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문병호박사의 칼빈의 교회론/조직신학회

by 【고동엽】 2021. 10. 12.
칼빈의 교회론: 기독론·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문병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Sola Scriptura: 칼빈 신학에 대한 관점적 접근
소위 칼빈 신학의 중심 주제(the so-called central dogmaof Calvin’s theology)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을 단순히 현학적인 것으로만 치부(置簿)할 수 없음은 제네바의 성경 교사요 말씀의 수호자인 그는 신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전제나 논리보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에 충실해서 그곳에 기록된 다양하며 역동적인 신학 주제들(loci)을 이성적으로 첨삭하지 않고 모두 다루었으므로 그 정수를 논구하는 것이 그의 신학을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 학자들은 칼빈 신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적 접근(perspectival approach)이 필요함을 역설한다.주지하는 바와 같이 칼빈 신학의 서론(prolegomena)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라는 두 관점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두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타락 전 하나님 형상과 타락 후 하나님 형상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다시 논해진다.
이와 같은 다양한 관점에서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파라다임 속에서 구속사(historia salutis, 역사적 구원계시)와 개인의 구원 서정(ordo salutis)을 역동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칼빈은 신학적이며 주해적인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서 약속-성취의 유비(promissio-perfectio analogia)와 그림자-실체의 유비(umbra-substantia analogia)를 동시에 고려한다. 약속-성취의 유비가 이미 구약 백성들에게도 계시되었다. 다만 그들은 그림자를 통하여서 실체를 믿었다. 실체가 없다면 그림자는 헛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자가 있음은 인격(persona)이 위격(hypostasis)으로 존재(subsistentia)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과 우리의 구원은 다양한 관점에서 동시에 공시적이며(그림자-실체) 통시적인(약속-성취)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로 다루어진다. ‘항상 같으나 시대에 따른 [하나님의 구속 경륜],’ ‘어느 곳에든 계시나 특정한 곳에만 계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위],’ ‘조건은 있으나 조건적이지 않은 [언약 이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능력이 있으나 선택된 사람에게만 [미치는 복음의 능력],’ ‘즉각적인 그러나 점진적인 [성화],’ ‘명령하시나 스스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 ‘자유하나 매여있는 [성도의 삶]’; 이성적인 측면에서는 역설적이나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은혜 위의 은혜가 되는 성경적 진리 자체(veritas ipsa biblica)를 궁구(窮究)함이 칼빈 신학의 근거요 요체며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칼빈의 신학에서 다양하게표출되는 관점적 접근들은 그의 입장이 비학문적이라거나 비논리적이라거나 비신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성경의 자기 계시성(영감성, 충족성, 완전성)에 얼마나 충실했으며그가 계시와 은혜에 관해서 얼마나 고상한 입장(high view)을 견지하고 있었는가를 잘 대변하고 있다.칼빈의 신학이 지금도 여전히 회자됨은 그의 신학이 인문주의적 비평이나 심리학적 요소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은 아니다.칼빈의 텍스트 자체에 충실한문자적-역사적-영적(삼위일체론적 그리고 기독론적) 성경 해석이오늘날 성경 신학자들이나 성경 해석학자들 그리고 설교학자들에게도 하나의 전형이 되는 것은 그의 신학이 sola Scriptura 원리에 입각해서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 읽기에 충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칼빈 이전의 종교 개혁자들이지나치게 주제 중심적이었으며 칼빈 이후의 종교 개혁자들은 지나치게 콘텍스트 중심적이었다면,칼빈이야말로 진정한 sola Scriptura의 원리로 신학한 처음이자 마지막 종교 개혁자였다고 할 것이다.
칼빈은 말씀이 말씀하심에 따라서 신학했다. 이성적 논리로 하나님의 계시를 확장하거나 이성적 한계로 하나님의 계시를 축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신앙으로 수납함을 전제로 신학했다.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를 그토록 강조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불가해성을 동시에 강조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신학의 중심에 두었지만 하나님은 다만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 하듯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는 맞추심(accommodatio)을 말했다.보이지 않는 첫 번째 손(manus invisibilis)으로서 하나님의 오직 그리고 전적인 은혜에 따른섭리를 가르치면서 보이는 이차적 손으로서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했다.
칼빈은 어떤 교리적 논리(ratio)나 서정(ordo)보다 성경의 가르침 자체에 충실했다. 그리하여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구원계시)를 동시에 강조하고, 율법과 복음의 실체적 일치성과 경륜적 차이성을 논하고, 구원사(historia salutis)와 개인 구원서정(ordo salutis)의 역동적 관계에 부착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미래를 묵상하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인의 종 된 삶으로 묘사하고,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의 즉각적 그리고 계속적인 전가(imputatio)를 강조했다. 그리고 동시에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강조했다.


2. 교회: 말씀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체
말씀의완전 축자 영감(the verbal and plenary inspiration of the Word)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지체(membra)된 성도들의 머리(caput)이신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cum Christo)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연합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영감(inspiratio)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영의 조명(illuminatio)으로 말미암아 감화(persuasio)된 심령으로 믿음으로 온전하게 수납한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만이 말씀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말씀의 객관성은 하나님은 성경에서 인격 가운데 그의 입술로(ore)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있다.성경의 권위(auctoritas)는 그 저자(auctor)가 하나님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 사실은 성령의 은밀한 증거(arcanumtestimonium)에 의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백성들에게만 확정된다(Inst.1.7.1-5, CO2.56-61). 그리스도는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해석이나 승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을 받아서 그를 앎으로써 심령 가운데 인쳐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중보자로서 구원주이시며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 이시다(Inst.3.1.2, 4, CO2.394-395, 396-397).그리스도는 “중보자 혹은 사역자의 인격으로 (in mediatoris vel ministrypersona)”오직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신다.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그의 띠로 묶인 자들이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Inst.1.9.3, CO2.71).이 신비한 연합체가 교회이다.교회론은 이러한 sola Scriptura 원리로 개진되며 그로부터 기원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으며 구원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만 구원을 온전히 이루며(화해의 중보자: mediator reconciliationis),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중재의 중보자: mediator patrocinii),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에 이를 수 있다(가르침의 중보자: mediator doctrinae). 그리스도의 중보는 성도의 구원의 총체적 양상을 반영한다. 그것으로부터 sola Scriptura 원리의 적합성과 개인 구원 서정의 교회론적 의미가 확증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영을 받아서 그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를 아는 지식의 온전함에 이르며, 의롭게 되며, 거룩하게 되며, 영화롭게 되는 지체된 성도들의 모임이다.


2.1.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Christus caput ecclesiae)
칼빈의 교회관의 기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사도신경의 “credo sanctam ecclesiam catholicam(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선택된 자들 전체의 수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교회가 . . . 한 교회이며 공동체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전체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으시기 위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의 은혜로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심으로써(엡 1:4) 이 백성 가운데서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는 지도자며 통치자, 이른바 몸의 머리가 된다. 그런데 교회가 둘 혹은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공동체는 보편적, 즉 우주적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고 일치되어서(엡 1:22-23) 한 머리에 의지함으로써 한 몸으로 자라가고 그 몸의 지체로서 서로 연합하고 함께 지어져 간다(엡 4:16). 그들은 진실로 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하나가 되며 같은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영생의 유업을 위해서 부름 받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또한 이 공동체는 거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의 수만큼 교회의 지체들로 받아들여지며, 그들은 모두 주님에 의해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요 17:17-19; 엡 5:25-32) (1536 Inst. CO2.72-73).
1559년 기독교 강요에서는 이를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를 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며(Inst. 4.1.2. CO 2.747, cf. 3.24.6, 3.21.1), 사도 신경에서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교회는 가시적 교회 일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수도 포함하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전체 백성들을 포함한다는 사실(Inst. 4.1.2, CO 2.746)을 적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은밀한 손인 섭리의 극장(theatrum providentiae divinae)이라고 부른다(cf. Inst. 1.16.1-9).
칼빈 교회론의 두 가지 특징적인 양상은 그가 교회를 구원 받은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의 혜택을 누리는 방편이 되는 것으로 본 것과, 그가 후기의 작품으로 갈수록 가시적 교회(ecclesia visibilis)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기반한 비가시적 교회(ecclesia invisibilis)를 믿음이 뿌리 박고 자라야 할 기초로 보았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는 구원의 연속이며 혜택이고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이 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는 곳이다. 곧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이다. 칼빈은 제 1차 신앙 교육서에서도 교회의 보편성과 거룩성을 성도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으면서 특히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공동체(societas)이자 교제의 연합체(communio)로서 주님의 영으로 자라감을 강조하며 이로부터 교회의 직분론을 전개한다.
칼빈은 오시안더(Andrea Osiander)의 왜곡된 중보자 기독론을 비판하면서 그가 진실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가 교회에 은총을 주시는 신비한 연합에 대해서는(“de mystica unione qua ecclesiam dignatus est”) 무지했음을 지적한다(Inst. 2.12.7, CO2.346-347). 칼빈은 오시안더가 주장하는 “본질적 의(iustitia essentialis)”와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내주(habitatio essentialis Christi)”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가 머리로서 지체된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심이 성도와 그리스도의 신비한 연합이며 이것이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라고 말한다(Inst. 3.11.10, CO2.540).이로써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범신론적 신교(神交)나 신화(神化)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의 교제(communio)와 교통(communicatio)에 기반한 것으로서 구속사적이며 구원론적인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성도는 그 지체됨을 칼빈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으로 설명한다. 특히 결혼으로서 표현된 이 연합을 성례적 연합으로 다루며 이로써 성도에게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와 그의 의와의 교통을 설명한다.연합된 성도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자라가는 것이 교회를 세움(aedificatio)이다.


2.2.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ecclesia mater)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4권에서 시민 정부에 관한 마지막 장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을 교회론에 할애했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 강요의 삼분의 일에 거의 육박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안에서 지키시는 외부적인 방편과 도움에 관해서(De externis mediis vel adminiculis quibus Deus in Christi societatem nos invitat et in ea retinet)”라는 제 4권의 제목은 교회론이 이차적인 교리임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 3권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인 기도, 예정, 그리고 성도의 부활 교리와 제 4권의 후미에 다루어지는 성찬 교리 사이에 참교회의 표지, 직분론, 입법권, 그리고 권징을 다룸으로써 자신의 교회론이 기독론에 터 잡고 있는 구원론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와 같은 이해 가운데 칼빈은 어거스틴, 루터와 마찬가지로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라서 교회를 경건한 사람들의 오직 한 분 뿐인 어머니라고 보았다.
이미 본 바와 같이 칼빈은 credo ecclesiam에서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를 동시에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의 교회론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비한 연합체로서의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제정명령이라는 성격을 가지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의 교제(a pure communion of persons which has nothing of the character of an institution about it)”가 아니다.그것은 플라톤식 철학적 연합이 아니라 성경적인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에 기반한다.
기독교 강요의 초판 이후 칼빈의 가시적 교회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증폭되었다. 1559년 강요에서도 여전히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에 있다는 사실이강조되나(Inst. 4.1.2, 7, CO2.746-747, 752-753)’이곳에서 칼빈은가시적 교회의 표지, 권위, 사역, 구조와 교회 입법과 사법에 주된 관심을 쏟는다. 가시적 교회를 칭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머니가 된다고 말한다(“quibus ipse[Deus] est pater, ecclesia etiam mater sit”) (Inst. 4.1.1, CO2.746). 믿음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성도들은 아이들과 같아서 어머니의 돌봄이 필요하다(Inst. 4.1.1, CO2.746).어머니인 교회의 품에서 양육받지 않고 “학교(schola)”인 교회에서 배우지 않는다면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어머니의 가슴이 아니면 죄사함과 구원의 소망이 없다(Inst. 4.1.4, CO2.749).
교회의 어머니 되심은 성도들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자라감으로 설명된다. 곧 성도와 교회를 세우는 것(aedificatio)으로 특징적으로 표현된다. 칼빈은 이러한 교회의 특성을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를 통한 돌보심으로 이해한다. 이하 칼빈의 설교에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the so-called extra Calvinisticum을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을 나눠주실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흘리는 바 나의 피니라.”주님께서 이를 행하심은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그 자신의 실체로 살게 하려 하심이다. 몸의 연합이 그로부터 나오고(la liaison du corps procede de luy), 그는 우리의 양식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 은혜와 은사가 부족할 때 우리가 우물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물을 긷게 하려 하심이다. 우리가 복음이 가르쳐 준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에게 의지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점점 더 강해지고 이러한 모든 은혜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확고하게 갖게 됨을 느끼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이 다 사라져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의 영광을 즐거워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위선자들과 흠과 연약한 부분들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지라도 우리는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연합에 지고한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거역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운 사역자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자는 그의 가르침에 나타난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 버리는 것과 다름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감(in aedificationem corporis Christi)”이며 이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써 성도는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에게로 날마다 자라가야 하기(adolescamus in illum per omnia, qui est caput, nempe Christum)” 때문이다(Inst. 4.3.1, CO 2.776-778). 그러므로 교회에서 “복음의 사역보다(ministerio evangelii)”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Inst. 4.3.3., CO 2.779). “교회론을 다룸에 있어서 칼빈만큼 그리스도 아래에서의 사역을 고상하게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2.3. 참 교회(ecclesia vera)
칼빈은 동시대 카톨릭 신학자들로부터 분리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 그는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거절함으로써 분파적인 이단 교리로 빠져 들었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형식주의에 사로 잡혀 있으며(Inst. 4.2.3),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기초로 삼지 않고(Inst. 4.2.4),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유일한 교회의 감독임을(“ab unico Christi episcopate”) 주장하는 키프리안의 입장으로부터 멀어져 있다고 비난한다(Inst. 4.2.6). 칼빈은 “교회의 교제(communio ecclesiae)”는 “온전한 교리에의 일치와 형제적인 사랑(consensio sanae doctrinae et fraterna caratias)”이라는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의하여서(in Christo vel secundum Christum)”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본다(Inst. 4.2.5, CO 2.771-772).
“보편적 교회(ecclesia universalis)”는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 하나의 진리(una divinae doctrinae veritas)”를 믿고 고백하는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들려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례가 시행되는 곳에는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Inst. 4.1.10, CO 2.753-754). 교회에는 말씀이 선포될 뿐만 아니라 말씀이 들려지고 순종되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 그리고 기타 합당한 경건의 원리들”에 대한 선포와 들음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Inst. 4.1.12, CO 2.12).
그러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칼빈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교회의 권징(disciplina ecclesiae)을 다루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한 성도들이 교회를 썩게 만들 때에는 꼭 교회의 머리에 불명예를 안긴다” 라고 말함으로써(Inst. 4.12.5, CO2.907)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는 가르침이나 교리는 교회에서 배척해야 함을 간접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잃어버린 권징을 해서는 안됨을 칼빈은 말하고 있다. “권징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서 분을 내며 거슬리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유순하게 하는 굴레와 같다; 혹은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을 깨우는 박차와 같다; 또한 때때로 더욱 심각하게 타락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부드럽게 다스리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Inst. 4.12.1, CO2.905).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원 교리가교회의 영혼과 같다면 권징은 교회의 힘줄들과 같다(Inst. 4.12.1, CO2.905).이와 같이 참 교회의 표지는 머리이신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중보자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른다.교회의 참 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 가운데 하나임(unitas in unio)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3. 삼위일체와 교회
3.1.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시라는 사실은 교회의 삼위일체론적 기원을 제시한다. 삼위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을 협약(pactum salutis) 하셔서 구원자(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방식(대속)과 구원 받을 백성들(예정)을 작정하셨다: 구원자로서 작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자가 되셨다; 참되고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선택된 백성들의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함께 작정되었다.
칼빈은 교회의 하나임(unitas)과 연속성(continuitas)을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보자이심에 기초해서 다루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사실에 자주 의지한다. 칼빈은 교회의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의의를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한 중보자의 인격 가운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우리 주님의 역사적인 현재(praesentia)와 마지막 날 영원히 받으시는 영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와 같이 교회의 기원은 중보자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시는 성자의 선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 설명된다.
그리스도께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primogenitus)로서 불리는 바와 같이(골 1:15)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는 머리였다고 선지자는 말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가 되셔야 한다. 상실된 모든 것들이 그에 의해서 회복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나오심이 영원부터 라는(egressus Christi esse aeternos)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 . . .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속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말씀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모든 창조물의 첫 열매로서, 특히 교회의 머리로서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의 교회의 중보자 되심—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 되심—은 삼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냄으로써 교회의 기원과 본질과 실재를 계시한다. 교회는 함께 일하시는삼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성부는 교회의 아버지며 성자는 어머니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활동이며 능력이고 은사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동시로 발출되는 능력으로서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한다(Inst. 4.1.7, 13).
칼빈에게 있어서 내재적 삼위일체적(immanent-trinitarian) 이해는 경륜적 삼위일체적(economic-trinitarian) 이해를 지향하고 있다.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시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하셨다”는 초대 교회에 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적 교리는 다음과 같은 경륜적 삼위일체적 이해에 이른다: “아버지는 사역의 시작이고 모든 일의 기원이자 근원이며, 아들은 모든 일의 지혜와 경륜과 작정된 바대로의 뜻이며, 성령은 그 사역의 능력이자 효력이다” (Inst. 1.13.18, CO 2.105).
니케아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적 구원 사역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론을 다룬다.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손(manus)을 통하여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그 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 또한 오직 이와 같은 방식으로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cf. Inst. 3.2.1). 우리를 향하신(pro nobis)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in nobis) 역사한다.
따라서 구원에 대한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은혜는 “교회의 공동선(commune ecclesiae bonum)”을 위한 것이므로 성령의 은사들은 공히 교회의 일치를 유지하고 증진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Inst. 3.7.5, CO 2.509).교회의 사역들이 그렇듯이 성령의 은사들(dona Spiritus)은 다양하다. 그러나 마치 다양한 성부(聲部)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한 음을 만들어 내듯이 성도들은 각자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조화롭게 사용하여서 궁극적으로 다른 은사들을 세워가야 한다.다양한 은사들을 지닌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서로 도와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령의 은사들은 각각의 지체들이 교회를 위해서 합당하게 일할 수 있게끔 능력과 지혜를 준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성령의 은사들은 교회의 직분들과 연관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은사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잔에 채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고유한 기능을 감당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직분에 앞서며 성령의 은사로서 직분이 표현된다. 성령의 은사들은 직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직분을 예비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마다 사역과 관련된 은사들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도들과 목사들을 세울 때 다만 그들에게 가면만을 씌운 것이 아니라 은사들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이 은사들이 없으면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허망하고 무익한 이름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더불어서 능력을 동시에 받는다.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직분을 합당하게 감당해서 지체들을 서로 세워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영은 하나인 것과 같이, 직분들은 다양하지만 몸은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 이것이 사역의 신비이다.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짐’으로 적요될 수 있는 경륜적 삼위일체로 대변된다.


3.2. 그리스도의 영: 교회의 구원론적 기초
칼빈의 교회론의 기초는 영원하신 아들이신 로고스 하나님이 육신을 취하시고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인 중보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이제는 보좌 우편에 재위 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의 의로 그들과 교제하시고 교통하심에 있다. 아래에서 고찰하는 바와 같이 칼빈은 성자의 교회의 머리 되심을 내재적 삼위일체에 기반한 경륜적 삼위일체로서 전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수의 학자들이 교회의 하나임(unitas)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임과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해서 다루어 왔다. 그들은 이와 같은 그들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칼빈의 로마서 9-11장 주석과 신∙구약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다룬 기독교 강요 2:10-11에 주로 의존한다. 그들은 특히 참되고 영적인 이스라엘—교회(ecclesia) 가운데 교회(ecclesiola)를 그리스도의 선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 설명하고자 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주의 사자, 여호와, 엘로힘이라는 이름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그의 중보자직과 관련해서 입증하고, 선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와 같은 경륜적 삼위일체적인 이해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도자며 교회의 머리, 즉 교회의 중보자로서 다루고 있다. 스가랴 앞에 나타난 천사에 관한 칼빈의 다음 주석은 교회에 대한 그의 역동적인 입장을 잘 표현해 준다.
이 천사장은 중보자였으며 교회의 머리였다. 여호와는 항상 동일하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듯이 그리스도는 육체에 현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천사와 여호와며 교회의 중보자며 하나님이라고 차별없이 부르는 것은 전혀 의아스럽지 않다. 그는 성부와 같은 본질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며, 비록 우리의 형제가 되시기 위해서 육신의 옷을 입지는 않으셨지만 이미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고 계셨다. 왜냐하면 머리가 없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합해져서 하나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본질에 관해서(respectu aeternae suae essentiae) 하나님이라고 칭함받고, 그의 사역에 관해서(respectu officii) 주의 천사, 즉 중보자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 되심이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됨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의 작용은 곧 몸 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구원의 과정으로 여겨진다. 즉 성도의 구원과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하나가 된다. 칼빈은 칭의(iustificatio)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 iustitiae Christi)”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Inst. 3.11.2, CO 2.534). 칭의는 “그리스도와 교제(communio)하는 자리로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vestitus)” 사람의 상태를 말한다 (Inst. 3.17.8, CO 2.596). 이와 같은 이해 하에 하나님이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 받아 주신다는 이중적인 은혜(이중적인 의의 전가)가 논의된다. 이 교리는 칼빈의 첫 번째 신앙교육서(Catechismus)에서 선포되었으며, 1543년 기독교 강요에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고 재천명되었다(1543 Inst. 10.70, CO 1.787, Inst 3.17.10, CO 2.598).
칼빈의 로마서 주석은 그의 칭의론을 더욱 자세하게 보여 준다. 이곳에서 칭의는 “중생의 시작으로부터 영생의 삶에 동참하는 때까지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교제(communionis cum morte Christi)”라고 더욱 구체적으로 정의한다.칭의를 또한 “우리 자신과 구속주 사이에 서로 유사한 것을 찾고 이에 응답하는 (mutua similituderespondeat)”과정이라고 한다.칭의의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qualitatem)이 아니라,”“그저 주신 의의 전가”라고 말한다.
우리의 공로를 보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의의 전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의 교통(communicatio)이라는 개념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날마다 새로운 삶을 나누어 준다.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교통된다(communicatur)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로써 칼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서 중보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의(iustitia)는 오직 그리스도의 “특성(qualitatem)”이며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고유하게(proprium)”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면 의의 열매—성화와 영생—를 찾을 길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해에 근거해서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inserimur) 순간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혹은 가정(domesticus)을 형성하게 된다고 주장한다.할례라는 상징(symbolum)이 지시하는 진리(veritas)는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칼빈이 유대 랍비들을 반박하며 말하듯이, “교회를 중보자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마치 잘려진 머리로부터 떨어져 나간 몸을 죽은 채로 방기(放棄)하는 것과 같다.”
교회의 하나임과 연속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이 유대주의자들의 메시아론에 입각한 교회론이나 플라톤의 그림자(skia, umbra)와 실체(substantia)의 유비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칼빈의 교회론은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중보자 그리스도가 변함없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스타인메츠(David Steinmetz)가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의 “열 가지 원리” 중에 하나로 제시하는 바와 같이, 비록 텍스트의 의미는 그것의 당시적(ad hoc) 의의에 제한되고 그러므로 선 비평적(pre-critical) 주해는 그 자체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 대한 구약의 중요성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의 연속, 이스라엘과 교회의 불연속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연속과 관련해서 예견된다.”이러한 관점은 내재적이며 경륜적인 삼위일체론에 근거한 중보자 그리스도의 하나임과 그 사역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가운데서만 수용되는 것이다.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영원하신 독생자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 영으로 성도와의 교제와 교통을 통하여서 그의 의를 전가한다는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칼빈의 성경적 교회, 즉 참 교회 이해의 기초가 된다. 영원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영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이 교회의하나임과 연속성을 계시하며 개인 구원의 구속사적-구원론적 이해를 통해서 교회론의 역동성을 찾는 핵심적 locus이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부터 중보자의 인격을 박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여기고 지체로서 그와 연합하도록 하자. 이 연합이 가장 아름답게 보존되어야 함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임이 무익하거나 무용하지 않듯이 그 [연합의] 능력이 성도들의 몸 전체로 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또한 우리가 믿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본질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의 생명과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으로 우리와 교통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라는 것이다.


4. 결론: 칼빈의 기독론적·삼위일체론적 교회 이해
1559년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편별(ordo docendi)은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음에 대해서 학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일치한다. 초판으로부터 칼빈은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세 부분이 아니라 네 부분으로 다루어서 교회에 대한 고백을 별도로 다룸으로써 교회론을 강조했다(1536 Inst. 2.20 ff.). 이는 칼빈이 교회론을 성령론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지 아니하고 전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다루었음을 간접적으로 예증한다.
칼빈의 만년에 있었던 폴란드 신학자들과의 삼위일체 논쟁은 주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칼빈은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강조하며 마지막 때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위격적 연합이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중보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을 통한 사역에 다름 아니다. 영적으로 감화된 구원 지식으로 알게 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친히 이루심으로 다스림이 교회이다.
칼빈은 종교개혁 시대의 키프리안이라고 칭해질 정도로 가시적 현재적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의 선택을 기초로 하는 비가시적 교회의 교리의 근거해서 그러했다. 교회론은 은혜의 방편으로서 구속론과 연결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기독론적으로 이해된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의 교리에 구축되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구속 사역이 veritas로서 선포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한 장이며 그 지식이 또한 자라가는 곳이다. 교회는 아이에게는 유모와 같고 좀 더 자란 사람들에게는 학교와 같다. 그러므로 교회를 떠나서는 마치 하나님을 떠난 것과 같이 생명을 유지 할 수 없다. 교회의 머리가 생명의 근원되시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영이라면 그 가르침을 좇아서 다스리는 교회의 권징은 마치 힘줄과 같다. 칼빈의 교회 이해는 그의 말씀과 성령을 강조하는 성례관과 조화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보좌 우편에 재위하시나 떡과 잔에 전인격적으로 임재하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 성도는 그의 지체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써 교회는 비로소 역사에 현재(praesentia)한다. 그리스도가 중보하심으로써 교회는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자라간다. 칼빈이 세례와 성찬의 의의를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이웃 사랑에서 찾았듯이, 교회를 통한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를 향한(erga eum) 것이며 우리를 향한 것(erga nos)이다.
칼빈의 신학은 완전 축자 영감설에 따른 sola Scriptura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서론적으로 언급했다.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로 보고 그 머리를 그리스도로 봄으로써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장을 교회로 파악한 것이 칼빈 교회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기독론적 교회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칼빈의 교회론은 참으로 정통 기독론적(Christological)이지 편향된 기독론 중심적(Christocentric)이지 않다. 이는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기독론적 교회 이해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기원한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론적·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칼빈은 교회를 가족이나 가정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는 순간 우리는 그의 지체가 되며 하나님의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교회의 하나임과 연속성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심과 성도들의 영원한 중보자 되심에 기초한다. 즉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이 내재적·경륜적 삼위일체론적 구원 사역의 핵심이 된다. 다음 주석을 주목하자.


우리의 사색으로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그리고 나아가서 그와 아버지와의 거룩하고 신비한 연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 . . 그것을 아는 유일한 길은 그가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실 때이다. 이것이 우리가 체험한 바 믿음이다. . . .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한 축복을 아들에게 두셨듯이 아들은 자신 전체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음은 우리가 그의 몸에 접붙임 되어서 오든 그의 의와 축복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심은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그가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이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어머니로서의 가시적 교회는 선택 받은 백성 전체로 이루어지는 비가시적 교회에 기초하는데, 비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백성들이 한 성령의 역사로 모여서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로 정의된다(Inst. 4.1.3). 교회는 아래로는(downward) 아버지의 뜻을 말씀이신 아들을 통하여서 성령으로 조명된 감화 받은 성도들이 계시로서 받으며, 위로는(upward) 아들의 중보로 그의 영을 받은 백성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