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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말 것과 믿을 것 (마태복음 26장 31-35절)

by 【고동엽】 2022. 1. 2.

믿지 말 것과 믿을 것 (마태복음 26장 31-35절)
< 사탄의 전략에 속지 마십시오 >

약 10년 전에 중국 북경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가이드가 호텔 밖으로 혼자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지금보다 훨씬 못 살던 때였습니다. 2시간 전신 마사지를 받는데 한국은 8만원 할 때 중국에서는 한국 돈으로 8천원을 했습니다. 호텔 안에서는 작은 생수 한 병이 2불 50센트였는데 호텔 뒤 구멍가게에서는 1불에 큰 생수 1병, 큰 소다수 2병, 과자 2봉지를 살 수 있었습니다. 거의 10배였습니다.

그때 가이드는 호텔 밖 출입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면서 중국에서 혼자 여행하던 사람이 납치되어 장기가 다 해체되어 죽었다는 얘기 등을 여러 번 했습니다. 왜 그 가이드가 그런 얘기로 두려움과 공포를 주었을까요? 여행객들을 그의 품 안에 가두어 바깥 세계를 차단하고 자신이 인도하는 식당과 상점만 이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여행자의 호주머니를 가볍게 하고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려는 영업 비밀이었습니다.

거짓 목자를 구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영혼에 공포감을 주는 언행 빈도수를 살펴보면 대략 구분됩니다. 왜 거짓 목자는 거의 매번 지옥과 사탄과 귀신 얘기를 할까요? 그들의 영업 비밀을 노출한다고 눈을 흘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공포감을 조성해서 영혼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요새 LA 다저스의 디 고든 선수가 뜨고 있습니다. 마이너리그 때부터 천재적인 도루 실력으로 유명했는데 타격까지 좋아지니까 인기가 많습니다. 며칠 전 한 야구해설가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도루를 잘합니까? 비결이 있습니까?” 그때 고든이 말했습니다. “그건 영업비밀이라 말할 수 없어요.” 어떤 분야의 대가는 각자의 영업비밀이 있습니다. 그런 영업 비밀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영업 비밀이 거짓과 술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그냥 두고 보면 안 됩니다.

1960년대 프로레슬링은 최대 인기스포츠였습니다. 그때 박치기 왕 김일은 최대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영철 선수가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기자회견을 하자 그 다음부터 프로레슬링의 인기도 점차 하락했습니다. 그때 장영철 선수는 프로레슬링계의 영업 비밀을 밝힌 이유로 거의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거짓과 술수로 사람들을 호도하는 영업 비밀은 밝혀져서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거짓 목자는 사탄과 지옥과 귀신 얘기로 영혼에 공포감과 두려움을 심은 후 심약해진 사람들에게 영혼의 때를 위해 목숨과 물질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 바친 물질로 화려한 초대형 교회를 짓고 자기 왕국을 세웁니다. 그것이 영혼의 때를 위한 모습일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영혼의 때’란 말도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대신 ‘천국에서’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부활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공리와 같은 가장 중요한 기초 교리입니다. 천국 삶은 ‘영혼이 유령처럼 지내는 삶’이 아니라 ‘몸을 입고 누리는 삶’입니다.

그런 거짓 목자들은 유난히 기도를 강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로 귀신과 싸우는 도구로서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귀신에게 진다고 합니다. 그런 설교를 계속 들으면 기도하면서도 귀신 영상은 계속 부각되고 불안과 공포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닌 ‘공포의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이 틈타니까 24시간 내내 기도해야 합니까? 적절하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고 생업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기도하지 않는 시간도 지켜준다는 것이 바른 기도생활입니다.

‘10시간 기도했는데 귀신과 불안과 어둠을 떨치지 못한 사람’과 ‘10분 기도했는데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사람’ 중에 하나님이 누굴 더 기뻐하실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결국 거짓 목자가 기도를 강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귀신과의 싸움 도구’로 인식시켜서 계속된 귀신 얘기로 영혼에 두려움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들은 끊임없이 사탄과 귀신과 지옥 얘기를 기회만 생기면 합니까? 영혼을 자기 수족처럼 만들고 종처럼 부려먹고 영혼의 때를 위해 바치라고 하며 물질을 뜯어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사탄과 귀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때만 했고 그때도 영혼에 두려움을 심기보다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보통 목회자들도 때로는 지옥과 사탄과 귀신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성도다운 삶을 도전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성경은 상당 부분이 성도다운 삶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 얘기가 나오면 이단 목자는 자기 영업에 방해되니까 그런 설교는 영성이 없는 윤리적인 설교라고 비하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잠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경은 성경에서 빼버려야 합니다. 그처럼 윤리설교란 딱지붙이기로 자신의 무속적이고 기복적인 설교를 영성설교처럼 포장하는 트릭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사탄과 귀신 얘기 많이 하면 영성이 있는 설교입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왜 그런 얘기를 계속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해서 자기 삶과 영혼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 무서운 귀신영화를 보면 1-2주간은 공포에 젖습니다. 영상 이미지 수용성이 강한 저의 첫째 딸은 더 오래 공포에 젖었습니다. 그때는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방에서 혼자 자지 못하고 “엄마! 무서워요!”라고 하면서 엄마 침대로 들어와 꼭 품에 안겼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절대 의지하게 하려고 공포심을 잊을 만하면 귀신영화를 보여주는 부모가 있다면 참된 부모일까요? 참된 부모는 최대한 귀신 공포영화를 차단함으로 자녀의 동심과 영혼을 지켜주고 수시로 “저건 아무 것도 아냐?”라고 자녀를 안심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성인도 무서운 귀신 영화를 보면 며칠 동안은 공포감이 생깁니다. 그래도 성인은 그 공포감을 이겨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미성숙한 신자에게 귀신 얘기를 자주 들려주면 공포감이 믿음을 압도합니다. 그래서 공포감을 이기려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공포기도’에 매달리고 거짓 목자에 매달립니다. 반면에 성숙한 신자는 귀신 얘기를 들어도 믿음이 공포감을 압도합니다. 그런 강한 믿음이 있으니까 불안감과 두려움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감사기도’가 넘치고 기쁨과 평안이 넘칩니다.

사탄은 자기 하수인을 통해 미성숙한 신자들에게 자기 영상을 주입해서 공포심을 가지게 하고 그 공포심을 이용해 ‘공포에 사로잡힌 기도와 헌신’을 하게 한 후 순진한 영혼들의 열정과 호주머니를 털어 자기 왕국 건축에 이용합니다. 문제는 그런 괴벨스 같은 거짓 목자는 자기가 영혼을 약화시키는 사탄의 하수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영성’으로 알면서 스스로도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전한 신학공부와 목회 윤리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고 신학교에서는 “목사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처럼 거짓 목자는 사탄과 귀신과 지옥 얘기를 해서 순진한 어린 영혼을 약화시킨 후 말은 예수님께 매달리라고 하면서 자기에게 매달리게 하고 자기 왕국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매달리게 합니다. 문제는 귀신 얘기를 계속 하면서 귀신의 영상을 키워 영혼을 약화시키는 영혼 사냥꾼의 전략에 말려드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사탄을 밟고 올라서서 사탄이 자신을 결코 해칠 수 없다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생활에서도 그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면 두려움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공포의 기도’를 드리면 두려움이 계속되고 기도할 때는 잠시 두려운 감정과 한탄의 감정이 없어졌다가 기도 후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한탄이 남아 있습니다. 왜 공포의 기도는 그 효과가 며칠도 못 가고 심지어는 몇 시간도 못 갑니까? 계속 귀신 얘기를 들으면서 그 영혼이 매우 심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된 귀신 얘기로 영혼을 약화시키는 태도는 하나님과 사탄을 대등한 선악관계로 만들어 사탄을 크게 보게 하는 이원론 사상의 대표적인 태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맞상대할 수 없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자녀도 못 이깁니다. 그런 확신을 심어주지는 않고 계속 사탄과 귀신과 지옥 얘기를 하면서 두려움을 심어 담대한 믿음을 빼앗고 또한 영혼의 때를 위해 기도하고 바치라면서 정작 본인은 성도들이 바친 시간과 물질로 자기 왕국을 쌓는 사람에게 결코 속지 마십시오.

그처럼 귀신과 사탄과 지옥 얘기로 구원의 확신을 약화시키고 계속 불안감을 주면서 기도를 독려하는 거짓 목자의 말과 의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에서 나쁜 가이드에 매이면 영혼이 두렵고 헐벗게 됩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고 호텔 밖으로 나갈 때 새로운 복된 세계가 펼쳐지듯이 “죽으면 죽으리라!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사탄은 나를 어떻게 못한다!”고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면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축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사람을 너무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 복된 인생을 위한 교훈 >

본문은 예수님이 성찬식이 끝나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 교훈을 통해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어떤 교훈입니까?

1.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성만찬이 끝나고 감람산으로 가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쓸쓸한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31절).” 그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다 예수님을 버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친구를 믿되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때로는 적보다 친구를 더 조심해야 합니다. 적이 와서 다단계 가입하라고 하지 않고 친구가 와서 다단계 가입하라고 합니다. 물욕은 친구까지 그렇게 이용도구로 만듭니다. 그처럼 사람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어느 날 친구 둘이 산길을 가는데 갑자기 큰 곰이 나타났습니다. 한 친구가 옆 친구를 밀치고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다급해진 옆 친구는 곧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습니다. 곰은 죽은 시체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곰은 엎드린 친구를 여기저기 살피다가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얼마 후 나무 위로 올라간 친구가 내려와 물었습니다. “여보게! 곰이 귀에 대고 뭐라고 하던가?” 엎드렸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저만 혼자 살겠다는 놈과는 상종도 말라고 그랬어.”

사람은 수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삽니다. 그 은혜를 버리거나 배신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배신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너무 믿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했다고 너무 상처 받지 않게 되고 인간 이해의 폭도 넓어지면서 내일의 희망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제자들이 다 버릴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쓸쓸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는 내적인 깊은 평안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평안이 있었을까요? 구약 스가랴 13장 7절에 나오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란 말씀을 통해 그 과정들이 다 말씀의 성취 과정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의 배신조차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이뤄지는 사건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배신에 너무 상처 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고 떠나게도 하십니다. 또한 살면서 당하는 수많은 실패와 시련과 고독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하에 이뤄진 것입니다. 그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음을 믿고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면 어떤 시련을 만나도 침착할 수 있고 그때 복된 인생을 위한 교훈도 많이 얻습니다.

시험과 시련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표식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는지는 우리는 잘 모릅니다. 우리들에게는 사랑받을 만한 것이 사실상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열렬히 사랑해주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때로는 시험도 허락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개선과 성숙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약속과 최종승리를 철저히 믿으십시오.

3. 첫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했습니다(32절).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제자들이 실망해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인 갈릴리로 갈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들의 믿음과 소명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왜 갈릴리에서 믿음과 소명을 새롭게 하셨습니까? 그곳이 영적인 첫 사랑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첫 사랑의 이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요새 왜 교회성장 프로그램이 비판받습니까? 영혼은 거대한 교회조직을 통해서도 바벨론의 냄새를 맡지만 획일적인 교회성장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바벨론의 냄새를 맡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과 세미나는 교회에 대한 첫 사랑의 이미지를 크게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한 때 교회를 망치는 대표적인 전시 행사가 한국 교회를 휩쓴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총동원 전도주일>이란 행사입니다. 그때 양로원과 노인정에서 식사와 선물을 미끼로 노인들을 버스로 한번 데려온 것도 전도로 쳐서 한 사람이 몇 천 명을 전도했다는 과대망상이 성행했습니다. 그게 무슨 전도입니까? 그러니까 교회를 난생 처음 온 사람에게는 교회가 시장바닥처럼 가벼운 이미지로 첫 인상이 형성됩니다. 반면에 진지한 사랑의 전도를 통해 고난 중에 교회에 첫 발을 디딘 사람은 교회만 들어서도 경건한 분위기에 눈물이 탁 터집니다.

나중에 보면 교회에 대한 첫 인상 차이 때문에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깊이 있고 지속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람은 첫 인상으로 식당을 계속 찾고 첫 인상으로 교제를 계속할까를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첫 대면은 첫 사랑의 입구와 같은데 교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교회를 시장바닥처럼 느끼게 하면 교회에 대한 첫 인상이 좋게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인생의 진지한 고민거리가 생겨도 교회를 찾고 싶은 마음이 덜 생깁니다. 결국 교회에 대한 첫 인상을 일그러뜨린 총동원 전도주일 행사는 한국 교회에 최대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총동원 전도주일이란 과시적인 행사와 교회성장 세미나 등을 통한 수많은 인위적인 행사는 오히려 참된 전도를 막습니다. 왜 일제강점기 때 한국 초대 교회가 영혼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까? 요한계시록의 서머나 교회처럼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 한국 교회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까? 외형적인 성공과 성장 세미나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세미나 교회’가 되지 말고 ‘서머나 교회’가 되는 길에 있습니다.

4. 자신을 믿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오늘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했습니다(33절). 그때 베드로는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람이 얼마나 연약하고 잘 변하는지는 모르고 한 소 영웅주의적인 성급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 그때 베드로가 다시 “저는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뼈를 묻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우리도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35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습니다.

요새도 베드로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에 뼈를 묻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 중에 실제로 그 교회에 뼈를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이 진짜 뼈를 묻습니다. 살면서 수시로 선한 결심을 하고 노력하지만 그 결심과 노력은 얼마 못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기의 연약함을 아뢰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그처럼 자신의 결심과 노력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어느 날, 한 선생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나요?” 그때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절대 노력하지 말게. 순종은 노력으로 안 돼.” 인간의 의지와 결심과 노력은 무력한 것이란 뜻입니다. 살면서 굳게 결심하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좋지만 자기 긍정이 지나쳐서 자기 과신이 되면 안 됩니다. 남을 지나치게 믿지도 말고 자신을 지나치게 믿지도 마십시오. 인생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

사람이 자신을 과신할 때 꼭 나타나는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먹었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글러먹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자신에게도 잘못 되어먹고 글러먹은 모습이 많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지나치게 신뢰하면 사람들의 신뢰를 더 잃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 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세상 소리가 더 달콤하게 들릴 때가 많습니다. 유혹의 소리는 언제나 달콤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와는 눈에 비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까?(창 3:6). 그런 달콤함에 넘어갔다가 실패한 후 남을 원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담도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 때문에...”라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다가 삶이 힘들어질 때 하나님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사회를 탓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에 대한 비판의식은 있어야 하지만 습관적으로 남 탓과 환경 탓을 하면 안 됩니다. 탓은 자기 영혼도 병들게 하지만 남의 영혼도 어둡게 만들고 하나님의 마음도 얻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힘든 일을 만날 때 최소한 남 탓은 하지 마십시오. 탓하는 삶은 약자의 제일 표식입니다.

가끔 하나님을 잘 믿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뭔가를 이룰 수 있다고 여기면 그런 생각도 자주 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의 연약성을 진심으로 깨달을 때가 옵니다. 바로 그때가 진실한 믿음이 생길 때입니다. 그처럼 고난과 시련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감사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 주일설교(140413)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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