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척 하는 큰 인물 (마태복음 18장 1-6절)
<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십시오 >
어느 날, 한 초등학교 교사 선생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며 칠판에 글을 쓰는데 한 아이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 안 보여요. 대가리 좀 비켜주세요.” 선생님은 당황했지만 그 아이는 하나도 당황해 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빠 엄마로부터 늘 듣던 말을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좋은 언어를 쓰고 자녀들도 좋은 말을 쓰려고 해야 합니다. 나쁜 말을 쓰면 위인이 될 수도 없고 진정한 친구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욕을 쓰지도 말고 욕이 입에 배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렸을 때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입에서 “씨...”란 말이 나왔습니다. 욕이 아닌 억울함의 표시였는데 아버님은 그 말을 욕으로 여기고 무섭게 매를 대셨습니다. 그때 “욕하는 것은 맞아죽을 일이구나!”란 생각이 배여 흔한 ‘새끼’란 욕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친구나 형제에게 욕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녀들과 약자들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본문은 그 사실을 잘 도전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로마를 정복하면 자신들도 새 왕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란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생긴 보이지 않는 분쟁과 갈등이 마침내 “누가 큰 자가 됩니까?”란 질문으로 표면화된 것입니다.
요즘도 성도 중에 당시의 제자들과 같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성공해서 더 높은 자리에 있는가? 누가 더 돈이 많은가? 누가 더 좋은 차를 타고 멋진 옷을 입는가?” 그렇게 비교하며 살면 속상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왜 큰 비전을 가져야 합니까? 비전이 커질수록 비교의식이 작아지면서 불행감도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천국에서는 차별적인 계급이 없기에 인간적인 비교 개념을 따라 누가 크냐고 질문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크고 작은 자가 없습니다. 그처럼 크고 작은 것에 대한 비교개념이 작을수록 천국 평안은 커집니다. 반면에 천국에서도 상급 차이는 있기에 상급 개념에 따라 누가 크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 천국의 큰 자와 관련된 교훈 >
누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까? 천국은 세상 나라와 무조건 반대 개념을 가진 나라는 아니기에 ‘천국에서 큰 자’는 세상에서 ‘작은 성도’가 아니라 ‘작게 된 성도’입니다. 즉 천국에서 큰 자는 힘을 과시하지 않거나 나타내지 않는 절제자입니다. 더 나아가 힘이 있으면서도 작은 것처럼 자신을 낮추고 힘을 나눔으로 작게 되기를 기뻐하는 자는 천국에서 더욱 큰 자입니다. 결국 나눔에 탁월한 자가 누구보다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나눔에 탁월하게 되려면 어린아이처럼 계산이 없고 순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삶을 도전하신 것입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 당시에 여자와 어린이는 소중한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고 더 나아가 그들의 순수함이 천국 백성의 중요한 자격임을 ‘진실로, 결단코’란 말을 통해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낮추고 어린이를 잘 대접하라고 말합니다(5절). 본문 말씀은 어떤 교훈을 줍니까?
1.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처럼 대하십시오
어린아이는 순수함과 겸손함의 상징으로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남을 의심하지 않으려고 하고 계산과 꾸밈이 없이 살려는 천국 시민의 상징입니다. 그처럼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고 더 나아가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본문 바로 뒤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어린아이의 수호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은 그 천사들이 하나님의 절대 신임을 받는 존재란 뜻인데 그런 영광스런 존재들이 어린아이들은 수호한다는 말씀은 그만큼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깊은 관심 대상이란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약자와 어린이들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숭배의 의미가 아닌 존경의 의미에서 하나님처럼 대하고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처럼 대해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니까 자신은 꽤 괜찮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부모가 자녀들을 통해 얻는 것들도 많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피곤한 삶에 활력을 줍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자녀를 보면 책임감이 생기고 새 힘이 납니다. 또한 자녀 앞에서 행동과 말을 조심하는 것 등도 자녀 때문에 얻는 큰 유익입니다.
2. 순수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3대 조건을 말씀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요 3:5).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둘째,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마 6:14-15). 누군가를 멀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멀리하더라도 미워하지는 말고 용서하십시오. 자신에게도 다른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셋째, 어린아이들과 같어야 합니다(3절).
물론 어린이들에게도 잘못된 점이 많기에 어린아이라고 무조건 다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그 믿음이 어린아이처럼 계산이 없는 순수한 믿음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처럼 계산이 없어야 진짜 친구도 얻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마음도 얻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친구가 필요하기에 친구를 찾고 만듭니다. 그러나 친한 친구라도 오래 같이 지내다 보면 갈등도 생기고 서로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때 계산과 속셈을 가지고 친구관계를 맺으면 갈등 상황에서 그 친구관계가 깨집니다. 그러나 계산이 없으면 갈등을 넘어 좋은 친구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좋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얻습니다. 계산이 없는 순수한 믿음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계산이 없는 사람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보다 못난 것 같은 사람과도 친구를 하려고 합니다. 무엇을 얻는데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친구를 뒤에서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자신을 높게 보이려고 친구조차 깎아내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허례허식이 없습니다. 크기와 서열과 외형을 의식하며 억지로 잘 보여 사람의 마음을 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넷째, 삶이 따뜻하고 감사와 이해심도 넘칩니다. 그처럼 계산과 속셈이 없어야 진짜 친구를 얻을 수 있고 믿음도 진실한 믿음이 됩니다.
믿음도 축복을 믿는 계산적인 믿음이 주가 되면 영혼이 실족되기 쉽습니다. 축복은 참된 믿음의 부산물로 여길 줄 알아야 진짜 축복도 주어집니다. 성공 문제에서도 그렇습니다. 너무 따지고 계산하면 세상에서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인맥을 얻고 좋은 멘토를 얻고 크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대개 비계산적인 사람입니다. 교회도 선교하고 나눌 줄 아는 교회 교인이 축복 받습니다. 기복적인 설교로 “축복 받으십시오!”라고 하면 더 축복을 못 받고 선교적인 설교로 “더욱 나누십시오!”라고 하면 더 축복 받습니다.
물론 계산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이 계획과 구상도 하지 말고 생각 없이 유치하게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계산적인 존재가 되지 말라는 말은 자기에게 이익 되는 방향으로만 계산하며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기적으로 계산하고 살면 단기적으로는 성공한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결국 실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과 태도를 원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사람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3. 겸손한 태도를 가지십시오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란 말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자’란 말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행복하게 삽니까? 세상적인 복을 받고 정상에 오르겠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반면에 자신을 작은 존재라고 여기고 잘난 체 하지 않고 힘을 과시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 행복하게 삽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은 자기 비하나 유약함이 아닙니다. 또한 자신의 견해가 없는 무색무취한 태도도 아니고 평지의 삶에 머물러 있으면서 정상을 향한 꿈과 비전이 없는 모습도 아닙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되 비하하지 않는 것이고 무대에서는 내려와도 맡은 자리에서는 쉽게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칭찬받는 자리에서는 물러나되 어려운 자리에서는 후퇴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이지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겸손하게 살면서도 때로는 당당하고 강하게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돌진은 주의하되 꿈과 비전을 향한 저돌적인 매진은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겸손은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사용하지 않고 절제하며 더 나아가 힘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명제는 이렇습니다. “힘이 정의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의 명제는 이렇습니다. “힘의 자발적인 나눔이 정의다!”
사람은 다 교만해지려는 본능이 있지만 그런 본능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겸손이 없으면 인생은 회한이 많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교만한 모습을 보인 후 나중에 자책합니다. “내가 왜 그때 그런 교만한 말과 태도를 취했을까?” 반면에 겸손하게 행동하면 나중에 이런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때 그렇게 행동하길 잘했어.” 그래서 겸손하면 늘 평안을 잃지 않고 결국 남의 인정과 존중을 받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인정과 은총을 받으면서 결국 천국에서 큰 자가 됩니다.
4. 편견 없는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든지 주님 이름으로 어린 아니 하나를 영접하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5절). 그리고 성도 하나를 실족시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며 성도 한 사람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언급합니다(6절). 더 나아가 본문 다음에 나오는 7-9절 말씀은 그렇게 성도를 실족시키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진다고 말씀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연약한 성도를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성도를 실족시키는 행위는 무엇보다 큰 죄입니다. 요즘처럼 쉽게 상처받는 시대에 단순하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성도를 실족시키는 행위가 아닙니다. 살면서 아무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한다면 아무도 천국에 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끼리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연약함의 발로이지 사악함의 발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연약한 인간관계에서 늘 있을 수 있는 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십시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한 ‘성도를 실족시키는 행위’는 약하고 없고 어린 자를 약하고 없고 어리다는 이유 때문에 무시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사람은 만남의 횟수 및 때와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친소관계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친소관계를 가지는 것은 편애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질문한 것은 편애가 아닙니다.
편애란 사람의 기본인격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의 기본인격을 존중하고 상대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편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편견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작은 자와 자녀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자기 자녀가 다른 자녀보다 못나보여도 소중하게 여겨주면 점차 훌륭한 자녀가 됩니다. 자기 부모가 다른 부모보다 못한 것 같아도 소중하게 받들면 자신에게는 훌륭한 부모가 됩니다. 더 나아가 힘없는 유아들을 소중히 여기듯이 힘이 빠진 어르신들도 소중히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이번 총회에서 한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왜 나이든 은퇴 목사님들이 그렇게 총회에 기어코 참석하려고 할까? 보기에 안 좋다.” 사실상 그 말이 듣기에 안 좋은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다른 목회자들은 속으로 그런 말을 하는 목회자를 멀리합니다. 복의 근원과 함께 하면 복을 받지만 불행의 근원과 함께 하면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은퇴한 어르신 목사님들은 은퇴하면서 존재의미가 크게 약화된 상태이기에 총회에 참석해서 같이 회의하며 교제하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젊은 목회자가 나쁘게 보면 어떻게 복된 존재가 됩니까? 힘이 빠진 어르신들을 잘 섬기고 힘없는 사람들을 잘 살필 때 하나님의 보살펴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바르게 성공한 것이라면 자기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하지 말고 존경해주십시오. 반대로 무책임과 무절제로 뒤처지고 실패한 것이 아니라면 자기보다 뒤처진 사람을 힘써 보살펴주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 작은 척 하는 큰 인물 >
미국 보스턴에 애니란 시각장애인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장애에 너무 속이 상해서 정신병까지 걸렸습니다. 그런 그녀를 부모도 외면했습니다. 어느 날, 한 어른 자원봉사자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 따뜻한 사랑에 감동해 그녀는 6개월 만에 마음 문을 열었습니다. 점점 병세가 좋아져서 퇴원했고 곧 보스턴 파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6년 동안 우등생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시력을 되찾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이런 신문 광고를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 구함.” 애니는 어른 자원봉사자의 사랑에 감사하고 신문사의 도움으로 시력을 되찾은 것도 감사해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품고 그 구인광고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먹고 자면서 그 아이를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화를 남긴 인물로 키워냈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나중에 빅토리아 여왕이 헬렌 켈러에게 영국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며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그때 헬렌 켈러가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앤 설리반 선생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인물을 키우는 비전을 가지고 몇 년째 “예수 믿고 인물이 되라! 예수 믿고 인물을 만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동료 목사님은 그 비전을 공유하면서 그분 교회에서도 예배가 끝날 때마다 일어나서 교인들과 함께 손을 들고 외칩니다. “예수 믿고 인물이 되자! 예수 믿고 인물을 만들자!” 그 비전이 공수표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훈련하고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책임과 무절제가 없는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가난하게 되고 약하게 되고 장애인이 된 사람을 섬겨주는 태도입니다.
어느 날, 아파트 주차장에서 누군가 아주 예쁜 차를 주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년이 차에서 내리는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자동차가 너무 예뻐요. 이런 자동차를 사려면 꽤 비싸지요?” 아저씨가 궁금해서 되물었습니다. “왜? 이런 차를 가지고 싶니?” 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그러나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다리가 불편해 밖에 나가서 걷지도 못하고 뛰지도 못하는 제 동생에게는 이런 예쁜 차를 하나 사주고 싶어요.”
얼마나 귀한 동심입니까? 그 소년의 말을 들은 그 아저씨는 그날 나누려는 마음과 비전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소년의 말을 들은 하나님도 그 소년을 인물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년처럼 항상 남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힘을 나누려고 힘을 키우고, 인물을 만들려고 인물이 되고, 큰 인물이 되어도 늘 작은 척 하며 은밀하게 나눔을 실천하십시오. 그처럼 작은 척 하는 큰 인물이 많아질 때 이 세상은 한 단계 더 밝게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흔히 교단 총회에서 많은 갈등과 싸움이 있다고 듣지만 저희 교단 총회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1990년 한번 다툼이 있은 후 24년간 평화롭게 총회를 끝냈습니다. 회의는 사람을 회의에 빠지게 할 요소가 많지만 의견이 달라도 거의 큰 소리 없이 평화롭게 끝내는 저희 교단 총회가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가급적 성도 대표도 총회에 함께 참석했으면 하는 이유가 총회를 통해 교단과 목회자에 대해 회의에 빠지기보다 오히려 애정도 커지고 소중한 비전도 받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둘째 딸을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총회에 참석시켰습니다. 제가 속한 <기독교 선교연맹>의 DNA와 나눔과 선교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아빠가 한국에서 저희 선교연맹의 나눔의 영성을 착근시키려고 분투하는 것을 딸의 인생영상에 무언으로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둘째 딸이 많은 동료 목사님들의 사랑과 후원과 기도도 받고 나눔과 선교 비전도 받으면서 지금은 뼛속까지 저희 선교연맹의 DNA가 심어지는 느낌입니다.
지금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유명한 이태리 피자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곳은 100여 년 전에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의 창시자인 심슨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장소였습니다. 작년에 총회기간 중 저녁에 딸을 데리고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때 딸이 그곳을 되사서 총회회관으로 삼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또한 선교사와 목회자들이 쉴 수 있는 집을 구입해 바치고 싶다는 비전을 가졌습니다. 금년에는 저희 선교연맹 산하의 대학교가 4개나 있는데 아직 고등학교가 없으니까 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비전도 가졌습니다.
소중한 비전을 가지면 하나님이 그 비전을 이룰 소중한 인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인물 재배치 계획에 따라 음지에서 후원할 소중한 인물을 만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처럼 나눔과 섬김의 비전을 가지고 순수한 마음으로 작은 등불 하나라도 들려고 하면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지고 하나님이 인물의 꿈도 이뤄주실 것입니다. 마치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극적인 암행어사처럼 음지에서 소리 없이 후원하는 유력한 인물 한 사람의 힘은 거대한 초대형 교회 하나의 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의 육상 영웅인 그리피스 조이너는 LA 남쪽 빈민가에서 11남매 중 한 명으로 자랐습니다. 그녀의 가정은 정부 보조금으로 간신히 사는 가정이었고 그녀는 그 가정에서 꿈과 희망도 없이 절망 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다니던 학교에 슈가레이 레너드란 유명한 복싱 챔피언이 방문했습니다. 아이들은 환호할 때 그녀는 혼자 그늘진 곳에 앉아 땅을 꼬챙이로 푹푹 찍으며 무관심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언뜻 보고 레너드가 조용히 다가가 물었습니다. “얘야! 넌 뭐가 제일 좋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나는 뛰는 것 외에는 재밌는 게 하나도 없어요.” 레너드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나와 함께 뛰어 볼래?”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뛰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얼마나 잘 뛰던지 다 뛰고 나서 강철 체력을 자랑하던 그가 오히려 헉헉거리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뛰는 운동을 하면 나보다 더 유명한 세계적인 선수가 될 거야.” 그때 그녀가 다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뛰어서 유명한 인물이 되자!” 그때부터 최선을 다해 훈련해서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늘진 곳에 앉아 절망하는 약한 자에게도 깊은 관심을 주면 그도 훌륭한 인물이 되고 그를 섬겨주는 자도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자를 섬겨주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이제 그저 ‘작은 자’로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큰 인물의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이룬 후 ‘작게 된 자’로 살려고 하십시오. 그처럼 작은 척 하는 큰 인물이 되어 사랑과 섬김과 나눔을 실천함으로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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