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4가지 소원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 무지는 큰 허물입니다 >
어느 날, 신부님 두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다가 과속으로 붙잡혔습니다. 경찰이 신부님들인 것을 알고 말했습니다. “아니, 아실만한 분들이 왜 그러세요? 그렇게 달리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해요? 한번 봐 드릴 테니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그때 한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괜찮아요. 예수님이 같이 타고 계시니까요.” 그러자 경찰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타셨다고요? 세 분이 타면 불법입니다.” 그러면서 딱지를 뗐다고 합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의외로 과속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상처와 스트레스를 애꿎게 차에게 풀고 속도감을 통해 푸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연약함으로 이해해줄 수 있어도 단속되었을 때 “내가 목산데...”라고 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으면 안 됩니다. 그때는 신분을 더 감추며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인생과 목회를 이렇게 과속하며 살지 말자!”고 새롭게 다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주신 직분과 능력과 축복과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남용하면 그것은 축복의 도구가 아닌 근심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요즘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자기 왕국을 쌓는 사람에게 어리석게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무지와 무분별은 큰 허물입니다.
한국 사람은 아시아에서 제일 평균 키가 큽니다. 지난 몇 십 년 간 잘 먹은 탓에 한국인들의 얼굴 형태도 대체로 고급스럽게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경제와 스포츠 강국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문화 강국이 되었습니다. 창조성이 대단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반면에 북한은 아시아에서도 평균 키가 제일 작습니다. 같은 민족인데 몇 십 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다른 종족처럼 된 것입니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명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이 초호화판으로 잘 먹고 잘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굶주리게 하고 공포에 젖게 만든 결과 딴 종족처럼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현실도 모르고 아직도 그들을 신처럼 추앙하는 북한 주민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인들이 보기에 얼마나 어리석게 보입니까?
이단 신자들도 똑같습니다. 그들은 자기 교주가 최고인 줄 알고 신격화합니다. 외부인들은 교주가 각종 사술과 언술로 수많은 영혼을 농락하는 것으로 뻔히 보이는데 그들 내부에서는 교주를 메시야처럼 여기고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144000명에 선택된 존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단체에 속한 신도들이 모든 것을 바치고 고생할 때 그 사이에 이단 교주만 뒤에서 호화판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빨리 그들이 그 그룹에서 나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베드로도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생의 미혹에 더 이상 빠지지 않도록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죽기 전에 성도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 베드로의 4가지 소원 >
베드로는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자신의 소원을 담아 성도들에게 몇 가지를 간절히 생각나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언급했고 13절에서는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라고 언급했고 본문 15절에서도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고 언급했습니다. 베드로가 죽기 전에 성도에게 생각나게 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1. 진리 안에 서 있는 것
당시 거짓 선생들은 기복주의와 신비주의로 영혼들을 복음의 진리 밖으로 이탈시켰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순교가 임박한 줄 알고 죽기 전에 복음의 진리 안에 굳게 선 성도들에게 한 번 더 복음의 진리를 생각나게 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12-15절). 진리 안에 선 삶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과 자비를 품은 삶이 바로 진리 안에 있는 삶입니다.
그처럼 진리 안에 굳게 서려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면서 끝없이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비우는 삶은 자기 상실이 아니라 자기 초월입니다. 시냇물은 강으로 흘러들어 더 커지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어서 더 커집니다. 그처럼 하나님 안으로 자기를 비우고 들어가면 초월적인 위대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왜 세상이 점차 혼란해집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포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커지고 자의식이 강해지면 세상의 혼란도 커지고 자신의 고민도 가중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자기를 잘 덜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잘 덜어내고 주님을 겸손히 붙잡고 남의 뜻을 존중해주려고 할 때 진리 안에서 평화와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재림을 아는 것
본문 16절에서 ‘강림’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루시안’은 예수님의 초림이 아닌 재림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예수님이 능력과 재림에 대해 알게 함으로 재림 소망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림 얘기가 교묘히 만든 얘기가 아님을 확신시키려고 자신이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봤다고 증거하면서 변화산 체험을 언급하며 그때 예수님이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다고 합니다(16-18절).
왜 그런 체험을 얘기합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확실히 믿고 용기를 내어 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의와 공평으로 모든 불의를 심판하시고 신실한 성도의 한과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귀한 상급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재림의 소망은 당시 핍박과 고난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최대 원천이었기에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이 재림에 대한 소망을 뚜렷하게 가지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뚜렷한 재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예고 없이 오십니다(벧후 3:10; 살전 5:2). 그러므로 매일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자기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들끼리 가족처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뭘 얻기를 바라면 안 됩니다. 얻을 생각은 하지 말고 줄 생각만 해야 진짜 가족입니다. 그렇게 살면 넘치는 보람과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3. 성경을 주의해보는 것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이 구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은 구약성경의 메시야 예언을 뜻하고 크게 보면 구약 성경 전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샛별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즉 성경 말씀을 어둠을 비취는 등불처럼 여기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성경을 주의해서 보라는 말씀입니다.
왜 베드로는 성경을 주의해서 보라고 당부했습니까? 그만큼 당시 거짓 선생들의 미혹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거짓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까? 성경의 약속 말씀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문서입니다. 그 약속 문서를 붙잡고 사는 것이 축복 받는 제일 기초 비결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성경을 꼭 잡고 기도하면 신비한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머리맡에 놓고 자면 잠자리가 편해진다고 합니다. 그런 태도도 성경을 중시하는 마음의 표현이지만 그런 태도가 너무 지나치면 무속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더욱 중요한 태도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힘써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때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성경의 약속을 믿고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임을 믿고 나가면 어떤 문제도 극복하고 작품 인생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4.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않는 것
베드로는 성경 및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20절). 성경 말씀과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21절).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재림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면서 자기 멋대로 내세운 계시와 해석으로 영혼을 낚아채 갔습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베드로는 경고한 것입니다.
요즘도 그런 거짓 교사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의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성령의 감동대로 계시하고 해석하기에 그만큼 권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석을 참고하고 남들의 지혜도 참고하고 깊은 묵상과 연구로 성경해석에 땀 흘리는 것은 인간적인 해석이고 자신이 성령의 인도로 즉석에서 해석한 것은 신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그런 즉석 해석에 문맥과 어휘와 원어와 배경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오류가 많고 심지어는 성경의 원래 내용과 180도 반대로 해석할 때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해석을 성령님이 주신 해석이라면 얼마나 성령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것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계의 백두산 혈통으로 믿도록 교묘한 언사를 씁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더욱 세상의 조롱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잘 극복하는 교계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국 교회가 다시 세상의 칭송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 바른 교회를 추구하십시오 >
조선 말, 매관매직이 판치던 때, 어떤 관리들은 자신이 부임할 땅을 미리 조사하며 “그곳에 예수교인은 얼마나 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교인이 많으면 고관을 찾아가서 다른 고을로 부임하게 해달라고 청탁했습니다. 자신의 부정부패가 드러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교회와 교인은 양심이 있었습니다. 도덕과 윤리가 투철했고 정의의 편에 서서 약자를 도왔으며 일제의 강압통치 때는 애국지사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교회와 교인은 사회 양심의 잣대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와 관련된 각종 부정적인 소식들이 너무 많이 들립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일차적으로 목회자 책임입니다. 성도의 수준은 대개 목사의 수준의 반영입니다. 속물 리더 밑에서 인물 성도가 나오기 힘듭니다. 영어 해석도 잘 못하면서 미국 신학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면 내세우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 충만!”을 무수히 강조하는데 그렇게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교회치고 물질축복이 강조하지 않는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성령충만과 물질축복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왜 종교인들이 물질축복에 사로잡힐까요? 어렵게 살아온 환경 영향도 큽니다. 어릴 적의 고난과 가난을 잘 극복하지 못하면 2가지 문제 가능성도 커집니다. 하나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고 또 하나는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것입니다. 동양문화에서는 거짓말보다 간통죄를 크게 보지만 서양문화에서는 간통죄보다 거짓말을 더욱 큰 죄로 여깁니다. 닉슨 대통령이 거짓말 했다고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야 했습니다.
왜 동양에서는 거짓말은 큰 죄로 안 봅니까? 거짓말을 일종의 지혜로 여기는 문화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거짓말의 천재인 제갈공명을 존경합니다. 그처럼 동양문화권에서 거짓말을 큰 죄로 여기지 않기에 거짓말로 혹세무민해서 왕국을 이룬 거짓 교회들과 메시야가 유독 동양에 많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르고 당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을 알고도 지혜나 처세로 여기며 용납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을 알고도 교회권력의 단맛에 취해 묵인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을 알고도 교주의 저주가 무서워 쉬쉬 합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커집니다.
이제 한국에도 예언, 치유, 축귀 등에 등장하는 수많은 종교인의 거짓을 지혜나 처세가 아닌 범죄로 여기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종교자유와 혹세무민은 다릅니다. 그래서 혹세무민은 공권력이 적극 제지해야 합니다. 그런 제동장치가 없으니까 미국에서 전혀 인정 못 받는 이단 목사가 한국에 와서 위대한 신 사도처럼 숭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인들이 매번 당하니까 거짓 신 사도들은 한국을 최대 놀이터로 삼고 있습니다. 영어로 설교하면 왠지 신령하게 보는 무지는 더 이상 없어야 하고 더 이상 묵인되어도 안 됩니다.
미국에서는 카운슬링도 면허가 없으면 원칙적으로는 불법입니다. 즉 “믿음으로 약을 끊으세요. 40일 금식기도 하면 나을 거예요.”라고 말했다가 죽어서 소송을 당하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결국 거짓 메시야의 등장이나 거짓말로 인한 혹세무민이 힘든 사회구조입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종교인들은 서슴없이 그런 유사한 상담을 해줍니다. 나중에 그 말이 틀렸다고 판명 나고 심지어는 죽어도 좋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해준 것으로 여기고 대개 눈감아 줍니다. 그래서 자칭 신령한 종교인들의 무책임한 혹세무민의 말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주일에 목회자가 강단에서 선포합니다. “지금 관절염이 나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나았다고 일어납니다. 약 한 달쯤 후에 “지금 관절염이 나았습니다.”라고 하면 같은 사람이 또 일어납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왜 매번 나았다고 그렇게 일어나나요?” 그가 말합니다. “나을 것이라고 믿고 일어나는 겁니다.” 나았다는 말과 나을 것이란 말이 어떻게 같습니까? 결국 하나도 안 나았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믿음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니까 거짓 치유자들이 대 교회를 이루고 체육관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의도라면 거짓말도 용납해주는 동양문화는 좋은 문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교회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회문화도 바뀌어야 합니다. 좋은 교회 문화는 계승해야 하지만 거짓을 쉽게 눈감아주는 교회 문화에는 젖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거짓이 수많은 영혼들을 망치고 죽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피해는 참는다고 해도 너무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명백하면 때로는 소송을 해서라도 그 거짓을 막아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런 문화에 젖지 않고 자신부터 늘 새로워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 자신부터 새로워져야 합니다 >
살다 보면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런 말은 아무리 많이 해도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잘못된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고 자신이라도 최선을 다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뒷 파도만이 앞 파도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호수가 흙탕물이라도 물 근원이 맑으면 그 호수는 맑아집니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는 문제는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불의한 모습에 실망하지 말고 우리라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면 됩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처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자신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그처럼 죄짓는 것이 괴로운 성도가 많아져야 앞 물결을 밀어내고 새로운 물결을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서울 법대 다니는 한 청년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법조인들의 불의한 판결을 보니까 대학 다니고 판검사가 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노동판에 뛰어 들겠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형제! 자네가 법조인들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그들은 변하지 않아. 자네가 고시패스하고 판검사가 되어서 자네라도 지금의 그 선한 마음을 10년만 유지하면 그 부분은 달라지지 않겠는가? 열심히 공부해라.”
그 말을 듣고 그 청년이 열심히 공부해서 4학년 때 고시를 패스했습니다. 그리고 검사로 임관한 후 한 단체에서 밤에 고아들을 가르치는 야학 선생을 꾸준히 했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한 사람이 잘하면 그 부분은 변화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이 변화되고 자신이 인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능적인 입술을 잘 억제해서 이런 말은 가급적 줄이십시오. “교인이 왜 저래? 교회가 왜 저렇게 사랑도 없어” 교인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교회가 왜 사랑도 없어!”라고 하는 사람이 대개 사랑이 더 없습니다. 사랑이 풍성한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입에 배지 않아서 남이 사랑이 없다는 말을 잘 못합니다. 욕이 입에 배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욕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없는 행동을 잘 못하는 사람은 사랑 없는 말도 잘 못합니다. 결국 “누가 사랑이 없어!”라는 말은 “내가 사랑이 없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장 흔한 욕은 아람어로 ‘레카(라가)’란 욕이었습니다(마 5:22). 그 뜻은 ‘우매한 놈’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가장 흔한 욕이었기에 우리말로 하면 ‘개OO’란 욕과 같은 욕입니다. 그런데 당시 어떤 사람들은 기도할 때도 ‘라가’란 말을 자주 언급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렇게 기도한 셈입니다. “하나님! 그 개OO! 못된 새끼입니다. 그런 새끼를 혼쭐 내주세요.” 하나님은 그런 기도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욕으로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당시에 한 지역 공회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지방 행정관이 재판을 진행하는데 원고가 재판정에서 피고를 삿대질하며 말했습니다. “행정관님! 저 개OO! 나쁜 새끼입니다.” 그렇게 계속 욕하면서 피고를 처벌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지방행정관은 나중에 원고를 무고죄로 대신 잡아서 옥에 넣었습니다. 자신 앞에서 ‘라가’란 말을 너무 많이 쓰는 원고의 말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법정과 자신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새는 판사도 말을 조심합니다. 하물며 재판 대상이 법정에서 욕하면 얼마나 판사가 모욕감을 느끼겠습니까?
왜 예수님은 형제를 욕하면서 정죄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욕하는 것은 하나님께 큰 모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욕하는 사람의 정의는 정의로 인정받기 힘들듯이 사랑이 없는 사람의 사랑이 없다는 말은 공허한 외침이 됩니다. 자신에게 사랑이 없기에 남이 사랑이 없다고 쉽게 정죄하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가 대개 그렇습니다. “누가 인격이 안됐어.”란 말은 대개 그 말하는 사람부터 “내가 인격이 안됐어.”란 암시입니다.
남의 못된 것이 보이면 그것을 자신의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깊이 성찰해보면 남을 비판하는 그 문제가 자신 안에 들어있습니다. 이제 남의 못된 것이 보이면 얼른 자기 모습도 살피고 그 행동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한 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그 사람 때문에 제 죄를 깨달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소서!”
아픈 말을 들으면 “네가 뭔데 그래!”라고 하지 말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 저의 부족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겠지요?”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약자나 실패자는 될 수 있어도 위선자는 되지 않습니다. 그처럼 아픔이 있을 때 그 아픔을 회개기회로 삼으며 환경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세워지려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된 성도가 됩니다.
지상 교회와 교인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다 보면 교회와 교인의 부족한 모습을 수시로 목격합니다. 그때 정죄 대신 자기 성찰의 기도를 하며 자신의 변화부터 꾀하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의 맑은 물로 한국교회는 조금 더 새롭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그런 정화장치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베드로의 소원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인물 되는 길을 추구하고 자기 변화를 잘 이뤄냄으로 마지막 때에 거룩한 정화장치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316) - <성경66권설교파일에 베드로전후서 전체 설교 28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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