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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쳔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관심

by 【고동엽】 2014. 9. 10.

한국성경신학회 논문 발표회 2002. 2. 18.
메이쳔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관심
김성봉(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I. 시작 말
1. 연구의 계기
2. 연구의 의의
3. 지금까지의 연구
4. 연구의 방식

II. 메이쳔의 생애와 그의 저술
1. 메이쳔의 생애
2. 그의 저술

III. 메이쳔의 저술을 통하여 본 그의 조직신학적 관심
1. 아쉬움
2. 그의 저술들에서 보이는 조직신학적 주제들
3. 그의 사상적 배경

IV. 주제별로 본 그의 조직신학적 관심
1. 성경론
2. 신론
3. 인간론
4. 기독론
5. 구원론
6. 교회론
7. 종말론

V. 이 같은 서술 방식의 공헌과 한계
1. 공헌
2. 한계

VI. 맺는 말

메이쳔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관심
I. 시작 말
1. 연구의 계기

성경신학회가 신학자들을 발굴하여 연구 발표하려는 계획 중에 이번에는 메이쳔을 택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기로 하였다.

2. 연구의 의의

이 같은 연구는 메이쳔을 알게 하고, 그가 가졌던 관심과 그가 기울였던 노력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신학적 신앙적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암시 받게 될 것이다.


3. 지금까지의 연구

1) 고전적인 연구

메이쳔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서는 무엇보다도 웨스트민스터의 동료요 후배였던 스톤하우스(N. B. Stonehouse)의 J. Gresham Machen: A Biographical Memoir일 것이다.

2) 최근의 일련의 연구

메이쳔에 관한 가장 최근의 연구서로는 크리소프(Terry A. Chrisope)의 Toward a Sure Faith: J. Gresham Machen and the Dilemma of Biblical Criticism, 1881-1915일 것이다. Darryl G. Hart의 몇몇 책들과 글들은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발행한 영문 저널에 메이쳔 특집논문 4편이 실려 있다. 이러한 연구서들이 있을지라도 그의 조직신학에 대한 글은 찾기 어렵다.

4. 연구의 방식

한 신학자의 생애의 가치는 그가 산 시대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그런고로 먼저 그가 산 시대와 그의 생애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의 생애 동안에 저술한 책들을 일별한 후에 그의 저술들 속에서 나타나는 조직신학적 관심들을 주제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메이쳔의 생애와 그의 저술

1. 메이쳔의 생애

메이쳔은 1881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출생하였다. 1898년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하여 대학 공부를 한 후에 1902년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다. 1905년에는 독일 마르부르크, 괴팅엔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1906년 가을 학기부터 프린스턴에서 신약학 교수로 봉직하여 1929년까지 그 일을 계속하였다. 1914년 6월 23일에 뉴저지주의 플래인스보르에서 모인 뉴 브룬스윅 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YMCA 사역자로 봉사하였고, 1919년 다시 교수로 봉직하였다. 메이쳔 당시의 교회는 초자연성을 부인하고,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침식하는 자유주의의 활동무대가 되었는데, 자유주의는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맹공격을 가해 왔으며, 이에 대하여 교단 내에서 대응하다가 1929년 9월 25일 윌슨, 엘리스, 반틸 교수 등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33년에는 독립선교부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1935년 3월 29일에는 노회에서 목사직을 면직 당하게 되었다. 1936년 6월 11일에는 130여명이 모여 PCA를 조직하였고, 이후에 PCUSA와 구별하기 위해 OPC로 개칭하였다. 1936년 12월 크리스마스 휴일 동안의 설교 도중 쓰러져 치료를 받던 중 1937년 1월 1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과연 그는 "진리를 위한 용사, 근대 개신교가 낳은 학식 깊고 용감한 영적 용사, 그리스도의 주권, 성경의 권위를 높인 개혁주의 신학자"였으며, "고결하고 관대하고 온화하며 상냥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N. B. Stonehause).


2. 그의 저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편의상 연대순으로 열거해 보면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1921/1927),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 What is Faith? (1925/1946), 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 The Christian Faith in the Modern World (1935/1970), The Christian View of Man (1937/1965) 등이 그것들이다.


III. 메이쳔의 저술을 통하여 본 그의 조직신학적 관심

1. 아쉬움

죤 머레이 교수는 메이쳔의 유고작인 「기독교 인간관」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1937년 1월 1일 그레샴 메이쳔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행한 연설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출판을 위하여 원고가 정리되었지만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되었다. 좀더 일찍이 '현대의 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 in the Modern World)이라는 제목 하에 행한 강연 시리즈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 두 책은 기독교 교리 부분에 관한 메이쳔 박사의 가장 원숙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은 책을 최소한 네 권 출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뜻하지 않은 별세로 인하여 이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가 출판하기로 계획하였다는 최소한 네 권의 책의 내용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책의 내용을 훑어보면 분명해 진다. 앞서 언급한 두 권의 내용이 무엇인가? 우리말로 「기독교와 현대신앙」이란 제목으로 나온 첫 번째 책에서는 신학서론에 해당하는 내용인 성경론과 기독론이 주로 다루어져 있는데 기독론과 관계하여서는 신론과 삼위일체론과 성령론이 각각 한 장씩 다루어져 있다. 「기독교 인간관」에서는 신론과 인간론이 주로 다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권에 이어 다루어질 내용이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그것은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관한 내용들일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나머지 두 권의 책이 나오지 않은 데 대하여 대단한 아쉬움을 느낀다.


2. 그의 저술들에서 보이는 조직신학적 주제들

앞서 언급한 그의 저술의 목록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하겠다.

1)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1921/1927). 이 책은 "그의 첫 학문적 저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바울 사도의 교훈은 예수님의 가르친 단순하고 순수한 교훈을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당시의 자유주의에 대해 맹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전통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입장을 분명히 진술해 주었다. 그의 저서 중 "가장 훌륭한 저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 책이나 다음에 언급할 「동정녀 탄생」의 둘 중 하나일 것으로 머레이는 말하고 있다. 머레이는 "이 두 책을 통하여 그가 신약학 분야에 특히 변증학 분야에 정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2) 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 이 책의 주제는 "자유주의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신앙과는 전혀 다른 근원으로부터 나온 별개의 종교"라는 것이다(머레이). 이 책을 통하여 "신앙의 독특성을 변호하고자 하는 그의 불타는 정열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자유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지적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표현하였다. 자신이 몸소 자유주의 입장을 습득함으로 그들의 약점과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잘못은 공격하면서도 그들에게 동정심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예수는 진실로 신비스럽다. 누가 그의 인격의 신비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신비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신비이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는 적어도 그가 실제 인간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학계가 재구성한 예수보다는 더 낫다. 그는 어떤 도덕적 격언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형이 아니오,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이었다. 기독교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들은 그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이 책에 대한 리프만(W. Lippmann)의 평가는 인상적이다. "이 책은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그 예리함, 그 중요성, 그 재치 그리고 침착하면서도 확고한 정통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변증은 내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출판된 책들 중(기독교와 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에 대해) 가장 신빙성 있는 논증이다. 우리는 메이쳔 박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 줄 안다."

3) What is Faith? (1925/1946). 이 책의 주제는 "그 당시 현대주의의 반지성주의와 싸우는 것"이었다(머레이).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의 성격과 기독교 교리의 여러 가지 국면들을 보다 더 확실하게 해설하였다.

4) 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 이 책에서 메이쳔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순전히 인간으로만 취급하려는 그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공박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학문적인 차원에서 확증해 주고 있다. 이 책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변호함에 있어서 이 책에 필적할 만한 저서는 없다"고 머레이는 격찬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도덕적 인간으로 전락시킨 반면 메이쳔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인간이요 참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증명해 주었다. "동정녀 탄생으로가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구주가 모체에서부터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으며, 또 처음부터 생식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초자연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반문하였다.

5) The Christian Faith in the Modern World (1935/1970). 기독교 교리 부분에 관한 메이쳔 박사의 가장 완숙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메이쳔은 「기독교 인간관」의 저자 서문에서 "「현대의 기독교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1936년 2월에 출판된 제 1 부는 성경의 권위와 신론을 취급하였다."고 하여 이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바를 분명히 밝혔다. 저자의 이 같은 자기 표현을 바탕으로 하여 직접 그의 책을 살펴보면 우리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얻을 수 있다. 그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성경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와 최소한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의 일부가 제시되어 있다(물론 이것도 단지 간략한 형식으로이지만)."고 한다. 이 같은 저자의 표현에 비하여 우리가 직접 그의 책을 펴 보면, 그 내용에 있어서 기독론이 차지하는 비중에 놀라게 된다. 전체 열 일곱 장 중에서 무려 일곱 장에 걸쳐 기독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6) The Christian View of Man (1937/1965)

이 책은 "그의 생애 말년에 완성된 저서"로서 위에 언급한 The Christian Faith in the Modern World와 함께 기독교 교리 부분에 관한 메이쳔 박사의 가장 완숙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저자 서문에서 메이쳔은 "이 책은 성경적 인간론과 ...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하여 취급하고 있다. 논의의 상당 부분은 죄에 관한 선경적 가르침에 관련되어 있다. ...... 이 책에서 나는 개혁주의 인간론, 특히 개혁주의 인죄론과 은혜론이 단순히 신학자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고 하여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내용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앞서 나온 「기독교와 현대신앙」의 저자 서문에서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다른 내용들 - 인간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적 견해 - 은 앞으로 취급될 문제로 남겨져 있다."고 하여 이 책과 다음 나올 예정이었던 책들의 주제를 짐작하게 한다.


3. 그의 사상적 배경

메이쳔은 「기독교 인간관」 저자 서문에서 "이 책은 조금도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시종일관 개혁신학의 거장들, 특히 챨스 핫지(Charles Hodge),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그리고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캐스퍼 위스타 핫지(Casper Wistar Hodge)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는 워필드나 보스와 마찬가지로 본 저자의 은사이시다."고 하여 그가 다루는 주제와 관련하여 그가 의존하고 있는 사상적 배경을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나는 이 작은 책에서 이 개혁신앙을 전하고자 하며, 또한 그것을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매우 상세하게 전하고자 한다."고 하여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 개혁신학인 것을 표명하고 있다.


IV. 주제별로 본 그의 조직신학적 관심

1. 성경론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는 제 4 장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기독교와 현대신앙」에서는 전체 18장 중에서 거의 1/3에 해당하는 앞부분 일곱 장을 이 주제를 다루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처럼 이 주제는 그가 서술하는 모든 신학적 주제에 있어서 전제가 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복음은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래되었는데, 복음이 수록되어 있는 이 책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 관건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리는 계시의 기록을 함유하고 있으며(contain), 이 계시의 기록은 그 외의 어떤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계시에는 "하나님의 창조물과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서도 나타나는 그러한 계시"도 있고,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계시도 있는데, 이 새로운 계시는 "죄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게 될 수 있는 길에 관한 것"인데, 이 양자가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생활은 신약성경의 기록의 진리성에 의존하는데, 기독교적인 체험은 그것이 서류상의 증거를 확인하는 데 정당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아가 "성경에 수록된 계시는 영원한 진리의 재확인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의의를 제시하는 계시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메이쳔은 계시의 교리뿐만 아니라 영감의 교리에 대하여서도 언급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참된 계시의 기록이면서도 그 기록이 오류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고로 ... 계시의 교리에 영감의 교리를 부가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영감의 교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영감의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성경이 중대한 사실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 기록은 진리이며 그의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사고와 표현의 습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류로부터 보호되었으므로 그들의 소산인 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무오한 표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이름하여 '완전 영감설'이라고 부르는데, 메이쳔에 의하면, 이 같은 완전 영감설은 "성경 저자들의 개성을 부인하지도 않으며, 보도를 수집하기 위한 그들의 통상적 방법의 사용을 무시하지도 아니하고, 성경을 낳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성경기록자들이 그들의 전 생애의 섭리적인 정하심에 의해 그들의 사명을 위해 준비된 후, 그 모든 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영에 의한 복되고 놀랍고 초자연적인 인도와 충동을 받았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책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로부터 보호되었다. 따라서 그 결과로 생긴 책인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사실의 문제들에 관해 말하는 바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고 그것의 명령들에 있어서 완전히 권위적이라고 생각한다"고 그의 영감론을 밝히고 있다. 메이쳔에 의하면 완전 영감설이 특별히 부인하는 것은 "성경 중에 오류가 존재한다"는 그런 주장이라고 한다.

메이쳔은 영감론과 관계하여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미리 언급한다. 그것은 역본과 사본의 무오 주장의 가능성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후대에 그 책들을 베낀 필사자들과 구별되는, 성경의 각 책들의 '기록자들'이 영감되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 "오직 성경의 원본들 ... 거룩한 기록자들의 붓으로 쓰여졌던 그 책들이 ... 성령이 초자연적인 충동과 인도로 산출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우리는 축자 영감을 믿는가?"라고 묻고는, 그에 대하여 "그렇다. 나는 성경의 축자 영감을 믿는다"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말하는 "축자 영감"에 대하여 바른 생각을 가져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그럼 그가 말하는 "축자 영감"은 어떤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감은 확실히 성경의 단어들과 관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확실히 축자 영감을 믿는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축자 영감'이라는 말로 영감이 '오직' 성경의 단어들에만 관계해야 하고 또한 성경 기록자들의 영혼에는 관계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의미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축자 영감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메이쳔의 성경론과 관계하여 좀더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여간 예민한 눈이 아니면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가 바울 종교의 기원을 서술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바울에 따르면, 구약 성경의 율법은 참으로 권위가 있고 참으로 신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었다. 그것은 역시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필요한 죄의식을 산출하도록 의도되어졌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메이쳔은 마르시온의 오류를 피했고, 또한 소위 바나바 서신의 오류도 피했다. 그런데 이단의 방식을 피한 것은 잘한 일이지만 신구약의 통일성과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있어서 개혁주의의 풍부한 면모를 살리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구약의 율법을 단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으로만 이해하는 루터의 이해 방식에 머문 듯한 모습이다. 율법의 제 3 사용의 의미에서 구원받은 백성의 성화의 삶을 위한 계속적인 적용이 간과된 듯한 느낌이다. 물론 제사법과 의식법, 시민법은 폐지되었지만, 십계명을 하나님의 영원한 도덕법으로 받음으로써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이 있을지라도 그의 성경론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내용에 충실한 성경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신론

신론에 관한 메이쳔의 서술은 주로 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기독교와 현대신앙」, 「기독교 인간관」에 집중되어 있다. 앞의 두 책이 신론 중에서도 신의 존재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면, 마지막 책은 신의 사역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본 논의에서는 주로 앞의 두 책의 논의에 집중하고자 한다.

메이쳔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인간에 대한 교리와 함께 복음의 위대한 두 전제가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지식은 종교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여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 복음의 2대 전제인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죄의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메이쳔은 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거듭 지적하고 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은 인식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를 인식하여 그와의 인격적 교제를 가능케 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는, 자연 속에서, 도덕률에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우주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며, "초자연적인 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통하여도 자신을 알리신다.

메이쳔은 신론과 관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다.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창조와 관계하여서만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더 나아가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인격적인 하나님"까지도 염두에 둔 표현이다. 그는 그 당시에 신론보다는 오히려 기독론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언급하면서 그러한 주장이 갖는 오류를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하였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님께 대해 심히 모욕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러한 주장이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에 있는 가장 심오한 사실들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단지 예수님에게 대하여서만 모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모욕적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 "사람들이 그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가, 그가 세상의 창조자나 통치자이신가 하는 문제에는 흥미가 없고, 오직 그가 선하신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저급한 견해인가!"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합리적 유신론 즉 세계의 창조주이며 살아 계신 지배자인 한 지고의 인격에 대한 지식이 곧 기독교의 기초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종교의 바로 기초가 되는 것은 "인격신의 실재에 대한 승리적 신앙"이었다. "기독교의 바로 기초에는 인격신의 실재를 믿는 신앙이 존재한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보편적 부격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아버지'라는 칭호를 보다 훨씬 더 친밀한 관계인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 적용하였다. 그에 의하면, "복음 그 자체는 전혀 다른 무엇에 속해 있으며, 신의 부격에 대한 진실로 명료한 신약성경의 교리는 홀로 신앙의 가족 속에 들어 온 사람에게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메이쳔에 의하면 성경에 계시된 기독교의 신관에는 많은 요소가 있는데, 그 중에서 "신의 두려운 초월성"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속성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 세상 안에 내재하실지라도, 그는 또한 초월해 계신다. 세상은 그를 의존하고 있지만, 그는 세상을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을 제한하셨지만, 세상은 그를 제한하지 못했다. 세상은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지만, 그는 영원 전부터 계신다. ... 하나님과 세상의 두려운 구별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메이쳔은 장로교회의 소요리문답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간략하게 논하고는 삼위일체에 관하여도 간략하게 언급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인격(one person)이 아니시다. 한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인격(three persons in one God)이시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이다." 그는 "삼위일체는 오직 성경 안에서만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오직 초자연적인 계시에 의해서 만 우리에게 계시하신 내용이라고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그는 워필드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 교리는 명백하게 가르쳐진 정도가 아니고 전제되어 있다"고 하였다. 즉 "신약성경은 삼위일체 교리 위에 철저히 기초하고 있고, 그 교리가 말로 표현되기 전에도 그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성령의 사역이라는 위대한 사실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표현된 신약성경의 모든 구절들은,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에 대하여 표현하는 구절들과 함께, 삼위일체 교리를 지원하는 구절들이다." 이 교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교훈은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것은 그대로 신약성경의 핵심이다. 한 분 이상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상에 대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과 똑같이 반대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똑같이 분명하게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은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이 셋은 같은 한 인격의 세 모습(측면)이 아니고 서로 간의 참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시는 세 인격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거기에서 우리는 '세 인격 그러나 한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교리를 가진다."

이 밖에도 신의 사역에 대한 논의를 「기독교 인간관」을 중심으로 논의할 수 있겠으나, 논의의 균형을 위하여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3. 인간론

인간론에 대한 메이쳔의 논의는 주로 「기독교와 자유주의」와 「기독교 인간관」에 집중되어 있다. 앞의 책에서는 "신과 인간"이란 제목으로 간략하게 다루어져 있으나, 뒤의 책에서는 기독교 인간관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인간론이 "처음 지음 받은 인간," "타락한 인간," "죄의 기원,"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 등을 다루는 데 비하여 보면, 그가 다룬 내용도 대동소이한 것을 볼 수 있다. 굳이 아쉬운 것을 말하라면, 언약론이 보다 풍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기원과 관계하여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말하며, 인간의 본질에 관하여서는 엄격하게 이분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영과 인간의 혼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두말은 동일한 것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부르고 잇는 것인데, ... 그것들이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말로 '인간의 혼' 또는 '인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다른 말들일 뿐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기독교 인간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하여 낙관적인가, 아니면 비관적인가 하는 문제이며,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하여 심각함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앞 단락에서도 말하였듯이 메이쳔에 의하면 "현대 자유주의는 기독교 복음의 2대 전제인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죄의 사실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신의 정죄 하에 있는 죄인으로 간주되는데 현대 자유주의 운동은 죄의식의 상실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 같은 대조는 이교주의와도 유사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이교주의가 생래의 인간성에 대하여 낙관적인 반면에 기독교는 상한 심령의 종교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를 상한 심령의 종교라 한다 해서 늘 눈물만 흘리고 있는 종교란 의미는 아니다.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종교요, 신의 은총에 의해 죄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이다. 신의 은총에 의하여 죄를 처리해 버린 후에야 비로소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을 즐겁게 계발할 수 있는데, 이것이 보다 고상한 기독교적인 인도주의이다. 즉 인간의 자만 위에서가 아니고 신의 은총 위에 수립된 인도주의인 것이다. 메이쳔에 의하면 "인간은 단순히 허물과 죄 가운데 병들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약한 상태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잇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주권적인 중생의 행위로써 그를 구원하신다"고 한다. 메이쳔은 「기독교 인간관」의 결론부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단지 개략적으로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려고 힘써 왔다. 즉 아담의 최초의 죄책이 전가됨으로써 죄책 가운데 있는 인간, 따라서 그 죄에 대한 형벌로서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또한 온 성품이 부패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어서의 전적인 무능력으로서의 영적인 죽음을 겪고 있는 인간, 타락한 마음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개개의 범죄 행위를 산출하는 인간,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직면해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는 모습이다."

4. 기독론

기독론에 관한 메이쳔의 글은 「기독교와 자유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와 현대신앙」에 주로 나온다. 처음 두 권에서는 이 주제에 대하여 한 장씩 다루는데 비하여, 마지막 책에서는 무려 일곱 장에 걸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독론에 대한 논의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논의인데 비하여 기독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주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기독론에 있어서 중요한 논지는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것이다. 메이쳔은 워필드(B. B. Warfield)를 인용하면서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를 포함하여 삼위일체의 교리를 마치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관념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처럼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신약성경은 그것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로 제시한다"고 하였다. 그는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를 특별하게 가르친다기보다 그것을 기정 사실로 간주한다"는 워필드 박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들이 그것을 기정 사실로 간주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으로 오신 사실에 의해 이미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 교리는 말로 표현되기 전에 성육신의 사실에 의해 확립되었다."

메이쳔의 기독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논지는 예수님이 신앙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의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인용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단지 신앙에 대한 모범으로서 제시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제시하신다"고 하였다. 메이쳔은 복음의 근거가 되는 인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인격이 누구인가? 그가 곧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있어서 단순한 신앙의 모범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었다고 메이쳔은 주장한다. 바울의 종교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신앙한 것 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예수를 신앙하는 데 있다"고 그 핵심을 잘 지적하였다.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그의 주저 「바울 종교의 기원」의 논지를 이룬다. 바울에게 있어서 제 일의적인 것은 예수님의 모범이 아니고 예수님의 구속사업이었다고 바로 지적하였다. 그의 신앙은 제자들의 설복에 의한 것이 아니고 주님 자신에 의한 개종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입장에 비하여 메이쳔의 논적이었던 현대 기독교의 예수관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메이쳔의 주장이다. 그가 관찰한 대로는 그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비록 예수님에 대하여 신성을 말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신성'이라는 용어와 '하나님'이라는 용어의 이러한 이중적인 사용이 말할 수 없는 해독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용어들을 '자기들의' 의미대로 사용하는 불신자들의 경향은 그 용어들을 그들의 의미대로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경향과 결합되어, 교회 안에서 기독교와 불신앙 간의 중대한 문제점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 결과 교회의 기초가 내부로부터 침식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기독교인이 예수님에 대하여 종교적 관계에 서는 데 비하여 자유주의자는 그런 관계에 서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신의 계시라고 말하며, 예수의 종교 생활 속에 들어가며 또한 들어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종교적 관계에 서려고는 하지 않는다고 질타한다. 현대 자유주의자는 예수께서 신에 대하여 가졌으리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바로 지적하였다. 메이쳔에 의하면, "예수님께 대한 진정한 신앙은 예수님의 고귀한 주장들이 과장되지 않은 사실로 간주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즉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로서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자원하여 세상에 오셨고 심지어 그의 육신의 생활에서도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지금은 부활하셔서 자기에게 그들의 생애를 맡기는 자들과 교제하신다고 간주될 때에만 그러한 것이다."

그밖에도 그의 기독론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들로는 예수의 메시야 의식, 그의 무죄성, 그로 말미암은 사죄, 초자연적 인격 등이 있다.

5. 구원론

구원론에 관한 메이쳔의 글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와 「신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각 한 장씩 다루고 있다. 그런데 제목으로서는 한 장이지만 내용으로서는 그 책들 전체의 내용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주제이다. 하트(D. G. Hart)는 이 책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메이쳔이 그 책에서 강조한 것은 구원과 속죄에 관한 교리이다. ...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구원했다"고 주장했다. 메이쳔은 "구원"이란 제목 아래서도 주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치중하여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메이쳔은 "자유주의는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으며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역에서 구원을 찾는다"는 말로 기독교의 구원의 특징을 현대 자유주의와 구별하여 표현하였다. 메이쳔에 의하면, "구원은 발견된 그 무엇이 아니고, 발생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구원은 옛날에 일어난 사건에 의존하는데," 그 옛날의 발생사건은 오늘까지도 지속하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것은 그가 성취하신 일 때문이다. 어떤 일을 그가 성취하셨던가? 스스로 우리의 죄악을 취하여 십자가상에서 우리 대신 그것을 짊어지셨다. 메이쳔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자기 희생의 모범이 아니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무서운 죄의 실재를 무시하고 단순한 인간 의지의 설득을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여기는" 오류에 빠져 있다. 메이쳔은 구원론에 있어서 중심적 진리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흠도 티도 없는 무죄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내세우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중심적 진리가 없으면 다른 모든 진리는 그 진의를 상실한다고 한다. 고귀한 자기 희생의 모범이라 할지라도 죄책과 죄의 속박에 있는 자에게는 무용지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메이쳔은 구원의 방편과 관계하여 당시에 제기되었던 "제설혼합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메이쳔은 이제 본격적인 구원론의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개개의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가?"라고 묻고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령으로 인하여 각자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고 대답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의 일부분이며, 그것은 새 생명의 시작이며, 새로운 탄생이다. 때문에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은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관계가 있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칭의라 한다. 이 칭의는 죄인이 그리스도의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메이쳔에게 있어서 칭의와 중생의 순서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칭의가 중생보다 먼저 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중생이 칭의의 앞에 서는가 하는 문제는 불필요한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양자는 한 구원의 양 국면이다." 하지만 이 같은 표현은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보다 세심한 신학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너무 가볍게 표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표현과 관계하여 메이쳔이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말은 설득력이 있다.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의 대상이다. 그리고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그런고로 기독교적 견해에 의하면 신앙은 단순히 선물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가 신앙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 단순히 그리고 단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그 분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다른 하나의 표현 방식에 불과한 것이다." 신앙이 이처럼 구원과 관계하여 배타적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신앙은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고 어떤 것을 하는 것이나 심지어 어떤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구원과 관계하여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 신앙의 대상에 대한 강조는 특기할 만하다. "신앙이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 영혼의 한 품성으로서가 아니고, 그 신앙의 진정한 대상과의 접촉이 이루어짐으로서"이며, "신앙의 효력은 ... 신앙 자체에 의존하지 않고 신앙의 대상에 즉 그리스도께 의존한다." 그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은 사람이 그의 신앙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결코 말하지 않고, 그가 그의 신앙을 통하여 혹은 그의 신앙을 수단으로 하여 구원받는다고 항상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들을 각 사람의 영혼에 적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6. 교회론

메이쳔에 의하면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받을 때 그 구원받은 사람들은 연합하여 기독교회를 이룬다"고 한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진정한 형제관계는 구속함을 받은 사람간에 존재하는 형제관계"이다. 이런 점에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논의에서 구원론에 이어 교회론이 뒤따라오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메이쳔은 당시 논의가 되었던 사회 개조 문제와 연관하여 사회개조를 위한 어떤 조직체로서의 교회라는 관점에 대하여 "전 사회의 구원이 성취되기 전에 있어서도 구원을 벌써 받은 사람들의 사회가 기왕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 사회가 곧 교회이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인간의 사회적 요구에 대한 기독교의 최고 응답"이다.

그에게 있어서도 유형의 교회와 무형의 교회의 구분이 보인다. 그는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진정한 교제인 무형의 교회는 오늘날 유형의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의 교제 중에서 표현된다"고 말한다. 하트가 이해한 대로는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교회의 정체성은 올바른 교회에 달려 있고, 교회는 그것의 신학적 기초를 변호하고 지키는 일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만약 교회가 교리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곧 멸망할 것이다"는 것이다. 이 주제와 연관하여 그는 그의 지배적인 문제의식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그 시대의 유형교회의 미약함에 대하여 탄식하면서 그 원인을 이렇게 지적한다. "실제로 믿을 만한 신앙고백을 전혀 해 본 적이 없으며, 복음에 대한 그들의 전 태도가 기독신자의 태도에는 전혀 배치되는 그러한 사람들의 대단체를 교회에서 수용하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사람들이 비단 교회의 신도로써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회의 직분으로써 허용되어 왔으며, 일층 더 심한 것은 그들이 교회의 회의를 좌우하며 교회의 교리를 결정하도록 시인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로 인한 위협을 그는 다음과 같은 우려 섞인 말로 표현하였다. "금일의 기독교회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내부의 적으로부터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핵심까지 비기독교적인 신앙과 행위의 일 모형이 교회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위협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그로 하여금 교회론에 대한 더 이상의 진전보다는 당시 교회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성토와 변론에 치중하도록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은 신앙고백서를 근거로 선서는 하면서도 그 고백에 매이지 않는 교직자들의 무리였던 것이다. 메이쳔은 신앙고백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그 신조로 선서하고서는 직임을 얻고 나서는 그 신앙고백을 비웃는 자들의 부정직성을 비난하면서 그들에 대하여 정직을 회복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는 교회 내에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자유주의가 혼재해 있는 이러한 변태적인 상태를 어떻게 종결할 수 있겠는가고 묻고는, "그 최상의 방도는 신조적 교회의 신앙고백을 명료한 역사적 의미에 있어서 수락하지 않는 자유주의 교직자들이 신조적 교회로부터 자진하여 철퇴하는 것이다"라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해결책은 너무나 순진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자발적 조직"과 "비자발적 조직"에 대하여 말하는 데, 예를 들어 국가가 "비자발적 조직"인데 비하여 교회는 "자발적 조직"이라고 하였으며, "비자발적 조직"의 경우에는 보다 관용해야 하겠으나, "자발적 조직"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메이쳔은 "복음적 교회는 이러한 자발적 단체 중에 포함되어" 있으며, "복음 전파를 근본목적으로 하고 세워진 조직이 복음에 반항하는 일을 본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 재단과 명의를 위탁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고 순연한 부정직이다"라고 그 시대의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 같은 그의 견해를 두고 그의 교회관을 가리켜 "조합 교회적 교회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의 교회관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그가 제시한 정당 비유에서 더욱 힘을 얻는다. 그에 의하면, "가령 어메리카의 정치운동에 있어서 민주당의 정강을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민주당 구락부가 조직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여기에 또한 민주당 구락부의 정강에 반대하고 야당으로써 공화당을 지지하기 원하는 다른 시민들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정직한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논할 여지도 없이 그것은 단순히 공화당의 정강을 위하여 선전을 촉행할 공화당 구락부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의 정책의 지지자들이 이와 같은 단순한 방법을 추구하는 대신에 민주당 정책을 준용한다는 선언을 하고 민주당 구락부에 가입한 후에 마침내 그 자금을 반 민주당 선전에 충당한다고 가정하자. 이러한 계획이 교묘한 것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정직할까?" 그 당시 교회의 형편과 관계하여 이러한 예를 든 후에 메이쳔은 "세속 생활에서 인용한 예증으로 인하여 누구나 실족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며, "우리는 일순간이라도 교회가 정당구락부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이로 인한 오해는 쉽게 가시지 않은 듯이 보인다. 이로 인한 그의 교회관에 대한 비난은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 메이쳔을 변호하자면, 그가 여기에서 굳이 정당을 예로 들어 말한 것은 교회의 구성원 특히 그 중에서도 교회의 지도자는 그가 속한 교회의 신앙고백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메이쳔에 의하면, 교회는 "투쟁으로부터 피할 곳"이며, "사람이 인생의 싸움을 준비할 수 있는 휴식처"이며, "백성을 백성으로부터 종족을 종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을 잠시라도 망각하고 인간의 자랑을 망각하고 싸움의 정열을 망각하고 산업전의 당혹케 하는 문제를 망각하고 그리고 십자가의 발아래 차고 넘치는 감사의 희열 속에서 연합하기 위하여 2인이나 3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이요, "천국의 문"이며, "그 집의 문지방으로부터 피로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나오는" 그러한 집이다.

7. 종말론

그의 저술들에서 종말론에 관한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종말론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들을 인용하는 대신에 그가 그 시대를 어떤 긴장감을 가지고 보았는 지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현대는 안일과 환락의 시대가 아니고 열성과 기도로써 역사할 시대"이다. 그는 무서운 위기가 교회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지켜 본 무서운 위기는 어떤 것인가? "복음적 교회의 교직자 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대군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한가? 그에 의하면 "전통적 용어의 이중적 사용"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장하거나 또는 견해의 상위를 단순히 "해석상의 상위" 정도로 축소시켜 자신을 위장하면서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침투한 적에 대하여 그는 "오늘날 이교주의가 기독교의 명칭 하에 교회 중에 침입하였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침투한 적들이 이제는 공공연히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 과거와 일치하려는 가식은 포기되고 현재 발생하고 있는 사건의 진의가 노현되려고 하는 징후가 보인다." 어떤 면들에서 그러한 징후를 보았던가? 그에 의하면, "교회는 거의 성경의 속박이 공공연하게 포기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가 무용한 번쇠사의 유치장으로 퇴락할 수 있는 정도의 지점까지 육성되어 왔다고 현대의 사람들은 분명히 상상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 때를 당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교직자나 평신도가 다같이 이 시련의 날에 있어서는 새로운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영적 전투에 대한 그의 기대는 이러하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경주한다면 그리스도의 싸움은 사랑과 충성으로 감행될 것이며, 당파적 열정이나 개인적 원한은 제거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 속에서 마치 결전에 임하는 장수의 각오를 가진다. "하나님이여, 원하옵기는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결정을 하게 하옵소서!"

그가 본 그의 시대는 "복음에 대적하는 세력이 이제는 거의 교회를 지배하려고 하는" 시대였으며, "현존의 교회가 자유주의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한" 시대였다.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도 그는 신앙 안에서 장래에 대하여 비관하지 않고 낙관한다. "가까운 장래에 무엇이 올 것인가는 우리가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최종적 결과는 실로 명백하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버리시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시련을 당하고 있는 학대보다 더 암흑한 시대에 있어서도 교회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가장 암흑한 시대가 도래한 후에는 언제나 여명이 임하였다." 그는 그의 시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가진다. "그러나 가장 적당한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또 하나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현존의 교회가 자유주의에게 완전히 정복을 당하여 사람들이 영혼의 근본적 요구의 만족을 현존교회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그 외부에서 발견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기독교 단체가 형성될 수도 있는 일이다"고 하였다.

그 시대 속에서 영적 위기를 느낀 그의 심령은 마치 엘리야의 심정과도 같았다. "그 어딘가에 반드시 구속함을 받은 남녀성도가 있어서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겸손하게 단합하여 그의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선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게 감사하여 그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경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 단체만이 홀로 영혼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오죽 위기와 외로움을 느꼈으면 이같이 표현하였을까? 전후좌우를 둘러보아도 동지는 없고 적들로만 가득한 그런 영적 위기를 느낀 것이 분명하다.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가지는 위기감 그러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목자되신 주님 때문에 가지게 되는 소망을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현재와 같은 투쟁의 시대에 있어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식탁의 주위에 충심에서 집합하는 회중이 있다. 진실로 목사다운 목사가 있다. 그러나 많은 도성에 있어서 이러한 회중은 발견하기 어렵다."


V. Machen의 신학 진술 방식의 공헌과 한계

메이쳔의 글은 전체적으로 논증적이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영적 형편에 대하여 위기의식을 가졌기에 그 위기에 대한 지적과 그에 대한 대안제시가 그의 글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러한 자세는 그가 다룬 거의 모든 주제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글에는 어떤 장점과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약점이 나타난다.


1. 공헌

조직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메이쳔의 저술 방식에 있어서 공헌을 생각하자면 무엇보다도 그가 그 시대의 영적 위기를 잘 지적하였다는 점이다. 자신이 이미 전수하여 가지고 있는 개혁신앙의 내용에 비추어 그 시대가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그의 독일 유학 생활에서 더욱 심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시대의 시대정신 앞에서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내용을 잘 변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약 원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제되는 주제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교회의 신앙을 효과 있게 변증하였다.


2. 한계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읽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그가 가진 그 시대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주제를 넉넉하고 풍성하게 다루지를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다루는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한 서술에서 나타난다. 굳이 변명하자면 이러한 문제점이 우리가 분석하는 자료들이 가지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분석하는 자료들의 대부분이 신약신학자로서 조직신학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고, 그것도 방송 원고로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한 내용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VI. 맺음말

우리는 지금까지 메이쳔의 조직신학적 관심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가 그의 시대 속에서 얼마나 영적 긴장을 느끼며, 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그 시대를 향하여 성실하게 변증하였는가를 살폈다. 그 때로부터 적어도 2세대는 지나간 오늘날이다. 과연 우리 시대의 교회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그가 느꼈던 그러한 영적 긴장의 소지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는 그가 가졌던 그러한 영적 예민함이 없는 것인가? 또한 영적 긴장과 위기의식을 가졌다 해도 그가 했던 것처럼 그토록 성실하게 그 시대를 향하여 변증해 나갈 수 있을까? 우리에게 열심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그럴만한 실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열심도 없고 실력도 없는 것인가? 그가 떠난 지 두 세대가 지나서 새삼 그의 생애와 저술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우리 시대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그가 가졌던 그러한 열정을 가지고 살기를 다짐하며, 그가 가졌던 그러한 성실함으로 우리 시대를 향하여 복음의 내용을 변증할 수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는 그의 단점까지를 본 자들로서 복음을 변증하는 그 순간에도 보다 풍부하고 넉넉하게 복음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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