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의 삶을 멀리하십시오 (하박국 1장 1-17절)
<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요새 어려운 현실 때문에 비관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치는 사람들의 시름을 더하고 경제는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주의는 약해지고 있고 다수를 적으로 삼는 경쟁문화에 순진한 사람은 설 땅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성취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누군가의 눈물을 자아내는 성취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비롯됩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일전에 가난에 지친 한 19세 소녀가장이 자살했습니다. 아침에 신문배달하고 난 후 약국에서 일하며 작은 수입으로 6식구를 부양하던 예쁜 소녀가 왜 자살했을까요? 가난이란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기를 정말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자살이란 절망적인 선택은 하지 않습니다. 즉 그 소녀에게는 주위의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그처럼 서로 좋은 격려자가 되어 인간사회에 따뜻한 봄이 오게 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도 불의가 판을 치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하박국이 누구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경책 중에 1장 1절에서 자신을 선지자로 표현한 사람은 하박국, 학개, 스가랴 3명인데, 그것을 볼 때 하박국은 직업적인 선지자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박국은 경고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께 불의한 현실에 대해 ‘어찌하여’란 말로 계속 질문합니다. 하박국의 별명은 ‘기쁨의 선지자’지만 처음에는 질문이 아주 많은 ‘어찌하여 선지자’였습니다. 먼저 하박국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언제까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느냐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2절). 또한 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이란 표현으로 불의하고 혼란한 사회상을 고발하면서 왜 율법이 지켜지지 않고 악인에 의해 정의가 왜곡되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보시느냐고 질문했습니다(3-4절).
그 질문에 대해 하나님이 가장 먼저 대답하신 말씀이 불의한 현실에 대해 하나님이 행하실 놀라운 역사를 곧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5절). 어떤 놀라운 역사입니까? 6절 이하를 보면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심판 후에 놀라운 회복의 은혜도 허락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시지만 진심으로 회개하면 놀라운 회복과 반전의 역사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불의한 유다를 패망하게 하시는데 그 유다의 패망에 갈대아인, 즉 바벨론을 사용하십니다(6절). 당시 바벨론은 두렵고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마치 먹이를 움키려는 독수리처럼 강하고 빠르고 날렵했습니다(7-8절). 또한 그들은 포악하게 진군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주변 나라와 성들을 점령했습니다(9-10절).
당시 바벨론은 힘을 신으로 삼고 바람처럼 주변 국가들을 점령하며 범죄를 했습니다(11절). 그처럼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쓰실 것을 언급하자 하박국은 다시 하나님께 왜 바벨론을 심판하시지 않느냐고 호소합니다. 왜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와 불의를 심판하려고 바벨론을 잠깐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12절). 또한 하나님은 불의를 그냥 두고 보시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비록 하박국이 호소조로 질문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질문에는 하나님이 불의와 패역과 거짓된 자와 악인을 그냥 두고 보시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박국은 힘 있는 바벨론에 의해 자기 백성들이 비참하게 붙잡혀가는 모습을 그물에 낚인 고기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바벨론이 다수의 영혼을 사로잡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풍성하게 잘 먹고 잘 살면서 주변국들을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고 질문합니다(14-17절). 이 질문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결국 바벨론을 심판하고 정의를 세우실 것이란 믿음이 내포된 질문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 바벨론의 삶을 멀리하는 길 >
결국 성도와 교회가 가장 주의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벨론의 삶입니다. 바벨론의 삶이란 간단히 말하면 힘을 신처럼 앞세우는 삶, 바람처럼 빠르게 변하는 삶, 사람 숫자를 과시하는 삶, 그리고 거짓말로 영혼을 삼키는 삶을 뜻합니다. 결국 바벨론의 삶을 멀리하고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힘을 신처럼 앞세우지 마십시오
요새 과학기술과 문화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인류의 미래가 희망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힘 있는 악인이 힘없는 의인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계속 호소한 것입니다. “하나님! 왜 악인들이 의인들을 못 살게 굴도록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해도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으면 힘 있는 사람은 첨단기술을 활용해 더욱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는 악인 한 명의 포악이 과거에 천 명의 악인이 저지른 포악보다 더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악인을 진멸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심판의 도구로 쓰려고 잠시 그들을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힘을 앞세우지 마십시오. 힘이 잘못 사용되면 사람을 망치는 최악의 도구가 됩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사람의 복수형인 ‘사람들’은 더욱 믿지 마십시오.
일전에 한 대학교수가 부자 아버지를 살해하자 한 동안 많은 부자 아버지들이 밤에 자식이 슬며시 들어올까 봐 방문을 꼭 잠그고 잤다고 합니다. 물질이 많고 힘이 있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힘을 신처럼 여기지 말고 힘이 생기면 열심히 그 힘을 나누고 분산시키며 선용해야 그 힘이 미래의 다수의 축복을 예비하는 참된 힘이 됩니다.
일전에 사우나에서 60이 다 된 분이 문신을 하고 근육을 자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걸을 때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걸었습니다. 본인은 힘 있어 보이는 그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옆에서 볼 때는 얼마나 안쓰럽게 보이고 나이가 든 분이 그러니까 주책없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본인은 몸 전체에 문신을 하고 근육을 만들려고 많이 수고했겠지만 그런 모습 속에 그의 허영심과 열등감이 더 크게 보였습니다.
사람이 힘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처럼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열등감의 소산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랑은 남의 칭찬과 인정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세우려는 약자의 표식입니다. 힘이 있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힘을 자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힘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사람은 내면의 힘이 없는 약자입니다. 내면의 힘이 있으면 힘을 과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힘의 자랑을 통해 사탄과 만나지 않고 힘의 나눔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2. 바람난 사람처럼 살지 마십시오
요새 성공과 관련된 책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성공 세미나에도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러나 그런 세미나를 좋아하면 대개 더 성공하지 못합니다. 치유술사들이 몇 명의 치유를 크게 떠벌려 군중들을 미혹하듯이 교회성장 세미나 강사들이 일부 교회의 성공사례를 부풀려 성공의 환상을 심어주지만 목회자가 그런 세미나를 열심히 다니면 더 부흥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에 대한 기본신뢰가 성도들의 무의식 속에서 점차 침식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반석과 같은 듬직하고 꾸준하고 진실한 목자를 통해 무언의 평안과 희망을 얻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세미나를 열심히 쫓아다니면 무의식 속에서 왠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성도는 목회자가 세미나를 열심히 찾아다니기보다 하나님 앞에 앉아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자기 형편과 달란트를 따라 지혜롭게 목회하는 모습을 원합니다. 그래서 세미나를 열심히 다니면 천편일률적인 성공 방법과 기술과 매뉴얼은 얻을 수 있어도 양떼들의 신뢰와 권위는 은연중에 잃기에 교회는 더 후퇴하게 됩니다.
믿음의 제일 속성이 무엇입니까? 고난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유행의 바람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 거칠게 흔들리는 배에서 평안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모습을 볼 때 제자들은 무한한 힘과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됩니다. 바벨론의 삶은 바람 같은 삶입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리더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리더입니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진정한 내면의 행복과 평안과 동감을 얻고 최종승리도 얻습니다.
사탄이 제일 잘 찾아오는 사람은 바람에 잘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사탄은 아예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찾아오지도 않고 넘어갈만한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문제가 생기면 그때 사탄도 동시에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때 “큰일 났네! 어떡하지?”라고 하며 불안해하면 진짜 큰일 납니다. 그때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이 일도 감사하게 하소서!”라고 하고 평안을 찾으면 바람도 곧 잦아들고 그의 고백대로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3. 사람 숫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다수를 쫓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아주 이상적인 말씀 같습니다. 사람 숫자도 없이 어떻게 공동체와 사역을 지탱합니까? 사람 숫자가 없으면 재정도 없고 재정이 없으면 공동체를 지탱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생존 문제가 걸린 교회에는 숫자적인 성장이 더욱 절실합니다. 그래도 숫자적인 성공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숫자에 매달려서 넓은 문을 찾고 바벨론의 삶을 찾다가 축복과 행복의 길이 더 좁아진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천에 어른 교인이 약 30-40명 정도 되는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랜 기도 끝에 그 교회 담임목사가 다른 목회지로 개척을 떠나면서 후임 목회자에게 1원도 안 받고 교회를 인계했습니다. 더 나아가 후임 목회자와 한 달 동안 같이 심방까지 해주며 남은 교인들에게 교회와 후임 목회자를 잘 섬기라고 당부하고 떠났습니다.
후임 목회자는 근처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가족끼리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30-40명의 성도가 생기자 큰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롭게 목회를 잘 해보겠다고 근처의 교단 선배 목사를 찾아가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그 선배 목사가 세미나에서 주로 듣는 얄팍한 상담을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그런 경우에는 성도들의 마음을 목사님께 빨리 향하게 해야 합니다. 특히 목사님이 젊으니까 영적인 권위를 잘 인식시키고 수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임하면 곧 대 심방을 해서 성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 안수기도를 해주십시오. 그렇게 영적인 인장을 찍으면 성도들이 좋아하면서 목사님의 권위를 더 인정해줄 겁니다.”
안수를 영적인 인장 찍기로 여기고 행할 때 권위가 생긴다는 발상이 얼마나 얄팍한 발상입니까? 옛날에는 그런 발상이 통했지만 요새는 그런 발상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말씀에 은혜와 깊이도 없이 맨날 하던 설교만 하고 주의 종임을 내세워 전횡을 일삼고 평소의 삶이 엉망이면 아무리 안수를 해주어도 권위는 생기지 않습니다. 안수는 신중히 행해져야 할 깊은 의미가 담긴 영적인 접촉입니다. 그 안수를 권위를 세우고 영적인 소유권을 강화하려는 영적인 인장 찍기의 수단으로 사용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깁니다.
사실 세미나에서 배우는 방법 중에는 그런 얄팍한 방법들이 많습니다. 특히 전도 세미나에서 배우는 전도 방법들 중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세상적인 방법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런 방법들이 진실한 전도를 더 막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외적으로 성공했다는 목회자들에 의해 세미나를 통해 다량으로 그리고 천편일률적으로 유통된다면 한국 교회가 수준 낮게 되고 후퇴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수순입니다.
그런 세미나에서 배운 대로 하면 성공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별로 열매가 없으니까 사람들은 점점 그 허무한 실체를 깨닫고 그런 세상적인 방법에 대한 비판 소리를 높입니다. 그런 비판을 잠재우려고 세미나 강사가 더 강조하며 내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양념처럼 “기도하면 됩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라는 말을 세미나 내용에 열심히 섞어 넣습니다. 바벨론을 지향하는 세미나에서 ‘복음, 예수’란 말을 내세우니까 별로 앞뒤가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처럼 양념을 넣는 말도 잘 안 통하면 그 다음에는 세미나 강사가 최후의 수단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사람임을 은근히 드러냅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자는 기도 많이 한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뜻을 따르고 복음의 원리를 알고 기도하는 사람이 그런 세상적인 성공 원리를 전파하고 다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다 보면 오히려 그런 세상적인 원리를 멀리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교회성장 세미나와 목회 성공 세미나가 바벨론의 삶을 퍼뜨리니까 한국 교회는 소리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망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그 선배 목사의 말대로 젊은 목사는 대 심방을 하며 전 성도를 안수해주었습니다. 부임한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목회자가 자기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을 싫어하는 성도도 있었지만 그때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겼습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도장을 찍은 그 젊은 목사로부터 영적인 향기를 별로 맡지 못했습니다. 돈이 없어 힘들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했고 설교를 통해 감동도 못 받고 꿈과 비전도 도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1년 후에 성도는 20명으로 줄고 2년 후에는 10명으로 줄고 3년 후에는 또 다시 가족만 남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길 때 세상적인 지식이나 세미나 지식도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도 핵심 기초만은 굳건해야 합니다. 즉 균형 잡힌 건강한 말씀의 기반에서 하나님 앞에 앉아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자기 달란트와 사명을 따라 최적의 길로 나아가려는 기초만은 굳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공 욕심과 물질 욕심을 버리고 항상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숫자적인 성공에 집착해 바벨론의 삶을 추구하면 진정한 성공도 얻지 못하고 혹시 성공해도 금방 무너집니다.
4.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하박국은 하나님께 왜 거짓된 자들이 성공신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그냥 방관하시느냐고 하소연합니다(13절). 지금도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하박국처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호소만 하고 끝내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작은 변화의 초석이 되는 것입니다. 즉 거짓이 왜 성공하도록 하느냐고 호소만 하지 말고 자신이 거짓에 현혹되지 않음으로 거짓이 성공하지 않도록 일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 9계명을 주실 때 “거짓말하지 말라!”고 실천이 거의 불가능한 계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완벽하게 진실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 말에는 평범한 말도 거짓적인 요소가 있고 때로는 선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백색 거짓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 대신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거짓 증거는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강조하고 서약하며 거짓말하는 조직적인 거짓으로 사회 정의를 크게 어지럽히고 많은 피해자를 낳는 더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말하는 것보다 더 주의해야 할 것은 거짓 증거하는 ‘조직적인 거짓’입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은 ‘양심’이란 자기 검열 장치가 있기에 대개 거짓 증거를 주의합니다. 결국 자기가 거짓 증거를 하는 것보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남이 하는 거짓 증거에 현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 증거에 현혹되면 자기 영혼과 삶도 무너지지만 거짓된 자들이 성공하는데 일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새 광고의 힘이 무섭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가 아프면 무조건 <이가탄> 약을 찾습니다. 별 것 아닌 것도 계속 광고하면 대단하게 여겨지고 아무리 좋은 것도 광고를 안 하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처럼 광고는 허상을 만들고 심지어는 거짓도 진짜로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성도는 거짓말과 거짓 증거로 영혼을 삼키려는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바른 말씀 지식을 알고 특히 세상적인 욕심과 영험하게 보이려는 영적인 욕심도 잘 버려야 합니다.
로마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람의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새는 마음 놓고 얘기할 사람이 적은 시대입니다. 분위기 좋게 웃으며 말했는데 그 말이 왜곡된 형태로 되돌아와 뒤통수를 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가장 신나고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릴 때가 언제입니까? 둘이 앉아서 남의 욕을 실컷 할 때입니다. 그처럼 입술은 수많은 죄와 잘못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누가 이단에게 잘 넘어갑니까? 순수하게 잘 믿는 사람이 대개 이단의 사냥감이 됩니다. 언뜻 보면 이단들의 믿음은 더 대단하고 굳셉니다. 그러나 분별력 없는 확신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순수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어둠의 속성을 이해하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대박 성공신화를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특히 바벨론의 화려한 삶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가는 과정에 어려움은 있어도 반드시 최종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 진리가 발견되는 곳 >
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삶에 미혹됩니까? 외적인 성취에 최상의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외적인 성취나 성공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성공 집회를 찾고 성공 세미나를 찾지만 성공한 후에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공에 대한 바른 개념과 가치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와 성공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고상한 이론에서 발견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진리를 향해 열려 있기만 하면 작고 초라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진리는 발견됩니다.
17세기 프랑스에 로렌스 형제란 부엌의 성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성질이 고약한 마부였습니다. 그는 1666년 주방에서 일하는 평인 수도사로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18세 때 눈 덮인 겨울 숲을 거닐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 후 계속 하나님의 임재 훈련을 통해 불멸의 성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는 매일 수도사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며 부엌에서 노래했습니다. “이 모든 식기들의 주인 되시는 주님! 주님은 부엌에서 일하는 제게 기쁨으로 노래하며 식사를 준비시키고 저 많은 그릇을 닦게 하셨나이다.”
로렌스는 하나님의 임재 훈련을 통해 초라한 부엌을 지상 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진리는 외적인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화려하게 만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위대하게 만들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뜻과 삶을 따라 많은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성공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성공하면 더욱 자신을 감추고 그 성공을 힘써 나누려고 하십시오. 그래서 심령의 자유와 평안과 보람을 얻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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