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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은 분리주의자인가

by 【고동엽】 2014. 8. 20.

메이첸은 분리주의자인가? 신학 이야기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에 항거하다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한 그레이스앰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로 규정하는 교회사가들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신학대학원의 교회사 교수 가운데도 그렇게 평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로 평가는 시각은 교회사를 진리성이 아니라 힘의 논리, 기득권의 관점, 강자의 시각으로 평가한 결과이다. 신앙인물과 교회사 평가의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이첸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이 주제는 "배교로 치닫는 교회,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에 직결되어 있다. 정당화 될 수 있는 교회분열의 경우를 말해 준다.

이 글은 최덕성 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 제14장 “매카트니와 메이첸의 선택: 배교로 치닫는 교회,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옮겨 온 것이다.

메이첸은 분리주의자인가?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1. 교리 없는 기독교

미국북장로교 총회(1934, 클리브랜드)는 그레스앰 메이첸이 장로교 독립외국선교회(The Independent Board of Foreign Missions, 이하 독립선교회)를 설립한 것이 교단의 헌법에 위배된다고 단정했다. 장로교 신자 개인이나 교회가 독립적인 선교기관에 헌금을 바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총회 산하 선교부와 상충되는 선교기관에 헌금을 내는 것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독립외국선교회는 교단 안에서 선교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즉각 중지할 것이며, 이 단체와 관련된 교역자들과 신자들은 당장 관계를 끊으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엄명했다.

그 무렵, 교단의 외국선교부는 포용주의 에큐메니스트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가 이끌고 있었다.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선교사들 문제로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고백하는 신자들이 바친 헌금이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선교사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태국인들이 불교를 더 잘 믿도록 하고, 중국인들이 도교나 유교를 더 정성껏 믿도록 하고, 일본인들이 신도교를 더 열성적으로 믿도록 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메이첸은 독립선교회를 조직(1933)하여 정통신학과 교리에 근거한 선교 활동을 확대하고자 했다.

보수파 지도자 클라렌스 매카트니는 총회가 메이첸과 독립선교회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결정을 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총회의 조치가 그 정신과 분위기를 볼 때 가혹하고, 엄격하고, 비성경적이고, 비장로교적이라고 말했다. 그 결정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결정이 아니라 마치 로마 교황의 교서와 같다. 조잡하고, 언어도단이며, 헌법에 위배된다. “경건한 사람들이 장로교인답게 단결하여 선한 일을 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괴롭힘과 징계와 비난과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가당치 않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1고 항의했다.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도 총회의 그러한 조치가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메이첸의 뜻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총회가 정당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회의 지시를 받은 뉴부른스윅노회는 메이첸에게 총회의 결정에 대한 응답을 요구했다. 메이첸은 총회에 불순종하는 것이 교단의 헌법과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총회의 명령에 따르지는 않지만, 미국북장로교회에 남아 있을 완전한 권리가 있다. 나는 장로교회의 헌법에 따르고 있다”2고 말했다.

메이첸이 총회의 명령을 거부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총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反)하는 것을 선전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바친 헌금을 비기독교 메시지를 전하는 선교사들이 사용하게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낸 헌금을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2) 총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려고 하면 헌금을 자유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벌금이나 세금처럼 강제적으로 내야 한다. 그러나 선교헌금은 벌금이나 세금이 아니다. 신자가 자유롭게 바치는 예물이다. 총회가 교인들의 헌금을 금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3) 성경은 이러한 세 가지 행위를 모두 금한다. (4) 총회의 명령은 교회의 헌법에 위배된다. 교회헌법은 총회의 결정보다 상위(上位)에 있다. 따라서 총회의 결정은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부합해야 한다.3

뉴부른스윅노회는 메이첸의 소명(疏明)을 접하고 7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재판을 했다. 혐의는 다음과 같았다. (1) 목사임직 서약을 어겼다. (2) 장로교회의 행정과 규율에 불복한다. (3) 교회의 규정과 헌법의 권위를 부인한다. (4) 교회의 법적인 권위를 무시한다. (5) 독립외국선교회와 관계를 끊으라는 총회 지시를 거부한다. (6)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려는 열의가 없다. (7) 성실하지 않다. (8) 선배들이 합법적으로 권하거나 명령하거나 바로잡아 줄 때 순종하지 않는다. (9) 주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4 메이첸에 대한 혐의는 이처럼 여러 가지였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의 요점은 한 가지였다. (10) 총회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것이었다.

노회는 1935년 3월 29일에 메이첸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유죄 판결을 내리고 목사직을 정직(suspension)시켰다. 메이첸은 자신이 불복종하는 것은 총회가 아니라 총회의 불법적인 명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법정, 곧 대회(Synod)와 총회(1936, 시라큐스)에 상소하여 변호하고자 했으나 기각을 당했다.

개혁파(자유주의)와 중도파가 장악한 미국북장로교의 법정은 정의와 장로교 질서의 기본 원칙을 비웃고 있었다. 하나님만이 홀로 양심의 주이시며, 성경이 총회와 모든 신학논쟁을 판단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대원칙을 충격적일 만큼 무시하고 있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는 “총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우월한지 그 여부를 묻는 게 교리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하면서 메이첸에 대한 교회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 비판했다. 카이퍼(R. R. Kuiper) 교수는 “메이첸의 재판은 자유주의와 그 선동자들의 불관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 비장로교적인 지도자들은 장로교 목회를 하는 훌륭한 장로교인에게 관용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5고 분석, 비판했다.

총회가 교단 산하의 선교부가 아닌 독립선교회의 활동을 제재한 것은 월권이다. 미국북장로교회 노회와 총회의 결정은 신자의 양심과 자유를 구속하는 매우 부당한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 총회의 결정은 정치폭력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조차 그 부당성을 지적할 만큼 정당하지 않았다.

매카트니는 메이첸에게 온화한 태도를 가지라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현실론을 펼치면서, 기독교인의 양심과 자유도 중요하지만 총회의 결정에 순응하지 않으면 당장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들이 목사로 장립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며, 독립선교회 관련자들이 장로교단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고 말해주었다.6 독립선교회를 해체하고 덜 논쟁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라고 권했다. 매카트니는 교단 안에서 화평스런 방법으로 정통신학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파급하고 싶었다.

그러나 메이첸은 매카트니의 권고를 거절했다. 미국북장로교회가 파송하는 비기독교적인 선교사들보다는 자신이 주도하는 선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훨씬 더 충실하게 전하고 있으며, 총회가 이러한 선교단체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메이첸의 전기 작가 스톤하우스는 그가 원칙에 철저하고 헌신정신이 강하고 용감하며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하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한다.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며, 정치적 편법과 술책을 싫어했다고 한다.7 그러나 교회개혁을 위한 메이첸의 분투노력은 소용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의 분열 조짐이 여러 해 동안 나타났다. 메이첸은 교회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분열을 혐오하여 ‘매우 가증스런 죄악’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교회 조직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버렸다는 것이 입증될 경우에만, 곧 그 조직체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경우에만 떠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메이첸은 “순전한 장로교인이었다. 더욱이 장로교회의 목회자답게 교회 헌법을 옹호하려는 그의 열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장로교회 헌법이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 만약 메이첸이 자신에게 개인적인 행복과 편안함을 안겨 줄 행로를 좇았다면, 그는 훨씬 이전에 장로교회를 떠났을 것이다. 그가 개혁을 위해 수고하는 가운데 겪은 것은 냉담함이나 적의 뿐 아니라 모욕과 비방이었다. 그것은 쓰라리고 우울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심사숙고가 그로 하여금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했다.”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열린 장로교 총회(1934)와 노회의 재판법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결정을 내렸고, 교회의 헌법을 무시했다. 총회와 노회는 조직체의 결정에 절대복종하라고 하는 교권적 압력을 가했다. 교회 안에는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기독교와 신앙무차별론이 강세였다. 메이첸은 그러한 적들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호헌언약연합(Presbyterian Constitutional Covenant Union. 1935)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미국북장로교회의 헌법을 옹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1) 교회헌법이 바탕을 둔 하나님의 말씀, (2) 믿음과 교리문답에 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담고 있는 완전하고 영광스런 신앙체계와 계시된 진리, (3) 인간 법정에 대한 맹종이 아닌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과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장로교 정치의 참된 성경적인 원칙 옹호 등을 목적으로 천명했다.9 이 단체는 미국북장로교회가 진정으로 장로교 정신과 원리(Presbyterianism)에 충실할 것을 희망했다.

메이첸은 장로교호헌연합 조직에 가담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한 마음으로 미국장로교회의 헌법을 지키면서, 기존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자유주의 기독교와 신앙무차별주의가 통탄스러울 정도로 성행하는 상황에서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기독교의 메시지를 회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자 했다. “만약 그런 노력이 실패하고 특히 현재의 다수파의 전제주의적인 정책이 승리한다면, 희생에 개의치 않고, 미국의 참된 장로교회를 영속시키기 위해 준비할 것이다”10고 말했다.

장로교호헌연합은 진정한 장로교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메이첸이 조직한 선교회와 마찬가지로, 기대했던 것만큼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이사회도 장로교호헌연합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웨스트민스터의 한 명의 교수와 열세 명의 이사들이 독립선교회와 장로교호헌연합을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메이첸의 올곧은 행보는 그들에게 완강한 것으로 비쳐졌다. 매카트니도 동참을 주저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존 교단 안에] 머물러 있겠다”11는 태도를 보였다.

사태가 신앙과 치리회의 한계를 넘은 것을 본 메이첸은 매카트니에게 자신이 참다운 장로교회가 실현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반대하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믿는다”12고 했다. 그는 당분간 교단을 떠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매카트니에게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자들을 수용하는 ‘배교하는 교회’에서 이탈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분열이 곧 이루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희망하면서 분열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장로교단이 그 핵심부에서 배교한 교회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와 같이 배교한 조직 속에서 계속하여 머무는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13

미국북장로교회 총회(1936)는 독립선교회와 관계를 가지는 교역자들의 목사직을 정직시켰다. 메이첸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로교호헌연합은 아메리카장로교회(Presbyterian Chuch of America)로 출범했다. 가담자들은 새 교단의 출발과 관련하여 복음적 신앙이 타협적인 교회기구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활발하게 전진할 것이라고 기뻐했다. 그때 미국북장로교회는 이 새로운 교회가 자신의 것과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래서 아메리카장로교회는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신생 교단은 얼마 후 전천년설과 알코올음료 사용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갈등을 겪었다. 칼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성경장로회(BPC)가 분열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이스신학교, 비블리칼신학교, 커버난트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미국북장로교회는 1967년에 바르트주의를 반영한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큰 차이가 있는 고백문이었다. 그러나 이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이나 신조는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이 교단은 1983년에 미국남장로교회(PCUS)와 통합하여 현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로 개편되었다. 이 교단 안에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속죄사역·육체부활·기적수행 능력을 부인하는 자,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고백하지 않는 자도 목사로 장립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는 자도 목회활동, 교수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사람을 상당수 만난 바 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분열은 한국장로교계의 교단 스펙트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장과 통합은 미국북장로교회의 후신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고신과 합동은 미정통장로교회(OPC)와 역사적으로 미국남장로교회와 관련이 있는 미국장로교회(PCA)와 자매관계, 우호관계에 있다. 박형룡·박윤선·한부선·이근삼·오병세 교수 등은 구프린스톤신학 전통을 전수(專修)한 사람들이다. 프린스톤신학교 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메이첸의 가르침을 받거나 영향을 받았다.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등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이와 신학노선을 공유하는 리폼드신학교와 커버난트신학교 등과 학문 교류를 하고 있다.

2. 매카트니와 메이첸의 선택

매카트니는 메이첸과 달리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포용하는 교회 안에 남아 있는 편을 택했다. 정통신학을 고백하면서도 좌경화 된 ‘배교하는 교단’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거대한 조직과 재산과 인력과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매카트니를 이사로 초대하자 장로교 총회는 그를 프린스톤신학교 이사로 임명했다. 프린스톤은 거대한 재원을 가진 학교였다. 매카트니는 이러한 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프린스톤신학교의 이사가 되어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롱필드는 매카트니가 프린스톤신학교의 이사가 되기로 한 것은 정통신앙을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동기는 아니었다.14

매카트니가 프린스톤신학교를 선택했으나 그가 메이첸의 지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프린스톤신학교 이사로 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47년에 재차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열성적인 목회활동·설교·교육으로 보수신앙을 보급했고, 팜플렛을 제작하여 영향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 세속화, 자유주의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좌경화 된 교회기구 안에 남아서 정통신앙을 파급하겠다고 한 매카트니의 선택이 아주 부당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진리 중심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을 파급하는 데 이바지하는 하나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미국북장로교회의 정체성 유지와 추락 방지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해롤드 오켕가를 포함한 열두 명의 젊은 목사들을 지도하여 미국 기독교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배교의 물결을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급진 좌경화 하는 교회와 신학교의 신앙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당하게 목사직을 정직당한 메이첸은 교회가 일단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면 정통신앙의 원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배교에 들어선 교회’에서 분리하는 길을 택했다. 기독교의 중추 진리와 교회론을 둘러 싼 지성 싸움에서 정통교리의 중요성과 신앙의 자유의 보고(寶庫)를 회복시킬 새로운 종교개혁, 곧 역사적 기독교의 복흥(復興)을 꿈꾸었다.

메이첸이 교단을 떠난 것은 ‘분리주의’ 행동인가? 이 용어가 이 경우에 적절한가 하는 것은 교리사와 교회사의 관점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외형적 교회 기구를 절대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그가 교회를 떠난 것은 분리주의 행동이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 신앙고백공동체로 본다. 교회의 존재가 무엇을 믿고 고백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본다. 웅대한 기구와 거대한 재산과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가졌다고 무조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집단은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말씀선포―교리를 교회의 존재여부를 식별하는 표지(標識)로 여겼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교회’라면 그것에서 성별(聖別)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칼빈의 관점, 곧 진리성 원칙에서 보면 메이첸의 선택은 분리주의 행동이 아니다.

교회·교단이 공적으로 이단교리를 천명하지는 않으면서도 중추 교리를 신앙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 거짓교사를 제재하지 않고 그들이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원리를 적용하면 그러한 집단에서 ‘자유’(liberation)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다. 이단보다 더 유해한 자유주의 기독교가 자리 잡도록 포용하는 그러한 ‘교회’에서 성별하는 것이 옳다. 성별은 보편성과 사도성을 가진 교회의 단일성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배교하는 교회나 우상숭배하는 교회를 떠난 사람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로교회의 신학에 충실한 정통신학자 메이첸은 교단을 떠나고, 교회의 신학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 코핀은 그 안에 남아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교회 안에는 정통신앙을 가진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이 메이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신학논쟁이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문제였다는 것을 말한다. 유서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신자들은 교회 자도자들과 신학자들이 그 같은 배교적이고 회색주의적인 사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메이첸이 대항하여 싸운 것은 당시 장로교회 구성원 전체가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의 교리적 충실성을 부인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었다.

교회의 신학노선 설정을 위한 논쟁은 언제나 ‘별들의 전쟁’이다. 고대교회의 기독론 논쟁이나 종교개혁기의 교회론 논쟁이나 19세기와 20세기의 자유주의 기독교 문제로 인한 장로교회의 갈등에 관련된 사람은 소수의 신학자들이었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1952, 1953, 1959)에 개입된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소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가 생명력과 신학적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은 그 신앙공동체를 주도하는 극소수의 신학자 때문이다. 그 교단 안의 목회자와 장로 몇 퍼센트가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가 하는 것보다 그 공동체를 주도하는 소수 신학자의 신학 사상이 무엇이며, 그 교단의 신학노선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떤 류의 신학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 메이첸이 덜 전투적인 자세로 논쟁에 임했다면 과연 다수의 정통신앙인들의 그를 지지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신자들은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삶의 세계’(Lebenswelt)에 따라 행동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은 다양한 면들로 구형된 정신·관행·습관·언어·몸짓·상징·기호·사고방식·느낌 등에 따라 행동한다. 신학과 교리는 이른 바 클리셰(cliche), 곧 심리, 사회, 문화 요소들과 얽혀 있다. 메이첸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았다. 다수의 신자들은 정통신앙을 가졌다. 그러나 신학논쟁은 소수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15 교회의 좌경화와 생명력 상실은 언제나 소수 신학자들의 그릇된 사상에서 시작된다.

만약 메이첸이 교단 안에 남아 온건한 인사들을 설득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가 선택한 양자택일 구도는 다양한 기질을 가진 인물들과 상이한 배경과 역사를 가진 당시 교회를 충분히 고려한 것은 아니다. 문화와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제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메이첸이 교단 안에 남아 있었어도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교회의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매카트니가 교단 안에 남아 있었지만 그가 미친 영향이 두드러지지 않은 점이 이 사실은 말해준다.

메이첸이 줄기차게 펼친 논의의 핵심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향하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방지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어드만과 스피어 등 중도파 인사들이 취한 태도는 교회가 고유한 신학적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물꼬를 텄다. 보수파의 어정쩡한 자세와 중도파 인사들의 회색주의 태도 그리고 그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결탁은 교회의 좌경화와 신학교의 변질을 몰고 왔다.

롱필드는 미국북장로교회가 메이첸을 잃은 것이 교단의 큰 손실이었다고 지적한다. 당대 최고의 정통신학자를 붙들지 않은 탓으로 교인 수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3. 사랑, 관용, 진리

자유주의 기독교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지평(horizon)을 넓혀 이웃·가난한 자·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과 구조악·질병퇴치·교회의 사회적 책임·기독교인의 실존적 삶에 대한 통찰을 갖게 했다. 인종차별 철폐·빈민구제·사회악 타파·사회정의 실현·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보수계 교회들의 사회에 대한 이해·교회의 사회적 역할·사회구조 변혁에 대한 인식과 대처능력이 진보계 교회들보다 덜 활동적인 것은 사실이다. 빌리 그레함과 존 스토트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복음주의세계선교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sm)의 ‘로잔언약’(1974)은 보수계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 높은 담장을 가로질러 두었던 보수계 선배들의 태도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사회참여·사회정의 실현·질병퇴치·인권회복 등은 인도주의 차원에서도 할 수 있고, 비기독교 단체도 수행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승려와 이슬람 사제와 연합하여 수행할 수도 있다. 성경 가르침에 따르자면 교회가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죄·십자가·구원·영생·영적인 삶과 이웃사랑의 실천과 사회와 국가와 문화에 대한 책임 중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참여와 사회윤리 실천과 선행이 교회의 생명을 잃게 만드는 흐름과 무관하다면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사회참여에 열성을 보인 자유주의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교회에 남긴 것은 생명력 상실과 교인 수 감소와 불명확한 정체성이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와 십자가와 영생의 도리를 거부하거나 이러한 주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사회참여, 사회구원을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가르쳐 왔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여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찾아온 것은 신앙공동체의 생명력과 정체성의 상실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까닭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불명확한 정체성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자유주의 기독교의 사회복음주의 신학이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사회참여·사회윤리·교회와 국가의 관계 활동에는 미미하지만 왕성한 생명력과 순수한 신앙과 오순절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고, 그러한 사람이 수행하는 사회참여와 윤리가 의미를 지닌다.

흥미롭게도 자유주의자 코핀은 1952년에 이르러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15 자유주의 신학은 코핀조차 그 흥기(興起)를 걱정할 정도로 위험하고 세속적이고 유해한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 논쟁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것들은 오늘날 대부분 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가 주장하던 것들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지 않는 것임을 자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덧없는 신학에 연연하면서 교회에 남긴 것은 엄청난 불행과 비극이다. 생명력 없는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 상실, 교회분열을 안겨주었다.

자유주의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성경무오성을 불신하며 기독교 신앙을 상대화 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록의 계시성을 부정한다. 신앙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지 않고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진리를 양보하여 하나 됨을 얻고자 한다. 외적인 통일성을 위해 내적인 하나 됨을 보장하는 교리를 희생시킨다. 교리와 생명을 상반 관계로 본다. 기독교의 본질이 윤리에 있다고 본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추구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구주, 구원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지만 유서 깊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의중 유보한다. 문구 하나 하나에 사적(私的) 의미와 이의(異意)와 다른 개념을 덧붙여 해석한다. 민중신학자나 해방신학자가 말하는 구원과 개혁주의 신학자가 말하는 구원은 개념이 다르다. 전자는 사회악·구조악·질병·가난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제공하는 죄 사함과 영원한 형벌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용정신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짓교사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이단을 단호히 배격한다. 에베소서 1-3장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소의 터’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터’ 위에 세워졌다. 이 ‘터’를 배제하는 하나 됨은 거짓된 연합이며, 그리스도와 불일치하는 일치이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존재하는 하나 됨을 깨뜨리는 연합이다.

신약성경과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북장로교회의 갈등과 분열은 메이첸과 정통신앙 수호자들의 전투적인 자세와 불관용 태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최소한의 ‘터’를 허물고 주의 포도원에 여우가 들어와 분탕질하는 것을 허용한 결과이다. 교회의 좌경화와 생명력 상실은 중도파 지도자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적 정박지를 허물려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관용하는 태도를 취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를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성도를 온전케”(엡4:12)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했다. 구원의 유일무이한 ‘터’ 위에 선 성도들이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않고 단단한 것을 먹고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분별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들을 세웠다.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도록(엡4:14) 하려는 목적이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일치’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1)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거나, (2)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의미를 의중유보하거나 (3)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을 부여하거나 근본 개념을 바꾸어 해석하고 (4) 자유주의 신학자, 거짓교사를 규제하지 않는 교회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배교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이미 이루신 연합’을 유지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가 설교강단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는 교단과 연합, 일치를 삼가 해야 한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가진 교단과 하나 됨은 옳지 않다.

믿음의 터가 다른데 누구를 향하여 함께 기도할 것인가? 전해야 할 것이 일치하지 않는데 무엇을 함께 전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고백하지 않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하늘로 좇아 나타났다고 하는 진리를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노 따위는 허황된 교설(敎說)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엇을 함께 고백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고 단지 신앙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과 무슨 선교를 함께 할 것인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었다고 믿는 사람과 악을 허용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교제와 일치는 불가능하다. 성경은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만유 위에 계신 한 하나님”에 대해 일치된 신념을 요구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 세 가지 경우에 독자적인 교회설립이 정당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박윤선 교수가 어느 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결론이다.

첫째, 교회가 우상숭배를 할 때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분열한 경우이다.

둘째, 교회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거나 부정하는 자를 제재하지 않을 때이다. 메이첸이 자신에게 정치폭력을 가한 교회,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난 경우이다. (따라서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힘의 논리, 기득권의 관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진리성에 기초한 평가가 아니다. 교회사 평가의 기준은 성경이다).

셋째, 교회가 진리에 충실한 사람을 추방할 때이다. 출옥성도들 중심의 경남노회(현 고신)가 건실한 단일 장로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다수의 우상숭배 전력자들이 주도하는 총회가 정치폭력으로 그들을 제거한 경우이다.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 가지 경우에 ‘분리주의,’ ‘교회분리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판단이다.


[최덕성 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서울: 현장과본문사이, 2005)에서 옮겨 온 것이다. 각주는 책을 보라. 북장로교회의 좌경화 역사에 대한 관련 글들을 책에서 참고하라.]

[출처] 메이첸은 분리주의자인가?|작성자 최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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