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 빛이 있어라 하시매! (창 1:3-8)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창세기보다 더 아름답고 귀중한 책이 없다.'고 창세기를 극찬했습니다. 이 아름답고 귀중한 창세기는 태초에 곧 '바라'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창조 사와 선민을 선택하셨다는 선민 사로 요약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2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시작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럼 성경 끝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계22:2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창조로 시작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주님의 은혜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주경학자 매투헨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을 6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다양하다. ⑵아름답다. ⑶정밀하다.
⑷능력이 있다. ⑸질서가 있다. ⑹신비하다.
여러분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명품을 만든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인조공원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거나 만든 것들은 곧 싫증이 나게 됩니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들은 싫증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하늘을 보고 싫증나는 분 있습니까?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꽃을 보고 싫증나는 분 있습니까?
제 아무리 세상 적인 명화라도 365일 그것만 올려다 볼 수도 없습니다. 또 제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도 그것만 24시간이나 1년 간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하루 이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백년이나 천년이 지나도 볼수록 정밀합니다. 보고 또 보아도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또 보고 또 봐도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할/
▶하나님을 거부하는 학교선생이 학생들에게 성경을 비판합니다. '성경의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백성들을 끌고 홍해바다를 건넜다고 하는데 당시 그 바다 깊이가 6인치 밖에 안 되는 갈대밭이었습니다.'
선생의 말이 끝나자 뒤에 있던 학생 한 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큰 소리로 외칩니다. '바로 그때 더 큰 기적이 있었으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 소리에 기분이 불쾌해진 선생이 '아니 무슨 기적이 있었단 말이냐?'라고 묻자, 학생은 여유 있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전 군대를 6인치 깊이 밖에 안 되는 갈대밭에 빠뜨려 죽게 하신 일이야말로 더 큰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기적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할/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빛은 창조하시기 전의 형편을 2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이미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셨으니 아직 그 땅에는 생물이 살 수 있다든지 조직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없었기에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뭐하겠습니까?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빛이 아니면 혼돈도, 공허도, 흑암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해나 달이나 별이나 에덴동산이나 짐승이나 사람을 먼저 만들지 아니하시고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빛이 없다면 제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을 못 보는 헬렌 켈러는 백악관에 들어가면서 '원더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사람에게 경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창조의 원리를 한 사람의 생애 속에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에덴동산만큼이나 아름다운 정원과 큰 호화로운 집에 벽마다 세계적인 명화를 걸어 놓고 장식장마다 국보급 골동품으로 채워놓고 수천만 원짜리 응접세트에 외제 카펫트를 깔아 놓고 또 오디오 박스에서는 세계의 명곡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그토록 거창한 대저택의 주인 되는 사람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앉아 있습니다. 이유는 그 집 주인은 소경에다 귀머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뿐입니까? 마음의 빛이 꺼진 사람들이 겪는 불안은 더욱 심각합니다. 마음의 빛, 마음의 등불이 꺼지면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가 의미 있고 가치 있으려면 빛이 꺼지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의 빛과 양심의 빛과 생명의 빛이 꺼지면 온 세상이 어두워질 것입니다. 온통 세상이 어두워지면 세상은 무질서가 판을 치고 혼돈과 죄악이 날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빛 없이는 못사는 존재입니다. /믿/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주고 드러나게 하고 볼 수 있는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할/
본문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저절로 빛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므로 빛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1장에 무려 10번이나 반복됩니다.
성경 전체 속에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가라사대'가 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1: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 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능력은 '빛이 있으라'는 그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빛이 있으라'고 해서 빛이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 번, 만 번 주문을 외운다고 해서 빛이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세계를 보면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은 절대 권력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왕이나 대통령이나 절대 권력자들은 불가능이 없는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썩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입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고려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여기서 말하는 빛은 4일째 창조된 태양에는 구별되는 에너지원을 가리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4:6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한마디로 이 빛의 근원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피곤하신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노를 저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기우뚱거리며 침몰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죽게 되었는데 왜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하면서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면서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잔잔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그 즉시 바다의 물결의 잔잔해지고 풍랑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잔잔하라! 고요하라!'는 말씀 한마디에 성난 파도가 즉시 잔잔해 졌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설명해 줍니다. 또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님께서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이 한마디 말씀에 나사로가 죽어서 3일이나 지나 냄새까지 났던 그가 수족을 동이고 얼굴을 천으로 감은 채 무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능력이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할/ 그 말씀에 능력임을 기억하십시오,
요11:45절에 보면 이 광경도 목격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고, 12:11절에 보면 이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사건 까닭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정에 임하고, 우리 사업에 임하고, 문제 속에 임하고, 영과 육체 속에 임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가정에는 풍랑이 잠잠할 것이며 걱정과 고민이 고요해질 것입니다. /믿/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면 그대로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반드시 되는 것입니다.
눅7:1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관을 메고 나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통곡을 하는 한 부인과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관을 따라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다 아셨습니다. 그 부인은 얼마 전에 남편을 잃고 이제 하나뿐인 아들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그 아들이 어떤 일로 급사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울지 말라'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관속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할/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아멘!' 하면 그 말씀이 그대로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아멘! 아멘!' 하고 받는 것은 그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 하고 말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눅1: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할/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창조된 여러 피조물에 대해 기쁨으로 승인하는 인준행위, 즉 결제도장을 찍으신 말씀입니다.
'좋았더라'는 말은 '히'어로 '토브'인데 '위대한, 놀라운, 완벽한, 아름다운'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하나님의 천지창조에는 3차에 걸친 분리사역, 즉 나누는 사역이 나옵니다. 본문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고 7절에서 물과 궁창을, 9절에서는 바다와 땅을 나눈다고 했습니다.
후에 바울은 고후6:14절에서 이 '빛과 어두움의 분리'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의에 적용하여 도덕적, 종교적 성결의 원리로 해석'했습니다.
①빛에 대한 교훈을 성경에서 몇 가지만 알아보겠습니다.
요1서 1: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빛 자체로 스스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약1:17절에서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시라'고 했고, 고후4:6절에서 '어두움에 빛이 비치라 하시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즉 이 빛을 만드신 분이 우리 마음에 이 빛을 비추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빛이 되시고 빛을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시51: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또 엡4:23-24절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멘!/
②빛이 있으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도 빛이다'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마5: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 우리도 빛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고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중세에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경건 생활을 하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루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토니오야, 네가 그렇게 애쓰며 살아도 너의 경건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구두를 고치는 노인의 경건보다 못하느니라' 그 음성을 들은 안토니오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구두 고치는 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몹시 누추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열심히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네는 어떻게 사시기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습니까?' '나? 특별하게 사는 것이 없어요. 길에 나와서 그저 이렇게 열심히 구두를 짓고, 또 이렇게 번 돈으로 양식을 사서 식구들과 함께 먹고 가정 예배를 드리며 서로 사랑하고 살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거지요.'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동굴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친절히 대하고 성실히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③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그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⑴먼저 자신을 살피는 생활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자기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요일1:8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죄인임을 바로 고백할 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합니다. 의인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⑵빛 가운데 사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은 가장 궁극적인 원리와 가장 고차원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이것을 터득하고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이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손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손 목사님은 일제 밑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모진 고문과 형무소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은 당시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시던 중, 45년 8월15의 감격으로 형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이 해방의 기쁨이 체 끝나기 전에 우리나라는 사상적인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48년 10월 19일 날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군의 폭거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반란군이 목사님의 두 아들을 잡아 예수쟁이라면서 '예수의 사상을 버리고 공산당 이념에 동조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 그때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할 수 없다. 쏘아라!'
이때 형 동인이가 죽음 앞에 있는 것을 안 동생 동신이가 '여러분! 우리 형님은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대신 내가 죽을 테니 형님을 살려주시오!' 하면서 형님 앞으로 총을 맞으려 달려갑니다.
이것을 안 형이 '동신아 너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니 너는 내대신 부모님을 봉양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폭도들이 형의 눈을 가리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형 동인이가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가지만 너희들은 그 무서운 지옥 형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하느냐'고 하자 화가 난 폭도가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때 붙잡혀 꼼짝할 수 없는 동생이 형의 죽음을 보자 그들을 밀어붙이고 형 앞에 달려가는데 뒤에서 여러 방의 총성이 울리자 그 동생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은 의외로 냉정하게 만큼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아들들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후에 반란군이 다 잡히고 두 아들을 죽인 사람도 붙잡혔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은 여러 곳에 탄원을 내고 힘을 써서 그 범인을 살려내고 그를 양아들을 삼고 신학을 가르치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자식을 죽인 원수, 그러나 손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있었기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할/
⑶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떳떳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일2:10절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디."고 했으며 바울은 행24:16절에서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우리 성도들이 지킬 때, 하나님이 보시고 '좋았더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질서를 말합니다. 여러분! 능력도 좋고 아름다움도 좋지만, 질서 없는 능력, 질서 없는 아름다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은 툭하면 촛불시위로 사회를 어수선하게 합니다. 그들의 요구도 좋고 시위도 좋습니다. 그러나 질서 따라 의사표시를 해야 합니다. 점점 과격해지는 시위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 순종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연법칙도 질서의 능력 앞에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뿐 아니라 해가 뜨고 지고, 모든 순서가 하나님이 명하신 질서 따라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④오늘 우리는 빛에 대하여 배우고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왜 하나님이 좋아하셨을까요?
⑴빛은 새로운 활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⑵빛은 어두움과 싸우는 능력이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은 상반되는 것으로 두 가지가 함께 있게 되면 갈등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좌와 싸워 이기는 능력입니다.
⑶빛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성품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⑷빛은 모든 생명들에게 희망을 주고 소생케 합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생명들은 존재가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희망을 가리킵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왕 야빈의 철병거 구백승에 압제를 당하여 고통이 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지도자로 세워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적들을 다 무찌르고 자유를 얻게 된 그들이 너무 기뻐서 찬송을 하는데, 그 마지막 절이 삿5:3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할/ 아침에 해가 힘있게 돋는 것은 희망참을 가리킵니다. '빛이 있으라' 이것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⑸빛과 복음은 똑같은 구원의 소식입니다. /믿/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어두움을 비치게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심으로 복음의 빛이 세상에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멸망치 않고 영생의 길을 주십니다.
⑹빛은 번영과 잘 됨을 의미합니다. 잠13:9절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이 말씀은, 의인은 모든 것이 잘 되고 악인은 망한다는 뜻입니다. 그 집에 빛이 비친다는 것은 그 집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집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사업장에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잘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마귀는 우리가 이혼하고 죽고 병들고 싸우고 망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오면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아멘!/
⑺빛은 평안함을 줍니다. 시27: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빛 되신 주님이 우리와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한 손길이 나타난 결과입니다. 전능자의 손길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움이 충만한 진선미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보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조하고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는 그 대상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심이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서 관심 있게 보고 양육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피조물을 관심 있게 보고 사랑합니다. /할/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낮과 밤을 나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빛 때문에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이 나누어졌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다는 것은 주야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낮은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밤은 사탄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시24:6절에 보면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낮이건 밤이건 하나님이 지으신 시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날과 시간과 물질을 인간들이 제멋대로 죄짓고 악을 행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낮이 있고 밤이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의 삶에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환경의 밤이 올 때도 있고, 낮이 올 때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5절 하반부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시간을 창조하셨으며, 그 시간을 시와 때와 절기를 따라 구별하셨습니다. 이는 연약한 인간이 순간 순간마다 새롭게 결단하여 살아가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이 말씀을 가지고 많은 학자들은 '하루의 시간의 개념이 24시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로 논란의 대상과 많은 학설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는 말을 문학적인 의미로 하루를 보면 됩니다.
여러분! 밤이 지나며 아침이 되고 12월이 지나면 1월이 오듯이 우리 인생의 길에 어떤 고난과 고통의 밤이 있다 할지라도 새날과 새아침이 다가오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여기서도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좋았다'는 말씀은 '아름답더라, 선하더라' 이런 의미입니다. 그럼 무엇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순종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들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너의 믿음이 좋았더라'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부어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6절부터는 둘째 날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여기 궁창이란 허공, 곧 하늘을 말합니다. 대기권을 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대기권은 윗물과 아랫물로 나뉩니다. 윗물은 구름, 수증기가 올라가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구름 수증기가 적당하게 혼합되어 이 대기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우리들이 제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외선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윗물과 아랫물을 통하여 기후를 조절하시고, 모든 식물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7절에서는 윗물과 아랫물이 말씀한마디로 합당하게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능력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두 가지 특별한 언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본 절에 나오는 '그대로 되니라'는 말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7번 나오고 '그대로 되니라'는 말은 6번이 나옵니다(7,9,11,15,24,30). ▶그렇다면 여기 '그대로 되니라'는 무슨 의미일까요?
⑴하나님의 절대 주권입니다. 엄청난 우주를 창조하시면서 '그대로 되니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절대자라는 강력한 의미입니다. /믿/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면 못 할 것이 없고 하나님이 안 하시려고 하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대로 되니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라는 강력한 의미가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⑵절대 예언입니다. '그대로 되니라' 이는 예언입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입니다. 그런데 첫 장에 '그대로 되니라'가 6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은 나머지 성경도 하나님의 뜻 그대로 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개시가 좋으면 하루가 좋다고 장사하는 이들은 말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싹수를 보면 잘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압니다. 사람은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첫 장이 '그대로 되니라'의 반복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대로 됩니다.
▶성경 속에는 대 주제 예언이 세 가지가 있는데 아주 중요한 영적 원리요 대 주제입니다.
㈀죽은 후에 심판이 있다는 예언입니다. 히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인생은 다 죽음으로 갑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상한 비서를 한 명 두었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침실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대왕이 일어나면 바로 와서 인사를 드리면서 '대왕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지는 비서입니다. 그러면 알렉산더 대왕은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치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모든 결단이 엄숙하고 비장하고 경건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예언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은 역사의 진리이자 위대한 예언입니다. 가을에 거두려면 봄에 심어야 합니다. 내일 거두려면 오늘 심어야 합니다.
㈂믿음대로 된다는 예언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된다'고 하셨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꼭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이루려면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 능력이고 축복이고 기적의 통로입니다. /믿/
⑶'그대로 되니라' 이 말씀 속에는 모든 역사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될 터이니 그대로 순종하라는 순종의 명령입니다. /할/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이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궁창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늘이란 '솨마임'이란 단어로 '높다'에서 유래된 말로 아주 높이, 그리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대기권 전부를 가리킵니다.
여러분, 오늘날 과학적인 지식으로 이 대우주의 생성과정을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은 실토합니다. 천문학자, 지질학자, 물리학자, 또는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우주 생성에 대한 이론들은 하나의 학문적 이론일 뿐 그것에 진실이라고 보장할 길이 없다고 그들은 한결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성경에서만이 궁창 즉 하늘의 신비로 말해주고 그 대기권의 모든 무게로 하나님이 능력으로 오늘도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배우면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또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고 굳센 결단의 결과가 있어져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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