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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칼빈의 경제관/안명준

by 【고동엽】 2021. 10. 12.

패널토의 - 발제1 사회 : 최태수 목사

(신학교육부 실행위원)

 

"요한칼빈의 경제관"

 

송 재 식 목사

( 서 림 교 회 )

깔뱅의 경제와 사회사상

(앙드레 비엘레의 깔뱅의 경제 사회적 사상(La Pensee Economique et Sociale de Calvin)을 중심으로)

 

1. 깔뱅시대의 경제와 사회생활

16세기의 사회는 매우 소란한 사회였다. 사회는 수많은 힘 때문에 폭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이권획득에 혈안이 된 많은 군주들의 군사적 유혈 투쟁이 사회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백년전쟁, 부르군디 전투, 이태리 전투 등으로 유럽은 끊임없이 황폐화되어 갔다. 뿐만 아니라 사회는 경제질서의 급변에 뒤따른 사회적 혁명운동으로 완전한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경제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이 있던 16세기의 유럽은 하나의 전환의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물물교환 형태가 지배적 상거래 방식이었으나 새로운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은 결과적으로 유럽에 엄청난 양의 금을 제공해 주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산업이 일어나고 교역이 활발해졌다. 그때까지의 상업방식으로는 이처럼 엄청나게 증가된 활동을 수용하거나, 주도해 나갈 수도 없었다. 통제불능의 자본주의가 고대도시의 상업중심지 밖에서 잉태되어 급속도로 팽창되어 갔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말미암아 생계비는 치솟은 반면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하였다. 도시와 시골에서는 가난한 임금노동자들이 생겨났다.

인쇄기가 발명되고 곧이어 종교개혁 전야가 조성되고 또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복음의 누룩이 평민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제는 이 누룩이 고통받는 대중들에게 강자의 부정을 정당화하고 강자의 억압을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에게 진리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자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현상들은 결국 교회와 사회 안으로 역류해 들어가 교회 및 사회내면의 뿌리깊은 불만의 물고를 터뜨려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를 야기 시켰다.

외면적으로 중세사회의 체제가 전복되어 가고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내면적인 신앙의 각성은 복음의 재발견과 관계가 있었는데 교회전체가 사회 문제들에 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

1533년까지만 해도 깔뱅은 카톨릭 중산계급의 인습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깔뱅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신앙과 사회는 분리된 영역으로, 개인윤리의 차원을 떠나서는 아무런 상호의존이나 상호관련도 맺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깔뱅은 일단 개종한 뒤에는 갑자기 그리고 아주 자유롭게 왕과 지배계층이 위험한 혁명분자요 또는 폭도들이라고 간주했던 자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강요 초판 서문에서 발견되는 1535년 봄에 프랑소와즈 1세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은 깔뱅의 공적 활동의 첫 신호였다. 깔뱅은 이 서신에서 복음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정치 및 제반사에 있어서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부한 자들을 격렬하게 공격한다. 깔뱅은 세상을 두개의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깔뱅에게 있어 서는 세속도시에 대한 관심이 그의 기독교신앙의 직접적인 표현이었다. 돈, 부, 재산에 대한 깔뱅

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본다면 이 점이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깔뱅이 주로 활동한 스위스 제네바시는 14세기 이후 재화와 물자의 교류가 빈번히 이루어지는 상업과 교통의 요충지로서 활발히 발전해 갔다. 그러나 15세기에 이르러 프랑스 왕의 경제정책과 유럽인들의 바다로의 항로개척으로 전 유럽의 교역조건이 바뀌게 되면서 제네바의 발전도 점차 멈추게 되었다. 이처럼 경제적 침체기에 있던 도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 파렐(G. Farel)과 깔뱅은 이 어려운 경제상황과 씨름하게 되었다. 새로운 경제정책과 아울러서 도시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이들이 우선적으로 고민했던 일이었다.

성경에 투철한 깔뱅은 정신이냐 물질이냐 하는 따위의 형이상학적인 추상성이 노출한 관념적 도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성경에만 입각하여 물질적 재화가 신의 도구로서 만인의 공동 부를 위해 사용될 것을 희구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를 주신 것은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 생활뿐만 아니라 연대적 책임사회를 위해 사용함에 있었다. 그래서 화폐는 단순히 실리적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정신적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갈파하였다.

이런 점에서 깔뱅은 자유자본주의자일 수 없으며, 또 전체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자 일 수 도 없다. 그의 경제관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사회적 인격주의자 또는 휴머니스틱한 사회주의자라고 함이 타당할 것이다.

 

(1) 부의 개념

재산에 관한 기독교적 개념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위하여 초대 교회시대로부터 20세 기초에 이르기까지의 재산의 소유개념을 고찰하여 봄으로써, 부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할 것이다.

 

1) 초대교회

비록, 당시의 예루살렘교회가 소유를 자발적으로 분배하고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하여 모금을 하였을 지라도, 재산의 권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4세기의 교부들에 의하면 재산은 원래 공유하는 것으로 주장되었으며, 사유재산은 인간의 타락 후에 생겨난 것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비록 합법적일지라도 사유재산의 권리는 자연법에 의하여 인간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2) 중세 시대

아퀴나스(Thomas d'Aquin)는 사유재산을 자연법에 의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의 견해는 초대 교부들과 매우 달랐다. 그의 이론에 다르면 재산과 취득의 사이에 도덕적인 차이가 있었다. 만약 어떤 굶주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취하여도 도둑으로 지목되지 아니하고 개인이 정당화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재산에 대한 이론이 20세기 초 교황들의 회칙들 안에서 요즈음까지 이어져 내려 왔음을 볼 수 있다. 그 회칙들은 물질은 사적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확증으로부터 유래된다.

이로부터 초대교회와 중세기의 크리스천들은 사유재산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가 있다.

 

3) 종교개혁 후

종교개혁의 결과로 재산에 대한 크리스천의 사상은 심오해졌다. 비록 루터가 맹렬히 자본주의를 비난하였을 지라도 깔뱅은 중류층의 경제활동을 정당한 것으로서 받아들었다. 또한 그는 크리스천의 생활이 세상과 분리된 은둔생활이 아니라 평상생활의 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7세기말에 죤 록(J. Locke)의 이론은 크리스천의 재산에 관한 사상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록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노동을 투자한 것에 대해 당연한 권리를 가지며, 사유재산의 권리는 시민정부가 설립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으며,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땅을 이용할 수 있고 개인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재산의 권리는 다른 사람들 해치는 것으로서 주장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들은 교회가 평상시 재산의 권리를 정당하게 인식하여 왔으며, 또한 재산의 도덕적, 사회적 위험들을 날카롭게 인식하여 왔고 복리를 보호하여 왔음을 명백하게 하여 주고 있다.

록과 같은 후기 청교도들이 준비하였던 재산의 권리가 절대적이요 무한하다는 현대의 신조는 19세기의 극에 달한 경제적 개인주의의 산물이었다. George. F. Thomas는 지난 세기 동안 많은 크리스천들에 의하여 재산의 권리가 주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신약성서의 정신과 대조적이며 교회의 경제사상의 주된 전통과 모순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크리스천의 재산에 대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기독교 사상의 지배적인 전통은 늘 사유재산의 필연성을 인정하였다.

둘째, 그렇지만 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무조건적인 권리의 주장을 시인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재산권에 대한 절대적이 주장은 경제적 개인주의를 산출하게 되었 다.

셋째, 사유재산의 자신의 실현(realization)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재산의 권리는 절대적인 권리가 아니다. 에밀 부르너(E. Brunner)는 그의 저서 ' 정의. 사회질서'(Justice and the social order)에서 "재산 없이는 자유가 없 다. 그러므로 사유재산의 창조로 인해 세워진 권리이다" 때문에 "이 재산은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고 보며 인격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타 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기 물건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과 의 관계에 있어서는 청지기라는 것이다. 데비드 맥코나기(D. Mcconaghy)는 모든 가치와 물건은 돈으로 계량하는 데 그것 은 사물의 가치 표준이 되는 것이며, 그것은 인격을 헤아리고 작정하며, 사람을 헤아리게 하는 물건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라는 것이며, 사람이 금전을 장만하는 사이에 금전은 사람을 지어낸다고 하면서 결론 짓ᄀ를 재물 은 인격을 시험하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헤버트 와담스(H. Waddams)는 창세 기에 있는 타락 이전의 인간상태는 아담과 하와가 사유재산으로서 에덴의 낙 원을 즐기는 아니었고, 단지 그들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 때,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재산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여 주셨다는 것이며, 성서 안에서는 어떠한 사유재산의 설립도 추적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사유재 산이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사악한 특성 때문"이며, 사유재산을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부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중립적이다. 또한 사유재산은 경제적 견지에서 볼 때 사회의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선 하고 악한 것은 전적으로 사용의 방법에 달려있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재산 의 절대적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국가가 절대적 소유권을 갖는다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재산권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는 재산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도록 주 어졌으며 그의 사랑을 사람들 사이에 중진 시키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 그 래서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다"는 것이다.

 

4) 부의 위험성

부에 대한 욕구에는 그릇된 동기가 있을 수 있다. 즉 사람은 타인에 대한 지배의 수단으로서 또는 자기의 성공의 표식으로 부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사치스러운 풍조를 조장하는 것이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재물의 위험성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에 대해 말해준다.

첫째, 기독교인은 소유물을 소유하되 소유물에 소유되어선 안되며,

둘째, 재물을 소유함으로서 오게 되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여야 한다.

셋째, 재물은 소유로 말미암아, 잘못된 독립심을 조장시켜 줄 수 있다.

넷째, 돈을 벌기 위해 불명예스런 행동을 하므로 너무 많은 댓가를 지불하는 수가 있 는데 그것은 항복보다는 두려움을 가져올 뿐이다.

다섯째, 많은 소유는 인간의 마음을 영원이란 빛에서 멀리 이 세상의 사물에 고착시켜 준다.

여섯째, 재물은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은 빈곤을 추구해서는 안되지만 부를 지나치게 갈망해서도 안 된다" 재산의 소유는 일에 있어서, 주 주제가 되며, 대부분의 인간의 경우 물질적 소유에 대한 약속이 일에 대한 열 의를 더하게 하는 것이며, 이런 점은 자본주의의 장점이 될 수 있겠다.

 

(2) 빈곤의 개념

"빈곤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가를 알려면 빈곤의 개념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빈곤의 전통적인 개념은 개인 및 가족의 일차적인 욕구인 의. 식. 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상태를 말하였다. 오늘날 빈곤의 개념은 대개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으로 구분하고 종래에는 최저 생계비를 말하였지만 현대적 개념은 그러한 경제적 개념에서 벗어나서 교육, 건강, 비행, 불평등, 기회 등의 사회적 조건 또는 자원의 결핍상태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빈곤의 정의는 상대적일 수 밖 에 없다. 부유한 사람이 필요로 생각하는 물질적 요구는 일반 하류층의 사람들이 생각 할 때는 너무 지나치거나 분수에 맞지 아니하는 요구라고 해석될 수 있기 마련이다.

스텐리 무니함 (W. S. Mooneyham)은 빈곤을 굶주림이요, 굶주림은 힘을 얻는 데에 대한 결핍의 징조라는 것이며, 굶주림은 생명과 관계가 된다는 것이며, 또한 굶주림은 인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수세기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쳐왔고, 음식의 결핍-기근조차도-에 대한 내용들은 성경에도 언급하여 준다.

왈터 하렐슨(W. Harrelson)에 의하면 "기근은 인류가 싸워온 자연적 사건으로서 그리고 죄의 흔적과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인류의 불행으로서 성경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무니함은 빈곤과 굶주림의 두 상태는 함께 결합되어 있으며 가난은 굶주리는 것이요, 굶주리는 것은 가난이라고 함으로서 굶주림과 빈곤, 그리고 가난을 다 함께 보고 있다.

한편 빈곤에 대한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빈곤의 사회에 생산적 기여를 하려는 사람이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될 때 사회문제가 된다. 이러한 관심에서 보면 빈곤은 빈곤자가 곤경한 상태에 적응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사회적 기능에 위협을 줄 때 사회문제가 된다.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하층민이다. 옛날에는 농민들이 그 핵심을 이루었지만 근대 시민사회에 와서는 노동자와 빈농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서적으로 보면 가난한자의 현실은 언제나 있었고 이것을 극복하는 사랑의 실현은 하나의 자연스런 사회성이라고 볼 수 있다.

 

2. 깔뱅의 경제윤리 원칙

고대 중세사회의 체제가 해체되면서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해야만 하였다.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강조하던 중세기적 개인화된 종교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종교개혁은 세상에로의 적극적 참여를 강조하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사회적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보존하려는 자연적인 소질을 지닌다.

특히 깔뱅은 루터와는 달리 신앙과 세상을 분리된 두 영역으로 보지 않았다. 또한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보다는 둘 사이의 조화를 추구했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는 심지어 물질적 재산까지도 하나님이 그 섭리를 완성하는 도구로써 파악한다. 그 물질적 재산의 대표적인 돈은 실용적 성격 뿐 아니라, 영적인 사명도 갖고 있는 것이다. 돈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 수단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모든 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의 상징이 되며, 동시에 이를 모르고 하나님의 선물임을 분별치 않고 마구 사용하는 자에게는 저주의 표시가 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인간을 시험에 빠뜨리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돈의 소유라는 것에는 항상 책임성이 뒤따르는 것인데, 이를 망각할 때 인간은 시험에 빠지게 된다. 부유한 자는 그 부를 가난한 사람과 나눌 책임이 있으며 가난한 사람은 그러한 혜택으로 가난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또한 부유한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그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 바로 깔뱅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에서 물질의 상호교환을 강조하는데, 그 예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만나의 분배를 들고 있다. 이러한 상호교환이 경제적 불평등을 아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격차를 줄여 나갈 수 있고 고루 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해 갈 수 있게 한다. 깔뱅은 실제로 거의 궁핍에 가까울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설교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부유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부를 낭비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 깔뱅의 빈부관

거의 모든 기독교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깔뱅 역시 물질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보았다. 깔뱅은 주기도문의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깔뱅은 하나님 앞에서 식물과 같은 일상적인 것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사상을 공격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는 아주 사소한 일에까지 미치므로 우리의 육신을 돌보는 일을 멸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깔뱅은 빈곤이나 불행을 그 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냉대의 증거로 보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번영을 어떤 개인의 공로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보고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위한 선택의 증거로도 역시 보지도 않았다. 사실상 깔뱅은 부의 평등한 분배를 선행으로 보지 않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강조하였다.

'억압의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저주받았거나 버림받은 자들로 생각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대로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확실하고 일시적인 부의 상태를 하나님의 은혜로 판단하고 부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행운이 그들에게 미소 짓는다고 말한다. 한편 그들은 불행하거나 비참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어리석게도 하나님은 저들을 미워하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과오는 이세상 어느 시대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과오이다.

깔뱅주의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를 개인적인 번영에서 찾았다고 주장한 막스 베버의 견해는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진화론(Social Darvinism),즉 적자생존의 생물학적 원리가 경제 발전에 적용된 것이 비기독교적 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류 사회의 많은 신교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칼빈은 그러한 잘못된 영향이 전능자의 은밀한 섭리에 전적으로 끼어 들지 않기를 원하였다.

깔뱅에게 있어서 부와 빈곤은 신성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부와 빈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통로이며, 인간의 편에서는 믿음을 증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축복을 악용하는데 대한 깔뱅의 신랄한 비판은 단순히 종교개혁의 금욕주의는 아니었다. 깔뱅이 제네바의 부자들을 각성시킨 것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사랑의 법이었다. 참으로 깔뱅의 사회 경제 사상에서 어떤 중심 주제가 있다면 부자가 형제를 돕는데 사용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 사회의 연대책임은, 어떤 사람은 많이 가지고 어떤 사람은 가난하다는데 대하여 변명할 수 없다는데 있다. 깔뱅은 가난한 형제를 위한 참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설명하기 위해 광야의 만난 이야기를 인용한 바울의 말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부자들이 유산으로 그 부를 소유하였던지 근면과 노력으로 부유하게 되었던지 하여간 그들의 부유함이 무절제와 방종에 사용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 분배의 당위성

깔뱅은 부에 대하여 계속 말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부자가 아니었던 깔뱅은 가난한 사람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리인(Procureurs) 혹은 수취인(Receveurs)이며, 이웃의 믿음과 사랑을 점검하는 사자들이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신다. 그리고 구호금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졌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시고 인정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준 것을 마치 하나님 자신에게 드린 것처럼 여기시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법적인 형태로 이행할 수 있는 의무는 아니다. 가난한 자들은 형제들이며 또 형제로서 대해야 한다. 깔뱅주의자들에게는 무정한 도움이란 있을 수 없다. 도움은 사랑으로 베풀어져야 한다.

"사랑이 결여된 친절한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고 말하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 중에는 분명히 형제들의 불행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깔뱅의 말에 별다른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마 학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깔뱅은 그런 재물의 분배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나누어주는 참으로 어려운 일 일지라도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태복음6장19-20절의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말씀으로 주석하면서 깔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산을 팔라는 명령은 마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보존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쉽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의 수입이 그들의 부족을 공급하지 못할 때, 우리의 재산을 그들에게 분배하는 일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하겠다."너의 관대함이 너의 기본 재산을 줄이는 데까지 하고, 너의 땅을 처분하는 데까지 하라"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풍부히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관대함은 조금도 가난한 사람들의 감사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몇 세대 전에 부유층의 사람들이 예의를 갖고 아낌없이 도와준 자선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감사의 표시를 소홀하게 하므로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물질적 원조와 기술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후진국에 대하여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입장을 나타낸다.

그러나 깔뱅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격적인 특징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께 갚아야 할 것을 받는 하나님의 대사로서의 위치를 행사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반응을 알지 못했다. 깔뱅은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잘못 이행하거나, 도움을 받고도 감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중단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아무런 감사의 표시가 없을 때, 우리가 베푼 자선이 오히려 우리에게 충분한 축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경제분야에 있어서 깔뱅의 가장 새로운 지시는 아마 재물의 공정한 분배를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강단에서 그는 제네바의 충실한 시민들과 가난한 피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몸의 지체들로 만들기 원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각각 서로를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각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만일 내가 그러한 극한 상황에 처했더라면, 나도 도움을 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이웃을 돕는 일을 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연합하시고, 우리를 한 몸으로 결합시킨 데 대한 관심에서 나온 형제애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몰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모두가 서로 봉사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3) 돈의 영적 사명

마틴루터는 다음과 같이 명민하게 피력하였다. "세 가지의 회심이 필요하다.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돈지갑의 회심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우리 현대인들로서는 돈지갑의 회심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돈 문제가 사회생활 속에서 거론될 때는 경제적인 측면을 생각하게 되고, 개인 생활 속에서 거론될 때는 도덕적인 측면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돈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서 중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성경이 돈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예수께서 돈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실로 복음설화에 있어 놀라운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의 경고와 권고들은 반복적이며 단조롭기까지 하다. "화 일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눅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6:19)."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눅12:15).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눅12:33)." 문제는 예수님의 돈에 관한 가르침이 매우 명백하면서도 엄격하다는데 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돈의 소유 문제만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돈을 맘몬이라고 부른 점에서 잘 나타나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돈이나 부를 나타내는 아랍어 낱말을 쓸 수도 있었는데 맘몬이라는 낱말을 씀으로서 돈을 의인화하고 그것을 일종의 신격으로 다루었다. 쟈크엘룰(J.Ellul)은 그의 저서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수가 우리에게 계시해 보여주는 것은 첫째, 돈은 하나님의 권세(Puissance)라는 점이다. ...둘째, 그 권세는 영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세는 영적인 의미와 방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길, 권세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어느 곳을 지향하고 있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를 향하게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 설정한 병립관계를 과소평가 해서는 안되며, 어느 것이든 둘 중의 하나와 인간과의 관계는 중종의 관계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돈을 필요로 한다 기 보다, 돈이 사람을 필요로 하며, 돈이 사람을 얽매어 돈의 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되도록 사람을 예속시킨다는 것이다.

깔뱅은 성경의 근거를 제시해 가면서 물질적인 재산이 하나님이 자신의 섭리를 완성시키는데 사용하는 도구들이라고 가르친다. 또한 돈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생존케 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이다. 이것이 돈의 영적 사명이다.

 

(4) 노동에 대한 견해

중세시대의 지배적 사상인 스콜라주의는 노동을 신앙생활과는 별도의 세속적 의무로 간주하였다. 스콜라주의는 무엇보다도 사색과 명상의 삶(Vita contemplativa)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노동과 직업적 행위의 삶(Vita activa)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약화되는 것이었다. 깔뱅은 이러한 중세기의 사고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이분법적으로 노동을 신앙에서 분리시키는 중세기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복음이 노동을 통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처럼 깔뱅은 인간의 직업적 활동과 노동에 대해 신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그 노동은 일에 의해 노예와 같이 소외되는 상태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래서 깔뱅은 이 세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무대"로 보았다.

노동은 인간을 억압하는 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의 기능을 지니므로,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아를 실현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노동뿐 아니라 휴식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안식일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안식일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것을 의미한다.

 

(5) 이자문제

1566년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Confessio Helvetica posterior)를 작성한 불링거(H. Bullinger)는 1531년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경제 사회적인 대전환을 가져 왔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세기까지 지배하였던 돈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 놓게 하는 획기적인 변혁이었다. 그때까지는 고대 희랍 사상가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즉, 돈이 돈을 낳을 수 없다는, 즉 돈에는 증식성이 없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고대와 중세교회는 이러한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였고 이자를 금하는 성서적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것을 불링거가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유용한 이자와 해로운 이자"를 구분하였다. 그렇게 하므로써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생산을 위한 가치있는 자본에 한하여 이자를 허용하였고 이자문제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자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유용하게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바로 이점을 깔뱅은 받아들 이고 이보다 더 한 차원 높여서 자연법적으로 파악된 돈에 증식성이 없다는 명제를 전적으로 새롭게 하였다.

계속되는 종교적 분쟁으로 제네바의 상인들과 은행가를 포함한 재력가들이 도시를 떠나자 제네바의 경제는 침체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이유로 이주한 새로운 정착민의 이전으로 제네바의 경제는 회복기에 들어섰는데, 이때 이자율에 대한 국가의 엄격한 통제는 경제와 산업을 부흥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억압의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깔뱅은 교회 전승의 계승 보다는 성경에 대한 상황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자에 대한 긍정적 가치를 강조한다. 이윤추구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임을 파악한 깔뱅은 유통자본으로써의 돈에 적정한 이자를 부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난한 자와 약자를 착취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깔뱅은 근본적으로 이자 사업을 지지했으나 합당한 수준에서의 이자를 통한 자본의 대출과 고리대금업적 이자놀이는 처음부터 철저히 구분되었다. 깔뱅은 돈에 쪼들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가난한 자가 사회에서 받게 될 불이익을 항상 염려했던 깔뱅은 구약의 희년사상을 수용하여 일정 연한이 되어 땅을 재분배하고 빚을 탕감하게 해 줌으로 재산과 부가 사람을 사회적으로 억압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개인의 책임과 국가의 적절한 통제를 균형있게 강조하였다.

 

깔뱅의 경제윤리 사상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깔뱅은 이 세상의 재물을 추구하되 탐심을 갖고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우리는 정직하게 일해서 그 소득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적게 가진 자도 하나님께 감사한 생활을 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어야 한다. 많이 가진 자는 탐심과 무절제, 낭비와 불필요한 소비, 그리고 교만이나 허영으로 재산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

 

* * * 맺 는 말 * * *

이제 우리가 다루어 온 결론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어떻게 하면 3장에서 상술한 깔뱅의 사회적 휴머니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깔뱅의 사상과 소망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갈 것인가? 깔뱅주의는 낡은 사상인가? 깔뱅주의가 시대에 뒤떨어진 낙후된 사상이라는 말은 극히 건방진 생각이다. 깔뱅주의의 윤리는 근대 산업주의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깔뱅주의의 윤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행동이다.

이 근린애의 윤리적 실천은 추상적 이론이나 굳어버린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곧 각자가 삶을 영위하는 역사의 현실에서 몸으로 부딪기는 산 행위이다. 반봉건적 절대주의 체제 밑에 살았던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근린애의 실천은 곧 태만과 낭비와 향락을 조장하는 낡은 상업자본주의 경제구조를 무너뜨리고 근면하고 검소하고 금욕적인 생산계층의 이익과 가치관에 적합한 새 질서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 새 자유는 "에고"를 위한 제멋대로의 자유가 아니다. 남을 위한 자유, 국가와 사회를 위한 근린애적 자유이었다. 이런 자유를 르네상스적 자유에 대하여 "청교도적 자유"라고 부를 수 있다면, 청교도적 자유는 동포와 국가는 어떻게 되건 저 혼자만의 이익과 권력과 명예와 향락을 얻으려는 자유가 아니라, 그러한 이기적 자유를 분쇄하기 위하여 결연히 일어서서 제 힘과 재능과 목숨을 바치는 용기와 실천이다. 이 자유가 진정한 근대적 자유이다. 잎서 언급한 바 깔뱅주의의 엄격한 윤리적 생활의 정신이 곧 근대적 자유의 본질이다.

청교도적 자유는 물질적 세속적 자유로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양심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상과 언론 출판 등의 지적 자유와 함께 정치적 자유의 필요를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시민적 제 자유는 시민사회의 역사적 산물로서 역사적 제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형태도 변화하게 마련이었지만 그 근린애적 윤리성의 본질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었다. 오늘날 시민사회의 제조건의 변화에 따라 시민적 제자유,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적 자유에 근본적 제한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세계사의 추세이다.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제한은 근린애적 윤리성의 축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 확대이다.

부르조아 시대가 끝나고 대중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도 청교도적 자유의 역사적 요청은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커가고 있다.

이상으로 제2장을 통해 깔뱅의 생애와 윤리사상에 대하여 논하였고 제3장에서는 깔뱅의 인간상과 소명을 다루었으며 아울러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청교도 정신의 붕괴의 과정을 고찰하므로써 순수한 깔뱅정신이 대중향락주의로 전락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제4장에 와서는 깔뱅의 경제관을 시작으로 빈부에 관한 일반적 견해와 깔뱅의 빈부론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알지 못한 단호하면서도 엄격한 빈부에 대한 깔뱅의 견해를 상고하였다. 또한 제5장에서는 부의 불균형으로 보조화를 이루고 있는 빈부에 대한 현실적 과제에 대하여 분배정의의 차원에서 성격적 대안을 제안하였다.

이제 끝으로 이 글의 앞에서 고찰했던 모든 것들을 근거로 청지기의 개념과 기독교인의 책임과 임무 그리고 경제생활의 바람직한 태도를 위하여 개인과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간단히 제시하여 보도록 할 것이다.

가. 청지기 직분

경제적 질문들을 위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를 둔 하나님 중 심주의적 세계관에 있다. 하크니스는 물질의 소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청지기직(Stewardship),즉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것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온다고 하며 이용어는 좁은 의미로서 특히 십일조를 강조하는 경우에 사용되었으나 그 본래의 뜻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물건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위탁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수십 억의 굶주리는 이웃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동안에 우리가 더욱 높은 생활수준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욕심의 죄가 아닐까? 윌리암 로(William Low)는 그의 저서 "헌신과 거룩한 생활에로의 진지한 부름(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에서 만약 우리가 재물을 사소하게 소비하지 않고 눈먼 자의 눈으로 과부에 대해 한 남편으로서, 고아에 대한 한 아버지로서 사용한다면, 황폐한 자들에게 편리함을 조도록 하는 폭넓은 사역이 됨은 물론 우리들 자신이 하늘에 있는 영원한 보화를 획득하는 것이다 고 함으로 재물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언급을 하여 준다.

요한 웨슬러(J. Wesley)는 '금전의 사용'이라는 설교에서 재물에 관한 세 원칙을 설교했는데

첫째, 벌 수 있는 대로 벌어라(Gain all you can),

둘째, 할 수 있는 대로 아껴라(Save all you can),

셋째, 할 수 있는 대로 나누어 주라(Give all you can)는 삼 대지의 설교를 하면서 재산은 최선의 노력으로 벌어옴으로 그의 사용은 낭비 없이 가장 검소한 수 준에서 자신의 필요와 가족의 부양과 믿음의 가족을 돕는 일에 성실히 사용 되어야 하며, 육신의 정육과 이 세상의 저장을 위한 허영과 사치의 생활을 금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선을 행하라고 권고하였다. 종교개혁자 특히 깔뱅의 윤리는 또한 청지기의 윤리였고 이것은 오늘에도 우리의 재산, 소유와 소비 생활의 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 책임과 임무

굶주리는 세계의 도전에 적절하고 유용한 응답을 하고 져 하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책임이 요청된다. 개인적으로나 연합하여 해야할 일들이 많이 있다. 또한 동시에 거기에는 개인적인 책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식량생산을 위해서는 땅의 면적을 넓힐수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계를 벗어나서 책임을 피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난한 자의 외침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임은 한계 안에서 개인적으로 응답을 하도록 한다. 책임은 심지어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응답하도록 하여 준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가 있다. 그것은 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독교 윤리의 원칙들을 명확히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 교회가 경제체제와 동일시되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적인 지식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일어난 경제적 문제의 해결로부터 개인이나 그룹들을 방치해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는 개인주의나 자기 기만에 의해서 나열된 인생들 틈에서 사회의 새로운 사상을 창조해야할 큰 교육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더욱 좋은 기독인의 경제질서는 정의로서 나타내는 사랑의 개념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업은 쉽지 않을 것이다.

19세기의 개인주의 영향 아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의 주장을 소홀히 하였다. 그 결과 수십만이 가난한 생활로 고통을 겪어야 했었다. 비록 우리 사회 안에서의 경제적 개혁이 경제의 활동과 정치적 힘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면 비효과적이 될 것이다. 교회에 현대적 물질주의나 개인주의와의 타협이 있을 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결코 잊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는 개인과 국가로서의 기독교인이 빈곤한 자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

기독교인들 중에서 교사, 변호사, 목사, 주부기타 기능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빈곤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름대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은 하루에 한시간 정도는 빈곤한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다. 무지가 빈곤의 원인이고 빈곤하기 때문에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면 우리는 무지에서 그들을 해방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의사들은 빈곤한 곳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무료 진료를 해 주눈 일이 가능할 것이다. 변호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로 변호하여 그들의 인권을 찾아주고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리학자는 빈곤한 지역의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심리 상태를 감정해주고 옳은 방향으로 카운셀링 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교회의 지도자들은 될 수 있는 데로 빈곤한 지역으로 가서 그들을 위해 예배드리고 기도해 주어야 하겠다.

 

(2) 교회적으로 할 수 있는 일

첫째로 전도의 구역이 일차적으로 빈곤한 지역이 되어야 하며, 그들과의 간격이 좁혀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의 시설이 부유한 자들을 위해서 보다는 빈곤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겠다. 특히 유치원이나 경로당을 설립하여 빈곤한 가정의 자녀들이나 노인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이며,

셋째로 구제사업이 일시적인 효과를 위한 것보다는 계속적인 사업이 되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빈곤지역을 위한 아파트를 지어서 그들이 영육 간에 평안한 쉼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는 일도 바람직스럽다 하겠다.

이외에도 교회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이 있다. 특히 교회는 이 시대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지닌 공동체이기에 개혁자 깔뱅의 올바른 경제윤리 사상을 정립하여, 점점 대중 향락주의로 병들어가는 사람들과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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