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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위대한 여성성누가 -1:26-45

by 【고동엽】 2022. 7. 3.
위대한 여성성


누가1:26-45


(1999/12/19)

생일날의 주인공은 어머니인가요, 아니면 태어난 당사자인가요? 괜한 물음인가요? 생일날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는 것이 어머니가 아닌 것을 보면 답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요.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비록 우리가 60억 명 가운데 하나라 해도 말입니다.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축하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기 위해 여러분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아무 일도 한 게 없지요? 수고한 분이 있다면 어머니/아버지시지요. 그렇다면 생일날 부모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근본을 모르는 자식'이라고 야단맞아도 할 말이 없겠네요. 또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가 한 일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어머니가 고생하셨지요. 태 중에 10달을 고이 기르시고는, 목숨을 걸고 우리를 낳아주셨지요. 생명을 낳기 위해 생명을 거는 겁니다.



Her-story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주인공은 항상 남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구원사의 계보를 보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모세…이렇게 가지, 사라/리브가/라헬/아스낫/십보라…, 이렇게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 story' 곧 남성들 중심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남자들이 이루어온 역사가 대체 무엇입니까? 매일 갈등하고, 싸우고, 파괴하고, 경쟁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어떤 분은 이제 우리는 남성 중심의 역사만 볼 게 아니라, 여성들이 이루어온 역사, 곧 'Herstory'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역사 속에서 늘 주목받지 못하고 그늘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의 삶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her'는 꼭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수탈당하며 변변히 권리주장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많은 여성 신학자들이 성경에서도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당신의 구원사에서 여성을 별볼일없는 존재로 여기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라구요? 정답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선 주연배우는 누구입니까? 모세지요? 하지만 모세는 스스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어머니 요게벳에게서 몸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세요. 히브리의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다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어겼던 히브리의 두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이 두 여인은 왕의 지엄한 명령을 어겼습니다. 목숨을 건 거지요. '어떻게 멀쩡한 생명을 죽일 수 있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두 여인은 지상의 왕의 명령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더 무겁게 생각했던 겁니다.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다' 하면서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갔던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에서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더 강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남자들보다 죽음을 한번 더 경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출산 체험 말입니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자기의 뿌리가 흔들리는 체험을 했던 이들을, 그런 경험도 없는 이들이 어떻게 당하겠어요.



마리아의 자기 비움


저는 성탄절기에 참으로 위대했던 두 여인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입니다. 먼저 마리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은혜를 입은 사람아,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했을 때 이 시골 처녀는 정말 놀랐을 겁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호들갑을 떨지 않고,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니 이게 무슨 뜻일까?'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속말을 알아듣고 친절하게 대답해줍니다. "보아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러고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쭉 설명합니다. ①그분은 위대하게 될 것이다 ②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③하나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고,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입니까? 마리아는 즉시 그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요. 혹시 잘못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그러자 가브리엘은 비로소 마리아의 가슴에 드리워진 의혹의 베일을 벗겨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 줄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인간 아버지를 넘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이해했을까요? 아마 지금 여러분들 같이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수용해야 함을 직감하는 것이지요.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천사님의 말씀대로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종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종이 아닙니다. '주'의 종입니다. '주의 일을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으로 사용되어도 좋습니다. 나는 주의 것이니 주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이게 마리아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마리아의 이와 같은 자기 비움, 헌신, 희생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것조차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놓기 꺼리는데 마리아는 자신의 미래 전체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마리아는 자기를 온전히 바칩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이 계절, 주님은 이 땅에 강림하시기 위해 또 다른 마리아를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동료를 주시는 하나님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하신가를 알 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확신을 못하는 눈치이자 가브리엘은 엘리사벳의 예를 듭니다.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던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잉태하게 된 사실을 전하면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확신이 없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시기보다는, 고민과 갈등,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료를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하시려는 일이 불가능해 보이거든 마음을 열고 여러분의 이웃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의 온갖 어려움들을 이겨낸 동료들 말입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마리아에게 있어서 엘리사벳과 같습니다. 한 몸 공동체를 이룬 우리는 교우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총을 함께 나누면서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촛불을 들고 걷다가 내 초에 불이 꺼져도 함께 걷고 있는 동료로부터 불씨를 나누어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예를 듣고는 용기를 얻어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시려는 일을 수용합니다. 지금 우리는 엘리사벳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이웃들의 가물거리는 신앙의 불꽃을 '훅' 불어 꺼뜨리는 사람은 아닙니까?



하늘의 낌새 알아차리기


이제 저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또 다른 아름다운 일화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태기를 느낀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했을 때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던 아기가 뛰놀았답니다. 아기가 발길질을 한 걸까요? 임신 5개월이 지나면 아기의 태동을 느낀다면서요? 혹시 엘리사벳이 최초의 태동을 느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닐 수도 있구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아기의 태동은 특별한 일이 아닌 데도, 엘리사벳은 깜짝 놀라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여자들 가운데 복을 받고, 그대의 태 속에 있는 열매도 복을 받았습니다. 내 주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문안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 속에 있는 아기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어떤 낌새를 알아챈 것 같습니다. 아기의 태동을 통해서 엘리사벳은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잉태한 여인이었기에 그는 한결 더 하늘의 징조에 예민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삶 속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체험들 속에서 어떤 메시지를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의 낌새라도 감지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늘로 나있는 안테나가 완전히 고장나 버린 것은 아닙니까? 하늘 소리를 들으라고 주신 안테나를 가지고, 잡음과 다를 바 없는 세상의 소리를 듣느라고 온통 정신이 팔려 있지는 않습니까?



여성적인 가치들의 복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는 이처럼 위대한 두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괴테는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성은 다 폭력적이니 소용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동안 우리가 여성적인 가치라 하여 소홀히 해왔던 희생, 헌신, 돌봄, 감성적인 면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 세기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 곧 여성적인 가치들이 복권되는 세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계절, 여러분 속에 있는 공격성과 파괴성, 거칠고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거친 감정과 몸짓으로는 갓난아기를 안을 수 없습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몸도 마음도 유연한 것은 생명을 품어 안는 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기'를 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부드러워져야 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부드럽고, 다정다감하게 만드십시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주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여러분 스스로 잃어버린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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