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삶을 훈련하십시오 (신명기 21장 18-23절)
< 효자 요나단 >
성경을 보면 사울 왕은 문제도 많았지만 인간적으로 끌리는 점도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힘써 지키려고 했고 말년에는 70 노구를 끌고 직접 전장에 나갔다가 길보아산 전투에서 아들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습니다. 그 점에서는 부하들을 전장에 보내고 부하 장수의 아내를 범한 말년의 다윗보다 더 낫습니다. 결국 길보아산 전투에서 블레셋 병사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한 사울은 이방인들에게 모욕적으로 죽기 싫다고 자결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목을 베고, 갑옷을 벗기고, 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못 박아 매답니다.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다윗은 조가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삼하 1:23).”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도 귀하지만 사울과 요나단의 부자관계도 귀합니다. 요나단은 용사이면서 동시에 효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뜻이 달랐어도 부족하고 외로운 아버지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결국 죽을 때도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은 왕 사울의 화려함에 주목하지만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의 고독함에 주목했습니다. 그처럼 자녀는 부모와 마음을 함께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부모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요새 기억을 잊어버리는 노인 치매가 큰 이슈지만 더욱 큰 문제는 부모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리는 정신적인 치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대단한 줄 압니다. 부모가 항상 의젓해야 하고 항상 자기를 위해 다 주고 끝까지 참아야 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부모도 누군가를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자식에게 다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식을 의지하고 싶은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에게도 동심이 있고 감성이 있고 자기 삶이 있습니다. 자녀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는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평생 철든 자녀가 되기 힘듭니다.
부모는 부모이기 전에 한 인간입니다. 부모에게 부모 역할만 충실하도록 강요하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단하겠습니까? 사람 안에는 거지도 있고 왕자도 있습니다. 또한 놀고 싶은 탕자도 있고 절제하는 성자도 있습니다. 다만 선한 의지 및 사람의 시선 때문에 잘못된 모습을 억누르고 살 뿐입니다. 그 연약함과 고뇌를 누군가 알아준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곁에 없기에 외로운 것입니다.
요새 부모를 잘 모시는 자녀는 많지 않습니다. 어떤 자녀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부모로부터 상처를 입었다고 하면서 부모를 멀리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와 생각이 다르고 친구 문제로 아버지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어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용감한 장수였고 신실한 친구였지만 동시에 부족한 아버지와 끝까지 함께 한 효자였습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 늘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고 했던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 패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 >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부모를 진정으로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랑과 보살펴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님을 사랑하고 보살펴드리며 그 삶을 확대해 어르신들도 보살펴드려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을 무엇보다 큰 죄로 여기셨습니다.
본문 18-21절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모세는 부모의 말에 불순종하는 아들을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모의 징계를 무시하고 계속 불순종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시 공공생활 중심지로서 법정 역할도 했던 성문에서 재판하는 장로들에게 부모가 자녀의 불순종과 방탕과 술에 잠긴 것을 고하면 성읍 사람들은 다 그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대중들이 돌로 쳐 죽이는 징벌은 가장 악한 죄인에게 행해진 징벌로서 그만큼 불효는 대죄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불효자를 처형한 후 처형을 주관한 장로는 “어느 날 어느 성문에서 어떤 이유로 누구 아들을 돌로 쳐 죽였다.”는 글을 각지로 보내 그 내용을 모든 백성들이 알게 했습니다. 왜 당시에 그렇게 무섭게 불효자를 처단했습니까? 효를 공동체의 근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불효를 방치하면 가정도 망하지만 사회도 망합니다. 그래서 사회의 뿌리를 지키려고 그런 극약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한 후 나무 위에 달았습니다. 죽은 죄인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고 그가 지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백성들을 엄중히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모세 율법에 의하면 사람을 처형한 후 나무 위에 달면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 두지 말고 그렇게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존재이기에 바로 그 날에 장사해 하나님의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습니다(22-23절).
왜 그 계명을 불효자 처형에 관한 계명 바로 다음에 언급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죽을죄를 짓고 사형당한 자의 주검을 가장 부정하게 여겨 바로 치웠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교육상 잠시 주검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놓았다가 그날 밤에 치웠습니다. 그렇게 본보기 교육용으로 주검을 잠시 나무에 매달아 놓는 가장 흔한 케이스가 나라와 왕에게 반역을 한 케이스와 불효자를 돌로 쳐서 죽인 케이스였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회는 불효를 무엇보다 큰 죄로 보았습니다. 본문의 계명은 어떤 교훈을 줍니까?
1. 부모의 말에 순종하십시오
마태복음 15장 4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고 비방할 때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는 말씀은 그만큼 부모 공경을 중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삶은 십계명에서 인간관계에 대해 주어진 첫째 계명입니다. 결국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려면 무엇보다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잠언 30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받아 죽는다는 뜻입니다. 가끔 보면 점쟁이나 무당이나 거짓 목사의 저주는 무서워하면서 부모의 말은 쉽게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저주는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어르신을 무시할 때 임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도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이삭은 20세 전후의 힘 있는 청년이었고 아브라함은 120세 전후의 힘 빠진 노인이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단다.” 그때 이삭은 “아버지! 노망 드셨어요?”라고 하며 힘으로 아버지를 제압하지 않고 “예.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누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가문이 복된 가문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왜 사회가 붕괴됩니까? 가장 큰 이유는 효의 소중한 가치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잘 순종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신실하게 행합니다. 그래서 옛날 초대교회에서는 효와 신앙을 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순종을 중시했습니다. 그처럼 부모의 말과 행동이 때로는 납득하기 어려워도 힘써 순종하려고 해야 합니다.
2. 부모의 징계에 순응하십시오
부모가 자녀를 너무 감싸고돌면 자녀의 인격과 정신이 저하됩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잘못했을 때 필요하면 단호하게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새 부모의 징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 목사님들의 설교를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설교는 별로 없고 자녀를 이해하라는 설교만 넘칩니다. 우리도 점점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에 매를 대라는 설교는 구시대적인 유물처럼 더 외면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자주 나쁜 짓을 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말없이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조상의 산소 앞에서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을 백배 사죄하고 바지를 걷어 올린 후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무섭게 쳤습니다. 그때 아들은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참회한 후 나쁜 행동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자꾸 못된 짓을 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 아버지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회초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또 나쁜 짓을 저지르자 참회하라고 아들이 보는 앞에서 바지를 걷어 올린 후 회초리로 자기 종아리를 무섭게 쳤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놀래서 뛰쳐나가며 소리쳤습니다. “엄마! 빨리 와봐! 아빠가 미친 것 같아!”
세상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옛날에 청소년들은 어쩌다 잘못해서 파출소에 잡혀가면 죄송하니까 제발 집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결국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는 파출소에 들어서자마자 아들의 뺨부터 때렸습니다. 그러면 아들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은 파출소에 끌려가면 집에 전화해 부모에게 와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단숨에 달려온 부모는 아이를 꾸짖기는커녕 “다친 데는 없어?”라고 묻습니다.
부모의 바른 징계가 없으면 효자도 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처럼 인격을 말살하는 징계는 지양해도 지혜로운 징계는 지향해야 합니다. 물론 감정을 섞어 극도로 흥분한 상태로 징계하면 교육효과도 없고 오히려 반항심만 키웁니다. 부모는 교양 있고 절도 있게 징계해야 하고 그런 부모의 징계에 대해 자녀는 분을 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순응해야 합니다.
3.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십시오
왜 하나님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을 죽을죄로 여겼을까요?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자녀는 자신도 부모님으로부터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만큼 크겠습니까? 가정에서 함께 살다 보면 때로는 상처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의 보자기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이해하며 행복의 꽃을 피워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창 2:25). 그처럼 가족은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서로 덮어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편한 옷을 입고 실수와 허물과 민낯을 다 드러냅니다. 그것을 감싸주는 존재가 가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았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부족한 허물을 최대한 눈감아 주려고 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총각이 TV에 나온 처녀에 반해 그녀에게 호감 섞인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메일을 주고받다가 마침내 결혼을 전제로 한 카페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눈이 애꾸였습니다. 처녀가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왜 3년 동안 한 눈만 보이는 애꾸란 사실을 감췄나요? 당신이 애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을 속인 것이 화가 나네요.” 그때 남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언제 속였나요? 나는 하나도 속인 일이 없어요. 내가 처음 편지를 쓸 때 뭐라고 썼나요?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자기중심적인 억지 얘기로 이해를 구하면 더 정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남자의 말에는 역설적으로 참고할 부분도 있습니다. 사실상 가족은 단점을 보는 한 눈을 감고 장점을 보는 한 눈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처럼 한 눈을 감고 긍정적이고 좋은 면만 보고 살아야 인생의 상처를 줄일 수 있습니다.
가정은 고통과 상처가 없는 낙원이 아닙니다. 특히 자식을 바르게 이끌려는 부모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부모의 사랑을 오해해서 상처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오해를 품고 부모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안 됩니다. 가족은 상처를 상처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자녀는 더욱 그래야 합니다. 받은 상처보다 받은 사랑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자녀가 복된 자녀입니다.
4.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부모가 자식을 고발해 대중이 돌로 쳐 죽이게 한 계명은 계명으로는 존재했지만 사실상 거의 사장된 계명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식을 고발해서 대중이 돌로 쳐 죽여 나무에 달게 한 부모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문화된 계명이었지만 그 계명이 있는 것 자체로도 불효를 엄중히 경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의 계명대로 하면 사실상 우리는 모두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끊임없이 자식을 감쌉니다. 심지어는 방탕에 빠지고 죽을죄를 지은 자식도 감쌉니다. 자녀들이 너무 속을 썩이면 부모들도 가끔 정떨어진다고 하지만 얼마 후에는 또 용서합니다. 마음에 이미 지울 수 없는 너무나 큰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성경은 늘 손해만 보는 하나님의 짝사랑 얘기입니다. 부모도 자녀를 그렇게 짝사랑 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생일이 되면 선물을 받고 싶어 합니다. 태어나느라 수고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철든 자녀는 생일이 되면 자신을 낳느라고 고생한 어머니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자신을 그때까지 길러준 부모님께 오히려 감사의 선물을 드려야 합니다. 부부가 생일을 맞아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아내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 감사하는 것이고 남편은 장모님에게 전화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비례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큰 시련을 당해 고통 중에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은 그런 큰 시련을 감당하지 못할 줄 알고 하나님이 그런 시련을 면제해주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받은 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감사는 깨닫는 자만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고 서로에게 감사하십시오. 감사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입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감사를 잃습니다. 열 번을 잘해주어도 한 번 섭섭한 일이 있으면 금방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심성을 되돌리려면 무엇보다 가정에서 사랑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과 부자간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특히 요즘 무관심해지고 있는 부모 사랑과 어르신 공경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부모 사랑과 어르신 공경은 세상을 밝히는 근원이 됩니다.
부모와 어르신에게 마음을 쓸 때 남에게 마음을 쓰는 능력이 커지면서 그를 통해 세상은 점차 따뜻해집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첫 걸음은 효이고 마음을 훈련하는 최대 도장은 가정과 교회이고 마음을 훈련하는 최대 사범은 부모님과 어르신입니다. 부모님과 어르신을 공경할 때 사랑과 섬김을 배우게 되고 마음의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그때 그를 통해 세상의 소통이 이뤄지고 인물 되는 길도 펼쳐집니다.
<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십시오 >
삶에 원망과 한탄과 미움이 넘치면 저택에서도 지옥의 삶이 펼쳐지지만 삶에 감사와 찬양과 용서가 넘치면 초막에서도 천국의 삶이 펼쳐집니다. 감사가 넘치면 저주의 기운이 약해지고 축복의 기운이 강해집니다. 감사할 때 새 역사의 진척과 비전 성취도 빨라집니다. 기도응답을 가장 빨리 이르게 하는 능력 있는 기도도 감사기도입니다. 최고의 영성도 감사하는 영성입니다. 그래서 감사훈련이 중요합니다. 그 감사훈련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모님께 감사하는 삶에서 시작됩니다.
누구에게나 고난과 시련과 상처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슴이 까맣게 타고 마음이 크게 멍듭니다. 때로는 남들이 웃고 떠들 때 자신은 갇힌 방안에서 고독과 고민으로 신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신음과 상처와 고독과 고민이 반드시 불행만은 아닙니다. 아픈 가슴과 상처 입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 겸손해지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면 신음은 축복의 자원이 되고 상처는 은혜의 보고가 되고 고독은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편한 삶보다는 은혜를 깨닫는 힘든 삶이 더 낫고, 기도소리가 없는 저택보다는 기도소리가 넘치는 초막이 더 낫습니다. 아픔이 있어야 진주가 만들어지고 가슴 아픈 한나의 기도가 있어야 사무엘을 얻는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만난 것을 감사하고, 길이 막혔기에 기도의 문이 열린 것을 감사하고, 물질을 잃었기에 믿음을 얻은 것을 감사하고, 세상에서 절망했기에 천국소망을 얻은 것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부정적인 삶이 창조적인 삶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감사하고 어려워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하십시오. 사실 죽어야 살고 부서져야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대개 부서진 심령을 사용하십니다. 깨짐이 없이 커지면 세상에서는 지탄을 받고 교계에서는 이단교주나 산신령처럼 됩니다. 교회의 크기와 영성의 크기가 꼭 비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에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산신령보다 깨진 심령으로 칼을 감출 줄 아는 리더가 많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습니다.
깨짐도 없고 나눔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도 커지고 높아지고 힘이 생기는 것은 사탄의 미끼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성공하고 힘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산신령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왜 한국 교회의 위기가 생겼습니까? 영성과 카리스마를 내세우면서 오히려 외적인 교회성장에 집착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면서 마치 산신령이 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꽃은 만발한데 열매는 없고 성장은 있는데 성숙은 없고 인간적인 세미나는 넘치는데 신령한 샘이 나는 모습은 적은 것입니다.
옥합은 깨져야 향유가 흘러나오고 반석은 터져야 샘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기다림을 통해 성도를 고운 가루로 만드십니다. 즉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힘을 빼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라고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 차이로 내적인 갈등과 고민이 있고 기다림에 지칠 때도 있지만 우리의 기다림보다 우리의 성숙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기다림이 더 간절함을 기억하십시오.
비전 성취가 늦어져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다림을 활용하십시오. 기다릴 때 더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옵니다. 저도 기다리며 계속 글을 썼기에 지금까지 42개의 교회는 세우지 못하고 42명의 인물 제자는 못 얻었지만 성경 약 70%를 강해한 42세트의 방대한 문서를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완성될 성경 전권 강해 문서를 통해 내일을 꿈꾸고 세계를 꿈꾸고 천 년 영향력을 꿈꾸게 하셨습니다. 그 준비된 문서들이 출판된다면 한국교회를 알차고 새롭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할 줄 믿습니다.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은 결코 헛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최상의 때를 아시고 그때가 되면 생각을 초월한 신비한 역사를 통해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 전에 자아를 깨뜨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열심히 감사훈련을 하십시오. 그 감사훈련의 첫 단추가 되는 중요한 훈련과목이 ‘부모님께 감사하고 어르신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그런 감사훈련을 통해 범사에 감사함으로 인물 성도의 길을 멋지게 준비해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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