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 삼상2:1-10 (1999/11/28, 대강절 첫째 주) 백지수표 회사에서 쫓겨나 실의에 찬 가장이 푸념조로 말합니다. '백지 수표라도 한 장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빼앗긴 이의 절망감이 이 말 한마디 속에 담겨있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 쉬는 그의 옆구리를 누군가가 톡톡 칩니다. 어린 딸 아이가 하얀 종이를 한 장 내밀면서 말합니다. "받으세요, 아빠!" 아빠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묻습니다. "이게 뭔데…?" "아빠 돈 필요하잖아…내가 만든 백지수표야!" 아직 세상살이가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알 지 못하는 어린 딸애조차 아빠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지요. 아버지는 그 귀여운 고사리 손이 내미는 흰 종이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고마워, 아빠가 아주 잘쓸게! 근데 아빠에게 진짜 백지수표는 너야…" 몇 해 전 신학교 선배가 사진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의 렌즈에 잡힌 도시민들의 애환이 가슴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전시회장을 돌다가 마지막 작품에 눈길이 갔습니다. 복권 판 매 부스에 둘러서서 동전으로 열심히 복권을 긁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는데 그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환하더군요. 하지만 젊은이건, 늙은이건 그들의 얼굴에는 신산스런 세 월을 살아온 이들의 피곤함이 역력했습니다. 나는 선배에게 "형, 이 사진을 보고 있으니 까, 마음이 착잡해지네."하고 말하자, "그러니? 사실 나는 이 사진을 통해 우리의 절망을 드러내려고 했던 건데, 사람들마다 와서는 마지막이 희망으로 끝나니 참 좋다고 하더라" 면서 한숨을 푹 내쉬더군요. 재계의 시간 무관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를 제가 한 까닭은 1999년이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어서인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하지 못하 고,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제대로 살지 못한 세월에 대한 아쉬움 때문 일 겁니다. '제대로 사는 게 어떤 거냐?'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마음을 다해 받드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음이 담긴 일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다해 살지 못합니다. '여기'에 있으면서도 '저기'를 생각하고, '지 금'을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분주하게 오가기 때문입니다. 후회없이 산 사람은 자기의 현재에 충실했던 사람일 겁니다. 가진 것 없어 백지수표라도 한 장 있 었으면 했던 그 젊은 아버지처럼, 복권을 긁고 있었던 그 사람들처럼, 이맘 때쯤이면 우 리도 어딘가 우리 마음을 기댈 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주 님이 오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아이가 내미는 하얀 종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십니다. 일년의 끝 무렵에 성탄절이 있고, 주님의 오 심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4주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기다림의 시간은 자기를 돌아보는 齋戒의 시간입니다. 잎 진 겨울나무들이 맨 몸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것 처럼, 이 기다림의 시간에 우리는 호흡을 가지런히 하고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삶을 가늠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대강절 첫째 주일에 한나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근본을 되짚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기를 갖지 못해 마음 아팠던 한나는 간절 한 기도 끝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서원대로 젖을 뗀 후 아기를 성소에 데려와 하 나님께 바칩니다. 그런 후에 한나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 기의 원통한 심정을 헤아려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이들에게 든든한 반석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찬양입니다. 한나는 이 노래를 통해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해방자 하나님 한나가 경험한 하나님은 해방자이십니다. '해방'은 '갇힘'을 전제로 합니다. 갇히지 않은 사람에게 해방은 의미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어딘가에, 혹은 무언가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고, 자기 체면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 과 명예와 권세의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은 바 깥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향해 말을 건넬 수 없습니다. 손을 내밀 수도 없 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들을 보고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갇혀 있었고, 종교적인 계율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갇혀 있는 줄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뭔가에, 혹은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십니다. 부자는 '부'의 감옥에서 해방하시고, 가난한 자는 '가난'의 감옥에서 해방하십니다. 힘있는 자들은 '힘'의 감옥에서 해방하시 고, 무력한 자들은 '무력함'의 감옥에서 해방하십니다. ·한편 손마른 사람을 향해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던 예수(막3:5)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 손을 붙잡고 일으키셨던 예수(막1:31) ·눈 먼 소녀에게 '에바다' 외침으로 시력을 회복시키셨던 예수(막7:34)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 외침으로 삶의 세계로 불러내셨던 예수(막5:41)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 거지를 향해 '일어나 걸으라'고 했던 베드로(행3:6) 하나님은 갇힌 자들을 해방하셔서 다른 이들과 상호소통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손 내밀어 이웃의 손을 잡고, 넘어진 이를 잡아 일으키고, 이웃의 눈이 되어주고, 절망의 늪에 빠진 이를 찾아가 희망을 일깨울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사람이 라야 '갇힘'에서 해방된 참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 한나는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물 론 이런 표현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평평한 것이고, 허공에 떠있는데, 사방에 기둥이 받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이런 세계관을 가지 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나의 이 고백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터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조금 어렵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기반(God is the ground of all being)이라 는 말이지요. 하나님 없이 홀로 독자적으로 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입 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 식물, 미생물,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호흡하는 공 기, 마시는 물까지도 하나님이 다 주신 것이고, 하나님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말입니 다. 이것은 과학적인 공리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으로 느끼고,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입니다. 내 척추가 나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생명을 곧추 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 생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터전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오고 있었던 가 치관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신뢰의 상실은 우리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병 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이들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정치인들의 말을 믿는 사람이 있나?' 하면서 빈정거립니다. 냉소와 허무주의의 독소가 우 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분은 '무슨 주문이라도 외워서 이 미친 바람을 잠잠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만, 그런 신통한 주문이 어디에 있겠습니 까? 왜 이 지경이 되었지요? 우리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땅의 기둥 들의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매스컴을 통해 한강 다리 중에 교각이 부실해서 물 속에 떠있는 것이 많다는 보도들 본 적이 있습니다. 시멘트가 다 떨어져나가 철근이 드러나고, 흉물스럽게 떠있는 교각이야 말로 우리의 몰골 같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기둥은 그처럼 부실하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시골집 흙담이 생각납니다. 비가 올 때마다 조금씩 씻겨 내려가 기층 부분이 부실 했던 그 흙담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처럼 부실한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지요? 우리 삶의 참된 기둥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백지수표는 하나님이십니다. 깨진 삶의 치유 한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노래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유 리컵이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나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구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대적 한 자는 다 깨졌습니다. 20세기만 생각해 보십시오. 히틀러의 나찌, 무솔리니의 파시즘, 레닌과 스탈린의 피의 통치는 다 깨졌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거역 하는 자는 누구라도 무너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입니다. 역사는 그렇다치고, 우리들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을 거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산산이 찢겨 있습니다. 마음이 앞에서도 이야기 한 것처럼, 사람들이 '여기'에 있으면서도 '저기'를 생각하고, '지금'을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것은 마음이 찢겨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사는 것은 마음이 찢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현대인들은 心亂합니다. 마음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게 풀어질까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이작 싱어의 책 {바보들이 사는 마을, 켈름}을 보면 네 자매가 한 침대에서 자는 집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침이면 다리가 서로 엉켜서 풀 리질 않아요. 그래서 부모는 마을에서 제일 현명한 어른을 찾아가서 해결을 의뢰합니다. 그 현자는 다짜고짜 몽둥이로 이불을 난타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즉시 딸들의 다리가 풀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자의 지혜로움에 놀랐구요. 우리도 몽둥이질을 당해야 얽힌 마음이 풀릴까요? 영어로 '거룩하다'를 뜻하는 단어는 'holy'입니다. 이 단어는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전체'를 뜻하는 'whole'과 어원이 일치합니다. '건강'을 뜻하는 'health'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꿰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은 마음이 이리저리 찢기지 않았다는 말이고, 마음이 찢기지 않았다는 말은 거룩하다는 말이고, 거 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지 않는 생,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생은 조각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평화를 원하십니까? 조각난 마음을 깁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 없 이 멋대로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십시오. 지금 우리는 기다 림의 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기에 여러분 모두 우리 삶의 궁극적 기둥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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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19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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