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 렘23:33-40 (1999/12/12, 성서주일) 오늘 본문 말씀은 개역성경만으로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엄중(嚴重)하다'는 단어를 엄격하고 정중하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본문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게 문제지, 그것을 엄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서 엄중하다는 말은 다른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이 단어를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이라고 번역을 했고, 공동번역은 "짐스러운 야훼의 말씀"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짐스럽다"며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 참 예언자 성경에는 두 종류의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궁전에 머물면서 왕실이 필요로 할 때마다 길흉화복을 예고하고, 복을 빌어주는 궁중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제도권에 편입된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눈과 귀는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권력자들을 향합니다. 그들은 권력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권력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겠어요? 다 잘 되고 있다는 말 아니겠어요? '나라가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편안합니다.' 위기가 닥쳐와도 그들의 말은 매끄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재앙은 우리에게 미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편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을 깨워 제정신 차리도록 하기는커녕 사람들을 더 깊은 영적 잠속에 빠뜨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카리스마적인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두 방향으로 울려퍼집니다. 먼저 예언자는 그 시대의 죄, 곧 왕과 고관들, 직업적인 종교인들의 죄와 불의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백성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은 가차없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다(렘23:29)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쓴소리입니다. 우리의 감성에 상처를 입히고,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이 쓴소리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어두운 역사 속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근원적인 희망과 위로를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아이의 배를 쓸어내리는 어머니의 약손처럼, 민중들의 아픔과 절망을 어루만져 희망을 일깨우는 미풍이기도 했습니다.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힘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좋아할까요?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궁전 예언자들일까요? 쓴소리를 쏟아내는 참 예언자들일까요? 뻔한 이야기이지요? 그들은 듣기 좋은 소리에 인이 박여서 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예레미야가 권력자들과 거짓 예언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을 때,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언자를 조롱합니다.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이 있느냐?"="짐스러운 야훼의 말씀이 있었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기 위해 묻고 있는 겁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그들의 질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대하십니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너희가 곧 내 짐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이런 말씀을 듣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 할 텐데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계십니까? 달콤한 이야기, 듣기 좋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들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쓴소리를 제대로 들어야 우리 삶이 빗나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경 읽기 반성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교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마음에 위안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많이 읽어서 상 타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참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성경을 읽으면,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 삶을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새 하나님의 말씀은 거울이 되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낸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렵다는 핑계로. 부담스럽다는 핑계로.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편하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성경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입니다.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에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아, 건너뛰는 방법도 있네요. 우리의 성경읽기는 마치 감옥에 갇힌 삼손과 같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 가운데 불세출의 영웅이죠. 사자의 입을 찢어 죽일 정도의 힘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과 여자를 너무 좋아했어요. 술 먹으면 꼭 실수를 해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자기 힘을 엉뚱한 데 써서 말썽을 일으키구요. 그는 자기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잘 몰라요. 그저 즐기는거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적국인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삼손이 참 부담이 됩니다. 어떻게든 없애버리려고 하는데 방법이 없어요. 그러다가 그들은 미인계를 씁니다. 들릴라라는 어여쁜 여인을 통해서 그들은 삼손의 힘의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캐냅니다. 마침내 그들은 삼손의 힘의 뿌리인 머리카락을 자르고, 두 눈을 뽑아 감옥에 가두고는 연자맷돌을 돌리게 합니다. 비참하지요? 그런데요, 우리도 혹시 성경에서 "짐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눈을 뽑고, 우리 욕망과 편견의 맷돌을 돌리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력해져버린 것은 아닌지요? 걱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지 않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겪은 비극 뒤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깎였던 그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다."(삿16:22)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해도 그 말씀은 삼손의 머리털처럼 자라나 다시 역사변혁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말씀은 죽지 않는다 예레미야 36장에는 아무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했던 예레미야는 집권자들의 미움을 사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비서인 바룩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불러줍니다. 바룩은 그것을 파피루스로 만든 두루마리에 기록합니다. 예언자는 바룩을 성전에 보내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합니다. 바룩은 그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바룩이 그 두루마리를 읽을 때 왕의 측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예언의 말씀을 듣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예언자의 말을 전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라고 해서는 여후디를 시켜 낭독하게 합니다. 왕은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격분합니다. 자기의 정책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겨울이었기 때문에 왕 앞에는 난로가 있었습니다. 왕은 두루마리에서 서너 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읽은 부분을 칼로 오려서는 난로에 던져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여호야김도 사라지고, 그의 궁전도 불탔습니다. 하지만 약하고 타기 쉬웠던 파피루스에 담겨있던 예언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훌륭하게 보전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을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55:10-11)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 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 냅니다."(4:12)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에게는 부담이 됩니다. 본질에서 떠난 삶이기 때문입니다. 힘겨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달게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행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11:29-30) 얼마 남지 않은 올해, 혼돈과 분주함 속에서 떠돌지 말고, 어떻게든 시간을 확보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고집과 오만과 편견의 사슬을 풀고, 우리 속에 들어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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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1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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