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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벧후 3:8-14

by 【고동엽】 2022. 7. 3.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벧후 3:8-14

(1999/12/5)


공 부

나이 사십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가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낯설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이 김기석이라는 이 름으로 불리우는 사람이란 말이지. 그대는 정말 누구인가?' 나를 내가 제일 잘 알 것 같 은데, 아니예요, 날이 갈수록 잘 모르겠어요. 어떤 때는 꽤 괜찮은 생각을 하고, 가끔은 신통한 짓을 하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낯설 수 밖에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밖에는 없습니 다. '그렇게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그것입니다.


열심히 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그래도 날마다 공부하려고 애는 씁니다. 그것이 마 음 공부든, 문자 공부든 말입니다.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가야 하고,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라'(爲學日益 爲道日損)는 말이 있습니다. 점점 깊이 느끼 는 것입니다만 진리 공부, 즉 마음 공부는 덜어내는 공부예요. 욕망을 덜어내고, 집착을 덜어내고, 미움을 덜어내고, 거짓을 덜어내지 않으면 우리 삶이 아름다워질 수 없고 자 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 셨지요? 마음이 청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의 본바탕을 흐리게 만드는 때와 녹을 자꾸자꾸 닦아내야 하겠지요. 자꾸자꾸 닦아냄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의 진면목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성리학에서는 '性' 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본바탕에 '性'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命'이라고 하구요. 하나 님의 명령인 것이지요. 우리가 사람이라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주신 하나님의 명 령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요.


직함은 존재가 아니다

베드로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 뇨?"(3:11) 이 물음이 참 중요합니다. 이런 물음을 자꾸자꾸 물어야 우리 영혼이 커집니 다. 사람들이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습니다. '나 이런 사람입니다' 하는 거죠. 어떤 사람 은 명함에다가 이런저런 직함을 잔뜩 새겨 넣고는 뻐기듯 명함을 건네줍니다. 저는 그런 명함을 받으면 '아, 굉장한 데. 대단한 분을 만났어'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 속이 허 한 사람이구나. 오죽 자기 존재에 자신이 없으면 그래 이런 직함을 가지고 과시를 해!' 하면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누구요?' 하고 물으면 자꾸 자기 직함을 댑니다. '집삽니다.' '무슨 회사 사장입니다.' '무슨 위원회 회장 입니다.' '농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존재이지, 그가 획득한 사회적인 신분증명들이 아닙니다. 소설가 이윤기님은 사람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그대가 나날이 얻어들이는 정보, 나날이 읽어들이는 교양이 무엇으로 바뀌는지 보여 다오.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그대가 우겨넣는 나날의 먹거리가 뱃속에서 소화되어 무엇이 되는지 보여다오. 그대 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도록…"

이런 사람과 만나면 좀 피곤하겠지요? 하지만 이윤기님은 그 사람의 거죽 말고, 속을 보 고 싶다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고 묻고 있는데요. 자문자답입니다만 베드로가 주는 암시를 따라 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 다.


1.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사람

초대 교회는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서 교 회에 내고, 또 어떤 이들은 세속적인 직업을 버리고 오실 주님을 맞기 위해 거룩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오신다던 분이 안 오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 니다. '이거, 완전히 속은 거 아녀?' 인내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재빨리 옛 생활로 복귀했 습니다. 조금 더 진득한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그런 교인들의 의심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재림 지연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할 필요 를 느꼈습니다.

"정말 재림이 있냐, 없냐?"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뜸을 들이시냐?"

"다 너희를 위해서다."

"우리를 위해서라구?"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회개해서 구원받을 때까지 그날을 연기하고 계신 거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시편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는 말씀 말입니다. 전에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느린 것처 럼 보여요. 성질 급한 사람은 기다리다가 죽을 정도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탈출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날을 위해 모세를 80년 동안 훈련시 키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늦는 법도 없습니다. 항상 때에 맞게 움직이십니다. 바쁘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뛰어보아야 소용없지요? 마음을 가 라앉히고 조용히 기다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시간에 우리 몸과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사모하는 사람

97년 이후 우리 나라는 부자는 살기 좋고, 가난한 사람은 살기 어렵게 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부유층들은 술잔을 쨍 부딪치면서 '이대로!' 하고 건배했다지요. '남이야 굶 든 말든, 남이야 길바닥에서 자든 말든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 금고에는 돈과 양도성 예금증서가 가득하고, 술집과 백화점에서는 나를 제왕처럼 받들어 주니,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기자.' 괴테의『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런 약 속을 합니다. "내가 순간을 향하여 정지하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고 말하면 너는 나를 꼭꼭 묶어도 좋다." 폭력과 협잡과 부정의가 가득 차 있는 세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 는 이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은 지나가 는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바벨탑은 기필코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돈 위에 세운 인생의 집은 영원할 수 없으며, 권력도 세월과 더불어 덧없이 스러지는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고,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입니 다.


성도는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思慕하는 사람입니다. '思慕'한다는 말은 깊이 생각하고,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모하면 무슨 증상이 나타나지요? 실없는 사 람이 되지요?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러나 할 수 없어 요. 누가 말립니까? 못 말립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면 우리는 늘 그분 생각을 하며 삽니 다. 그리워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일주일의 대부분의 시간은 잊고 지내고, 겨우 주일날 교회 와서나 그분 생각을 한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사랑 은 그런 게 아니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죠. 저희 형이 내일이면 새 집으로 이사하는데 옛 가구들을 그대로 가져가자니 격이 맞지 않는다 며 아쉬워하더군요. 물건에도 격이 있는데,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격이 없어서야 되 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아 거짓을 물리치고, 속된 것에 매이 지 않고, 매사에 스스로를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의의 고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3. 자기 닦음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김교신 선생님이 딸을 출가시킬 때, 어느 지인이 이런 글을 보내왔답니다.

"새로운 집일사록 더럼 더욱 타옵니다.

날마다 쓸고 닦아 티끌 없이 하옵시면

님께서 깃거 오시와 함께 계시오리다."

우리 몸과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실 집입니다. 날마다 쓸고 닦아 티끌없이 하려고 노력해 야 합니다. 세상에 티끌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 까? 그렇지만 그런 티와 흠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를 합리화시키면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다 해도 최선을 다해 그것을 없애려고 애를 쓰면 주님이 가상히 여기십니다.


얼마 전 문화일보(11월 25일자)는 "믿음보다 강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아름다운 이야 기를 하나 소개했습니다. 전국을 돌며 수행중이던 용봉 스님이 신부전증으로 투병해온 진정임 씨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봉 스님의 신장을 이식 받 은 환자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답니다. 10년 동안이나 아내를 뒷수발하면서 신부전증 환 자의 고통을 절감해온 남편 지씨도 스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다른 이 에게 기증했다 합니다. 사랑의 릴레이인 셈입니다. 기자가 용봉 스님에게 어떻게 기독교 신자에게 신장을 기증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만물의 이치가 인연을 따라 서로 돕고 사는 것인데 하물며 생명을 살리는데 종교의 벽이 있어서야 되겠습니 까?" 저는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목사가 아멘 하는 게 이상한가요? 하지만 저는 29세의 젊은 수행자의 말을 통해 우리 속 에 있는 흠과 티를 닦는 길은 사랑의 실천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사랑은 종 교의 차별을 가볍게 뛰어넘어 사람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합니까? 이 근본적인 물음을 늘 던지며 사십 시오. 그리고 마땅히 그러해야 할 길을 택하십시오. 그 길을 걷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의의 고향인 새 하늘과 새 땅 주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날을 진심으 로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오늘도 세상은 나를 사랑해 달라는 피조물들의 신음으 로 시끄럽습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기 위해 우리가 몸을 굽힐 때 우리 몸과 마음 에 끼어 있던 흠과 티끌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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