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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by 【고동엽】 2022. 2. 11.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죄악이 많은 세상, 어두운 세상'으로 표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 가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⑴어둠 속에서 어둡게 사는 사람, 죄를 짓고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썩었는데 나 하나쯤 썩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나만 유별나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 올바로 살 필요가 있겠는가?' 하며 그냥 탐욕대로, 욕심대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⑵어둠 속에서 죄악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나만은 올바로 살아야 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첩첩 산중에 들어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차라리 혼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⑶세상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나는 세상의 빛으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빛이 되고 소금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어둠의 자녀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지만, 빛의 자녀는 자기 보다 더 높은 신적인 가치관, 더 높은 법칙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빛의 자녀입니다. /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비록 로마는 타락하고 방탕에 빠졌지만 로마에 사는 교회 성도들은 빛 된 삶,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AD 400년경에 어거스틴은 아프리카의 히포라는 곳에 주교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2천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에 한 분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사도 바울 다음으로 영향을 많이 준 신학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성자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는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354년 북 아프리카 다가스테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아버지(파트리 키수스)는 이교도였고, 어머니(모니카)는 경건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두 동생과 함께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쳤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기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동네 유지들이 돈을 모아 유명한 카르 타고 대학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기도와 동네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게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호탕한 기질이 있어 17세의 나이로 여인과 동거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키케르'의 책을 읽고 철학에 흥미를 느껴 바벨론 종교와 헬라 철학과 인도 사상이 종합된 이단 마니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한 때 '카르 타고'에서 가르치기도 했고, 나중에 이태리 밀라노대학에서 교수 생활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삶의 회의를 느끼고 어머니와 동거했던 여인과 아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로마로 갔습니다. 밀라노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암부로시우스 주교를 만나 큰 감화를 받았고 경제적인 안정도 이루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점점 폐인이 되어갔으며,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영의 음성을 듣고 회심의 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 날도 술에 취해 걸어가고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로 노래를 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그에게는 '펴서 읽어라, 펴서 읽어라'로 들렸습니다. 그 순간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성경책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읽었던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본문이 어거스틴이 회심할 때 읽었던 그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는 이 구절을 딱 본 순간에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는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고, 더 읽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의 마지막 부분에 눈이 가는 순간 마치 한줄기 광선 같은 확신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밀려들어와 온갖 어둠과 의심을 내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속에 어둠과 방탕과 음란과 호색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할/
본문은 말씀합니다. 밤에 잔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낮까지 잠을 자면서 침대에 누워 뭉개는 것은 방탕이요 무절제의 게으름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삶의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폭식하고 폭음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정신을 지배당하는 것입니다. 결혼한 부부간에 성적인 만족과 즐거움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 받은 가정을 파괴하는 주범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아내, 남의 남자를 통해서 자기의 성적욕구를 채우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의 기쁨과 가정의 소중함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음란과 호색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끌어내리려 하지말고, 남이 축복 받으면 박수를 쳐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남이 고통 받으면 함께 기도하고 세워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부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이겨나가려면 우리가 빛의 자리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 그분으로 내 모든 것을 채우라. 예수님의 빛으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판단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순종하고, 예수님의 빛으로 행해 나가라.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이다.' /할/
어거스틴은 그 이후로 그는 어두움의 일을 청산하고 빛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386년 32세가 되는 해였습니다. 그 이후 430년 8월 28일 76세로 하나님께 부름 받기까지의 삶은 한마디로 은총의 삶이었습니다.
당시 어거스틴에게 들려진 음성은 이웃집 어린 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였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의 노래 소리였으나 성령이 감동하시니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할/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나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해야 가정이 삽니다. 내가 변하면 교회가 부흥됩니다. 나부터 먼저 변합시다. /할/
우리는 흔히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이 그만두면 '옷을 벗었다'고 표현합니다. 꼭꼭 마음을 숨기는 사람에게 흔히 '가면을 벗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가장 먼저 벗은 자가 누구인가? 아담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벗은 것이 부끄러워 숲 속에 몸을 감추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우고 있을 때 하나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이 때부터 죄를 지은 인간은 육신을 가리 울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옷은 죄의 옷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빛의 갑옷을 입자!' 다시 말하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믿는 성도들의 '바른 삶의 행실'을 의미합니다. /할/ ◀제목소개!▶

 

①성도는 때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11).
여기서 말하는 시기는 연대적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시대적 상황을 의미합니다. 곧 그 시대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할/
그렇다면 여기 '이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어떤 이는 종말의 때를 가리킨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복음의 시대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리라고 약속한 시기이든, 복음의 시대이건 간에 지금이 어느 때이며 지금이 어느 시기인 것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원문에는 '카이로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짧고도 명확한 시기를 말합니다. 특정적인 시기인데 그리스도의 재림전의 시기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참 흥미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 시기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 후에 이 시기를 해설하면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의 안일한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게으름과 태만의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할/
▶잠자는 사람은 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내린 명령은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각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왜 깨어있어야 합니까? 살전5:4-6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니라'
자다가 깨어야 할 이유는 아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아침이 와서 일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잠을 자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심판의 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심판의 때, 역사의 종말을 고하는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이 점점 더 가까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세 가지로 해석하면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의 구원은 이미 받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와 미래의 구원도 이루어져야 됩니다. ▶현재의 구원은 내 생활이 점점 발전해서 성화 되는 것,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구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완전하게 구원받아 하나님 앞에 상을 받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할/
마26:41절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이르러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닥치고, 유혹이 닥쳐와도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은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 아직도 잠자리에 있는 사람, 즉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시험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고, 죄악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세월만 보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 속에는 악한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마귀, 사탄이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대적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 어느 누구도 이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깨어 있는 자는 등에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자입니다(마25:4). 여기 '자다가 깰 때'란 말은 '슬럼프에서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슬럼프 상태는 의욕을 상실해서 완전히 자포자기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할/

 

②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12).
⑴여기 '밤이 깊었다'는 말은 '영계의 암흑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시대의 사람들은 밤중 같은 세상을 살게 됩니다. 어두움은 죄와 마귀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엡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악의 영들'은 마귀의 세력에 동조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통치자들을 일컫습니다.
대낮 같이 밝은 시대에는 어둠이 발붙일 수 없지만 밤중 같은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어둠의 세력에 동화 되어버립니다. 요3: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할/
또 여기 '낮'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하기도 하고, '천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살전5:5-6절에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밤'은 무엇을 말합니까? 밤은 해가 진 오후 6시부터 해가 뜨기 전 오전 6시까지를 말합니다. 어둠이요, 혼돈입니다. 고통이요, 고독이요, 죽음을 말합니다.
'낮'은 무엇을 말합니까? 낮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해가 지는 오후 6시까지를 말합니다. 빛이 있고, 질서가 있고, 축복이 있고,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⑵그럼 '빛의 갑옷을 입자'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영적인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엡5:8절에서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고,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정말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아멘입니까?/
옛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들의 빛'이라고 했고, 유명한 랍비들을 가르쳐 흔히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류에게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인류의 등불'이라고 하고, 민족에게 공헌한 사람을 '민족의 등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 독특하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우리 모두 감사, 감격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빛은 어두움을 밝혀 줍니다. 빛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엄청난 힘을 행사하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삶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하는 삶의 열매를 보여주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빛의 갑옷을 입자'는 말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즉 '믿는 자의 본을 보이며 살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행하다'는 말은 '걸어 다닌다, 혹은 산다, 실천한다.'는 뜻으로,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 즉 삶의 열매를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어두움에 속한 어두움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 믿고 주안에서 빛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믿/
요8:12절에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아멘!/ 어두움은 더럽고 악한 죄악된 생활을 의미하고, 빛은 거룩하고 깨끗한 생활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 가장 많이 강조하신 말씀이 '빛'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신앙인이고,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 상태를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여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갑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할/
▶여기서 믿음의 본질 몇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믿음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삶의 질이 좋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빛으로 모신 성도는 인생의 길을 비춰 주심으로 천국의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보고 천국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의 눈이 뜨여져서 죄도 보고 자신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죄와, 세상과,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믿음은 바라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면 소망을 갖게 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내세를 갖게 됩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천국을 보게 하고 영적인 안목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찾게 해 줍니다. 죽을 자리에서 살아나게 합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성경은 주안에서 빛의 자녀된 우리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고 계십니다.
마5: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게 되면 빛의 열매가 나타나게 됩니다. 나무가 햇빛을 받으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이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의 빛을 받아 빛 가운데 살 때에 빛의 착한 행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아멘!/
▶초대교회 김익두 목사가 그 착한 행실의 열매를 맺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하루는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데 어떤 술 취한 사람이 그 앞을 가로막고 시비를 하다가 주먹으로 막 때리더랍니다. 말없이 다 맞고 난 후에 '형님 다 때렸소?'하고 물었더니 술 취한 사람이 '그래 다 때렸다'며 거칠게 말합니다.
그때 김 목사님이 '예수는 내가 믿고 덕은 자네가 보았네'라고 말했지만, 술 취한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영문을 몰라 함으로 '내가 김익두야'라고 자신을 밝히니 이 사람이 깜짝 놀라 술이 깨어 '형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빌었다고 합니다. '형님 지금부터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할 때 '어떠하긴 뭘 어떠하나 나를 따라와야지'해서 용서해주고 부흥회 데리고 가서 예수를 영접하고 큰 일꾼이 되었답니다. /할/


▶빛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유혹의 욕심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기 '유혹'이란 '나쁜 쪽으로 나를 이끌어 가려는 손짓과 몸짓 그리고 말을 의미'합니다. '교회 가자, 예수 믿자, 바로 살라'는 말은 유혹이 아닙니다. /할/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분노와 질투심을 이기지 못해 동생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던 롯의 처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통제하지 못한 탓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헛된 욕심과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욕심'이란 단어는 중립적인 의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욕심이 좋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욕심은 신앙의 진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욕심은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욕심이라는 단어 앞에 유혹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옛 사람이 따르던 욕심은 죄로 유인하는 그릇된 욕심입니다. 유혹은 시작이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비참하고 불행합니다. /믿/할/
㈁썩어져 가는 구습과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겐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옛것이나 옛날로 돌아가고픈 본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의 습관을 무 자르듯 절단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수술해 버리라, 잘아 버리라'는 말입니다.
▶사실 수술하고 잘라 내려면 아픔이 따라야 하고 결단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단입니다. 자기와의 싸움도, 내내 마시던 술을 끊는 것도 결단해야 합니다. 저도 예수 밖에 있을 때 술꾼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술도 결단하니까 끊어졌습니다. /믿/
내내 피우던 담배를 끊는 것도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자기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노력하고 결단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물론 한잔 술이나 한 개비의 담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요, 거룩하고 존귀한 자입니다. 그래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습관들이 있습니다. 나쁜 버릇도 있고, 옳지 못한 생각도 있고, 옳지 못한 고집이나, 자존심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끊으라는 말입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었으면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셨습니다.
엡4:24절에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벗어야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옷을 벗고 입는 것은 정상인만 가능합니다. 정신병자는 길거리에서도 옷을 벗고, 여름에도 오버코트를 걸치고 다닙니다.
누더기, 옛 습관 나쁜 옷을 벗었으면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려면 옛 것을 그리워하면 안 됩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해 미련을 가져도 안 됩니다. 자동차 운전석 윗면에 거울이 걸려있습니다. 용도는 뒷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백미러'라고 부르는 그 거울은 뒤쪽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로 가기 위해 백미러를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잘 가기 위해 백미러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거울삼아 앞으로 바로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새사람을 입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빛의 갑옷을 입는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할/ 지금까지는 나를 따르고 내 경험을 따르며 내가 가진 것을 따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아멘!/
제 아무리 호강하고 사랑 받던 사람이라도 머리 깎고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면 그 시간부터 교관의 호령에 따라야 하고, 군기를 따라야 합니다. 젊어서처럼 제멋대로 굴다가 불벼락이 떨어집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의 변화가 되어야 하고 그 다음 하나님을 따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가다 보면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인격 가운데서 두세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격의 초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고 그분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 새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되고 진실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할/ 주님은 새 사람이 되는 비결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메이크업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피부 미용에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질 것, ㈁충분한 휴식과 수면을 취할 것, ㈂자기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거나 근심과 걱정을 품으면 화장이 잘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 아무리 외제 화장품이라도 자기 피부에 맞지 않으면 피부에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화장도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할/
새사람은 마음이 달라지는 부분, 생각이 변한 사람입니다. 쓸데없는 욕심도 버리고 시기와 원망도 버리고 믿음을 깨뜨리는 근심, 걱정도, 불평불만도 버리고 순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나는 것이 곧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2:5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또 '새 사람을 입으라'의 원 뜻은 '새 마음을 품으라'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뜻을 품고 새로운 생각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새 시대에는 새 생활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뜻과 꿈과 생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새 생각과 새 꿈은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합니다. 사람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꿈을 품고 살아가면 그 꿈과 계획이 언젠가는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루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 이것이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아멘!/

 

③빛의 갑옷을 입은 자들에게 바른 생활의 철학을 당부하고 있습니다(13-14).
⑴단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 '단정히 행하라'는 말은 올바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면서 화장을 하고 몸을 단장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단정한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할/
⑵방탕과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방탕'은 원래 '축제의 행렬'을 뜻하는데 축제가 끝난 뒤의 식욕과 몸의 쾌락을 필요 이상으로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술 취함은 방탕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방탕과 술취함은 타락으로 나아가는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방탕한 자들을 보면 다 술 취하게 되며, 술 취하는 자들은 방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방탕은 식욕과 몸의 쾌락을 필요 이상으로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욕의 무절제한 추구입니다. 술 취함의 상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술을 마실 때 처음에는 점잖게 사람이 술을 먹다가 나중에는 술이 술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취하면 술이 사람을 마셔 버립니다. 그러므로 술 취하면 자연히 방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방탕과 술 취하지 말라'는 말은 밤늦게 까지 먹고, 마시면서 술잔치 하는 무절제한 삶, 흥청망청하는 삶을 금하라는 말입니다. /할/
엡5;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도가 입에 술을 대는 것은 방탕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⑶술 취한 다음에 오는 것이 무엇인가? '음란과 호색'입니다. 여기 음란이란 말은 무절제한 정욕이 낳은 부도덕한 성행위를 말합니다. 호색이란 분별 없는 성욕을 말합니다. 창19:5절에 타락한 소돔성에 천사들과 상관하려 했던 무리들이 호색꾼들입니다.
⑷'쟁투와 시기'는 무엇인가? 호색꾼들이 나중에 서로 다투게 됩니다. 어두움의 결과가 다툼으로 끝을 맺습니다. 쟁투와 시기의 처음은 작은 미움에서 시작됩니다. 미움이 극에 달할 때, 시기가 생기며, 시기하다 보면 분쟁하게 되고 서로 쟁투하게 됩니다. 이는 그릇된 편견과 아집과 독선에서 나옵니다.
여기 '쟁투'는 감정의 격정을 말하고, '시기'는 남의 성공에 대한 편견 즉 남의 행복을 원치 않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이 누리는 축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입니다.
현대는 감정이 격정 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스승도 몰라보고, 부모도 몰라보는 시대가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도 없다고 함으로 인간의 감정은 격정 일로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5:21절에서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멘!/
오늘날 세상에는 방탕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술 취한 사람도 많습니다. 싸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들은 범죄하고 죄악에 빠집니다(창19:32). 병에 걸립니다(잠14:30). 모든 재물을 다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됩니다(잠28:19). 화가 임하게 됩니다(사5:11). 그리고 심판을 받습니다(눅21:34).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을 당합니다(갈5:15).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갈5:19-21). /할/
⑸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일을 끊어야 합니다(14).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 세 가지는 '의식주'입니다. 그런데 먹는 문제보다 입는 문제가 더 앞세우고 있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란 말도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나라는 입는 옷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파리에서 새로 생긴 패션이 뉴욕이나 동경에서 유행하기 전에 먼저 서울에서 유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옷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런 세상 화려한 패션을 입으라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갑옷을 입으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하십니다.
▶옷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예수로 옷 입는다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있습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습니다. 의사나 간호원은 흰 가운을 입습니다. 경찰은 경찰복을 입습니다. 이처럼 옷은 사람의 신분을 짐작케 함과 동시에 민족이나 국적을 짐작해 하기도 합니다.
기모노를 입고 있으면 분명히 일본 사람일 것이고, 아오자이를 입고 있으면 분명히 중국 사람일 것이고, 한복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한국 사람일 것입니다. 이처럼 옷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로 믿고 사는 크리스챤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산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성도다. 목사다, 장로다. 권사다. 집사다'라고 어떤 상황에서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장된 성도요, 무늬만 가진 신앙 인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드러내 놓고 잘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옷은 품위를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위를 지니고 그 품위를 드러내고 산다는 뜻입니다.
사실 입고 있는 옷을 보아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 교양이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옷차림이 단정하면 어딘지 모르게 교양 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끼가 있어 보이고 허세가 있어 보입니다. 사람은 겉치레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벧전3;3절 이하에서 경고하기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자들이기에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들입니다. 바울은 오늘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로 옷 입고 살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정직하게 바르게 성실하게 살라는 권면인 줄 믿습니다. /할/
㈂옷은 보호의 수단입니다. 예수로 옷 입고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보호자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옷은 우리의 몸을 보호해 줍니다. 북극에 사는 에스키모 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서 털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고 털신을 신고 다닌답니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보호수단으로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낡아지고 없어지고 내 곁을 떠날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며 사는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인기도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날이 오고야 맙니다.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는 영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했습니다. /할/


▶그러면 그리스도가 입혀 준 옷은 어떤 옷인가?
㈀속죄의 옷입니다. 창3:21절에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범죄한 아담이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피 묻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바로 이 옷은 주님이 우리의 부끄러운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그 옷을 벗겨 우리에게 속죄의 옷을 갈보리에서 입혀 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추한 죄인이라도 주님이 주신 피 묻은 옷을 입기만 하면 허물과 죄에서 가리움을 받게 됩니다. /믿/
㈁온유와 겸손의 옷입니다. 마11:28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도 종의 형체를 입고 구유에 누우신 몸으로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머리 둘 곳이 없는 몸으로 구원사역을 행하셨으며, 최후에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구원사역에서 이러한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응답을 받고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됩니다. /할/
㈂영화(영광)의 옷입니다. 눅15:22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탕자는 아비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 방탕하여 굶어서 주려 죽는 돼지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갈라 입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이웃을 불러 잔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후일에 천국에 가서 이러한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입을 옷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옷입니다. /아멘!/


▶빛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이 보입니까?
㈀예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천자가 됩니다. 바울은 고전13:4-7절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할/
㈁섬김의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의 삶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들을 섬기고 직분 자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어린 사람들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예수님도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마20: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멘!/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할/
여러분, 빛의 갑옷을 입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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