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이렇게 하라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
이요 선지자니라.
본 구절은 참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가리켜서 “황금률”(黃金律 The golden rule)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가장 핵심 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와 유사한 경구도 있기는 합니다. AD 20년경에 살았던 유명한 힐렐(Hillel)이라는 랍비에게 어느 이방인이 찾아와서 “내가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동안 율법 전체를 한마디로 가르쳐 주면 유대교인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힐렐이 “당신이 싫어하는 일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말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감동받아 이 사람이 유대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 토비아스라는 사람은 “네가 미워하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말했고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은 “네가 원치 않는 고난을 남에게도 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면을 강조했지만 예수님은 적극적인 가르침으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 그래서 이 말씀이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마태복음 5,6,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제자들에게 주옥같은 교훈을 가르치셨다 해서 이를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읽은 이 말씀이 그 산상수훈의 한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은 거기서 몇 가지 유명한 약속을 말씀합니다. 7절을 보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얻게 되고 찾게 되고 열리게 될 것이다”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한 가지 사례를 말씀하십니다.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아비가 있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아비가 있겠느냐, 악한 아비라 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러고 나서 이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이 “그러므로”라는 부사입니다. 그 뜻은 “우리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너무 많으니 그러므로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할 일이 참 많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일“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심성입니다. 대접을 받으면 좋아하고 소홀하면 욕하고 비난하고 무시한다고 화를 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얻으려 와서 천원주면 고맙다고 인사하고 가지만 5백 원 주면 누굴 거지로 아느냐고 따집니다.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들은 자리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어디 초대받으면 내가 어느 자리에 앉느냐를 그렇게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대접을 받아 버릇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누구나 이렇게 융숭한 대우받고 대접받으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접하고 대우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접한다는 말은 진심으로 너를 칭찬하고 격려하고 올려주고 존중해준다는 말인데 그것을 행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 위주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사람은 남에 대해서는 깎아내리고 나에 대해서는 확대하고 과장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함을 보면 어떤 분은 이력을 다 써 가지고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자기 이력을 과장해서 나타내는 분도 있습니다. 자기를 과장해서 보란 듯이 나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임신한 부인이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했습니다. 모니터에 나타난 뱃속의 아이 모습을 보고 의사에게 “우리 아기 참 예쁘죠?”하고 말했습니다. 초음파 화면에는 뱃속의 아이의 얼굴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 얼굴이 예쁜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산모는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모니터를 조작하던 의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부인, 저건 애기 얼굴이 아니고 부인의 방광입니다.” 웃지 못 할 일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나 능력 가지고는 누구를 존중하고 섬기는 그런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점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 이것이 어려운 일인데도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강권하십니다. 그 선을 행하기가 어려운 일인데도 계속해서 강권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섬겨라“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하지만 또 섬김도 받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자연인인 인간의 마음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말 타면 종을 부리고 싶어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섬기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셔서 그 섬김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고치시고 싸매시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섬김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섬겨라.” 이 섬김의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이렇게 섬기는 삶을 살아갈 때 인정받는 삶을 살게 되고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되고 신앙의 성숙함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삶의 현장에서 인정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합니다. 또 가족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가정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지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가정부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로부터 이웃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권사와 장로를 뽑을 때는 교회에서도 투표하고 그가 사는 동네에서도 투표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는데 직장에서 동네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의 현장에서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이 나를 인정하게 되어 그 삶에서 성숙한 신앙의 멋이 나타나고 행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섬김의 정신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용기가 있어야 하고 과감한 자기희생도 동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과 신앙이 빈약하고 쩨쩨하면 감히 이 같은 정신이나 마음의 결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빈약하고 쩨쩨한 모습은 신앙인에게는 금물입니다. 우유부단하고 소신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처럼 불성 사나운 일도 없습니다. 거기서 용기도 기적도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인도의 우화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쥐가 고양이에게 너무 무서워서 쩔쩔맸습니다. 신이 보시니까 쥐가 너무 불쌍해서 고양이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고양이가 이번에는 개를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이 고양이로 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호랑이를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개를 호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 호랑이가 포수를 그렇게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신이 보다 못해서 “너는 다시 쥐가 되어라, 무엇을 만들어 주어도 쥐 가슴을 가지고 사니 할 수 없지 않느냐, 다시 쥐가 되어 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쥐가 고양이만 보면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 다니느라고 호들갑을 떨고 다닌다고 합니다.
쥐 가슴, 쥐 뱃장을 가지고 살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용기이고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용기와 뜻을 품고 살면 대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용기와 결단과 희생정신이 만들어 집니다. 그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섬김의 삶을 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협력하는 삶“
세상에서 가장 성숙한 삶은 함께 살고 더불어 살고 협동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거기서 힘이 나오고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서툰 삶의 모습이 혼자 살아가는 삶입니다. 개인주의, 내 이익중심의 삶이 가장 초라하고 빈약한 성숙치 못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 삶이 공동체 삶을 허물고 파괴하는 삶입니다.
개인주의 삶이나 이익중심의 삶은 당장은 좀 이익을 보고 수지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익을 보겠다고 손해 보지 않겠다고 약게 살아가지만 그 삶이 서툰 삶입니다. 그런 삶에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협력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두 사람이 한사람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고 했습니다, 한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서툰 삶이 함께 하고 협동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서툰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그 인생이 춥고 외롭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함께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LA에서 일어났던 폭동에 대해서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 자료가 나왔습니다. 그때 한국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들만 피해를 입게 된 원인이 밝혀졌습니다. LA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은 100명의 사업가들이 개개인이 사업을 하지 않고 돈과 힘을 모아 큰 백화점을 건설해서 한곳에서 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100인이 다 각각 100개의 가게를 만들어 문을 열었습니다. 모두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개개인이 사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LA파동 때 가게마다 불에 타는 바람에 우리 한인동포의 가게는 모두 불타서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인 사업체에는 피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큰 백화점이 불에 탔어보십시오. 그랬으면 미국사회에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인데 모두 작은 가게만 골라 불태우는 바람에 문제가 작아졌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흑인들이 백인부자동네인 비벌리 힐즈를 공격대상으로 결정했는데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막는 바람에 흑인들이 화가 나서 작은 가게만 닥치는 대로 불 질러서 우리 동포들만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래저래 동네북신세입니다.
우리는 이제 삶의 구조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의 가르침에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장은 이득을 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시간을 오래 두고 보면 모두가 손해를 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하며, 더불어 살고, 대접하며 섬기며 살라” 이것이 산상수훈에서 강조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을 골든 룰 즉 황금률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주님은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강권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만족하게 행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권하시는데 우리들이 흔쾌하게 실행하기가 참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우리들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단 한 가지 방법 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죽는 일입니다. 내가 죽으면 가능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쯤 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갑니다. 다 용서하고, 다 해결하고, 다 풀고 웃고 갑니다. 죽어야 가능합니다. 죽지 못하면 이 말씀은 평생 흉내도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몇 번 죽을 기회가 있습니다. 한번은 세례 받을 때입니다. 원래 세례 받는 일은 죽는 일입니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물에 빠져 죽고 다시 살아서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삶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가 세례 받던 날 친구들에게 물에 빠져 죽었다고 부고장을 보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친구들이 부고장을 받아들고 “김익두는 더럽게 살더니 죽을 때도 더럽게 죽었다”하고 장례식장에 와보니 세례를 받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하고 물으니까 “보다시피 나는 지금 물에 빠져죽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례 받던 날 예수와 함께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으면 누구를 섬기고 나누고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들 따위는 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번 죽을 기회는 안수 받는 날입니다. 장로로 안수 받고 권사로 취임하고 목사로 안수 받는 날 죽어야 합니다. 그날 장로도, 권사도, 목사도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생활도, 목회생활도, 사회생활도 쉽고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스펄젼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나에 대해 죽었고, 가족에 대해 죽었고, 목표, 중심, 철학, 존재에 대해서 죽었고, 예수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일생을 성자같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에 사사건건 부딪치고 자존심 상해서 고민하고 싸우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에게 어느 여 집사님이 상담 차 찾아왔습니다. “사사건건 깐죽대는 시누이 때문에 고민이 되어 상담하려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시누이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와서 하는 말이 “기도해도 안 고쳐집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했느냐”고 물으니까 “시누이의 못된 마음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도가 무슨 힘을 발휘했겠습니까. 나는 죽지 않은 채 상대방만 죽으라고 하니 상대방이 감화를 받고 죽습니까. 이런 기도는 백날 해 보아도 기도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시누이를 축복하는 기도를 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비로소 시누이와 화해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 안에 예수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 안에 예수의 영이 계시면 나는 그 영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영은 나로 하여금 그냥 이대로 살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내 안의 예수님의 영이 나로 하여금 섬기고 함께 더불어 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나를 움직이십니다. 그 움직이시는 대로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고 난후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의무이고 도리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우리로 하여금 이 병든 세상을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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