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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고난을 이겨내는 길 (욥기 19장 13-29절)

by 【고동엽】 2022. 1. 1.

극심한 고난을 이겨내는 길 (욥기 19장 13-29절)
< 비전은 어떻게든 이뤄집니다 >

1996년에 한 신학대에서 강의할 때 그곳 도서관에서 희귀본 영문 스펄전 설교전집을 보았습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인쇄된 두꺼운 설교집 시리즈 수십 권을 보고 흥분해서 비전을 품었습니다. “하나님! 한 세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를 번역해 출판하고 싶습니다. 재정을 주소서!” 그때 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로 몰려들던 때였는데 한국 신학도들도 그런 문서를 한글로 볼 수 있는 기쁨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문서선교 비전을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치도 진전시키지 못했지만 그 비전이 지금은 수정되어 진행 중입니다. 즉 제가 직접 만든 <성경 전권 설교파일>의 비전을 품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틀 전에는 <열왕기하 설교파일>을 완성함으로 성경의 약 3분 2를 완성했는데 그 설교파일을 거꾸로 영어로 번역해 출판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스펄전 설교전집을 보면서 2가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강해가 안 된 성경본문이 곳곳에 너무 많은 점과 또 하나는 줄여도 될 내용까지 너무 많이 책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2가지를 보완하려고 성경본문이 빠지지 않게 하고 또한 안 들어가도 될 내용은 교정하면서 최대한 빼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판할 산상수훈 설교파일도 처음 초고는 500페이지 분량이었는데 계속 줄여서 5교 후에는 400페이지까지 줄였습니다.

<성경전권 설교파일>이 잘 완성되어 천년영향력을 이룰 작품이 되고 영어로도 번역되어 나오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누가의 문서선교를 후원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나올 수 있게 했던 데오빌로와 같은 존재와 만남이 이뤄진다면 비전은 더욱 멋지게 그 실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스펄전 설교전집의 한국어 출판 비전은 이루지 못했지만 성경 전권 설교파일을 영어로 출판하겠다는 더욱 찬란한 비전으로 변형되어 구체화되는 것을 보면서 “비전은 어떻게든 이뤄진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토저(Tozer) 목사님 책을 보면서 너무 감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토저 목사님은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이 배출한 20세기 최대 저작가입니다. 그는 큰 목회는 못했지만 기복주의를 철저히 배제한 영성이 넘치는 글로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오래 끼치고 있습니다. 그처럼 무언가 좋은 인물과 작품과 열매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하십시오. 열매를 남기지 못하면 씨라도 남기십시오. 그것도 안 되면 인물이 나오도록 기도해주시거나 자신의 발자취가 담긴 기록이라도 남기십시오.

다윗이 오늘날까지 칭송받는 것은 이스라엘을 번영시킨 신실한 왕이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의 더욱 위대한 일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담은 시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도 작품 비전과 인물 비전만은 잃지 마십시오. 남길 것이 없으면 자기 마음을 토로한 시나 글을 남기고 그런 능력이 부족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을 담은 일기라도 남기십시오. 그러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신비한 힘과 지혜와 평안도 생길 것입니다.

< 극심한 고난을 이겨내는 길 >

살다 보면 욥처럼 극심한 고난과 상처를 겪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런 고난과 상처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1. 진실한 기록을 남기십시오

욥기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욥 자신이 제 3자처럼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욥기가 남아 4천년의 영향력을 끼치는 성경문서로 우뚝 서게 된 것이 욥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멋대로 해석하고 정죄하는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처절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당시에 형제들은 그를 배척했고 지인들은 낯선 사람처럼 행동했으며 친척도 그를 버리고 외면했습니다(13-14절). 또한 집안의 여종도 그를 투명인간이나 이방인 취급을 하며 그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간청해야 쳐다볼 정도였습니다(15-16절). 심지어 그의 아내는 욥의 숨결조차도 싫어했고 후손들도 그를 거지처럼 여겼습니다(17절).

또한 어린아이들도 그를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18절). 더 나아가 가까운 친구들도 욥을 미워했고 욥이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은 원수처럼 행동했습니다(19절). 얼마나 배신감이 컸겠습니까? 그처럼 자기 곁에 한 사람도 없는 외로움과 한과 상처 때문에 그는 점차 말라가면서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일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졌습니다(20절).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더 이상 정죄하지 말아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21-22절).

그런 극심한 상처를 극복하려면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본문 23-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욥은 자기의 고통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고난의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한 것입니다.

살다 보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호소해도 그 호소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때 침착하게 자기의 아픔과 상처를 달랠 새로운 방법을 찾으십시오. 그때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기록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긴 기록이 나중에 영화화되어 극적인 반전의 역사가 이뤄지고 한이 풀어지는 경우가 요즘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기록을 남기면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가능성도 커지지만 기록하면서 마음의 상처가 씻어지고 자기 성찰도 더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최종 승리는 진실한 기록을 남기는 자의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십시오

욥은 아무도 기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족은 물론 종까지 투명인간 취급을 하는데 사람으로부터 무슨 기대를 하겠습니까? 대신 욥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대속자로 자신의 현실 속에 오셔서 정의를 보여주실 것이란 고백을 하고 자신은 죽어도 자신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부활의 믿음을 고백합니다(25-26절). 또한 욥은 초조할 정도로 간절하게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싶어 했고 의로운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27-29절).

억울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보거나 당하면 그때 너무 분노하지 말고 너무 자신을 변호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또한 잠시 지는 상황으로 인해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잠시 이기는 상황으로 인해 너무 자만하지도 마십시오. 지는 것이 꼭 패배는 아니고 이기는 것이 꼭 승리는 아닙니다. 욥처럼 고난 중에도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신다! 의로운 심판장이신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란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최종 승리는 그의 것이 됩니다.

살면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만나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말 저와 함께 하십니까?” 그런 의문을 품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다윗도 그런 의문을 품었습니다. 정직한 의문은 오히려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의문은 도식적인 대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진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더 많이 알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넘치게 되길 원해서 품은 것입니다. 반면에 냉소적인 의문은 불신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즉 정직한 의문은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찾으려는 것이지만 냉소적인 의문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변명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알려고 씨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냥 덮어놓고 믿으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지만 하나님은 ‘덮어놓고 믿는 것’보다 ‘성경을 펴놓고 믿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런 수동적인 모습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은 계산적으로 살다가 계산이 통하지 않는 삶의 절벽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앞뒤가 막힌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한 후 ‘이스라엘(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이란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의문을 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려고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그런 의문을 품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다 보면 어느 때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대한 의문이 풀어지고 지혜와 믿음이 생깁니다.

솔직히 인생에서 고난이 없었다면 얼마나 가관이 되었겠습니까? 무속인이 육십갑자로 육갑을 떠는 것보다 더 육갑, 칠갑, 꼴값을 떨었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는 멀어지고 참된 친구는 다 떨어지고 영혼은 아주 천박해졌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내게 고난이 필요했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지면서 더 감사가 나옵니다. 그처럼 의문이 믿음으로 변화되는 축복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할 때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마 11:12). 왜 예수님이 “천국을 침략한다.”는 과격한 표현을 쓰셨을까요? 간절히 사모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더욱 알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처럼 의문이 전혀 없는 것보다 의문 중에도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정직한 의문은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초석이 됩니다.

3. 냉소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씨름할 때 모든 의문이 다 풀려야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면 영원히 기다려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직접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셔도 사람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려운 수학문제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고난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해답을 다 알려주시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의문에 대한 완전한 정답을 얻지 못해도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는 믿음의 삶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는 모험도 필요하고 위험도 따르고 대가도 치러야 합니다. 다 이해되어야 믿는다면 믿음의 능력과 축복도 체험하기 힘들고 믿음의 성장도 지체됩니다. 믿음은 근육처럼 사용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큰 문제를 해결하면 믿음이 더 자라 있습니다. 그처럼 완전한 해답을 얻지 못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큰일을 행하심을 믿고 힘들 때도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현재 저는 성경 약 3분의 2를 설교파일로 완성했는데 지난 22년의 목회세월을 생각하면 꿈만 같습니다. 새벽기도 참석인원도 많지 않은데 매일 평균 8시간씩 새벽말씀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몇몇 동료 목사님들은 저보고 워코홀릭(workaholic, 일 중독자)이라고 하며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매일 새벽말씀을 그렇게 준비함으로 탈진해서 건강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 내공들을 모아 주일 낮 예배 때 한꺼번에 탁 터뜨리세요.”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이 흔들렸습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붙잡고 비전을 따라 줄기차게 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알아주셨고 온라인 새벽기도 식구를 많이 붙여주셨습니다. 지금 목회자만 3천 명 이상 저의 온라인 새벽기도를 매일 받아봅니다. 그러면서 성경 3분의 2까지 설교파일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런 열매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시간차 은혜’에 감격할 때가 많습니다. 오래 전에 문서선교를 위해 기도한 것을 한참 후에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기도는 외상이 아닌 현찰입니다. 기도한 대로 응답되지 않는 것을 보면 기도가 마치 외상 같지만 잠시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순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언젠가 반드시 대 반전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현재만 보고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길에는 위험도 따르고 의문도 생기지만 그 모든 의문이 다 풀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으면 그 믿음은 무엇보다 귀한 자산이 되고 언젠가 귀한 열매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믿음의 가장 큰 적은 냉소입니다. 요새 하나님을 근본부터 불신하는 냉소주의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의문과 냉소는 다릅니다. 훌륭한 성도도 진지하고 정직한 의문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이 진짜 메시야인지 의문을 품었고 몇몇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기본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냉소는 처음부터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냉소적인 질문은 해답을 찾는 정직한 질문이 아니라 오히려 해답을 방해하려는 조롱 섞인 질문입니다.

주변에 냉소적인 불신자들을 보면 그들은 의심을 즐기며 항상 의심으로 가는 길을 찾습니다. 또한 그들은 성도에 의해 받은 상처를 크게 부각시키고 오래 기억해서 믿음을 외면하려는 변명으로 그 상처를 활용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실패를 지적하고 성도의 불일치와 모순을 찾으면서 희열을 느낍니다. 또한 검사가 죄인을 심문하듯이 하나님도 피의자처럼 심문하면서 “내 질문에 대답만 하세요!”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원합니다. 또한 아무리 많은 은혜의 증거가 있어도 그 증거를 외면합니다.

냉소주의자는 항상 대답보다 더 많은 반대를 내세웁니다. 성도가 전도하듯이 냉소주의자는 불신을 전도하면서 분명한 현실과 증거도 나쁘게 왜곡합니다. 물론 냉소주의자도 믿음의 증거를 조사는 합니다. 그러나 해답을 찾으려고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찾으려고 조사하는 것입니다. 냉소주의자는 조사하면서 이미 의심하기로 결심하고 하나님과 성도를 조롱합니다. 그런 냉소와 비판에 넘어가지 않고 의문을 품어도 하나님에 대한 기본 신뢰를 가지면 반드시 해답도 찾고 문제 해결의 길도 열릴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욥도 엄청난 고난 중에 하나님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21-22절).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후일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모든 서러움을 씻어주시고 영광된 자리로 자신을 이끄실 것을 믿었습니다(25-27절). 그처럼 하나님 앞에 영광스런 존재로 서는 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입니다. 세상에서 일이 잘된다고 마음이 높아지지 말고 일이 잘 안 된다고 마음이 무너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설 준비를 잘하면 그가 결국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잘 서는 문제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잘난 것은 별로 없어도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불신하며 믿음의 길에서 후퇴하지 마십시오.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사랑하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편하고 조금만 남보다 나으면 난 체하고 젠체합니다. 또한 음흉하고 잘 속이고 변덕스럽고 이기적이고 잘 삐치고 잘 미워하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요새 부실한 성도가 많다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자신에게도 부실함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고난 중에 해야 할 고백은 오직 “하나님! 마땅히 당할 일을 당했습니다.”란 겸손한 고백뿐입니다.

대부분의 성자들은 자신을 부실한 신자로 여겼습니다. 기독교 성자 중에 자신을 성자답다고 여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부실한 존재로 여겼기에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고난에는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으며 성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거름더미에서 더 크게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과거와 실패와 상처를 묻고 나가지 않으면 그 과거가 자신을 묻습니다. 지나간 상처에 매달리는 것은 암에 걸린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지나간 상처를 잘 잊으면 시간은 영혼의 강장제가 됩니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은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멋지게 이뤄 가실 것입니다.

< 믿음으로 사는 행복한 인생 >

요즘 인터넷을 통한 악한 정보의 유통시키며 세상은 냉소와 논리를 앞세워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물론 논리를 무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논리가 없는 믿음은 지혜가 없는 열정처럼 위험합니다. 논리적 사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논리 이상의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높은 차원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논리는 무거운 짐처럼 영적인 성장을 저해하기에 항상 논리보다 믿음을 더 앞세워야 합니다.

스펄전이 들려주는 얘기입니다. 옛날에 믿음과 논리가 같은 동네에 살았습니다. 믿음은 건강해서 하루에 30마일 이상 걸을 수 있었지만 논리는 약해서 하루에 3-4마일밖에 걷지 못했고 걸을 때도 계속 불평하니까 동네 사람들은 논리와 함께 다니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논리가 믿음과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요청했습니다. 믿음이 말했습니다. “논리야! 너 혼자 놀아라! 너는 나와 함께 못 걸어. 우리는 목적지가 다르잖아!” 그래도 논리는 완강하게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하면서 논리는 믿음의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논리는 계속 계산하며 가니까 한참 뒤떨어졌습니다.

저녁 무렵 그들은 강가에 도달했습니다. 논리가 말했습니다. “믿음아! 이 강을 건너지 못할 것 같아. 누가 다리를 놓을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믿음은 조용히 강을 걸어서 건넜습니다. 논리는 질겁하고 따라갔지만 따라가 보니 충분히 건널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자 높고 큰 산이 나타났습니다. 절망에 빠져 논리가 말했습니다. “믿음아! 산이 너무 높아! 저 산을 오를 수 없어! 다른 길도 없을 거야! 조금 더 상황을 분석해보자! 그래도 길이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 그때 믿음이 말했습니다. “논리야! 힘내!” 그리고 논리가 뒤쳐지지 않도록 격려하며 산을 넘어서 마침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논리의 길보다 믿음의 길을 앞세우면 인생의 짐은 의외로 가벼워지고 인생에 큰 진보와 성장도 있게 될 것입니다.

지난 22년의 목회를 돌아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신기합니다. 그 동안 어떻게 자녀를 공부시키고 어떻게 집 월세를 내고 어떻게 식사대접을 하고 살았는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교회 재정을 최대한 아껴 선교사를 후원하려고 자녀 교육비와 집 월세와 총회 참석비와 선교사 대접은 물론 목회를 위해 교인들과 식사하는 식사비도 지난 10여 년간 한 번도 교회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개인카드로 지출했습니다. 그래도 살아나가는 것을 보면 논리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삶의 이면에서는 논리보다 앞선 무수한 믿음의 기도와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이 인권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악한 현실을 볼 때마다 그는 너무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 감정대로 반응하면 뜻을 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어느 날 그가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 저는 사랑을 가지고 밀어붙이기로 했습니다. 미움은 지고 가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인권 운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불신과 냉소를 품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의 추세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흐름을 안타깝게 여기며 때로 의문이 생겨도 하나님을 꼭 붙잡고 믿음과 봉사와 나눔의 발걸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삶의 용기가 생길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증하시면서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항상 바르고 굳센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행복하게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 (030706,140309수정)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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