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바울을 잃어버리다 1
(한국교회에 고함)
기독교가 평화종교라 하면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 입니다. 그 모두 웃을 일을 말 하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에베레스트산보다 크신 분이므로 성서저자들은 저마다 자기자리에서 본 예수를 다르게 말 합니다. 바울이 본 예수를 중심으로 4 세기에 성서가 정립 되었습니다.
역사상 바울을 가장 올바로 파악한 사람은 토스토예프스키 입니다. 그는 시베리아 감옥 4 년 동안 다른 책은 반입이 금지되어 성서만을 읽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먼저 누가를 알으라고 합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제자였으나 바울과도 선교여행을 같이 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울사상이 짙습니다.
누가는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평화를 주려고 오셨다고 하고,(누가2:14) 예루살렘을 보시고 저들이 하나님나라가 왔음을 모르는 까닭에 평화를 몰라서 멸망하게 되었다고 예견하시며 우셨다고 증언 합니다.(누가19:41-44)
로마서의 중심 메시지도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이 죄인을 믿음을 보시고 용납했으니 그리스도인도 악인을 용납하고, 화해하고 평화하라 입니다. 이러한 성서의 평화 메시지가, 기독교에서 성서와 바울을 잃어버린 까닭에 그 메시지가 믿음의 중심으로 오지 못 했습니다.
성서와 바울이 기독교에서 사라진 경위를 살피기 전에 바울이 누군가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바울이 누군가 엿 볼 수 있는 사실 입니다.
토스토예프스키는 바울의 영향으로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악을 폭로하고 그 악에 고통받는 인간의 한계를 소설로 이야기 합니다. 어느 대학교수가 대학생들을 인솔하여 러시아 문학기행을 다녀온 후에 방송에서 하는 해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악을 어쩔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말한 '죄와 벌'을 그 교수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한 소설이라고 해설하는 걸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교수 수준이 초딩보다 못 합니다. 요즈음 하도 목사만 욕을 먹어서 물귀신 한 번 했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는 바울 식이고 톨스토이는 베드로 식 입니다.
바울은 이민자 출신으로(다소) 예루살렘에서 교육 받았습니다. 엄격한 샴마이와 합리적인 힐렐파의 두 파 중에서 힐렐계의 당시 최고 스승인 가말리엘에게서 수학 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골이 아니었으므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탄압에 더 열심으로 해서 행동대장으로 나섰습니다. 스데반 사형에도 역할을 하고 체포조를 결성하여 외국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는 중에 다마스커스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고 회심 합니다. 이것은 신의 개입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열심으로 믿다가 예수를 만나, 그 열심을 새로운 세계가 열렸음을 알리는데 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몰랐다가 안 것이 아니라 이제까자 믿었던 하나님 믿는 방법을 바꾼 겁니다.
필자가 기독교가 바울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적어도 4 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바울이 예수 만나고 증언하는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바울이 예수 만나기 전의 신을 믿거나 오히려 그 보다 더 악질적으로 믿기 때문 입니다.
예수 만나기 전의 바울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증오하고 죽여야 분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만나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자기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 입니다.
인류 정신사에 첫 번 째 기적이 일어난 것 입니다.
바울만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과는 다른 예수의 독특성을 말 합니다.
하나님은 적군 사령관을 붙잡아다가 아군 사령관 삼으셨습니다. 나의 스승인 안병무박사가 성서해석할 때 상상하라고 하셔서 상상을 했습니다.
렘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양 철학사'에서 예수는 종교 운동가로 서술하고 바울은 새로운 철학사조를 세운 인물로 서술 합니다. 바울에게만이 다른 종교나 사상과는 다른 사상이 있다는 것 입니다.
법정스님은 붓다가 인류사상 최초로 스스로, 자기 힘으로 구원의 길을 연 사람이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 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신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인류 최초의 사람 입니다.
폴 리꾀르 등 철학자들이 평가하는 바울의 가장 독특한 진술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더하다'고 한 진술 입니다.(로마5:20)
하나님의 의는 구원 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하려고 그리스도인을 선택 하셨다고 합니다.(고후5:21)
또한 믿는이는 신과 상응한 행위를 이웃에게 하는 사람 입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신하고만 관계하려는 신앙인은 장독대에 냉수 떠놓고 비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산 다는 것은 악한 사람(죄인)을 정죄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여 주는 삶을 말 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대상인 악한 사람은 사회로부터 소외 받고 배제된 힘없고 약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평화를 깨는 악질적 기득권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와 바울은 죄인을 배제하고 소외 시키는 바리새인에게는 격렬하게 저항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성 소수자를 사회에서 배제 시키려는 복음주의 우파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은 선과 악을 가르지 않고 구원하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니고 선과 악을 갈라서 배제하고 차별하는 플라톤 입니다.
이러한 바울과 성서가 기독교 출발부터, 적어도 5 세기부터 천 년 동안 사라졌습니다.
글이 길어졌으므로 천 년 동안 사라진 배경과
16 세기 종교개혁 시에 찾았다고 하나 찾은 게 아니라는 걸 화요일에 올리겠습니다. 성서에서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겠습니다.
여러분과 가정이 평화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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