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나타나는 참된 섬김(요한복음 13:14–15).
주님의 식탁이 차려지기 직전, 어둠의 숨결이 방 안을 스치고 있었습니다. 배신의 그림자가 가까이 왔고, 제자들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의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큰가, 누가 옳은가, 누가 먼저인가—그런 질문들은 말로 꺼내지지 않아도 눈빛과 침묵 사이에 떠다니곤 합니다. 그런데 그때,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손에 물을 떠 오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십니다. 사람의 손이 가장 피하려 드는 더러움, 발의 먼지와 땀과 냄새를 그 거룩한 손이 붙드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씻기십니다. 그 장면은 단지 감동적인 미담이 아니라, 복음의 심장과 성도의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계시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씀은 명령이면서도 초대이며, 윤리이면서도 복음입니다. 주님은 먼저 “내가” 하셨고, 그다음에 “너희도” 하라고 하십니다. 기독교의 참된 섬김은 인간의 결심에서 솟아오르는 억지의 도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낮아지신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질문은 단순히 “나는 섬기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주님께 씻김을 받고 있는가? 주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방식으로 섬기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주”와 “선생”으로 분명히 밝히십니다. 그분은 권위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드러내십니다. 세상은 권위를 가지면 위에 앉으려 하지만, 주님은 권위를 가지셨기에 내려가십니다. 세상은 높아지려 애쓰지만, 주님은 이미 영광을 가지셨기에 낮아지십니다. 우리가 흔히 섬김을 ‘약자의 선택’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섬김은 약함이 아니라 능력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힘, 자신을 내어주는 권능, 사랑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그 섬김은 단지 친절이 아니라 십자가의 방향을 향한 발걸음입니다. 수건은 십자가의 예고편처럼 허리에 매여 있고, 물은 정결케 하는 은혜의 표지처럼 대야에 담겨 있으며, 무릎 꿇은 자세는 곧 주님이 이루실 대속의 낮아지심을 미리 보여 줍니다.
여기서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말씀을 너무 쉽게 ‘서로 도우며 살라’ 정도로 흐릿하게 만들면, 이 본문의 칼날 같은 선명함을 놓치게 됩니다. 발은 ‘눈에 띄지 않는 영역’입니다. 발을 씻는 일은 ‘내가 드러나지 않는 섬김’입니다. 발은 그 사람의 길을 담고 있습니다. 먼지가 묻어 있는 발은 그 사람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는다는 것은, 다른 이의 지친 길과 상처 난 행로를 정죄하기보다 돌보고 회복시키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삶의 자리에는 먼지뿐 아니라 부끄러움도, 실패도, 눈물도 묻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영역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자리로 들어가십니다. 참된 섬김은 사람의 ‘빛나는 장점’이 아니라 ‘지친 현실’을 만납니다. 박수 받을 만한 부분이 아니라,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 손은 비난이 아니라 물과 수건을 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는 일을 어려워합니까. 어떤 때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의 발을?”이라는 마음이 조용히 올라옵니다. 어떤 때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면 이용당하지 않을까?” 어떤 때는 피곤함 때문입니다. “나도 지쳤는데, 왜 또 내가?” 어떤 때는 상처 때문입니다. “예전에 섬겼다가 배신당했는데.” 그런데 주님은 이 모든 계산을 깨뜨리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완벽하기 때문에 씻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방 안에는 곧 도망갈 제자들도 있었고, 곧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고, 이미 배신을 품은 유다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기 쉬운 사람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섬기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섬김은 상대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의 성품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성도의 섬김을 가능하게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공로로 세우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의 유일한 의로 세웁니다. 그러므로 섬김은 구원을 얻기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섬김으로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이 “본을 보였다”고 하실 때, 그 본은 단지 ‘행동의 예시’가 아니라 ‘복음이 만들어 내는 새 삶의 형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기실 때, 우리는 더 이상 섬김을 ‘손해’로만 계산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섬김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번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섬김에는 놀라운 균형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물을 길어야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하고, 수건으로 닦아야 합니다. 사랑은 추상적 감정으로 머무르지 않고 손끝으로 내려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영적으로 깊습니다. 주님의 섬김은 단지 발을 깨끗하게 하는 위생의 문제가 아니라,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깨끗하게 하시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섬김도 이 두 방향을 함께 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필요를 돌보되, 그 돌봄이 복음과 무관한 인본주의로 흐르지 않게 하며, 영적인 말을 하되 삶의 자리에서 손을 더럽히지 않는 말뿐인 경건으로 끝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진짜 섬김은 복음의 빛을 품고 현실의 먼지를 닦아 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서로”라는 단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누군가에게만 섬김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교회 안에서 섬김은 몇몇 헌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 전체의 호흡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는 공동체는 서로를 ‘소비’하지 않고 ‘세워’ 줍니다. 서로의 연약함을 비웃지 않고 덮어 줍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평가하지 않고 들어 줍니다. 서로의 눈물을 과장하지 않고 닦아 줍니다. 그러한 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말로 “우리는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로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공동체는 도시 한복판에서 조용히 빛을 냅니다. 그 빛은 화려한 조명처럼 눈을 부시게 하기보다, 밤길의 등불처럼 길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서로 섬기라”는 말씀은 결코 감정의 폭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늘 따뜻한 마음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감정으로 시작될 수 있으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의지와 순종으로 지속됩니다. 때로 섬김은 마음이 뜨거워서가 아니라, 주님이 그러하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러하라 하시기에, 한 걸음 내딛는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순종이 반복될 때,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차가웠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으십니다. 섬김은 마음이 완벽해진 다음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앞에 무릎 꿇을 때 시작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복음적 경계가 필요합니다. 섬김은 자기 구원의 확신을 만들기 위한 불안한 증거 쌓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렇게 섬겼으니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겠지”라는 마음은 섬김을 거래로 변질시킵니다. 또한 섬김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칭찬이 섬김의 연료가 되면, 칭찬이 줄어들 때 섬김도 함께 꺼집니다. 주님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지, 월계관을 머리에 얹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참된 섬김은 사람의 눈을 향해 서지 않고, 주님의 얼굴을 향해 서 있습니다. 사람의 박수가 잦아들어도 주님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라는 말씀이 가슴에서 울리면, 우리는 다시 물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또 다른 위험도 있습니다. 섬김을 너무 ‘영웅적 희생’으로만 만들어서, 결국 한 사람이 다 짊어지고 무너지는 경우입니다. 주님의 섬김은 무한히 자기를 소진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를 세우는 방식입니다. “서로”라는 말씀 속에는 부담의 분산과 은혜의 순환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늘 섬기고 누군가는 늘 받기만 하는 구조는 건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공동체가 서로의 발을 씻는 상호성을 품도록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때로 참된 섬김은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이기도 합니다.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섬김을 거절하는 교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우리는 배우게 됩니다. 은혜로 사는 법을. 그리고 은혜로 섬기는 법을.
이 본문에서 “본”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기준을 줍니다. 세상에도 섬김이 있고, 교회 밖에도 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 주신 본은 단지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방향’입니다. 주님은 섬기되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낮아지되 거룩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섬김도 진리 위에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정당화하거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덮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진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찢고, 정죄라는 칼로 상처를 더 깊게 내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손은 진리를 품은 사랑이었고, 사랑을 입은 진리였습니다.
이제 우리의 일상으로 내려와 보겠습니다. 오늘날 발을 씻는 모습은 어디에서 나타나겠습니까. 가정에서, 서로의 말투를 닦아 주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날카로운 한마디가 튀어나오려 할 때, 상대의 지친 발을 떠올리고 말의 모서리를 깎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늘 보이지 않는 자리를 지키는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실수한 동료를 조롱하기보다 수습을 함께하고 다시 일어설 길을 마련해 주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병상에서, 간병의 반복되는 동작 속에 사랑을 새기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청년의 혼란 속에서, 판단보다 동행을 택하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노년의 외로움 속에서, 시간을 내어 귀 기울이는 것이 발을 씻는 일일 수 있습니다. 발은 늘 땅을 딛습니다. 그러니 발을 씻는 사랑은 늘 땅의 자리에서, 현실의 자리에서, 작은 반복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화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어느 교회에 매주 예배가 끝나면 홀로 남아 의자 밑을 살피며 쓰레기를 주워 담는 어르신이 계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청소 봉사를 맡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청년 한 명이 “왜 늘 혼자 남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르신은 잠시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예배드리러 온 사람들이 발에 묻혀 온 먼지가 여기저기 떨어지잖니. 주님이 내 먼지를 씻어 주셨는데, 내가 남의 먼지를 좀 주워도 괜찮지 않겠니.” 그 말 속에는 자기를 드러내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거창한 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설교처럼 울렸습니다. 주님께 씻김 받은 사람은, 남의 먼지를 ‘더럽다’고만 말하지 않고, 조용히 주워 담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섬김은 종종 이렇게 이름 없이, 박수 없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옳으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옳음은 단지 예절의 옳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합당한 옳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법을 배우는데, 그것은 사랑의 법입니다. 이 사랑은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십자가처럼 단단합니다. 또한 이 사랑은 차갑지 않습니다. 수건처럼 따뜻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라는 방향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섬김도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너를 위하여’로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섬김이라는 이름으로도 결국 자신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의 나침반을 돌리시면, 우리는 점점 더 “주님, 오늘도 제가 누군가의 발을 씻을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우리를 주님의 발 앞에 다시 앉힙니다.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기 전에, 먼저 주님께 씻김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씻김은 죄 사함의 은혜이며, 매일의 회개와 성화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잊으면 섬김은 곧 메말라 버립니다. 은혜를 붙들면 섬김은 다시 샘처럼 솟습니다.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주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두르셨고, 피와 물로 우리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를 씻기시며,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의 눈빛 아래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사랑을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흘려보내게 하소서. 제 손이 높아지는 데 쓰이지 않고, 낮아지는 데 쓰이게 하소서. 제 마음이 판단으로 굳어지지 않고, 긍휼로 부드러워지게 하소서. 제 삶이 말로만 빛나지 않고, 수건처럼 조용히 빛나게 하소서.”
설교요약
주님은 자신이 “주와 선생”이심을 밝히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참된 권위와 참된 사랑의 섬김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요 13:14–15). 성도의 섬김은 공로를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씻김 받은 자에게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라”는 명령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는 필요를 돌보며, 상대의 연약함과 먼지를 정죄가 아니라 회복의 사랑으로 대하는 구체적 삶을 요구합니다. 진리 위의 사랑, 은혜에서 비롯되는 겸손, 공동체적 상호 섬김이 주님의 본을 따르는 길입니다.
묵상 포인트
- 주님께서 “내가” 먼저 섬기셨다는 사실이 오늘 제 마음의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 저는 섬김을 ‘거래’(칭찬, 인정, 보상)로 바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 제가 피하고 싶은 “발의 영역”(지저분함, 번거로움, 반복, 오해)을 주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 “서로”라는 말씀 앞에서, 저는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왜곡된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 사랑의 섬김이 진리를 희생하지 않되, 진리가 사랑을 찢지 않게 하려면 저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강해
요 13:14–15에서 주님은 자신의 신분(주, 선생)을 근거로 섬김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십니다. 이는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의 목적을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삶이 복음의 형태를 닮도록 하십니다. “발을 씻는다”는 행위는 당시 종의 역할을 상징하며, 예수님의 낮아지심(케노시스)과 십자가의 길을 예표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섬김은 단순한 예절을 넘어, 그리스도의 구속 은혜에 참여한 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성화의 실제입니다. 섬김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며, 율법적 자기의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감사의 순종입니다.
주석
- “옳으니라”: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마땅함, 합당함의 선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 질서에 부합함을 뜻합니다.
- “본을 보였노라”: 모범 제시 이상의 의미로, 제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패턴’(그리스도 중심의 낮아짐, 사랑의 실천)을 확정합니다.
- “서로”: 개인적 영웅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상호 돌봄을 전제합니다. 섬김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되지 않게 하며, 공동체 전체가 은혜의 순환을 이루게 합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κύριος(퀴리오스, 주)” / “διδάσκαλος(디다스칼로스, 선생)”: 예수님의 권위와 정체성을 나타내며, 그 권위가 섬김으로 표현됨을 강조합니다.
- “νίπτω(닙토, 씻다)”와 “πόδας(포다스, 발)”: ‘부분을 씻다’의 뉘앙스가 있어, 일상의 더러움과 반복되는 필요를 다루는 섬김의 실제성을 시사합니다.
- “ὀφείλετε(오페일레테, 너희가 마땅히…해야 한다)”: 도덕적 취향이 아니라 의무, 빚의 개념을 담아 ‘은혜로 빚진 자의 합당한 삶’이라는 윤리적 긴장을 줍니다.
- “ὑπόδειγμα(휘포데이그마, 본/모범)”: 따라야 할 패턴, 틀을 의미하여 교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구현해야 할 삶의 형식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본 교문은 신약이지만, 구약의 섬김과 겸손의 영적 뿌리를 비추기 위해 핵심 어휘를 연결해 묵상할 수 있습니다.
- “חֶסֶד(헤세드, 인애/언약적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이며, 주님의 섬김도 변덕이 아닌 끝까지 가는 사랑의 신실함을 드러냅니다.
- “עָנָו(아나브, 온유/겸손한 자)” 계열의 의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는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섬김으로 열매 맺습니다.
- “רָחַץ(라하츠, 씻다)”의 이미지: 정결의 개념은 단지 외적 위생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함을 상징하며, 주님의 씻김은 구원의 정결을 예표합니다.
금언
- 섬김은 낮아지는 기술이 아니라, 사랑이 흘러내리는 방향입니다.
- 은혜를 잊은 섬김은 의무가 되고, 은혜를 붙든 섬김은 기쁨이 됩니다.
- 주님을 닮는 길은 높은 자리로 오르는 계단이 아니라, 수건을 두르는 길입니다.
- 사람의 발을 씻는 손은,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 받은 손입니다.
- 참된 권위는 명령으로만 서지 않고, 무릎으로 증명됩니다.
신학적 정리
- 섬김은 칭의의 조건이 아니라 성화의 열매입니다.
-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단지 윤리적 본보기만이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 사건(십자가)을 향한 길이며, 성도의 섬김은 그 구속 은혜에 뿌리내린 응답입니다.
- 교회는 ‘서로’ 발을 씻는 공동체로서, 은혜의 상호성(서로 돌봄, 서로 세움)을 통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드러냅니다.
주제별 정리
- 사랑: 감정의 온도보다 십자가의 방향으로 확인됩니다.
- 겸손: 자기 비하가 아니라 자기중심성의 포기입니다.
- 공동체: 개인의 선행 집합이 아니라 서로의 먼지를 닦아 주는 관계의 그물입니다.
- 거룩: 정죄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람을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목회적 정리
- 섬김이 ‘소진’으로만 흐를 때는 공동체적 “서로”를 회복해야 합니다.
- 섬김이 ‘자기 의’로 흐를 때는 십자가의 은혜 앞에 다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 섬김이 ‘말’에 머물 때는 작은 실천 하나를 정해 반복함으로 사랑의 습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 섬김이 ‘두려움’에 막힐 때는 주님이 불완전한 제자들을 섬기셨음을 기억하며 안전함을 은혜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제가 먼저 낮아져야 할 관계 하나를 정하고, 말 한마디와 태도 하나를 바꾸겠습니다.
- 드러나지 않는 섬김 하나를 선택해, 칭찬 없이도 기쁘게 하겠습니다(가정, 교회, 직장 중 한 자리).
- 판단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은 수건을 드셨다”는 문장을 마음에 새기고, 회복의 언어를 선택하겠습니다.
-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겸손을 배우겠습니다.
-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씻김을 구하며, 섬김을 의무가 아니라 은혜의 흐름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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