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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바울을 잃어버리다 3

by 【고동엽】 2006. 7. 19.
기독교, 바울을 잃어버리다 3
(한국교회에 고함, 같은 제목의 보충글)
16 세기에 교회의 폭력성과 타락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종교개혁자인
1. 루터는 토마스 뮌쩌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하여 '그들을 찔러 죽이고 태워 죽여라'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말년의 격렬한 반유대주의는 그에게 인도주의자란 명예를 줄 수는 없어 보입니다.
2. 칼빈은 제네바를 4 년 여간 강력한 교리와 도덕률로 신정정치를 행했습니다. 그는 1553 년에 신학자 세르베투스를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화형에 처했습니다.
한 때 칼빈의 친구였던 카스텔리오가 가장 맹렬한 비판을 가했는데, 그는 이 잔악한 행위를 보고 '의심, 믿음, 무지, 지식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칼빈의 광신을 논박했습니다.(피터 버거외, 의심에 대한 옹호 153, 172p)
30 년 간의 종교개혁 전쟁으로 유럽인구의 삼분지 일이 죽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기 보다는 교황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영주들의 정치혁명이었습니다.(김균진, 루터의 종교개혁)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 신학과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종교개혁 신학을 따르고, 가톨릭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토마스 아퀴나스신학(폴 틸리히)을 따릅니다. 웃픈 현실은 이러한 신학들이 성서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실 입니다. 신학이란 자기시대의 고백인데, 오백 년, 천년 전의 신학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필자가 이제까지 기독교의 폭력성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 목숨처럼 지키는 신학이라는 게 바울이 예수 만나기전의 폭력신앙과 같음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5 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교회에 바울이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는 없습니다.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성서저자들이 본 예수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 성서로 돌아 가야 합니다.
성서 만능시대에 성서로 돌아가자고 하는 필자도 민망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막무가네로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말 하자면, 성서는 현대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 아닐 뿐만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글이 아니라 고대의 세계관, 과학수준, 문학형식으로 당시 삶의 정황에 의해 당시 사람들이 읽도록 쓰여진 글 입니다.
당연히 오늘의 세계관과 과학으로 학자들의 도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는 법 이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법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으라 합니다.(로마1:17, 3:21)
앞에서 살펴본대로 교황도 루터도 칼빈도 온전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 만나기전의 하나님을 믿은 것이고, 믿음으로 살지 않고 법으로 살은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으라는 말이 법(행위)과는 다른 정서적이고 관념적 의미로 사용될 것을 염려 했습니다.(로마3:31) 그 우려가 현실화되어, 바울의 후학들에 의해 믿음을 행위보다는 정서적 의미로 받아들인 히브리서가 쓰여지고 이것을 염려해서 보완하기 위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가 쓰이게 됩니다.(야고보서 의미는 페친의 견해를 수용했습니다)
법으로 살지말고 믿음으로 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법이란 법률, 문화, 종교, 이념, 도덕 등 우리의 모든 가치체계를 말 합니다.
법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려면 권력, 명예, 돈에 대한 집착, 성장과 부흥에 대한 열망, 성공, 성취, 업적, 탐욕 등 모든 열망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앞으로 20-30 년 후에 한국교회가 유럽과 미국이 그러했듯이 무너질 것 입니다. 젊은 세대가 없고 주일학교가 없는데 무슨 수로 이어 가나요?
현재 이문제에 대책을 내놓는 교단이 없습니다. 따뜻한 물 속의 개구리가 따뜻함에 취해 물이 뜨거워져도 모르고 있다가 익혀 죽는 거처럼 오늘의 교회도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무명의 목사가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은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원시교회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사업이 중요했습니다. 오늘날의 예쁘고 돈 많은 과부가 아니라 생존이 어려운 과부 입니다. 그런데 차별과 소외가 발생하는 등 재정 지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설교만 하기로 하고 행정과 재정지출 권한을 평신도에게 양도 했습니다.(사도6, 9장)
오늘의 교회사태는 평신도에겐 책임이 1 도 없습니다. 목사, 신부 장로에게 전 책임이 있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1. 목사, 신부는 설교만 하고 행정과 재정의 권한은 행사 하지 않는다.
2. 구제사업을 제외한 교회의 모든 사업을 중단한다.
3. 과도한 헌금을 억제하기 위해 장로제도를 없앤다. 그동안 교회에서 명예와 권력을 누리기 위한 헌금이 빈번 했습니다.(미자립 교회는 해당사항 없습니다)
질문하기 전에 자수하자면 나는 설교만 하고 행정과 재정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교인수 늘리려 하는 것과 교회 유지를 넘는 과도한 헌금은 교회를 타락시키는 일이라고 설교 했습니다. 그날 식사시간에 회계집사가 목사님 설교가 차~암, 그러자 나도 차~ 암하고 서로 처다보고 웃고 끝 했습니다.
평신도 교우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교회사태에 다른 각도에서 평신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합니다.
교회에 지나친 헌금과 목사, 신부를 영웅화 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미천한 신분에서 선택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는 가난해야 하고, 평신도는 목사, 신부를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페북에서 개척을 시작하는 목사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한 글을 보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교회나 유사 기독교 교회의 목사들도 처음엔 그러한 헌신과 열정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과 권력이 집중되면 타락한다는 사실은 만고의 이치 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땅의 가치체계인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 입니다.
3 회에 걸친 긴글에 함께하신 페친님들께 감사 합니다. 다음주엔 구원이란 무엇인가로 뵙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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