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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참 빛이 오신다 -히브리서 1:1-4

by 【고동엽】 2022. 7. 3.
일어나라, 참 빛이 오신다


히브리서 1:1-4


(1999/12/25, 성탄절)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텐데, 그 아기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옛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임마누엘'의 약속이 실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믿는 이들에게 이 말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는 어린아이의 손만 잡고 있어도 든든한 법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은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 빛을 비춰주시고, 그들이 마땅히 걸어야 할 삶의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여러 겹의 어둠이 첩첩이 쌓여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오신 때를 가리켜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하던 때였다고 말합니다. 로마 황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주전63년-주후14년)는 오랜 세월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끝에 로마 제국을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가 소위 '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고 부르는 시대는 이때부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그때까지 신들에게만 붙이는 호칭인 '아우구스투스'(높아지신 이)라고 불리우기를 좋아했고, 많은 아첨배들이 그를 '세상의 구주'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로마의 평화는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가 아니라, 로마의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평화이지, 민중들을 위한 평화가 아님을 말입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마 문화 이면에서는 수탈과 억압을 당하던 민중들의 한맺힌 사연이 있었습니다. 로마는 군사력으로 그들의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무덤의 평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때, 즉 역사의 어둠이 지극할 때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이런 소식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해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주님 나심의 소식은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입니다. 천사들은 또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평화는 로마의 평화와 같이 무력에 바탕을 둔 무덤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시작된 진정한 평화인 것입니다. 주님은 평화없는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 세상은 또 다른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주님을 맞아들일만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성한 사람들과 힘있는 사람들이 방마다 가득차 있어서 만삭의 여인이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해산할 수 있는 방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아픔이 되어 다가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수탈당해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도 어둠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보살피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여기던 이들이었지만, 오랜 어둠의 역사 속에 살면서 그들은 어느덧 어둠의 자식들이 되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들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 문제, 내 아픔, 내 상처, 내 욕망에 집착하다 보니 우리 삶에는 다른 이를 위한 여백없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실직자로 전락하여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성한 사람들에 의해 외면당하는 장애인들, 주체성 없이 천민 문화를 추종하는 젊은이들…이들을 맞아들일 여백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의 식탁에 배고픈 이웃들을 맞아들일 여백이 있습니까? 우리 가정에 길잃은 이웃들이 쉬어갈 여백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딱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랑의 여백이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말구유로 상징되는 아픔의 자리, 소외의 자리에 오십니다. 수십 만명이 모이는 교회, 파이프 오르간이 울려퍼지는 웅장한 교회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분을 알아볼 표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적이다.(눅2: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어린아기! 평화의 왕은 너무나 무력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십니다. 누군가의 돌봄없이는 설 수 없는 존재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해결사'로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둠 속에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세상에 희망을 창조하십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일꾼들, 바로 그들을 통해 주님은 거듭거듭 이 땅에 태어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듯하나, 누구도 멸절시킬 수 없는 절대적 생명입니다. 우리 곁에 오신 아기 예수는 연약하지만, 그를 지키려는 부모와 이웃들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기어코 당신의 소명을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불신과 거짓말과 허영심이 빚어낸 어둠 저편에서 주님은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바탕의 본보기이시요, 만물을 보존하시고,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그분을 모실 방이 마련되어 있습니까? 불신과 거짓말, 헛된 욕망, 미움을 몰아내십시오. 채찍을 만들어 하나님의 집을 정화했던 예수님처럼 말씀의 채찍을 들어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몰아내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사십시오. 김기창 화백의 그림, [해를 삼킨 닭]처럼, 가슴에 그리스도라는 빛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떠한 어둠 가운데서도 비틀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과 더불어 주님을 향해 성장해가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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