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는 길 (시편 18편 1-16절)
<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십시오 >
저는 가끔 초저녁에 잠들고 자정쯤 깹니다. 그때부터 새벽 4시까지 고요한 시간에 가장 말씀준비가 잘 됩니다. 그리고 4시쯤 되면 잠깐 눈을 붙이고 4시 30분부터 서서히 새벽기도회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새벽 심령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도 밝아지고 힘도 납니다. 스스로 기도해도 힘이 되지만 남이 기도하는 모습을 봐도 힘이 됩니다. 성도에게 믿고 기도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새벽기도 시간은 상처가 씻기는 놀라운 치유시간이고 각종 염려가 사라지고 대 평안을 얻는 시간입니다.
요새 빈익빈부익부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주택 문제와 실직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절망과 외로움이 읽혀집니다. 그런 현대인의 모습을 약 3천 년 전에 살았던 솔로몬은 전도서 1장 8절에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않는다.”고 잘 묘사했습니다. 그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이 힘겹습니다.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냅니까? 열심히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자신을 잘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45장을 보면 바룩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비서로서 예레미야가 받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후 그것을 백성들 앞에서 낭독하곤 했습니다. 그 첫째 예언서가 분노한 여호야김 왕에 의해 불태워졌지만(렘 36)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예레미야의 구술에 따라 둘째 예언서를 기록했습니다.
그처럼 강철 의지를 가졌지만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동족들이 겪는 참상을 보면서 마침내 그도 탄식했습니다. “하나님! 슬픕니다! 저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탄식으로 피곤해 평안함이 없습니다(렘 45:3).” 그에게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렘 45:4).” 하나님의 주권과 손길과 섭리를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옛말에 “불여의사 십상팔구(不如意事 十常八九)”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보통 80-90%는 된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열에 한두 번 찾아오는 좋은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합니다. 그래서 빈익빈부익부의 역사가 계속되지 않고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 따라 빈부가 역전되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가끔 속상한 일을 당해도 그 일도 하나님의 선한 계획과 섭리 안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또한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도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어렵고 힘들 때 낙심하고 의심하면 두려움과 절망은 더 기승을 부리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믿으면 두려움과 절망은 사라지고 다시 용기와 희망이 생깁니다.
삶이 힘겹고 환경이 어둡다고 탄식하지 말고 “내가 등불 하나는 밝히며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물질을 헛되게 쓰는 것도 사치지만 시간과 재능과 감정을 헛되게 낭비하는 것도 사치입니다. 그처럼 낙심과 절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정의 사회를 이루는데 작은 힘을 보태려고 하면 하나님이 힘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뜻을 이루려고 하면 곧 절망이 찾아오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곧 희망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힘든 세상에 희망을 전해주라는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사명을 잘 이루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인사이동과 재배치 계획에 의해 지금 이 시점에 우리를 한 말씀식구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그 사명을 늘 의식하며 살 때 하나님이 덤으로 우리의 삶과 가정과 자녀와 꿈과 비전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제 감정과 욕심에 이끌려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이끌려 사십시오. 그처럼 하나님의 뜻과 음성에 응답하며 살려고 할 때 어깨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와 권태와 고통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 다윗과 같은 인물이 되는 길 >
왜 다윗이 극심한 고난을 극복하고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까?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체험했지만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결론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본문의 부제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다윗은 극심한 어려움이 지났을 때 이 찬송 시편을 썼습니다. 다윗은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문제가 다 해결되었을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고 사랑의 고백을 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최상의 힘의 원천으로 알고 사랑했습니다. 그는 힘을 달라는 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처럼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체질화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이상의 사랑을 신기하게 사방을 통해서 받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안락보다 성도의 믿음과 인격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음지와 양지를 번갈아주시면서 믿음과 인격을 다듬습니다. 다윗도 오랫동안 순풍과 역풍을 지나면서 정금 같은 믿음과 인격으로 다듬어져 본문 1절의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을 반석, 요새, 구원자,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의 7가지로 표현하며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2절).
길이 막힌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홍해에서도 길을 만드시고 광야에서도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날 수 있고 요셉처럼 종에서 총리가 되는 인생 역전의 역사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의 공산치하에서 14년간 감옥생활을 했던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감옥에서 밤마다 주님과 춤을 추었고 기쁨에 넘쳐 지냈습니다. 출옥 후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독방에서 14년을 견뎠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내적인 기쁨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무서운 고문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여 년을 종살이 할 때도 모른 척 하시지 않고 그때 모세를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최선의 길을 준비하시며 하나님이 역사하실 최적의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축복의 때를 준비하십시오.
2. 어려울 때 기도하십시오
다윗은 어려울 때 찬송 받으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3절). 그는 ‘사망의 줄, 불의의 창수, 스올의 줄, 사망의 올무’로 인한 극심한 어려움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4-6절). 고난 중의 기도는 어떤 소리보다 더 하나님의 마음을 파고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과 기도를 축복의 재료로 삼고 더 나아가 우리의 탄식소리와 한숨소리까지 들으시며 우리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말없이 성원해주십니다.
요새 매일 새벽 기도회 전에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면 건물 밖에서 세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옵니다. 새벽에 말씀 듣고 잠깐 기도한 후에 출근하는 분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몇 달째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새벽기도를 하니까 이제는 아련히 들려오는 그 발자국 소리만 들으면 흐뭇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가 교회로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도 얼마나 기뻐하며 들으실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로 향하는 발자국 소리도 들으시고 마음속의 탄식소리와 한숨소리까지 다 들어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도와 찬양은 더욱 기쁘게 들어주실 것입니다. 성도의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무릎이 떨릴 때 무릎을 꿇으면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신비한 힘과 용기가 생깁니다. 기도는 영적 승리를 위한 최상의 무기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최상의 해결책입니다. 기도는 어떤 보약보다 귀한 예방약이고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한 체료제입니다.
물론 기도해도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 뜻대로 다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 받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사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남이 기도해서 복 받은 얘기를 듣고 자기도 똑같은 복을 받으려고 무조건 따라서 기도하면 그 기도는 대개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에 사심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한의사가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그가 순수하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이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시면 예배당을 지어 바치겠습니다.” 그 서원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의 불치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게다가 약도 잘 짓게 하셔서 그가 지어준 약을 먹으면 신기하게 나았습니다. 결국 그의 한의원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결국 돈을 많이 벌어서 예배당을 지어 바치겠다는 서원을 이뤄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 드린 그분의 사심 없는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 한의사 얘기가 유명해졌습니다. 기도와 헌신을 도전하는 좋은 예화니까 서울 방배동의 한 부흥사가 인용해서 성도들에게 교회건축 서원기도를 시켰습니다. 효과가 좋았습니다. 그러자 그 부흥사의 비디오테이프를 구해보던 다른 부흥사가 마치 자기가 겪은 얘기처럼 또 인용해 설교했습니다. 나중에는 어떤 성전건축 전문 부흥사도 그 얘기를 자주 인용해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문제해결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전건축 서원을 하며 기도했지만 앞선 한의사처럼 기도 응답을 거의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왜 나중에 유사하게 서원기도를 한 사람들은 응답이 없었습니까?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복을 목표로 삼아 서원기도를 따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심이 들어간 기도에는 하나님의 장단을 맞춰주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보다 복에 집착하며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상합니다. 그래서 간증도 잘 들어야 합니다. 간증을 듣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보면 그 간증은 영혼에 독이 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바라보지 말고 ‘복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심 없이 기도해야 응답도 체험하고 기도하는 삶에 회의가 생기지 않습니다. 결국 응답 받는 기도가 되려면 기도에 무엇보다 찬송과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응답이 없어도 죽도록 감사하고 찬송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그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격하게 움직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기도자들은 문제를 풀려는 집념을 가지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격하게 감격시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3. 최종 승리를 확신하십시오
본문 7절 이하에는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적을 심판하려고 강림하시는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의 코에서 연기가 오르고 하나님의 입에서 불이 나와 사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 불에 숯이 피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어떤 것도 다 무섭게 태운다는 뜻입니다.
본문 9절에서 하나님이 하늘을 드리우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그룹을 타고 다니시고 바람 날개를 타고 높이 솟아오르셨다고 노래합니다(10절). 이 구절에서 그룹은 천사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타는 수레를 뜻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강림하시면서 물의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으로 자신을 숨기셨습니다(11절). 이 묘사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위엄을 잘 나타냅니다.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번개가 빽빽한 구름과 함께 있고 우박과 섞여 불덩이가 내렸고 그때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우렛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내시며 벼락과 번개로 대적을 흩으시고 멸망시키셨습니다(12-14절). 계속해서 다윗은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으로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고 그때 하나님이 높은 손에서 손을 펴 자신을 붙잡아주시고 고통의 물에서 자신을 건져내셨다고 고백합니다(15-16절).
한 마디로 말하면 7-16절의 고백은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고 최종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다윗이 어려울 때나 잘 나갈 때나 예배생활과 기도생활과 믿음생활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믿고 최종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승리의 날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처럼 승리의 때를 바라보며 높은 창공에서 대 평안을 노래하며 사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다윗은 양치는 초라한 목자였다가 왕의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는 바로 고난의 긴 어두운 터널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그 터널 속에서 다윗은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터널의 끝에 닿았습니다. 그때도 변함없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믿음이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평안을 노래하며 넘치는 희망을 품고 나가는 것입니다. 천둥과 비바람이 칠 때도 비행기를 타고 10000미터 상공 위로 올라가면 거기에는 평화의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성도는 창공을 비행하는 비행기처럼 사탄이 지배하는 어두운 세상 위에 올라서서 대 평안을 노래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나가면 절망 속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되찾고 인생역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종으로 애굽에 팔려가게 하셨지만 나중에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또한 다니엘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셨지만 그를 3대 제국의 총리로 세워주심으로 유대인들이 이방 왕의 긍휼을 받게 하고 회복의 터전을 닦게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욥에게 극심한 고난을 허락하셔서 겉으로는 절망적인 처지로 만들었지만 그 고난을 통해 믿음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나중에 2배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최종승리의 역사를 믿고 현재의 고난과 상처 때문에 실망하거나 나약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고난과 상처도 얼마든지 축복의 재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현재의 고난을 잘 이겨내면 인생 역전을 이루고 마침내 다윗처럼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란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축복의 때를 기대하며 너무 아등바등 거리며 살지 말고 높은 데서 평안을 노래하며 비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 높은 곳에서 비행하십시오 >
저의 부부는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조촐하게 갔다 왔습니다. 대신 결혼 1년 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교단총회를 신혼여행 삼아 참석했습니다. 그때 시차 적응도 안 되었는데 새벽예배에 참석하라고 강요해서 아내가 감기몸살로 10일 내내 힘들어 했습니다. 결국 아내의 난생 첫 해외여행은 상처로 얼룩진 여행이 되었습니다. 동료 목사님들이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어도 맛도 제대로 못 느꼈고 교제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감기몸살일 때 처음 이틀만 푹 쉬게 했으면 나머지 8일이 즐거웠을 텐데 낮 모임은 물론 새벽예배까지 다 참석하도록 은근히 압박해서 나머지 시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긍정적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헌신을 인정받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역의 지경도 빨리 넓혀졌으면 하는 영적인 욕심과 사역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내면의 욕심을 깨닫고 나중에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왜 하나님이 안식하는 삶의 명령을 ‘자상한 권고’가 아닌 ‘강한 명령형’으로 주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안식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면 성격도 좋아지고 공동체도 행복해집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 중독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은 열심히 해야 합니다. 성도는 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과감하게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일 중독자가 아니라 쉴 줄 모르는 사람이 일 중독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성수에 힘쓰는 사람은 아무리 죽도록 일해도 일 중독자가 아닙니다.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교단은 총회 때 부부가 함께 동반할 것을 최대한 권합니다. 아내를 중시하는 미국문화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안식하는 삶의 연장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만 만나 교제와 격려와 위로의 좋은 시간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음지의 사모가 더 상처가 심할 수 있고 더 위로와 교제와 안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안식의 원리를 깨달았기에 옛날에는 아내가 새벽예배 빠지면 마음이 크게 불편했지만 요새는 알람 소리를 못 들어 새벽예배를 빠져도 전혀 마음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새벽예배에 빠지면 그날은 아내가 상당히 미안해합니다. 그런 미안해하는 마음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과 내적인 속성이 유사합니다. 누가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 옆에서 자꾸 죄책감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남편의 여유를 보여주면 아내가 더 고마움을 느끼고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그러면 스스로 알아서 더 잘하게 됩니다. 실제로 새벽기도 빠진 날은 반찬도 2배로 잘해주고 이해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표정도 2배로 행복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배우자 한 사람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목사입니까? 세계를 품고 선교해야 할 사람이 가족 한 사람에게 매달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신령한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다 그런 얘기가 신령함의 표식인 줄 압니다. 큰 착각과 오해입니다. 한 사람의 행복은 보통 행복이 아닙니다. 거기서 행복의 나비효과가 나타납니다. 반면에 한 사람의 불행이 보통 불행이 아닙니다. 거기서 많은 불행이 파급됩니다. 성도는 최선을 다해 선교도 해야 하지만 자기 곁에 있는 사람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이해와 격려와 성원은 의외로 엄청난 일을 만들어냅니다. 저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소속 목사로서 한국에 들어와 외롭게 사역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은밀한 손길들을 붙여주셔서 지금까지 문서선교 사역과 선교사 후원사역을 지탱하게 하셨습니다. 많은 손길들은 아니었지만 몇 명의 바나바와 루디아와 같은 존재들은 제게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옆에서 지친 손을 붙잡아주는 한 사람의 동역은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넉넉하게 이해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훈련을 하십시오. 성도끼리 “왜 믿는 사람이 저래?”라고 하는 바리새파 당원이 되지 마십시오.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더 나아가 제 3자인 불신자를 향해서도 “왜 정치가가 저래? 왜 부자가 저래?”라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것은 스스로 불행의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 한탄과 정죄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올바른 큰 인물이 되어 작은 등불 하나라도 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좁은 골짜기에서 작은 것을 놓고 아등바등 거리며 살지 말고 높은 데서 멀리 보며 비행하는 삶을 사십시오. 다윗처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신뢰하고 찬양하며, 어려울 때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는 단기응답을 바라기보다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 주심을 믿고 최종승리를 확신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참새처럼 파닥파닥 두 날개로 날아오르려다가 지쳐버리는 세미나적인 삶을 추구하지 말고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비행하며 대 평안을 노래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4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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