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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학자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 조명

by 【고동엽】 2014. 10. 3.

세계적인 학자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 조명



메이천 박사(1881-1937)의 전기가 총신대학교 명예교수인 홍치모 교수에 의해 「메이천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으로 번역, 출간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신학대학원과 일반대학원에서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강의해 오면서 우리말로 된 책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에 금번에 출판된「메이천의 생애와 사상」은 한국에서 메이천 연구에 크게 공헌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본서는 "역자서문"에서 밝힌 대로 한국교회가 메이천을 근본주의자로 매도하는 풍조에 대하여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재조명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자인 홍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메이첸 교수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상은 일반적으로 나쁜 편이다. 한국교회는 그를 가리켜 분열, 혹은 분리주의자, 독선주의자, 근본주의자로 취급하면서 매도해 왔다. 너무나 피상적이고 몰상식한 언동이 지난 60년 가까이 한국교회 안에 난무하였다. 지금도 메이첸 교수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이 없다, 그는 여전히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 자신이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칼빈주의자였다." "
이 책의 원 이름은「잔 그레섬 메이천: 전기적 비망록」으로, 저자는 메이천의 뒤를 이어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약신학자였던 스톤하우스 교수이며, 영국의 에프. 에프. 브루스 교수와 쌍벽을 이루며, 한 시대의 신약학계를 선도한 인물이다.
이 책은 전체 671쪽이며 차례로 25장으로 되어 있고, 메이천의 출생부터 소천까지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각각의 제목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제1장과 2장에서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란 메이천의 어린 시절을 조명하고 있으며, 그의 잔스 합킨스 대학교 시절은 제3장에서, 프린스톤 신학교 시절은 제4장에서 다루고 있다.
제5장, 6장, 7장에서는 괴팅겐 대학교와 말부르크 대학교에서의 독일 유학 시절을 다루고 있으며, 제8장에서 11장까지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서의 활동을, 그리고 제12장에서 15장까지는 세계 제1차대전과 메이천의 군 입대를 다루고 있다.
메이천의 주요 저서들인 「바울종교의 기원」(1921년),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년)에 대한 기록은 제16장과 17장에서, 파즈딕 목사로 인해 신학교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안에서의 갈등(일명 장로교 논쟁)은 제18장부터 22장까지 다루고 있다. 이후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운 일(1929년)은 제23장에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의 설립과 메이천 재판 사건은 제24장에서, 그리고 제25장은 그의 소천과 관련된 에필로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메이천은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목사요 신학교 교수로서 임종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메이천의 독일 유학 당시 이미 미국의 교계, 특히 자신이 속한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당시 유럽을 석권한 "자유주의"(또는 구자유주의, 현대주의로 명명)의 영향은 빠른 속도로 미국의 교회들과 여러 신학교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메이천은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하던 대로 수구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신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학문적인 변증이 가능하며 또한 마땅히 최선을 다하여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이천은 목사요 신학교 교수로서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 가지 분야에서 이 일을 계속했다. 첫째는 논문과 저술을 비롯한 학문적인 추구를 통하여 기독교가 유일하고 참된 종교인 것을 드러내는 것과, 둘째는 강연과 활동을 통하여 기독교와 성경의 진정성을 역설하는 방법이다. 이 결과로 당시 신약신학자로서의 메이천의 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바울종교의 기원」과 「초보자를 위한 신약 헬라어」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바울신학연구와 성경헬라어 연구의 필독서가 되고 있으며, 1930년에 출간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불후의 명작으로, 아직도 이 방면에 더 나은 저작이 출판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올해는 죽산 박형룡 박사 (1897-1978)의 출생 106주년과 더불어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유학 시 그의 스승이요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 박사의 서거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은 그가 신학사, 신학석사를 마친 1923년에서 1926년 사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구체적으로 비롯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된 1812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의 이사회의 재편성으로 말미암아 동 신학교가 신학교 설립 이래로 표방해온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을 포기하고,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이었던 종교다원주의를 신학교의 나아갈 방향으로 정한 1929년까지 동 신학교에서 주장되고 교수된 신학을, 1929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수 되어온 신학과 대조하여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구 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대표자들로는,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과 더불어 첫 교수였던 아치볼드 알렉산더로부터 찰스 하지,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 워필드, 게하르더스 보스, 메이천 등이 있다.
박형룡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한 1923년은, 미합중국 장로교회가 소위 근본주의대 근대주의 논쟁에 휘말려있던 시기로, 1910년에 채택된 「근본교리 5개조」가 1916년과 1923년 두 차례에 거쳐 확인 절차를 거치고,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거나, 목회를 희망하는 타교단의 목사에게 최소한의 신앙고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해는 위필드 박사가 교단 내 점증하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한 세대의 임무를 마치고 소천(1886∼1921년 사이 35년 동안 교수)한지 2년 후로,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 메이천 박사가 「바울종교의 기원」(1921)에 이어, 「초보자를 위한 신약 헬라어」(1923),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출간하고, 당시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Modernism)와의 논쟁에서 보수연합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한 해이기도 하다.
1812년 신학교의 설립 이래로 1929년까지, 동 신학교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영감과 무오, 그리고 그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동시에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 요리문답에 구현된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대한 입장을 일관되게 변호했다.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에서, 메이천으로 하여금 그 논쟁의 중심에 있도록 만들었다. 사실, 메이천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로 불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개혁신학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천은 당시 용어대로 정의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당시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또는 근대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범교단적인 보수연합세력의 결집이었으며, 오늘날의 왜곡된 용어의 사용과는 분명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 운동은 오늘날 용어상 구별이 필요하다.
19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 정확히 말하면 메이천 박사가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이 박탈된 1936년까지와 그 이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를 우리는 근본주의 운동으로 부르고, 후자(1936년 이후)를 "신근본주의"로 부른다.
1936년 이후의 신근본주의 운동에서는, 1936년 이전과는 달리, "분리의 교리"(Doctrine of Separation)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1차 분리를 넘어 2차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구프린스톤 신학 전통의 마지막 주자 메이천은 1920년대와 1930년대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에서,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보수연합세력의 결집인,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논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독교와는 뿌리가 서로 별개인 다른 종교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근본주의 운동은 메이천이 속한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는 1925년을 분수령으로 보수세력의 영향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1925년 총회장에 당선된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어드만의 영향과, 같은 해 테네시주 데이튼 시에서 열린 원숭이 재판의 창조론 시비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1860∼1925)의 답변은 교단 내 보수세력의 영향이 현저하게 감소하게끔 만들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이 격돌하던 바로 이 시기에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를 마쳤다. 후에,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는 동안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인 박윤선이 1934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톤 신학교을 추천하지 아니하고,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를 지적하고 메이천 박사를 중심하여 새로 출발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년 설립)로 가도록 권한 것은 메이천의 제자로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으로, 1812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설립부터 1929년 이사회가 재편성되어 신학적 좌경화를 이루기 이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주장되고 교수되어온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줄기에 선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과 사상을 연구할 때는 반드시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맥락에 비추어서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끝으로,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 연구에 있어서 1915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초기 메이천으로, 그 이후를 후기 메이천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사실 메이천은 미국의 남장로교회 소속이었으나,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북장로교회(당시 미합중국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겼으며, 이듬해 조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다. 초기 메이천의 저작으로는 프린스톤 평론에 실린 서평들과 논문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후기 메이천의 저작으로는 그의 저술들이 전부 이에 속한다. 「초월하신 하나님」, 「기독교 인간관」, 「기독교와 현대신앙」등은 그의 만년에 행한 라디오 강연을 모운 것으로 유작에 속하며, 유일하게 자신의 자전적 삶의 여정을 글로 남긴 것으로 "투쟁하는 기독교"(1932년)라는 글이 있다.
금번에 출판된 본서는 또 하나의 전기인 헨리 코리 저, 「잔 그래스햄 메이천」(총신대 출판부, 1997)과, 메이천의 초기 작품을 모운 「메이천박사저작선집」(총신대 출판부, 2002)과 더불어 메이천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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