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5단계 (에스겔 47장 1-12절)
< 절망을 이기게 하는 희망 >
1984년 여름, 저는 그 전까지의 세상적인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때 생긴 가장 큰 삶의 변화는 나누려는 삶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남자가 술 담배를 안 하고 데이트나 돈 드는 취미생활도 안 하니까 돈을 쓸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눔이 어렵지 않았고 1986년 취직 후에는 더욱 드리고 나누는 삶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만큼 힘써 나누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었습니다. 드리고 나누는 삶을 살면 하나님이 걸식하게 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누면서 미래도 준비해야 하니까 더 책임적인 삶을 살려고 했고 지혜와 창조성과 은혜를 더 구했고 더 땀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물질은 축적하지 못했어도 다른 쪽으로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며 역전인생을 꿈꾸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린고비처럼 아끼며 살아야 미래의 주인공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이 없이 저축만 하면 미래도 계속 소금물 인생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에 좋은 일에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저축을 못해 헐벗게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이 드리고 나누고 베풀 능력을 주시고 미래와 후대도 신비하게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의 자손은 걸식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시 37:25).
어떤 사람은 좋은 일에 잘 안 쓰는데 나중에 보면 별로 쓸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좋은 일에 잘 쓰는데 나중에 보면 더 쓸 것이 넘칩니다. 후자의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일에 쓰더라도 계속 쓰면 미래는 어떻게 준비합니까? 그런 사람들은 더 치열하게 땀 흘리며 은밀히 미래를 준비합니다. 또한 창조성과 지혜와 효율과 인맥의 은혜를 구하며 열심히 삽니다. 결국 그런 삶이 재화로 연결되어 미래가 더욱 복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재산이 거의 없습니다. 한두 달 앞이 불투명합니다. 대신 치열하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땀은 결코 배반이 없고 하나님이 반드시 미래를 책임져준다는 체험과 확신이 있기에 미래는 불투명해도 희망은 넘칩니다. 또한 그렇게 살았기에 하나님이 교회의 비전과 더불어 <온라인 새벽기도>와 <미션퍼블릭>과 <네트영어>를 통한 찬란한 문서선교의 비전을 구체화시켜 주셨습니다. 그처럼 현재 손에 쥔 것은 없어도 큰일을 준비하고 있다는 믿음과 희망이 넘치니까 그 믿음과 희망이 수시로 공격해오는 절망의 기운을 압도하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절망을 이기게 하는 희망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암이나 에이즈도 아니고 절망이란 병입니다. 절망에 빠지면 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왜 사람이 절망에 빠집니까? 사탄의 공작에 넘어가 희망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항상 길이 있고 넘치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탄은 수시로 힘든 현실을 가리키며 꿈과 비전을 방해합니다. 또한 사람을 이용해 우리의 꿈과 비전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위협합니다. 그처럼 사탄은 고도의 심리전을 펴며 문제를 크게 보이게 하고 자신감을 잃게 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주어 꿈과 비전과 일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삶의 용기와 지혜가 생기고 하나님이 문제를 감당할 힘을 주시고 결국 꿈과 비전을 이뤄주십니다.
기도는 문제를 극복하고 작품인생을 만드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기도에 회의를 품지 마십시오. 물론 기도해도 응답이 바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40년의 광야 훈련을 통해 작품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때 광야에서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기도는 즉석에서 무엇을 얻게 하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과 비전을 품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동시에 최선의 땀을 흘리십시오.
지금 세상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에 잘 적응하고 더 나아가 변화를 주도하려면 지혜와 창조성이 특히 필요합니다. 이때 가만히 촛불만 켜놓고 기도만 하면 안 됩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이 주신 창조성과 지혜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땀을 흘려야 작품 인생이 펼쳐집니다. 그처럼 문제보다 비전을 크게 보고 희망을 품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땀을 흘리면 언젠가 꿈과 비전을 멋지게 이룰 날이 반드시 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겔의 환상은 그런 희망을 도전합니다.
< 희망의 선지자 에스겔의 환상 >
주전 597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침략해 약 1만 명의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중에 25세의 청년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그 후 에스겔은 나이 30세에 선지자로 부름 받고 포로 중에 있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의 선지자였고 아모스가 정의의 선지자였다면 에스겔은 희망의 선지자였습니다. 나라든지 개인이든지 회복의 은혜를 입으려면 눈물의 기도와 정의로운 삶과 넘치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주전 586년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할 무렵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에스겔은 그때도 절망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 희망을 넘치게 하려고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여러 가지 환상 중의 하나가 본문의 환상입니다. 어떤 환상입니까?
어느 날, 에스겔이 하나님의 사자에게 이끌려 성전에 갔는데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펑펑 솟아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렸습니다(1절). 그리고 그 사자가 에스겔을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게 했는데 거기서 보니까 성전에서 발원된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왔습니다(2절).
그때 그 사자가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약 500미터)을 측량한 후 에스겔에게 그 물을 건너게 하자 물이 발목에 올랐습니다(3절). 그리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물을 건너게 하자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물을 건너게 하자 물이 허리에 올랐습니다(4절). 그리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니 물이 넘쳐서 헤엄칠 만한 물이 되고 사람이 쉽게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5절).
그때 그 사자가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고 하며 에스겔을 인도해 강 가로 돌아가게 하자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7절). 계속해서 그 사자가 말했습니다.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해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8절).” 성전에서 발원된 물이 요단강을 거쳐 사해 바다로 흘러들어가서 사해 바다의 물을 되살린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전에서 발원된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고기가 심히 많아지고 그 강물이 흘러 들어가서 바닷물이 되살아나고 그 강이 이르는 각처에서 모든 것이 산다고 했습니다(9절). 또 풍성한 고기들로 인해 강가에 어부가 많아지고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풍성한 어장이 형성되어 각종 고기들이 큰 바다의 고기처럼 많아진다고 했습니다(10절).
그때 생수의 강의 생명력이 닿지 않은 사해 주변의 진펄(진흙웅덩이)과 개펄(물웅덩이)은 저주 받은 소금 땅이 되지만(11절), 생수의 강 좌우 물가에는 각종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않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된다고 했습니다(11-12절). 성전에서 발원된 물로 인해 생명력과 치유력이 넘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성전에서 발원된 물로 인해 사해 바다가 살아나는 환상은 교회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통해 세상이 풍요롭게 변화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만큼 교회가 중요합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가끔 교회의 못난 모습이 보이고 교회생활을 하는데 힘겨움과 멀미와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 안에 있어야 넘치는 생명력을 통해 번성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치유의 능력도 잃지 않습니다.
병들었을 때 치유를 준다는 집회에 가면 대개 메마른 소금기둥처럼 비참해집니다. 치유는 그 집회나 그 집회 인도자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절대화하는 낌새가 있는 곳에서는 진짜 치유의 은혜는 절대 임하지 않습니다. 왜 에스겔의 생수의 강 환상이 주어졌습니까? 얕은 은혜를 추구하지 말고 은혜의 물이 머리끝까지 넘치게 차오르는 성령 충만의 은혜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와 욕심과 외형주의와 기복주의로 성령 충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 신앙의 5단계 >
에스겔의 환상에서 강물이 깊어지면서 물이 에스겔의 발목과 무릎과 허리와 머리까지 차오르게 된다는 것은 신앙수준에 따라 5단계의 신앙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1. 발목 신앙
발목 신앙은 발목을 움직여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며 겨우 주일예배 정도만 참석하는 신앙을 뜻합니다. 그런 발목 신앙은 인생의 중요한 때에 발목을 잡습니다. 특히 과거의 상처에 발목을 잡힐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와 섭섭함에 매여 사는 것이 얼마나 비생산적이며 부질없는 일인지를 잘 압니다. 그래도 과거의 일에 발목이 잡혀 후회와 미움과 상처로 까만 밤을 하얗게 보내며 불필요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또한 발목 신앙은 힘든 현실이 닥쳐도 금방 발목이 잡힙니다. 그처럼 발목 신앙으로는 믿음이 주는 능력을 체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일예배는 계속 나와야 합니다. 최소한 주일예배만이라도 지키려고 하면 그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위대한 성자들도 처음에는 교회를 왔다 갔다 하다가 때가 되어 위대한 길로 들어선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초과목과 같습니다. 그 기초라도 꾸준히 붙잡고 있으면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2. 무릎 신앙
어느 날, 주일예배만 나오던 성도가 고난 중에 성령과 말씀을 통해 큰 은혜와 위로를 받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봉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교인을 가족 이상으로 귀하게 여기고 귀한 비전 동지로 여기게 됩니다. 그때 교회관도 바뀝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에 비판할 것이 많이 보였는데 은혜가 넘치게 되면 누가 교회를 비판할 때 괜히 듣기 싫어지면서 “그분이 아직 교회를 잘 몰라서 그래요!”라고 교회를 변호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자아가 꺾이고 무릎을 꿇은 무릎 신앙의 모습입니다.
또한 무릎은 기도하는 삶을 연상시킵니다. 발목 신앙일 때는 문제가 생기면 열심히 사람을 찾아다니며 지인을 찾고 선배를 찾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더 꼬이고 마음의 상처가 더 깊어질 때가 많습니다. 신령하다는 장소를 찾는 것이나 신령하다는 사람을 찾을 때도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더 깊어질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무릎 꿇고 기도하면 문제가 신기하게 해결되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처럼 문제 때문에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시간을 구별해 기도할 정도까지 된 신앙이 바로 무릎 신앙입니다.
3. 허리 신앙
허리는 몸의 중심부분입니다. 물이 허리까지 잠긴 성도가 된 것은 균형 잡힌 성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 기적적인 현상과 체험이 있어야 은혜가 있는 것 같았는데 균형 잡힌 성숙한 신앙을 가지면 말씀만 들어도 은혜가 됩니다. 그처럼 바른 말씀을 통해 균형 잡힌 삶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바로 허리 신앙입니다.
말씀을 잘 모르면 영혼 사냥꾼의 덫에 걸립니다. 말씀의 제일 목표는 진리로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단의 제일 목표는 거짓과 공포와 기복주의의 덫으로 영혼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이단은 늘 자신이 특별한 사명을 받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떠나면 저주를 받고 가정에 초상나고 사업이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특별한 사명이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믿지 마십시오. 또한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도 믿지 마십시오. 바른 믿음을 가진 참된 기도자는 기도 많이 한다고 절대 자랑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가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언급된 것이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말씀의 진리는 허리띠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 허리띠가 없으면 전투에 나갔다가 바지가 홀라당 벗겨져 수치를 당합니다. 그처럼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지만 말씀이 없어서 영혼이 피폐해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수치를 당하지 않고 고난 중에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결국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4. 가슴 신앙
에스겔의 환상에는 생수의 강물이 가슴까지 찬 묘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머리까지 차려면 가슴도 차야 하기에 가슴 신앙도 중요합니다. 가슴 신앙은 감사 신앙을 뜻합니다. 감사가 넘치면 삶의 모든 순간과 내용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깁니다. 기도할 때도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왜 무속적인 기도에는 응답이 없습니까? 기원만 있고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끼리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자꾸 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지만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된 후 형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형님들! 두려워하지 마소서! 저를 이곳에 오게 한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사 신앙입니까? 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해석합니다.
살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십시오. 후회해도 소용없고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로 미래의 축복을 놓치지 마십시오. 과거의 좋은 일은 계승하고 과거의 나쁜 일은 반면교사로 삼아 복된 미래를 향한 밑거름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과거에 연연하면 사탄에게 당합니다. 과거는 푯대로 삼지 말고 발판으로 삼으십시오. 오직 예수님만 푯대로 삼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푯대로 삼아야 요셉처럼 축복 받습니다.
과거의 사건과 사고, 실패와 실수, 그리고 비난과 상처도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믿고 감사하십시오. 이해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허락하셨다고 믿으면 상처는 상급으로 바뀌고 미움은 용서로 바뀌고 후회가 감사로 바뀌면서 결국 감탄이 나옵니다. “아!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 그렇게 하셨구나!” 그처럼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가슴신앙을 가지고 과거의 아픔까지 감싸 안을 때 그의 미래에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5. 머리 신앙
여기서 말하는 ‘머리 신앙’이란 표현은 ‘머리를 굴리는 이성적인 신앙’을 뜻하지 않고 ‘머리까지 다 하나님께 맡긴 신앙’을 뜻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 단계를 지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는 신앙 단계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단계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범사를 맡기면 대 평안이 생기며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죽게 되면 죽으리라! 살게 되면 살리라!” 결국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징표는 대 평안입니다.
깊은 물에 몸을 맡기면 몸이 저절로 뜨듯이 신앙생활은 자기 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신비한 삶의 세계입니다. 축복이란 노력한 대로만 받지 않고 값없이 은혜로 주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 은혜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물질 문제도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드리고 나누고 베풀며 살면 더 어려워질 것 같지만 그때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살게 하시는 신비한 은혜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은 우리의 삶 곳곳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 은혜의 강물을 인식하며 그 은혜의 강물이 생성시키는 부력에 자신을 맡기고 모든 문제를 맡기십시오. 땅에서 발이 떨어지고 그 문제를 내려놓으면 망할 것 같지만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가정과 교회와 사업장에서 풍성한 열매가 주어지면서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사업도 살고 자녀도 살아나는 신비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받은 은혜가 주변으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 용천수의 삶을 사십시오 >
성전에서 발원된 물이 점점 넘치게 된 환상을 보여주신 후 하나님의 사자가 에스겔에게 물었습니다.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6절).” 이 질문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임과 동시에 약속입니다. 그 질문에는 교회를 통해 넘치는 은혜를 눈에 보일 정도로 분명히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더욱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세상을 살리는 역사를 꿈꾸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살리는 일에 저를 사용하소서!”
그런 나눔과 살림의 비전을 가지고 미국 신대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졸업 후 귀국해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목사로 한국에 처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지만 인물 배출 및 문서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내일의 찬란한 역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준비된 문서들이 문서선교의 기폭제 역할을 해줄 뜻있는 비전동역자를 만나면 더욱 많은 영혼을 살리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그런 찬란한 역사를 준비해두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에 기쁘게 편승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현재 상태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 말고 깊은 차원의 신비한 은혜를 간절히 추구하십시오. 그래서 물을 흘려보낼 줄 모르는 정체된 늪의 삶을 살지 말고 물을 언제나 흘려보낼 수 있는 방대한 댐의 삶을 사십시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에서 발원된 물은 아라바와 유대 광야를 거쳐 절망적인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흘렀습니다. 사해는 바다 해수면보다 39.6미터나 낮아서 물을 받기만 하고 아래로 흘려보내지 못해서 결국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생수의 강이 흘러들어와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처럼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참된 은혜입니다. 그런 주는 은혜를 추구하십시오.
요즘처럼 영혼의 공허함과 목마름이 깊어질 때 은혜와 사랑을 나누면 감동은 배가되고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생텍쥐페리에서 어린 왕자는 말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어디엔가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물만 있으면 사막도 살 만한 곳이 됩니다. 그처럼 생수의 강이신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해와 같은 메마른 세상도 생명력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성도는 내면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용천수처럼 되어 그 솟아난 샘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 삶이 힘겹고 영혼에 갈증이 느껴지면 더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고 더 나눔의 삶을 다짐하고 준비하고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나눔의 손길이 미치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고 자기 영혼도 살아납니다. 우물이 있으면 사막도 아름답게 되듯이 교회와 교인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용천수 교회와 용천수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용천수의 삶이 진정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런 인생을 살면서 선교와 나눔을 통해 아름답게 살려는 꿈이 없으면 더욱 허무한 인생이 됩니다. 사람은 선교와 나눔을 늘 꿈꾸며 살아야 살아갈 힘과 용기도 생깁니다. 그처럼 생명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려는 목적만 분명하면 힘든 현실조차 아름다운 삶의 재료가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면에 생수의 강이 흐르는 존재는 이미 가장 행복한 존재입니다. 그 행복과 사랑의 샘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보냄으로 메마른 세상을 살리고 아름답게 만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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