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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으로 사는 길 (마태복음 28장 1-10절)

by 【고동엽】 2022. 1. 2.

부활 신앙으로 사는 길 (마태복음 28장 1-10절)
< 모든 행복과 희망의 뿌리 >

1991년 뉴욕의 얼라이언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 사역자로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월간 <현대종교>에서 몇 달 간 글을 연재하다가 고 탁명환 소장님이 현대종교 편집부장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그때까지 틈틈이 써온 글을 당시 3대 기독교 출판사에 무작정 보냈습니다. 그때 한 출판사에서 원고를 채택해 처음 나온 책이 <하나님은 나의 전부>란 책입니다.

그 책은 축복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으로 돈 한 푼 없이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내는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낸 저자란 사실만 보고 세상 물정도 모른 채 돈 한 푼 없는 저와 결혼한 것입니다. 그때 가끔 카페에서 <현대종교>에 실린 제 글을 읽어주면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결혼할 때 연로하신 부모님 도움은 한 푼도 받지 않기로 결심했기에 당시 7만 5천원인 한 돈짜리 결혼 금반지 사줄 돈만 간신히 가진 상태에서 그 책과 글로 아내를 감동시키지 못했다면 결혼을 못했을 것입니다.

1992년, 결혼 직후 인천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혀 생소한 교단인 C&MA(기독교 선교연맹) 교단으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구글로 ‘C&MA’를 검색하면 금방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세계적으로 크고 건강한 교단이라도 처음부터 아예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니까 교단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개척은 어려웠지만 그때 한 영혼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으며 축복의 때를 위해 계속 글을 쓰며 준비했습니다.

2000년부터 그 글들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문서선교 사역을 시작하자 목사님들의 반응이 좋아지면서 점점 사역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가 힘이 있으면 선교도 힘 있게 할 텐데.” 선교의 뜻과 열정은 있었지만 실질적인 힘이 부족해서 그 뜻과 열정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 가끔 낙심될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기소침한 제게 한 동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한국의 토저 목사님! 힘내십시오.” 토저는 20세기 중반에 선지자적인 소리를 낸 미국의 최대 기독교 저술가이고 저희 교단에서 배출된 최대 인물입니다. 그분은 당시 ‘성공과 채움’을 추구하는 기독교 흐름에 역류해 ‘선교와 비움’을 역설한 영성이 깊은 목사님이었습니다. 요즘은 영성을 ‘은사주의나 신비주의나 무속주의’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성의 핵심 요체는 ‘나눔과 비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채우는 ‘번영신앙’을 좋아하지만 사실상 ‘비우는 길’이 진짜로 ‘채우는 길’입니다.

그 동료 목사님이 자주 토저 목사님과 같다고 격려해주니까 비교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정말 토저 목사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낙심의 기운이 들 때마다 그 격려를 생각하면서 계속 문서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성경 전체의 약 3분의 2를 강해한 글을 썼습니다. 2024년쯤에는 성경 전체를 완성할 것입니다. 현재까지 쓴 글만 해도 3백 페이지짜리 책 60여권 분량입니다. 그 중에 단 3권만 현재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 나머지 글의 출판을 위해 기도할 때 얼마 전에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큰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지 왜 힘들게 직접 출판하려고 합니까?” 그러나 출판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이기에 출판사에 맡기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재정은 왕서방이 챙기는 상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일전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조용필이 오래 전에 맺은 레코드사와의 부조리한 계약 때문에 자기 노래조차 음반을 만들려면 돈을 주고 오히려 저작권을 사야 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물론 문서선교의 뜻을 가진 계산을 초월한 출판사 사장을 만나면 되지만 이제까지의 출판 경험으로 볼 때 그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빨리 출판하고 싶다고 큰 출판사와 계약하면 자본의 논리에 문서선교의 비전이 매몰될 수 있기에 데오빌로 같은 신실한 후원자를 만나지 못하면 출판을 못해도 계속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고 합니다. 그 기다리는 기간에 완성된 글의 작품성을 계속 높이고 영문으로 만들면 됩니다. 만약 제가 출판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저의 딸들이나 믿을만한 제자들에게 그 비전의 완수를 부탁하고 천국에 갈 것입니다.

비전이 사심을 가진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듭니다. 그래서 계산적인 사람에게는 글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출판이 늦어지면 어떻습니까? 물욕과 명예욕만 버리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지 버리는 길이 결국 얻는 길입니다. 좋은 뜻을 품고 나가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그 뜻과 꿈과 비전이 멋지게 이뤄질 것입니다.

왜 성도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때도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은 어디에서 옵니까? 모든 행복과 희망의 뿌리는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만큼 복된 것은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있다면 어떤 고난과 절망도 극복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음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 죽음이 있기에 삶도 귀합니다 >

일전에 아주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빠를 배웅하던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아빠를 조금 더 보고 싶다고 아빠가 운전하는 트럭을 따라 가다가 넘어져서 아빠 트럭에 치여 죽은 것입니다. 그 아빠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죽은 딸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옛날에 둘째 딸 한나가 초등학교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차를 타고 교회로 가다가 딸을 보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한나야!”하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나도 순간적으로 너무 반가워서 아빠만 바라보고 골목길 차도를 건너 막 뛰어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뒤에서 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오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도 가슴이 철렁했는데 실제로 자녀를 잃는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이번 세월호 침몰 방송을 보며 저도 수시로 눈물이 나왔습니다. 하물며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때는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고 평생 아픔을 품고 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철면피 같은 나쁜 사람은 놔두고 착한 아이를 죽게 하실까요? 왜 사랑의 하나님이 죽음을 있게 하셨을까요? 너무 큰 철학적인 질문이라 쉽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즉 죽음이 있기에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청년이 타 주에서 공부할 때 큰 자격시험이 있어서 부모가 시험 전날 전보를 쳤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결코 용기를 잃지 말라. 너의 엄마와 아빠가(Your mom and dad).”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부모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마지막 구절을 “Your mom's dead(너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전보를 보냈습니다.

그 전보를 받고 아들은 시험을 포기하고 12시간을 차를 몰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어머니가 아들을 맞이했습니다. 아들은 곧 전보가 잘못된 것을 알고 안도하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는 오늘 인생의 두 가지 큰 경험, 즉 죽음의 고통과 삶의 환희를 한꺼번에 경험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만 해도 감사해요.” 어떻게 보면 죽음이 있기에 삶의 기쁨과 행복과 감사를 더 느끼게 됩니다. 또한 죽음이 있기에 얼마나 겸허해집니까?

어느 날, 한 분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갔다가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마음에 회한이 생겼습니다. “좀 더 용서하며 살 걸, 좀 더 베풀며 살 걸, 좀 더 건강을 살피며 살 걸...” 지옥에 가면 사방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가 ‘껄껄껄 소리’라고 합니다. 그는 암 진단을 받고 그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파트 평수를 넓혔지만 가족들과 해외여행 한번 하지 못하고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틀 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입원하려고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엑스레이를 다시 살펴보니까 암이 아닌 작은 종양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삶에 밝은 햇살이 비치면서 만물이 다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들풀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항상 마시던 공기가 그렇게 상쾌한 줄 처음 느꼈습니다. 또한 삶 자체가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미움과 질투와 불평과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그분은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섬기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자!”

그런 새 삶을 얻은 감격으로 살면 어떻게 욕심과 교만과 미움을 가지고 싸우며 살겠습니까? 사람이 욕심을 부리며 염치없이 교만하게 사는 이유는 아직도 죽음의 냄새를 잘 맡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생의 깊이를 더하려고 사람에게 죽음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이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은 늘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평소에 겸손하기를 힘쓰면 삶에 선한 열매가 많이 맺힐 것입니다.

어느 날, 소설로 유명해지면서 타락에 빠진 프랑스 작가 빅톨 위고의 외동딸이 센 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위고는 죽은 딸 앞에서 자기의 타락한 삶을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장례식 후, 위고는 딸의 방에서 딸이 자기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아빠! 이제는 꼭 집에 돌아오세요. 집에서 하나님과 엄마와 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가 집에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좋아요.”

위고는 그 딸의 편지를 읽고 자기의 타락한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후 섬김의 삶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뭇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프랑스의 교육부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딸의 죽음으로 새 삶을 찾았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럽지만 인생의 교훈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 부활 신앙으로 사는 삶 >

때가 되면 죽음은 자신에게도 현실이 됩니다. 그러나 죽음을 있게 하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부활도 약속하셨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영생으로 들어서는 관문이 됩니다. 그러므로 늘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십시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자신에 대해 확신하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본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습니다. 왜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12제자 대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여주셨을까요?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천한 여인이었고 일설에 의하면 로마 군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은 후 주님을 가장 사랑했고 주님의 무덤도 제일 먼저 찾았기에 역사상 가장 먼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자의 것입니다.

당시 여성들의 지위는 형편없었지만 주님 사역에는 여성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를 비롯한 여러 여자가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은밀한 후원으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큰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선교와 구제에 힘쓸 수 있었던 이유도 우리 교인들 외에 막달라 마리아나 루디아와 같은 은밀한 헌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사람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강한 사람들도 대부분 넘어진 전력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불을 끌어냈던 선지자 엘리야도 죽음의 위협이 무서워서 광야로 도망가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상이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주시면 부족한 사람도 얼마든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잘것없게 느껴져도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가끔 연로하신 권사님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면 권사님들은 항상 “내가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그냥 계시기만 해도 든든합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는 반드시 축복받듯이 어르신을 잘 모시는 교회는 반드시 축복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르신들은 교회에 와서 대접받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기만 해도 큰일을 하는 것이기에 어르신들 자신도 “내가 이렇게 중요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현재의 위치에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쓸데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만나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필요해서 이동 배치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큰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에 대한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사십시오.

2. 현 위치에서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왔을 때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말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찾는구나!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아나셨다. 빨리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예수님을 뵈라(5-7절).” 그리고 10절 말씀을 보면 다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왜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이나 12제자 외에 제자들이 가장 많이 배출된 예루살렘 인근의 베다니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고 멸시받던 변방 지역인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 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서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은 첫 사랑을 회복해 다시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부활절 때마다 “첫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 시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현 위치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결코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늦었다고 하지도 말고 끝났다고 하지도 마십시오. 나이 탓이나 환경 탓이나 자본 탓도 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얼마든지 좋은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사실 현재의 고난도 마음을 새롭게 먹고 다시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입니다.

옛날에 한 아버지가 외아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주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자 논과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대주었고 돈이 필요하다면 빚을 내서라도 힘써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은혜도 모르고 객지에서 탕자처럼 놀러 다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아들이 달라는 대로 다 주는 것이 아들을 위한 길이 아님을 깨닫고 더 이상 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화난 아들이 전보를 보냈습니다. 당시 전보는 10자를 넘지 말아야 했기에 이렇게 보냈습니다. “굶어죽을 상황임 아들.” 그 전보를 받고 아버지는 마음이 아팠지만 답신을 했습니다. “굶어죽어도 모름 아버지.” 그 전보를 받고 화난 아들은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분노를 품은 채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나 삶이 안정되고 자기도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이 하는 모습을 보니까 점차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아버지의 전보를 받고 난 다음부터 자기가 변화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20년 만에 고향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며 이런 유서 한 장을 남겼습니다. “아들아! 너를 기다리다가 먼저 간다. 네가 분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런 전보를 보냈다. 전보 후에 너를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고 하루도 마음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너를 정말로 사랑했다. 부디 나를 원망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기 바란다.” 그 편지를 보고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기가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을 깨닫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분발하며 살라고 고난도 허락하시고 잠시 외면하신 것처럼 축복을 보류해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고 그때 무엇인가 새롭게 할 일을 찾아 다시 시작하십시오. 그처럼 부활절을 죽었던 꿈과 비전을 살리고 사랑과 헌신과 용서의 삶을 살리고 가정과 교회의 행복을 살리려고 다시 출발하는 날로 삼으십시오.

3. 기쁨과 평안으로 사십시오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두 여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 무서움도 있었지만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빨리 떠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 “평안하냐?”고 물으시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9-10절). 이 장면은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전을 줍니다.

저는 신앙생활 초기에는 교회에서는 인상을 많이 쓸수록 신앙이 깊은 줄 알았습니다. 웃어도 약간 미소만 지어야지 경건한 교회에서 크게 웃으면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내공이 깊어지면서 진지하게 인상을 쓰는 것보다 즐겁게 웃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더 깊은 믿음의 표시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뻐하면 행복지수도 높아집니다.

어느 날, 한 미국 선교사님이 한국 교회에서 설교하는데 강단 아래에 앉은 성도들의 표정이 다 어둡고 심각해서 통역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성도들의 표정이 다 어두운데 제 설교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나요? 계속 설교해도 될까요?” 통역 목사님이 할 말이 없어서 말했습니다. “한국 성도들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서 보통 저래요.” 그때 선교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묵상했으면 그 다음에는 부활의 기쁨으로 살아야지요.”

100미터 달리기에서 80미터까지만 달리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소용이 없듯이 신앙생활에서 십자가만 묵상하고 부활의 영광의 외면하면 중요한 것이 빠진 셈이 됩니다. 믿음은 마음뿐만 아니라 얼굴과 언어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부활 소망을 가지고 얼굴과 언어에도 기쁨이 넘치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았기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죽음 얘기를 하면 대개 “재수 없다!”고 합니다. 집 근처에 공동묘지가 들어서면 땅값이 떨어진다고 질색합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묘지 근처가 조용하다는 이유로 오히려 땅값이 비싼 경우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엘리베이터에도 4층은 영어로 F라고 적어놓았고 집 호수도 101호, 102호, 103호는 있는데 104호는 생략하고 105호로 넘어갔습니다. ‘넉 사(四)’자와 ‘죽을 사(死)’자는 전혀 다른데도 그런 미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목사(牧師)’란 말도 쓰면 안 됩니다. ‘나무에 목매 죽은 사람’이란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하면 ‘사(士,師)’자 들어간 신랑감과 결혼하면 집안이 쫄딱 망해야 합니다. 왜 그런 헛된 미신에 빠집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더 죽을 일만 생기고 불행의 사자가 신나게 찾아옵니다. 반면에 죽음 이후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믿고 평안 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죽음과 불행의 사자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칠 것입니다.

찬송가 3장의 영광송은 후대에 곡이 붙여졌지만 가사는 초대교회 때 주님의 제자들이 순교의 형장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부르던 찬송입니다. “성부 성자와 성령/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삼위께 영광 영광.” 죽음의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세!”라고 찬송하는 모습이 바로 부활 신앙의 힘입니다. 성도에게는 그런 힘과 능력과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이제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것입니다. 또한 때를 따라 필요한 것들도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고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내일의 꿈과 비전과 희망을 향해 용기 있게 다시 출발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050327, 140420수정)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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