천의 신학방법론을 다룸에 있어서 ‘신앙’을 간과할 수 없어 메이천의 신앙을 신학방법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성경 신학자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경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설교자 자신은 그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경향도 있다. 메이천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명령하는 바에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참된 충성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 원인을 찾는다. 실로 옳은 진단이다. 성경을 가르기고 배우나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아닐까? 그리스도를 부르지만 온 목숨을 다해 충성하지 않는 것이 교회의 문제가 아닐까?
역사적인 접근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메이천이 성경무오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신앙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메이천은 <투쟁하는 기독교>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어린 시절에서부터 나왔다고 밝혔다. 메이천은 성경의 진리를 믿고 성경이 제시하는 구속 종교에 대한 확신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메이천은 기독교적인 인생관과 학문을 하는 방향에 대해서 배웠다. 그의 부친은 변호사였는데, 성경 원어와 고전어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신앙 고전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메이천은 학문과 경건성의 조화를 고향의 집에서 배운 셈이다. 메이천은 모친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갖도록 몸소 그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메이천의 가정은 그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학교였다. 그는 이미 성경 내용에 관한 지식을 12살에 얻었다고 할 정도로 어린시절부터 교리와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
신학을 하다보면 신앙과 학문, 경건과 신학이 괴리될 수 있으나 메이천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로서 행복과 안식을 누리면서 신학을 했다. 메이천은 모친께서 하신 말씀,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붙잡고 있는 것 보다 더 굳게 우리를 붙들고 계신단다.”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한번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로 영원히 그의 것이라는 감격을 알았다. 메이천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감격을 아는 신학자였다.
메이천은 당시 장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복음에 대한 확신을 외친다. 그는 장로교회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세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다시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라면서 복음에 대한 확고부동한 확신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예수님과 바울”에서 강조한 것처럼 갈라디아서의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감격과 확신이 있었고, 거기에 기초하여 신학의 혼돈기에서도 복음신앙 안에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천은 겸손함을 갖고 있었다. 그의 겸손함은 제자들에 대한 입장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겸손함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연결되며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와도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메이천은 학생들에게서 배우는 겸손을 소유한 학자였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법적으로 나와 그들은 교수와 학생의 관계이지만 실제로 나는 종종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그들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원칙에 대한 용기 있는 헌신과 자발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모든 것을 희생 하려는 자세를 통해서 그들은 나에게 오래된 복음이 언제나 새로우며 생명력 있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메이천은 적대적인 세상에서 은혜로운 교제를 학생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존귀하다고 보았다.
이상에서, 지적 탐구에 열정적이면서도 개혁신앙에 철저한 위대한 개혁신학자인 메이천을 통해서 신앙과 신념, 열정과 겸손함을 보게 된다. 그의 신자로서의 순결함과 교회를 향한 열정과 학문을 향한 진지함과 탁월함이 나의 삶에도 적용되기를 소망한다.(강대훈 홈페이지 http://kbibl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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