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내시는 하나님 (8)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
오게하리라.
비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비전을 꿈, 이상, 공상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비전이라는 말은 앞으로 주어질 뜻이나 기대를 마음에 품고 그 꿈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노력하는 삶을 말합니다. 장차 30년 후에 있을 내 모습을 마음에 계획을 하고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율곡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고하는 글에서 젊은이는 모름지기 입지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즉 뜻을 품으라는 말이고 비전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아이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마음에 이 뜻과 비전과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행복해집니다.
이 성경을 보면 이 속에 이 같은 비전과 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묵시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예언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언약과 약속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 성경 속에는 미래에 되어질 계획과 뜻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꿈을 주고 환상을 주고 기대를 주고 영혼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책입니다.
천국, 이것이 비전이고 환상입니다. 천국은 장차 주어질 찬란한 하나님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이 천국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부활, 이것도 비전이고 환상입니다. 장차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변화를 말합니다. 이 부활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가장 찬란한 영광이고 한번씩 경험하게 될 축복입니다. 심판, 이것도 꿈이고 환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은 권선징악입니다. 악이 심판받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는 것이 꿈이고 바람이고 소망입니다. 이 심판사상이 성경에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의 말씀대로 결국에는 진리가 승리하고 선이 이 세상을 점령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꿈과 비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도 이 같은 비전의 일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네가 눈먼 자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장차 너희를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소망도, 기대도, 미래도 없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래가 암담했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의 꿈과 비전과 기대를 심어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불렀고 너는 장차 이방인의 빛이 되며 눈먼 자의 눈을 밝히며 암흑과 흑암에 앉은 자를 나오게 하리라.” 즉 “장차 너희를 위해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그 메시야가 와서 너희를 해방하고 눈먼 자에게 보이게 하고 소망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얼마나 큰 비전이고 꿈이고 원대한 계획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세상에 주시는 꿈과 환상과 비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사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를 왜 부른 줄 아느냐, 너희가 나가서 이 흑암의 세상을 밝히고 소망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불러 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내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름 받았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심 있게 음미할 말씀이 있습니다.
“너를 불렀다”
이 말씀은 “내가 주를 알고 찾아간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아시고 나를 불러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시대마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아브람을 고향에서 살 때 불러내셨습니다. 다윗도 고향에서 양을 치며 살아갈 때 불러 내셨습니다. 요셉도 부모 밑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을 때 불러내서 애굽으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사울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돌아다닐 때 조용히 불러 내셨습니다. 제자들도 바닷가에서 고기 잡아먹고 살아갈 때 불러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뿐 아니고 우리들도 불러 내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갈 때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불러 내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이곳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참 기가 막힐 정도로 신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불러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주어진 큰 복이 있다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주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참 고마운 은혜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주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복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해서 오늘 이 자리로 나온 복”입니다. 우리들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 부름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고 혹 깨달았다 하더라도 고집스럽게 불응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겠습니까.
오늘도 부르심이 여러 번 있었지만 고집스럽게 불응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부름에 순종해서 이 자리에 나와 이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혜가 얼마나 크고 엄청난 축복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기회는 여러 번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안 올 수도 있습니다. 자주 오는 기회는 대부분 하찮은 기회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습니다. 평생 한두 번 올 수도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남은 것은 후회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 한번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깨닫고 순종해서 주의 부름에 순순히 응하여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복입니까.
영국의 에드워드 7세 국왕은 식사 예법이 너무나 엄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사시간에는 누구도 말을 못하게 했습니다. 왕자들이 국왕과 식사할 때는 말도 못하고 너무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식사하는데 어린 요크왕자가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면서 망설였습니다. 그렇게 참다못해 입을 열어 말하려고 할 때 에드워드 7세 국왕이 버럭 화를 내면서 “식사시간에는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다 끝난 후 조용히 물었습니다.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니?”, “다 늦었습니다.”, “무슨 말인데?”, “아까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말하려고 했어요.”
기회를 놓치면 이렇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해서 이곳에 와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여러 번, 언제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르심을 받은 것도 은혜이고 그 부르심에 순종해서 응답한 것도 복입니다.
어디로부터
그러면 우리들이 어디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까. 어둠 속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옛날 시골에서 살 때 얼마나 가난했고 촌스러웠습니까. 그 옛날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갈 때 그때 참으로 말할 수 없이 무지하고 어둡고 촌스럽고 가난했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그런 자리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약한데서 부름을 받았습니까. 병 속에서, 연약함에서, 두려움에서, 죽을까봐 떨던 자리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지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늘의 영적 세계에 대해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습니다. 오직 육신에 갇혀 살아갈 때였습니다. 그때는 오직 본능만 있었습니다. 먹고 일, 살아가는 일, 입는 일에만 골몰해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뿐 아니고 우리는 우상 속에서, 무속과 잡신신앙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 잡신신앙에 매여서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떨고 구속받고 속박되어 살았습니까. 그때 우리들이 부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우리는 지금도 그 수준에서 그 짓을 그대로 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참 기가 막히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을 되돌아보면 참 기적뿐입니다. 이제 영적인 눈을 뜨고 보니까 이것은 보통 영광이 아닙니다. 비로소 우리들이 영적 눈을 뜨고 보니까 지난날 우리의 삶이 얼마나 무지하고 한심하고 무모하게 살았는가를 알게 됩니다. 오늘도 무당을 찾아가고 북어대가리 놓고 복을 달라고 절하는 모습을 볼 때 옛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곳으로부터 불러 주셨습니다. 영광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불러 세웠나니” 우리들을 모두 그런 어두움과 암흑과 감옥 같은 구속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부름 받은 것이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입니다.
불러내신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을 구별해서 불러내셨습니까.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복을 부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세상의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불러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지 못해서 안달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계명들이 모두 이 땅의 백성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고 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들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균형을 위해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휴식하고 쉬고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취하여야 할 안식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유로 세상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해서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해서 가정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허함속에서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는 그 자체가 복이고 은혜입니다. 또 “동물을 잡아먹되 피 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각종 위생과 인간의 품위를 위해서 주신 계명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합니까. 그런 계명이 없었으면 참혹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계명이 주어졌음에도 짐승을 잡을 때 때려서 잡기도 하고 작은 우리에 가두어서 흥분시킨 후에 잡기도 합니다. 그래야 그 흥분된 상태에서 채취한 피가 약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피를 뽑아 마십니다. 그러니 그것이 인간이 할 짓입니까.
또 하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고향땅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불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것은 그 한사람에게 국한되는 복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안에서는 나 한사람은 결코 나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 한사람은 여러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한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이것이 복의 근원입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바닷가에서 부르셔서 3년 동안 훈련을 시킨 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셨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제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된 길로 안내를 받았습니까.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복을 받고 눈을 뜨고 거룩해졌습니까. 그것이 복이 근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시대마다 사람들을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을 옛날 그 구태의연한 환경에서 불러 내셔서 지금 예수 안에 살게 하신 것도 세상에 나가서 복의 근원되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가서 예수를 간증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알고 믿고 눈을 뜨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습니까. 나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복의 근원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값이고 의미이고 가치입니다.
그리고 또 “중보의 삶을 살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불렀은즉 너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라, 눈먼 자들을 밝히리라,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리라, 암흑에 있는 자들을 이끌어 내게 하리라“. 이 말씀은 “내가 너를 왜 부른 줄 아느냐, 그것은 너를 통해서 이 세상이 구원받고 자유하고 암흑에서 헤어나고 눈먼 자들을 눈을 뜨게 해 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메시지입니까. 우리에게 소명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미래가 암담함 속에서 살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장차 메시야를 보내 너희를 자유하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흑암에서 건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비전선포입니다. 소망과 희망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선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예언된 그대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밝히고 백성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선포하고 뜻을 전하시며 중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이 사명을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이 중보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장차 너는 이렇게 세상을 섬기고 중보하고 복을 선포하라”는 말씀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너는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해 주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고, 암흑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내라“.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갇힌 자들을 위해서 자유하게 하도록 이 길을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아직 천국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부르시고 계심에도 불순종의 자리에 그냥 앉아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내서 순종의 자리로 안내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중보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소명을 받았고 어둠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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