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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자라 가십시오 (베드로후서 3장 18절)

by 【고동엽】 2022. 1. 2.

계속해서 자라 가십시오 (베드로후서 3장 18절)
< 우상화를 힘써 거부하십시오 >

믿음생활에서 ‘순종의 영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이기주의와 기복주의를 극복하게 하고 자기 우상화를 억제하게 하는 훈련 측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은 자기 반대자도 비교적 잘 받아들이지만 반대를 잘하는 사람은 자기 반대자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크게 지나쳐 반대자를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면 대개 기존 질서에 반대해서 힘을 얻은 후에 카리스마의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1978년 11월 18일, 남미 가이아나의 존스타운에서 인민사원(Peoples Temple) 교회 신도들이 집단자살을 했습니다. 교주 짐 존스는 1952년 감리교회의 청년부 전도사로 있다가 흑인 신도를 거부하는 당시 교회에 반대해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그리고 흑인, 매춘부, 마약 중독자, 노숙자 등 소외계층을 돌보면서 그 점을 내세워 기존 교회를 반대하고 공격하며 신도를 끌어 모았습니다. 점차 공동체가 커지자 자신은 기존 교회를 반대하며 힘을 키웠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반대자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반대자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자기 우상화’의 길로 갑니다. 그때부터 카리스마를 나타내려고 꾸미고 미혹하고 조작하다가 그래도 잘 안 통하면 진짜 칼을 휘두릅니다. 결국 카리스마를 좋다고 따라가면 “내게 칼이 있어! 임마!”라고 소리치는 교주의 저주의 칼에 맞게 되고 심하면 교주의 측근 신도들에 의해 진짜 칼에 맞기도 합니다.

그런 자기 우상화를 무엇이 가장 방해합니까? ‘진리와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주는 ‘진리와 사실’로부터 영혼을 격리시키려고 울타리를 치고 폐쇄화의 길을 걷습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김정은 일가와 그 주변의 소수의 무리들을 위해 북한 국민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희생하며 삽니까? 울타리를 높게 쳐 외부소식을 차단하니까 자기들이 낙원에서 사는 줄 알다가 외부 현실이 점차 알려지니까 이탈 주민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일성 3대의 행태와 이단 교주들의 행태는 본질상 같습니다. 이단 교인들도 얼마나 희생합니까? 그래도 교주가 외부를 못 보게 울타리를 치니까 자기들만 선택된 존재인 줄 압니다. 그때 교주들이 치는 가장 흔한 울타리는 “오직 성경!”을 내세워 경건서적을 못 보게 하는 울타리입니다. 그들이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중시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경 해석만을 따르게 하려고 “오직 성경!”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오직 성경인데 경건 서적을 왜 읽어?”라고 말하면 그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그가 자기 말만 진리라고 믿게 하며 우상화의 길을 가려는 수순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좋은 경건 서적도 폭넓게 많이 봐야 극단적이고 파멸적인 신앙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단에 깊이 빠진 사람 중에는 폭넓은 독서자는 거의 없습니다.

또한 ‘진리와 사실’로부터 영혼을 격리시키려고 치는 또 하나의 울타리는 ‘신학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교주가 자기 멋대로 하는 해석을 무엇이 가장 막습니까? 신학이 막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영성을 강조하면서 신학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신학자는 비판 받을 수 있지만 신학 자체는 꼭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내용은 신학이란 그릇이 있어야 잘 보존됩니다.

성경을 기초로 신앙 원리를 체계화시킨 신학 중에 교회역사 및 교회생활을 통해 바른 신학으로 검증된 건전한 신학을 멸시하면 안 됩니다. 거의 모든 교단이 3년 간 성경을 10번 읽은 사람이나 3년 간 매일 10시간 기도한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고 최소한 3년 간 신학 공부를 하고 인턴과정을 거치고 고시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사실만 봐도 신학의 중요성은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심하게 ‘진리와 사실’로부터 영혼을 격리시키려고 쓰는 극단적인 방법은 ‘아예 세상과 담을 쌓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신앙촌을 만들어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들어와 살게 합니다. 그때부터 교주의 우상화는 극에 달해서 자기들만 낙원에서 살고 특별히 구원받는다고 세뇌하면서 신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습니다.

처음에는 그 공동체 생활이 새롭고 좋아 보이지만 점점 그곳 생활이 지옥임을 깨닫고 탈출하려고 하지만 그때는 감시자를 붙이고 저주로 위협하고 심지어는 총칼로 위협해 쉽게 탈출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한계에 도달해서 교주가 헛된 우상이고 그들의 지옥 같은 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 공동체가 와해될 것 같으면 결국 교주의 선동으로 집단자살의 길로 가기도 합니다. 인민사원 교회의 집단자살도 그렇게 벌어진 사건입니다.

결국 영혼이 미혹되지 않는 최소한의 상식이 있습니다. 첫째, ‘오직 성경’을 내세우며 경건 서적을 못 읽게 하면 경계하십시오. 둘째, 신학을 마귀 학문으로 매도하면 더 경계하십시오. 셋째, 폐쇄된 곳으로 이주를 권하며 “거기가 새로운 세상이다! 거기서 세로운 세상을  만들자!”라고 유혹해도 절대 거기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거기로 들어가는 순간 비참한 노예가 됩니다.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면 아픔도 당하지만 그래도 그런 어둔 세상에서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 인간의 우상화로 인한 비극 >

1965년, 짐 존스는 초기 거점인 인디애나폴리스를 떠나 핵공격에서 안전한 장소라고 선전한 북부 캘리포니아의 폐쇄적인 집단 거주지로 신도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곳에서 40대의 짐 존스는 메시야 행세를 했고 ‘아버지(Dad)’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박수와 악기와 춤과 환상연출 및 치유연출 등을 동원한 집단 환각상태의 예배 및 종말 설교를 통해 신도들을 두려움의 노예로 만들었고 지옥과 같은 환경을 구원을 위한 환경으로 믿게 했습니다.

처음 이주했을 때는 진짜 세로운 세상같은 느낌을 주어 그런 예배가 통했지만 점점 같은 형태의 예배가 계속되고 율법적인 삶과 감시하는 삶과 중노동의 삶에 지쳐 그런 삶을 반대하는 사람이 생겼고 심지어는 그 공동체를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측근 신도들을 시켜 그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며 그들의 탈출을 막았습니다.

그때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은 존스 목사가 신도들의 재산을 훔쳤고 치유를 조작했고 신도들을 폭행했고 남성 신도와 변태 성행위를 했고 스스로를 메시아로 여긴다고 폭로했습니다. 결국 정부에서 조사에 나섰습니다. 처음에 짐 존스는 그 폭로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의 모함이라고 했지만 그 폭로가 점차 사실로 확인되면서 상황이 불리해지자 마침내 천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열대 낙원이라고 선전한 남미 가이아나로 이주했습니다. 신도들은 거기서 강제노동을 하며 존스타운을 세웠습니다.

1978년 11월, 미국 하원의원 리오가 신도 학대사건 조사차 존스타운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공항에서 인민사원 경비신도들의 무차별 총격에 리오 의원과 3명의 기자가 죽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며칠 후 존스는 집단자살을 명했고 신도들은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셨습니다. 그때 부모는 어린 자녀들에게 먼저 주스를 마시게 해서 죽인 후 자기도 따라 마시고 죽었고 존스는 머리에 총을 맞은 채 발견됐습니다. 그 집단자살로 276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914명이 죽었습니다. 사람을 우상화하면 결국 파멸로 끝납니다.

오대양 사건도 유사한 사건입니다. 1987년 용인의 오대양 공장 식당 천장에서 구원파 일파의 교주인 박순자 외 31명이 집단자살을 했습니다. 박순자는 구원파 유병언 교회의 신자였다가 여러 신도들을 이끌고 독립해 “나는 전 세계 오대양을 지배하게 된다.”고 선전하며 ‘구원’을 내세워 사람들을 속이며 거액의 사채를 끌어 사업을 했습니다.

당시 박순자는 신도들을 합숙시키며 금욕생활을 강요했고 자신의 가족 외에는 모든 부부가 각방을 쓰게 하고 자식들과의 인연도 끊게 했습니다. 자아비판 시간에는 문제가 되는 신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습니다. 점점 사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계속된 폭행으로 신도들의 반발이 커지자 박순자는 더욱 무서운 구타로 반발을 잠재웠고 심지어는 교리 위반죄로 구원파 신도 4명을 살해해 암매장했습니다.

그런 반인륜적인 행태가 마침내 외부로 알려졌고 결국 경찰의 추적을 받던 그들의 집단자살로 박순자의 사교행위는 막을 내립니다. 당시 박순자와 유병언의 커넥션 소문이 무성했고 실제로 상당한 오대양 자금이 유 씨 회사로 유입되었습니다. 박순자는 원래 구원파 내 부녀자 사채 모집조직의 대전 지역 책임자였고 또한 집단자살 현장에는 재산헌납을 구원의 길로 묘사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란 유병언의 종말론 설교집이 발견되었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 우상화와 집단화와 폐쇄화를 더 경계해야 합니다. 물질과 다수의 힘에 의해 영혼과 정신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뜨거운 은혜’와 ‘냉철한 지식’이 겸비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은혜의 길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목자 역할’도 잘해야 하지만 바른 지식을 전하고 바르게 살게 하는 ‘선생 역할’도 잘해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구원파 유병언 일가의 욕심과 잘못된 교리가 큰 화를 부른 사건입니다. 구원파는 구원에 절대 가치를 둡니다. 물론 구원이 중요하지만 구원 하나만이 성도의 지상목표는 아닙니다. 인생은 단기승부가 아니고 구원 이후의 삶도 중요하기에 성경이 66권까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월호 참사는 크게 보면 한국 교회의 대형화에 대한 경종을 울린 사건입니다. 대형화는 우상화를 동반하면서 구원파와 같은 맹목적인 행태를 만들어 결국 한국 교회의 신뢰를 크게 무너뜨리는 통로가 됩니다.

어느 날, 한 젊은 대형교회 목사가 미국에 부흥회를 갔다 왔습니다. 그가 인천공항에서 내릴 때 교인 수십 명이 공항에서 도열해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도착하자 나이 든 장로들이 도열해 맞이했습니다. 존경의 표시라고 하겠지만 남들은 그 모습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바른 목회자라면 이렇게 부탁할 것입니다. “장로님! 권사님!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지 말아주세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알듯이 그런 교회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영혼구원이란 명목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교회성장을 통한 목회자의 명예욕 충족을 위해 전도를 강조합니다. 둘째,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을 계속 돌려서 헌신과 훈련이란 명목으로 교인들을 죽도록 고생시킵니다. 셋째, 부교역자들에게 훈련이란 명목으로 최소한의 사례를 주고 하루에 20시간씩 노동착취를 합니다. 훈련과 노동착취는 엄연히 다릅니다. 넷째, 카리스마를 보이려고 거짓말을 너무나 쉽게 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하게 진실한 사람은 없겠지만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것’과 ‘거짓말을 어려워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마지막 특징으로 그런 목회자는 자녀를 신학교로 보내 세습 수순을 밟습니다. 그 엄청난 왕국을 놓고 떠나기가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나누고 선교할 줄 알고 명예욕이 없는 건전한 목회자가 목회의 행복과 보람을 알고 자녀를 신학교로 보내는 것과 왕 같은 목회자가 자기 왕국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녀를 신학교로 보내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물론 선대의 축복을 후대가 어느 정도 물려받아 누리는 것은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물려받으면서 그에 합당한 헌신과 나눔을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재산을 상속받으면 절반에 가까운 상속세를 냅니다. 사회를 위해 그 정도는 공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교회를 물려받으면 교인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칠 수도 없기에 평소에 선대목사가 잘해야 합니다. 은퇴 전까지 분립교회 개척에 힘쓰고, 공격적인 전도를 멈추는 대신 교회의 슬림화를 지향하며, 세력 확장을 위한 선교가 아닌 나눔을 위한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더 존경과 명예를 얻고 후대의 축복도 더 받습니다.

프랜시스는 부자 자녀였지만 자기 소유를 다 나눠주고 낮아지는 길로 갔기에 당대의 교황이나 대주교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처럼 목회자는 자기 우상화를 잘 거부하고 성도들도 교회의 대형화를 거부하는 삶을 통해 우상화의 길을 막아서는 작은 제동장치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우상화를 방치하면 언젠가는 목사도 처참하게 무너지고 성도도 처참하게 상처를 받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결말입니까?

<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 가십시오 >

초대 교회 때도 잘못된 길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베드로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본문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 구절에서 “자라 가라!”란 말은 구원받은 것에서 끝나지 말고 계속 성장해서 미혹에 빠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장이 없고 성장의 희망조차 없다면 얼마나 우울한 일입니까? 또한 성장은 있는데 성숙은 없는 것도 얼마나 우울한 일입니까?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성도는 겸손히 살면서도 때로는 자신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려고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이 성숙해져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이 없으면 성공조차 결국 불행의 원인이 되지만 믿음이 성숙해지면 다른 많은 좋은 것이 따라옵니다. 요한삼서 1장 2절 말씀처럼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몸도 강건해집니다. 또한 믿음이 자라면 헌신도 멋지게 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부모에게 “달라!”고 보채다가 잘 자라면 나중에 가정을 일으키고 효도합니다. 그처럼 믿음이 잘 자라 가되 특별히 2가지 분야에서 잘 자라 가야 합니다.

첫째, 본문 18절 전반부 말씀처럼 예수님의 은혜에서 자라 가야 합니다. 은혜는 영혼의 생수와 같습니다. 그 은혜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주일성수에 힘쓰고 교회를 사랑하고 자기 비전과 소명에 매진할 때 주어집니다. 그런 은혜가 있어야 잘못된 것도 끊을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담배 하나 끊기도 힘듭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남자들은 담배를 끊으면서 신앙도 크게 자랍니다. 결국 은혜가 있어야 믿음도 자랍니다.

둘째, 본문 18절 중반부 말씀처럼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합니다. 은혜가 생수와 같다면 지식은 양식과 같습니다. 물이 귀해도 물만 마시면 자랄 수도 없고 힘을 쓸 수도 없기에 물과 함께 양식도 먹어야 됩니다. 즉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도 받아야 하지만 스스로 말씀도 많이 보고 들어야 합니다.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에서는 매주 몇 천 명의 청년들이 약 두 시간씩 눈물과 각종 몸짓으로 열정적으로 찬양합니다. 그런데 2년 이상 그 모임에 나오는 청년은 거의 없습니다. 찬양할 때는 은혜가 있는 것 같은데 말씀이 부족하니까 한때의 열정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유가 아무리 영양가가 있어도 우유만 먹으면 힘이 생기지 않고 밥을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뜨겁게 찬양해도 말씀이 없으면 결국 공허해지고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말씀을 떠나면 결국 이단이 됩니다. 깊이가 무한한 성경을 가까이 해야 믿음의 깊이도 깊어집니다.

< 앞으로 계속 전진하십시오 >

이번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에도 큰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계기로 대형화와 우상화와 물질화에 매몰되지 않고 신앙의 기초를 다시 세우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후 그곳에 새로 들어설 빌딩의 조감도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Think Back. Move Forward. It's Time.”(과거를 생각하라. 앞으로 나가라. 지금이 그때다.)

가끔 과거를 생각하며 “그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란 지혜를 얻고 시야를 넓히십시오. 그러나 과거에 매이면 안 됩니다. 과거를 생각하라(Think back)는 말은 과거로 돌아가라(Go back)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자신이 계속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뼈대를 세우고 많은 초대교회를 세웠고 성경 13권을 기록한 천재였고 복음에 목숨 걸고 헌신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지만 그래도 자신은 더 자라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과거를 반성은 하되 과거의 사건 및 과거의 시간에서 배회하면 안 됩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그 과거를 통해 삶의 지혜를 얻지만 과거로 돌아가면 현재와 미래를 잃어버리고 새 것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실패나 과거의 성취에 매달리지 말고 항상 과거를 생각할 때는 겸손한 삶을 새롭게 다짐해야 합니다. 토저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에 의해 이끌리지 않습니다. 자신만 가지고는 가장 가치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가장 위대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진짜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뒤에 있는 일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보고 하늘의 부르심과 상급을 따라 달려가십시오(빌 3:13-14). 달리기를 할 때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달리면 아주 위험합니다. 인생에서도 뒤를 보고 달리면 목표와 방향을 잃고 큰 위험에 처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생각해서 반성은 하되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에 매이지는 마십시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과거의 좋은 추억’보다 ‘미래의 좋은 비전’이 더 좋은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경주자의 삶과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에서 이기면 스타디움의 시상대에 올라 월계관을 받고 500드라크마를 부상으로 받고 일생 동안 모든 식사를 제공받는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상급은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런 하늘의 상급을 추구하며 믿음과 평안과 감사 가운데 꿈과 비전을 따라 나가면 장벽과 장애물조차 더 큰 축복을 위한 디딤돌과 재료가 됩니다.

이번에 개최된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 총회는 변함없이 좋았습니다. 다만 어떤 일로 그 동안 가깝게 지내던 한 목사님과 이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간에 주일예배를 마치고 이별의 아쉬움을 달래는데 갑자기 어떤 전화가 왔습니다. 문서선교의 비전에 동참해주실 은밀한 후원자와의 연결이 이뤄지는 전화였습니다. 그때 ‘보이는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에 충분한 ‘보이지 않는 만남’을 하나님이 새롭게 이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합니다. 이별의 아픔을 믿음으로 잘 수용하면 더 좋은 새로운 만남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십니다(롬 8:28). 결국 살면서 겪는 어떤 사건도 낭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10년 전의 고통이 지금의 고통을 잘 이겨내게 하는 초석이 되고 10년 전의 차 사고가 현재의 차 사고를 막아주는 또 다른 숨은 선생이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시련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가끔 비행기를 타다 보면 비행기가 크게 흔들립니다. 어떤 때는 마치 회오리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몇 십 미터를 뚝 떨어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지만 승무원들은 평안합니다. 그리고 약 10분쯤 지나면 다시 고요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인생의 불같은 시험도 인생 전체의 시각으로 보면 ‘10분간의 회오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을 너무 큰 문제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실패한 인생을 만들려고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10분간의 회오리’는 오히려 축복의 전조일 수 있습니다.

지금 힘든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전히 그 상황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10분간의 회오리’에는 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렸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좋은 사람은 반드시 그 나쁜 일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역풍은 조만간 순풍으로 변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꿈과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복된 삶을 위한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구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찬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큰일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변화될 수 없는 과거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인가 사라지게 하시면 무엇인가 찾아오게도 하십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나눔의 강자와 나눔의 모델이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나가면 마침내 시련과 장벽을 극복하고 인물의 꿈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항상 은혜와 지식이 겸비된 삶을 통해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518)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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