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성전 요2:13-22 (2000/3/26)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가리켜 사람들은 소위 성전정화사건이라고 말합니다. '淨化'란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더러워졌다는 말은 본래는 깨끗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서 때가 끼어, 본래의 청정한 모습을 잃는 것은 타락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聖殿은 말 그대로 '거룩한 집'입니다. 거룩한 집이 거룩함의 본질을 잃으면 그것은 있으나마나한 곳이 됩니다. 아니, 어쩌면 있어서는 안 될 곳인지도 모릅니다. 요한복음 2장은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드러내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집에 가신 이야기와 성전 정화 사건이 그것입니다. 요한은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집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낭패를 당할 지경에 있던 혼주는 물론이고, 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흥겨움을 되돌려주셨습니다. 주님이 계시는 곳 어디에서나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물처럼 덤덤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삶으로 무르익어 가고, 죽지 못해 사는 지겨운 인생살이가 흥겨운 잔치 집처럼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것이 가증스럽게 변한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사실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그보다 더 볼썽사나운 것이 없지 않아요?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그렇게도 분노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소위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은근한 자부심의 도구로 이용하고, 교묘하게 자기들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하십니다. 성전과 시장 유월절 무렵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셨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기대를 품고 성전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성전은 시장바닥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장사꾼들이 사람들을 부르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성전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던 겁니다.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 지치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자기를 돌아보고, 참회하고, 용서함 받고, 새 힘을 얻는 공간이어야 할 성전이 시장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우리는 압니다. 먼 곳에서 유월절 순례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짐승을 몰고 올 수는 없습니다. 여행이 모험이고, 고생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 아닙니까? 성전의 관리자들은 먼 곳에서 오는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제물로 바칠 짐승을 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세를 바치려면 트리안 화폐로 바쳐야 했기에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환전상들의 상행위도 허용했던 것입니다. '편의를 위해',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하지만 정말 동기는 그것 뿐이었을까요? 우리는 편의를 위해 가장 본질적인 것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본말이 전도되는 일들이 우리 삶의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관행적인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이미지를 바꾸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포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분인 줄만 알았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성전 한쪽 구석에서 채찍을 만들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세요. 이 때도 온유하고 포근한 미소를 짓고 계시지는 않았겠지요? 화가 나도 단단히 나셨어요. 예수님은 채찍을 휘둘러 양과 소를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으시던 예수님이 유독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분노를 느끼고 계셔도 예수님은 분별력을 잃지 않으십니다. 분노의 불길 속에서도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계십니다. 소와 양을 파는 상인들은 부자예요. 하지만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비둘기는 가난한 이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 것 아시지요? 비둘기를 사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인 것처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도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들의 재산을 수습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꼭 이렇게까지 화를 내셔야 했나요? 어느 신학자의 주장이 조금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배보다는 돈벌이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상인들에게 독점권을 주는 대신 상당한 물질적인 보상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벌충할 양으로 성전 상인들은 아주 비싼 값에 물건을 팔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피해를 본 것은 가난한 순례자들이었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었던 예수님이 맹렬히 화를 낸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꼭 그뿐이었을까요? 성전에 무엇이 있길래?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성전이 무엇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한 것 말입니다. 성전은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 장소거나,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구별해놓은 장소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의 이런 거룩한 분노는 이해할 길이 없어집니다. 아시다시피 성전의 중심은 '至聖所'(holy of holies)입니다. 성전의 가장 내밀한 곳에 위치한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수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에 한 차례, '대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휘장을 통해 성소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어 있었는데, 그곳에는 창문조차 없었습니다. 불빛 한 점 비쳐들지 않는 그곳에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지성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ark) 하나 뿐입니다. 언약궤 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상기시켜주는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십계명 돌판, 하늘의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지성소가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 위에는 순금으로 만든 속죄소(throne of mercy, mercy seat)가 있습니다. 이것을 施恩座, 즉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고도 번역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베푸는 주체는 누구시지요?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니까 이 속죄소, 곧 시은좌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자리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지성소를 범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속죄소 양 끝에는 순금으로 만든 그룹( cherub/cherubim)을 만들어 그 거룩한 곳을 지키게 했는데,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그룹들은 날개를 벌려 속죄소를 덮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속죄소 위, 곧 그룹들의 날개로 덮여있는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텅 빈 공간, 그 침묵의 공간이야말로 성전을 성전되게 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구별된 장소인 성전에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고요함과 침묵 아니겠습니까? 세상 염려와 근심으로 들끓는 사람들의 마음을 깊은 침묵의 세계로 이끌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해야 할 성전이 상인들의 아우성으로 북적대는 시장 바닥으로 바뀐 것에 대해 예수님은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분노는 예수님의 과격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뭔가로 들끓고 있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가장 거룩해야 할 성전이 하나님께 이르는 방해물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시은좌가 되신 예수 어찌 보면 폭력에 가까운 이런 행동에 대해 사람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시비조의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이때 예수님의 입에서 가장 과격한 대답이 흘러나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당혹스런 말씀 앞에서 유대인들은 여전히 중얼거립니다.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요한복음은 친절하게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삼 일은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스스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만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속죄소, 곧 시은좌이십니다. 지성소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인격에 있고, 그분의 삶에 있습니다. 지성소를 품고 살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지체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깊은 곳에도 지성소를 품고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이 '성스러움'을 공간화해 놓은 곳이라면, 안식일은 시간 속의 성소입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두 축이 성전과 안식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의 바퀴를 굴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문득 멈추어 서서 옷깃을 여미는 곳, 혹은 그런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라는 성소를 가슴에 모시고 살면 우리는 삼갈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법정 스님의 글귀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입에서 살벌하고 비릿한 정치와 경제만 쏟아져 나오고 시와 노래가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가슴은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마신 그 입에서 꽃향기 같은 노래가 나와야 한다." 여러분, 가슴에 속죄소, 시은좌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입에서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줄어들고, 시와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주님을 모신 사람은 노래하지 않을 수 없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화려한 건물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가장 깊은 곳에서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열려있을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면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마음에 지성소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성전이 된 사람,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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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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