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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어라 하시매! (창 1:3)

by 【고동엽】 2022. 3. 19.

빛이 있어라 하시매! (창 1:3)

 

  ▶주경학자 매투헨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을 6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⑴다양하다.    ⑵아름답다.    ⑶정밀하다.
  ⑷능력이 있다. ⑸질서가 있다. ⑹신비하다.
  여러분 인간이 제 아무리 정교하고 아름다운 명품을 만든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길 수가 없습니다. 제 아무리 인조공원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창조에는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리거나 만든 것들은 곧 싫증이 나게 됩니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들은 싫증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하늘을 보고 싫증나는 분 있습니까? 산을 보고, 바다를 보고, 꽃을 보고 싫증나는 분 있습니까?
  제 아무리 세상 적인 명화라도 365일 그것만 올려다 볼 수도 없습니다. 또 제아무리 위대한 음악이라도 그것만 24시간이나 1년 간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도 하루 이틀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백년이나 천년이 지나도 볼수록 정밀합니다. 보고 또 보아도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또 보고 또 봐도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할/
  본문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저절로 빛이 있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므로 빛이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 뿐 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이 창1장에 무려 10번이나 반복됩니다.
  성경 전체 속에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가라사대'가 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요1: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이 있으라'는 한 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능력은 '빛이 있으라'는 그 한마디 말씀에 빛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빛이 있으라'고 해서 빛이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 번, 만 번 주문을 외운다고 해서 빛이 있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세계를 보면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의 말은 절대 권력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왕이나 대통령이나 절대 권력자들은 불가능이 없는 것처럼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사람들이 가지는 힘이나 권력은 썩기도 하고 타락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하고 무엇을 명령해도 그것이 그대로 실현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빛이 있으라, 하늘이 있으라, 바다가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창조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실재입니다. 거기에는 지체됨도, 고려함도 없이 말씀과 동시에 실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여기서 말하는 빛은 4일째 창조된 태양에는 구별되는 에너지원을 가리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4:6절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한마디로 이 빛의 근원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피곤하신 주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은 노를 저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가다가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기우뚱거리며 침몰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죽게 되었는데 왜 돌아보시지 않습니까?' 하면서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시면서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잔잔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그 즉시 바다의 물결의 잔잔해지고 풍랑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잔잔하라! 고요하라!'는 말씀 한마디에 성난 파도가 즉시 잔잔해 졌다는 것은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설명해 줍니다. 또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신 주님께서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일어나라' 이 한마디 말씀에 나사로가 죽어서 3일이나 지나 냄새까지 났던 그가 수족을 동이고 얼굴을 천으로 감은 채 무덤 속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능력이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할/ 그 말씀에 능력임을 기억하십시오, 요11:45절에 보면 이 광경도 목격했던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고, 12:11절에 보면 이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사건 까닭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가정에 임하고, 우리 사업에 임하고, 문제 속에 임하고, 영과 육체 속에 임하면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가정에는 풍랑이 잠잠할 것이며 걱정과 고민이 고요해질 것입니다. /믿/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면 그대로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반드시 되는 것입니다. 눅7:11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와 함께 나인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성문 가까이 이르렀을 때 관을 메고 나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통곡을 하는 한 부인과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관을 따라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다 아셨습니다. 그 부인은 얼마 전에 남편을 잃고 이제 하나뿐인 아들을 의지하며 살고 있는데 그 아들이 어떤 일로 급사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울지 말라' 그리고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관속의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할/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흐릅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받을 때 '아멘!' 하면 그 말씀이 그대로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아멘! 아멘!' 하고 받는 것은 그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 하고 말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눅1: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말씀하시는 인격이시며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할/

 

  ①빛에 대한 교훈을 성경에서 몇 가지만 알아보겠습니다.
  요1서 1: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라고 했습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빛 자체로 스스로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약1:17절에서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시라'고 했고, 고후4:6절에서 '어두움에 빛이 비치라 하시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즉 이 빛을 만드신 분이 우리 마음에 이 빛을 비추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빛이 되시고 빛을 창조하시고,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시51:10절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또 엡4:23-24절에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멘!/

 

  ②빛이 있으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도 빛이다'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마5:14-16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 우리도 빛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을 주고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중세에 안토니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고 자신은 동굴 속에 들어가서 경건 생활을 하며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루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안토니오야, 네가 그렇게 애쓰며 살아도 너의 경건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구두를 고치는 노인의 경건보다 못하느니라' 그 음성을 들은 안토니오는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구두 고치는 할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몹시 누추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길에서 열심히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네는 어떻게 사시기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습니까?' '나? 특별하게 사는 것이 없어요. 길에 나와서 그저 이렇게 열심히 구두를 짓고, 또 이렇게 번 돈으로 양식을 사서 식구들과 함께 먹고 가정 예배를 드리며 서로 사랑하고 살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거지요.'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동굴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친절히 대하고 성실히 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③하나님은 우리가 빛 가운데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그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은 어떤 생활입니까?
  ⑴먼저 자신을 살피는 생활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자기를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요일1: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빛 가운데 나올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자신이 죄인임을 바로 고백할 때,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 거합니다. 의인은 예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⑵빛 가운데 사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사랑은 가장 궁극적인 원리와 가장 고차원적인 가치이기 때문에 이것을 터득하고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이 일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손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손 목사님은 일제 밑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모진 고문과 형무소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목사님은 당시 여수 애양원 교회에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며 목회를 하시던 중, 45년 8월15의 감격으로 형무소에서 나왔습니다.
  이 해방의 기쁨이 체 끝나기 전에 우리나라는 사상적인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48년  10월 19일 날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군의 폭거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반란군이 목사님의 두 아들을 잡아 예수쟁이라면서 '예수의 사상을 버리고 공산당 이념에 동조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거부하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두 아들의 모습을 보자 그때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할 수 없다. 쏘아라!'
  이때 형 동인이가 죽음 앞에 있는 것을 안 동생 동신이가 '여러분! 우리 형님은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대신 내가 죽을 테니 형님을 살려주시오!' 하면서 형님 앞으로 총을 맞으려 달려갑니다.
  이것을 안 형이 '동신아 너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니 너는 내대신 부모님을 봉양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폭도들이 형의 눈을 가리고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때 형 동인이가 '너희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나는 죽어도 천국에 가지만 너희들은 그 무서운 지옥 형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하느냐'고 하자 화가 난 폭도가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이때 붙잡혀 꼼짝할 수 없는 동생이 형의 죽음을 보자 그들을 밀어붙이고 형 앞에 달려가는데 뒤에서 여러 방의 총성이 울리자 그 동생도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손 목사님은 의외로 냉정하게 만큼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아들들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후에 반란군이 다 잡히고 두 아들을 죽인 사람도 붙잡혔습니다. 그때 손양원 목사님은 여러 곳에 탄원을 내고 힘을 써서 그 범인을 살려내고  그를 양아들을 삼고 신학을 가르치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자식을 죽인 원수, 그러나 손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있었기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할/
  ⑶빛 가운데 거하는 삶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떳떳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요일2:10절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으며 바울은 행24:16절에서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우리 성도들이 지킬 때, 하나님이 보시고 '좋았더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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