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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반틸의 기독교 세계관

by 【고동엽】 2014. 7. 20.

기독교 신학은 그것이 참된 신학이라면 인간이 그 앞에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라는 계시에서 구성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로부터 이탈한 인간의 현존재, 그리고 그에 대한 구원의 역사는 성서 안에서 증언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바로 성서 안에서 계시하였다고 한다면, 세계관은 정당한 세계관이기 위해서 불확실하고 타락한 자신의 이성에 의거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거해야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거한 세계관이 바로 기독교 신앙, 곧 기독교 신학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의 변증의 문제는 반틸에게 있어서 ꡒ성서 안에 담지된 진리의 체계에 대한 변증ꡓ의 문제이다.반틸의 관점에서 성서는 실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타당성 있는 진술을 행하는 유일한 근원이다. 성서는 ꡒ그것이 진술하는 모든 사항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ꡓ 따라서 그러한 권위있고 타당한 근원에서부터 인식을 구성하고 그것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야 말로 기독교적 합리성의 과제이며 변증의 과제이다. 신앙은 물론 궁극적인 차원에서 인격적 신뢰(fiducia), 즉 주관적 신앙(fides subjektiva) 으로서,하나님 안에서 신뢰하는 것(credere in deum)을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그것은 객관적 신앙(fides objektiva)인 지식(notitia)과 인정(assensus)을 전제로 한다. 반틸이 신앙의 변증의 문제를 언급할 때 그는 객관적 신앙의 차원인 지식과 인식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반틸의 변증의 작업은 궁극적 신앙의 차원을 변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은 신앙이 가지는 기초적, 전제적 차원을 변증하는 것이다.

신앙의 변증의 과정에서 성서 안에서 나타난 지식과 인식의 문제를 변증하는 반틸의 작업은 정당하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신학적 불가지론을 방지한다. 신앙이 가지는 객관적 역사적 차원을 변증하고 주장함으로써 신앙이 주관적 차원으로 환원되어 실재적 지반을 상실하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신앙이 가지는 인식론적 차원을 강조하는 것은 신약성서의 저자들의 입장과도 상응한다. 대개의 경우 주관적 차원의 신앙, 신뢰로서의 신앙이 성서의 저자들에게서 궁극적인 신앙으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차원의 신앙, 지식과 인정으로서의 신앙이 결코 간과되지 않았다. 요한에게서는 인식은 신앙의 구조적 요인으로 간주되며 바울에게서는 인간의 지혜에 대립되는 인식, 즉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반틸에게서 변증의 문제는 성서가 주장하는 진리 체계가 제공하는 지식과 인식의 타당성을 변증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는 곧 성서가 제공하는 세계관에 대한 진리성과 타당성을 인정하며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성서적 세계관, 즉 기독교 신학이 주장하는 진리의 체계는 어떠한 내용으로 구성되는가? 우리가 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반틸의 관점에서 성서적 세계관의 핵심은 여섯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세계의 종국에 대해서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3.
하나님에 대해서 성서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반틸의 관점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인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인격적인 분으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다.
반틸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비공유적 특성(incommunicable)으로 인해서 우리를 초월해 있다. 그의 어떠한 특성은 전혀 우리와 상관이 없는, 우리의 존재 양태를 넘어서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초월적 차원의 특성으로 하나님의 자존성(aseity), 불변성(immutability), 무한성(infinity), 그리고 단일성(singularity)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 동시에 결코 변화가 없으시며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존재하시며 그리고 단일한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지는 공속적 특성으로 인해서 우리와 함께 관계를 가지시며 내재하신다. 그는 빛으로서 지식의 근원이며 인간과 세계에 도덕을 요구하시는 거룩한 분이며 세계를 통치하시는 주권자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의 문제는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배제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분인 동시에 우리안에 있으시며,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다. 반틸의 표현을 빌자면 양자는 서로를 함축하며 따라서 기독교적 내재성과 초월성은 함께 가는 관계이다.

내재하시는 그리고 초월하시는 그 분이 인격적 존재이며, 또한 세 인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기독교 신학에서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 분은 인격적 존재이시지만 절대적 인격이시다. 그분은 인격이라는 점에서 자기 의식을 가지신, 그리고 도덕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그 인격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자기 자신이외에 어떤 대상에게도 의존적 관계를 가지지 않으신다. 그는 삼위 속에서 세 인격이 가지는 상호 의존적 관계이외에는 어떤 다른 것으로 부터 독립적이다. 그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구성된 한 분이지만, 그는 그 속에서 세 인격을 가진다. 통일성 속에서 구별되는 세 인격이 주장된다.


4.
반틸에 의하면 성서에 의해서 주장되는 인간학은 다음과 같이 주장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서 창조된 존재로 만물의 영장이나, 불순종으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었으며 구원이 필요하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전술한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가지며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하나님이 가지시는 지성, 공의로움, 거룩함이라는 속성을 그가 창조 시에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가 가지시는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단일성과 같은 비공유적 특성은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함께 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의 피조성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하나님과 다른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우주 안에서 피조물의 머리로서 예언자 왕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는 영장이다. 그는 예언자로서 우주를 해석해내며 왕으로서 우주를 하나님을 위해서 지배하며 제사장으로서 우주를 하나님을 위해서 바친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대리하여 우주에 세운 종이다.

인간이 가지는 이러한 고귀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세계관은 인간이 불순종을 통해서 죄로 떨어지게 되었음을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독특한 점은 반틸에 제기하는 타락의 개념이다. 반틸에게서 타락은 단순한 계약의 불이행, 불순종, 교만이 아니다. 반틸은 원인류가 지식의 나무를 먹은 것에서 착안하여 타락을 ꡒ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거짓된 지식의 이상을 세운 것ꡓ혹은 ꡒ자신을 위해서 지식의 절대적인 이해라는 이상을 세운 것ꡓ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선과 악을 불변하게 하는 과실을 먹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토대로 실재를 규정하고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실재에 대한 파악에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최고의 준거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준으로 삼으려 했던 것, 바로 이것이 반틸이 본 타락인 것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ꡒ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우주를 해석하려고 한 것ꡓ이 타락이다.


5.
인간은 타락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자신의 중심에 두는 것을 거부함으로서 하나님과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구원의 행위만이 인간과의 화해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보내셔야만 했다.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이자 참된 인간이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자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인성과 신성이 혼합되었다던가 혹은 한쪽이 한쪽으로 종속되었다던가, 아니면 서로 구별되어 동떨어져 존재한다던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틸은 칼케돈 신조를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성과 신성은 ꡒ혼합없이 그리고 변화없이, 또한 분리없이, 마지막으로 구별없이ꡓ연관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반틸은 칼빈이 주장한 그리스도의 3중 직분설을 수용한다. 그리스도는 말씀과 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를 계시한다는 점에서 예언자의 직책을 담당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신적인 정의를 만족시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다는 점에서 제사장의 직책을 담당하신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자신이 택한 이들을 자신에게로 순복케 하며, 그들을 지배하고 보호하며 모든 악을 견제하고 정복하였다는 점에서 왕의 직책을 담당한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세 사역은 서로 연관되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

6.
반틸은 구원에 대해서 개혁교회의 입장-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을 취한다. 반틸의 관점에서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상호 연관된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이러한 구원의 사역에 인간의 영역은 배제된다. 만일 구원의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존성과 불변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하나님의 결정 이외에 다른 무엇이 구원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존재한다면 결국 구원의 문제는 하나님에게 의존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는 반틸의 말을 빌자면 ꡒ영원하신 하나님을 인간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ꡓ

반틸은 칼빈 주의 만이 변증학에 있어서 타당한 입장이며 알미니안주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신인 협동론적 알미니안 주의는 신이 유한한 인간에게 의존해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결국 자아를 제일원리로 격상시키는 자연적 이성의 활동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일 뿐이며 바로 이 속에 알미니안 주의의 한계점이 있다. 반면에 단일 구원론적인 칼빈주의야 말로 구원에 있어서 유한한 인간이 신에게 의존해 있음을 주장한다. 반틸의 관점에서 칼빈주의는 영원하시는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존성과 독립성, 불변성을 보장하며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질적 차이를 보장하는 체계인 것이다.


7.

반틸은 웨스트민스터 신조를 따라서 교회를 ꡒ선택받은 자의 총계로 구성된 불가시적이며 단일한 그리고 보편적인 교회ꡓ로 규정하며 이것이 성서적인 교회에 대한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반틸은 교회론을 구성하면서 선택받은 자의 총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강조 한다.그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교회론은 구원론, 기독론, 더 나아가 신론의 관점에서 중대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이 자의를 통해서 임의로 참여하는 개인이 아니라 신적인 주권을 통해서 선택받은 자 라는 사실은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한 것임을 함의하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하나님의 절대성, 자존성과 불변성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는 오로지 신의 자의에 의해서 선택된 이로 구성될 뿐이며 그가 원한 이에게만 구원이 허락된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자존성과 불변성이 지켜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ꡒ시간에 제약된 자를 앞서가는 것은 영원자이며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ꡓ 택자로 구성된 교회의 개념은 구원의 일방성과 신의 절대성을 의미한다.


8.

반틸은 기독교 세계관의 마지막으로 종말론을 제시한다. 종말의 문제 역시 전술한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을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시간의 흐름, 즉 과거 현재 미래를 주재하신다고 믿는다. 그의 말을 빌자면 ꡒ기독교인은 하나님이 미래를 해석해나가신다고 믿는다.ꡓ 하나님이 미래를 해석해 나가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시간을 포함한 모든 실재를 미리 정하신 계획에 의해서 조직하시고 만들어내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역사관은 시간의 흐름에서 행해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주장하며 또 그가 정하신 마지막을 소망하는 것이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우주가 회복되는 ꡒ만유의 거듭남ꡓ을 소망하며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해석의 빛 아래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다.


9.

반틸은 앞서 열거한 기독교 신학의 대략적 교의를 살피고 나서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의 신앙이야 말로 기독교의 핵이며 이는 옹호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소 대담하게 ꡒ기독교적 세계관(christian philosophy of life)은 고전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전개된 성경의 진리들이다ꡓ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있는가?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점이 전제될 때에만 비로소 타당한 주장이 된다. 1)기독교적 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2) 성서를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이다.

우리는 반틸이 그의 글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얼마나 첫 번째 전제를 만족시켰는지 보아왔다.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을 판단의 준거로 삼는다면 참된 기독교 세계관은 개혁신학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타당하며 그는 성공적으로 이를 논증하였다. 하지만 반틸이 두 번째 전제를 만족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반틸 에게서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주권이 너무나 자명한 공리였던 나머지 그는 이를 성서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을 도외시 한 듯 하다. 그가 개혁 신학적 입장을 성서적으로 증명해 내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최종 심급으로서, 참된 계시로서 성서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자연적 이성을 공박한 이후의 무정부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하나의 연역적 원리를 도입하는 것으로 비춰질 뿐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서에 근거해야 하며 또 하나님의 주권을 증거해야 한다. 개혁신학이야 말로 참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삼고 있는 지반의 타당성을 성서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서를 관통하는 주제가 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야 말로 개혁신학이 진정한 참된 기독교적 세계관이라는 것을 확증해내는 선결 과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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